조선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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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成宗
지위
조선 국왕
재위 1469년 12월 31일-1495년 1월 20일
전임자 예종
후임자 연산군
섭정 자성대왕대비(1469~1476)
재상
이름
이혈(李娎)
묘호 성종(成宗)
시호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능호 선릉
신상정보
출생일 1457년 8월 19일(1457-08-19)
출생지 조선 한성부 세자궁
사망일 1495년 1월 19일(1495-01-19) (37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매장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왕조 조선 왕조
가문 전주 이씨
부친 덕종
모친 소혜왕후
배우자 공혜왕후
폐비 윤씨
정현왕후
종교 유교 성리학

성종(成宗, 1457년 8월 19일 (음력 7월 30일) ~ 1495년 1월 19일 (음력 1494년 12월 24일) , 재위 : 1469년 ~ 1495년)은 조선의 제9대 이다. 은 이(李), 는 혈(娎), 본관전주(全州), 초명은 아무. 묘호는 성종(成宗)이며 시호는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요절하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으나, 숙부 예종이 일찍 죽어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훈신들의 추대로 즉위했다. 즉위 후 태종세조에 의해 숙청된 사림파를 적극 등용하고,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지키고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노력하였다.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 대신들의 세력을 견제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친정 이후에는 외척 세력의 영향력이 강하였다. 여색을 좋아하여 여러 후궁들 간의 갈등을 다스리지 못하고 폐비 윤씨를 사사, 이는 훗날 아들 연산군으로 하여금 대량 숙청을 불러오는 빌미를 제공한다.

1469년부터 1476년까지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하였고 1476년부터 1494년 승하할 때까지 친정 하였다.

생애[편집]

출생과 성장[편집]

성종은 1457년 7월 30일,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세자빈 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아무[1]이고 후에 이름을 혈(娎)로 개명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일찍부터 행동거지가 매우 침착하였다고 전해진다. 세조 때 궁궐에 내려친 벼락에 맞아 한 환관이 즉사하였던 일이 있었는데, 그의 형 월산대군이나 다른 내관들은 이 같은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였으나, 그는 태연히 서 있었다고 한다. 이 일로 그는 세조로부터 태조와 세종을 닮아 기상과 학식이 뛰어날 것이라는 칭찬과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의경세자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는 어머니 세자빈 한씨와 함께 궁밖으로 나가게 된다. 조부 세조는 특별히 한씨를 수빈으로 봉하고, 궁궐에 살아도 좋다고 하였으나 한씨는 사저로 물러 앉는다. 어린 나이에도 곤궁한 생활에 대한 불평불만이 없었다 하며,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한명회신숙주 등은 이점에 착안하여 월산대군 대신 그를 선택하게 된다. 또한 한명회의 딸과 가례를 올렸고, 신숙주의 조카딸이 그의 계비인 폐비 윤씨인 점이 왕위 계승에도 보다 유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잠저 시절[편집]

1461년(세조 6년) 5살이 되던 해에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수빈 한씨는 꾸준히 대궐에 출입하면서 한명회, 신숙주 등과 교류하였고, 한명회의 딸 중의 한명을 자산군과 결혼시킨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의경세자의 동생인 해양대군이 예종으로 즉위하면서 잘산군(乽山君 또는 자을산군(者乙山君))에 봉해졌다. 1469년 예종은 즉위한 지 10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당시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3살이었고, 형인 월산군은 병환 중이었기 때문에 정희왕후의 명령에 따라 1469년(예종 1년) 음력 11월 28일에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성종의 즉위 배경에는 정희왕후의 의지 외에 그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의 생각과 어린 그를 즉위시킴으로써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신숙주 등의 훈신들의 이해관계가 두루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성종은 가뭄이 들면 자주 수반(水飯)을 들었다.[2] 물에 밥을 말아먹는 수반은 자연재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신의 도덕성을 과시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속이 타는 체질의 특성이 드러난 것이다. 즉위 직후 원상 김질이 “비위는 찬 것을 싫어하므로 수반이 비위를 상할까 염려합니다”라며 걱정하자 “경의 말과 같다면 매양 건식을 올려야 하겠는가”라고 성질 급하게 반박했다. 수반을 자주 먹는 습관은 설사로 이어졌다.[2]

즉위 이후[편집]

수렴 청정 기간[편집]

반발세력을 무마하고자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월산대군제안대군을 군에서 대군으로 책봉하고 이들을 좌리공신에 임명하였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당시 유력한 국왕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만큼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로대신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끝낸 1476년(성종 7년)부터는 원로대신들이 국정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원상 제도를 폐지하여 결재권을 되찾았다. 친정을 시작한 이후 그는 할아버지 세조가 권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길재-김숙자 등의 문인들을 적극 등용한 것을 참작, 김종직의 문하생들을 새로 대거 등용한다.

생부 의경세자 추존[편집]

성종은 작은 아버지인 예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하였는데, 1475년을미년(乙未年)에 회간대왕(의경세자, 성종의 생부)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는 것을 두고 조정에서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3][4]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한 대신들은 "의경세자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게 된다면 왕실의 계통(대종)에서 아버지가 두 분인 것과 같고, 예경(禮經)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를 이유로 들어 반대하였으나,[3][4], 대왕대비 윤씨가 나서 "의경세자는 명(命)을 받아 왕세자(王世子)가 되고, 명을 받아 왕(王)이 되었으며, 또 원래는 대종(大宗)이고, 예종이 비록 명을 받아 왕이 되었더라도 먼저 신하의 예를 의경세자에게 하였거늘, 하물며 의경세자는 예종의 친형이니, 예종의 위에 둔들 무엇이 해롭겠는가?"하여 되물었으며,[5] 배맹달(裵孟達), 임수겸(林守謙), 홍경손(洪敬孫), 권윤(權綸)등의 대신들도 대왕대비 윤씨의 의견에 동조하여 "의경세자는 세조조(世祖朝)에 있어서 이미 세자(世子)로 봉(封)하였으므로 안으로는 계승(繼承)한 바가 있고, 명나라 황제가 특히 고명(誥命)을 내려 주었은즉 위로도 주품(奏稟)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의경세자의 친자(親子)로서 대통을 계승하셨으니, 의경세자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거들었다.[5] 이후 조정의 논의가 계속되었으나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자 성종은 확고한 의지로 의경세자(덕종)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라는 절차 준비 명을 예조에 내렸고 반대파 대신들의 상소가 잇따랐다.[6][7] 결국 1476년 1월 9일에 의경세자(덕종)의 신주를 받들어 종묘에 안치함으로써 성종이 예종의 법자가 아닌, 덕종(의경세자)의 친자로서 왕위를 계승함을 확인하였다.[8]

폐비 윤씨 폐출과 사사[편집]

첫 왕비였던 공혜왕후가 18세의 나이에 요절하자 자신의 후궁 중 일찍 후궁으로 맞이한 숙의 윤씨를 왕비로 간택한다. 폐비 윤씨공혜왕후 사후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폐비는 성종이 다른 후궁을 찾자 공공연히 질투심을 드러내고 독약인 비상이 발각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켰다.

성종의 인수대비는 분노하여 폐비 윤씨의 투기를 계속 지적하였고, 원로 훈신들은 폐비 윤씨를 계속 탄핵하였다. 1479년 윤씨는 왕비에서 폐출, 사저로 내쫓겼다. 그 뒤 양사의 언관들이 폐비를 사사해야 된다는 여론을 조성하자 그는 원자의 생모임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양사의 거듭된 탄핵을 이기지 못하고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그 뒤 왕비 간택 건의가 있었으나 이를 뿌리치고 다른 후궁인 숙의 윤씨[9] 를 왕비로 삼았는데 정현왕후중종의 생모가 된다.

친정과 사림파 등용[편집]

임사홍, 유자광 등의 권신들을 축출하는 한편, 성균관을 비롯한 각 도의 향학에 전결과 서적을 주어 교육과 문화의 진흥에 힘썼으며, 김종직사림파를 과감히 등용함으로써 신진세력을 형성시키고 정치적 기반을 만들었다. 이는 후대 선조시기 사림정치의 완성으로 나타난다.

성종대왕 태실비
(창경궁 경내에 위치)

성종의 치세는 ‘문화의 황금기’라고 불렸을 만큼 세종세조가 이룩해 놓은 치적들을 바탕으로 빛나는 문화 정책을 펴 나간 시기였다. 1474년(성종 5년)에는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했으며 1492년에는 경국대전을 보충한 《대전속록》과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東文選)》, 《악학궤범》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간행했다.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과 비슷한 역할을 맡은 홍문관을 설치하는 한편, 문신 중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을 골라 집에서 독서하게 하는 호당제도를 실시하는 등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한 승려들을 엄하게 통제하고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하게 실천했다.

대외적으로는 1479년(성종 10년) 윤필상(尹弼商)으로 하여금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1491년(성종 22년) 허종(許琮)을 파견하여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 소굴을 소탕하고, 이듬해에는 이계동(李季同)을 함길도 일대에 파견하여 여진족의 침략을 대비하는 등 북방 방비에 힘썼다.

최후[편집]

성종은 동물을 좋아하였는데 궁궐 후원에 사슴과 강아지, 고양이 등을 데려다가 기르기도 했다.[10] 성종은 1494년 가을부터 폐결핵천식 등의 폐병, 기허증, 서증(暑症, 일종의 더위 먹은 병), 두통 등으로 병석에 누웠고, 등창까지 생겼다. 병석에 누운 상태에서 배꼽 밑에 갑자기 종기가 생겼고 이게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승하 직전 대사면령을 내리긴 했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성종은 1495년 양력 1월 20일 (1494년 음력 12월 24일)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폐결핵천식 등의 폐병 합병증과 두통, 기허증, 서증, 등창, 피부종기 등의 후유증으로 39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능은 선릉(宣陵)이며,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2계비 정현왕후 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사후[편집]

묘호는 조선의 모든 법제와 정비를 완성시켰다는 뜻을 담은 성종(成宗)으로 정해졌는데, 빈청에서는 성종의 덕을 표현하려면 인종(仁宗)으로 정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주장했으나 결국 원래대로 갔으며, '인종(仁宗)'이란 묘호는 그의 손자이자 중종장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인종이 받게 된다.

그는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문제를 자신의 사후 100년간 언급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이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연산군에 의해 거론된다. 사림파에서 이때의 성종의 유언을 지적하며 폐비윤씨의 추숭을 적극 반대한 것은 연산군의 폭정의 원인의 하나가 된다.

가계[편집]

 조선 제9대 국왕   성종 成宗  출생 사망
1457년 8월 19일 (음력 7월 30일)
조선 조선 한성부 세자궁
1495년 1월 19일 (음력 1494년 12월 24일) (37세)
조선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성종의 직계 조상[편집]

 
 
 
 
 
 
 
 
 
 
 
 
 
 
 
 
 
 
세종
 
 
 
 
 
 
 
 
 
 
 
세조
 
 
 
 
 
 
 
 
 
 
 
 
 
 
소헌왕후 심씨
 
 
 
 
 
 
 
 
 
 
 
아버지 덕종
 
 
 
 
 
 
 
 
 
 
 
 
 
 
 
 
 
파평부원군 윤번
 
 
 
 
 
 
 
 
 
 
 
정희왕후 윤씨
 
 
 
 
 
 
 
 
 
 
 
 
 
 
흥녕부대부인 인천 이씨
 
 
 
 
 
 
 
 
 
 
 
  성종  
 
 
 
 
 
 
 
 
 
 
 
 
 
 
 
 
 
 
 
 
한영정
 
 
 
 
 
 
 
 
 
 
 
서원부원군 한확
 
 
 
 
 
 
 
 
 
 
 
 
 
 
의성 김씨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
 
 
 
 
 
 
 
 
 
 
 
 
 
 
 
 
 
홍여방
 
 
 
 
 
 
 
 
 
 
 
남양부부인 남양 홍씨
 
 
 
 
 
 
 
 
 
 
 
 
 
 
동래 정씨
 
 
 
 
 
 
 
 
 
 

부모[편집]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덕종대왕 德宗大王
   의경세자 懿敬世子
전주 1438년 - 1457년 세조대왕 世祖大王
정희왕후 윤씨 貞熹王后 尹氏
   조선의 추존 국왕
소혜왕후 한씨 昭惠王后 韓氏
   수빈 한씨 粹嬪 韓氏  
청주 1437년 - 1504년 서원부원군 한확 西原府院君 韓確
남양부부인 남양 홍씨 南陽府夫人 南陽 洪氏
  인수대비 仁粹大妃
자숙대왕대비 慈淑大王大妃


왕비[편집]

시호 본관 이름 생몰년 부모 비고
정비 공혜왕후 한씨 恭惠王后 韓氏 청주 송이 松伊 1456년 - 1474년 상당부원군 한명회 上黨府院君 韓明澮
황려부부인 여흥 민씨 黃驪府夫人 驪興 閔氏
제1계비   폐비 윤씨 廢妃 尹氏  
  제헌왕후 齊獻王后[11][12]
함안 1455년 - 1482년 윤기견 尹起畎
고령 신씨 高靈 申氏
성종 10년(1479년) 폐위[13]
성종 13년(1482년) 사사됨[14]
제2계비 정현왕후 윤씨 貞顯王后 尹氏 파평 창년 昌年 1462년 - 1530년 영원부원군 윤호 鈴原府院君 尹壕
연안부부인 담양 전씨 延安府夫人 潭陽 田氏
 자순왕대비 慈順王大妃

후궁[편집]

작호 본관 이름 생몰년 부모 비고
귀인 귀인 정씨 貴人 鄭氏 초계 금이 金伊[15]   ?   - 1504년 정인석 鄭仁石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사망[16]
귀인 엄씨 貴人 嚴氏 영월 은소사 銀召史[15]   ?   - 1504년 엄산수 嚴山壽
남양 홍씨 南陽 洪氏
귀인 권씨 貴人 權氏 안동 1471년 - 1500년 권수 權壽
한씨 韓氏
귀인 남씨 貴人 南氏 의령  생몰년 미상 남흔 南炘
전주 이씨 全州 李氏
소의 소의 이씨 昭儀 李氏 미상
숙의 숙의 홍씨 淑儀 洪氏 남양 1457년 - 1510년 홍일동 洪逸童
남평 문씨 南平 文氏
숙의 하씨 淑儀 河氏 진주  생몰년 미상
숙의 정씨 淑儀 鄭氏
숙용 숙용 심씨 淑容 沈氏 청송 1465년 - 1515년 심말동 沈末同
숙용 권씨 淑容 權氏 미상  생몰년 미상
숙원 숙원 김씨 淑媛 金氏
숙원 윤씨 淑媛 尹氏


왕자[편집]

군호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   왕자[17] 효신 孝信 1475년 - 1475년
1 연산군 燕山君  융 㦕 1476년-1506년  폐비 윤씨      폐비 신씨 廢妃 慎氏
     거창군부인 居昌郡夫人
제10대 국왕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   대군[18]   ?   - 1479년
2  계성군 桂城君  순 恂   ?   - 1504년  숙의 하씨 안성군부인 安城郡夫人 원주 원씨 原州 元氏
3  안양군 安陽君  항 㤚 1480년-1505년  귀인 정씨 면천군부인 沔川郡夫人 능성 구씨 綾城 具氏 연산군 11년(1505년) 사사됨
4  완원군 完原君  수 𢢝 1480년-1509년  숙의 홍씨 면천군부인 沔川郡夫人 전주 최씨 全州 崔氏
정선군부인 旌善郡夫人 양천 허씨 陽川 許氏
 
5  회산군 檜山君  염 恬 1481년-1512년 영원군부인 寧原郡夫人 죽산 안씨 竹山 安氏
6  봉안군 鳳安君  봉 㦀 1482년-1505년  귀인 정씨 의춘군부인 宜春郡夫人 평양 조씨 平壤 趙氏 연산군 11년(1505년) 사사됨
7  견성군 甄城君  돈 惇 1482년-1507년  숙의 홍씨 수양군부인 永陽郡夫人 평산 신씨 平山 申氏 중종 2년(1507년) 사사됨[19]
-   왕자[20] 견석 堅石 1486년 -   ?  
8 중종대왕 中宗大王
진성대군 晉城大君
 역 懌 1488년-1544년 정현왕후 윤씨    단경왕후 신씨 端敬王后 慎氏
   장경왕후 윤씨 章敬王后 尹氏
   문정왕후 윤씨 文定王后 尹氏
제11대 국왕
9  익양군 益陽君  회 懷 1488년-1552년  숙의 홍씨 순천군부인 順川郡夫人 영일 정씨 迎日 鄭氏  
10  이성군 利城君  관 慣 1489년-1552년  숙용 심씨 곤산군부인 昆山郡夫人 남평 문씨 南平 文氏
풍산군부인 豊山郡夫人 안동 권씨 安東 權氏
 
11  경명군 景明君  침 忱 1489년-1526년  숙의 홍씨 강양군부인 江陽郡夫人 파평 윤씨 坡平 尹氏  
12  전성군 全城君  변 忭 1490년-1505년  귀인 권씨 단양군부인 丹陽郡夫人 안동 권씨 安東 權氏
13  무산군 茂山君  종 悰 1490년-1525년  숙원 김씨 영양군부인 永陽郡夫人 평산 신씨 平山 申氏
14  영산군 寧山郡  전 恮 1490년-1538년  숙용 심씨 금릉군부인 金陵郡夫人 청송 심씨 靑松 沈氏
교성군부인 交城郡夫人 경주 정씨 慶州 鄭氏
15  운천군 雲川君  인 忄寅 1490년-1524년  숙의 홍씨 학성군부인 鶴城郡夫人 안동 권씨 安東權氏
16  양원군 楊原君  희 憘 1492년-1551년  숙의 홍씨 문천군부인 文川郡夫人 풍양 조씨 豊壤 趙氏
양근군부인 楊根郡夫人 문화 유씨 文化 柳氏

왕녀[편집]

작호 이름[21]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순숙공주 順淑公主 1478년 - 1488년[22] 정현왕후 윤씨
2 혜숙옹주 惠淑翁主 수란 秀蘭/壽蘭 1478년 -  ?    숙의 홍씨 고원위 高原尉 신항 申沆
- 숙신옹주 淑愼翁主   ?   - 1487년[23]
1478년 - 1489년[24]
  미상 상반된 기록이 존재
3 휘숙옹주 徽淑翁主   생몰년 미상  숙원 김씨 풍원위 豊原尉 임숭재 任崇載 혜신옹주 惠愼翁主
4 공신옹주 恭愼翁主 1481년 - 1549년[25]  귀인 엄씨 청녕위 淸寧尉 한경침 韓景琛[26]
5 경순옹주 慶順翁主 옥환 玉環 1482년 -   ?    숙용 심씨 의성위 宜城尉 남치원 南致元[27]
6 경숙옹주 敬淑翁主 합환 合歡[28] 1483년 -   ?    숙원 김씨 여천위 驪川尉 민자방 閔子芳
-   공주   ?   - 1486년[29] 정현왕후 윤씨
7 정순옹주 靜順翁主 복란 福蘭[30] 1486년 -  숙의 홍씨 봉성위 奉城尉 정원준 鄭元俊[31]
8 숙혜옹주 淑惠翁主 벽환 碧環 1486년 - 1525년[32]  숙용 심씨 한천위 漢川尉 조무강 趙無彊
9 경휘옹주 慶徽翁主 정복 貞福[33] 1489년 - 1525년[34]  숙의 권씨 영원위 鈴原尉 윤내 尹鼐
10 휘정옹주 徽靜翁主 복▨ 福▨[35]   생몰년 미상  숙원 김씨 의천위 宜川尉 남섭원 南燮元[36]
11 정혜옹주 靜惠翁主 승복 承福[37] 1490년 - 1507년  귀인 정씨 청평위 淸平尉 한기 韓紀
12 정숙옹주 靜淑翁主 여란 如蘭 1493년 - 1573년[38]  숙의 홍씨 영평위 鈴平尉 윤섭 尹燮


성종이 등장한 작품[편집]

TV속의 작품[편집]

영화[편집]

기타[편집]

그에게는‘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란 별명이 붙었다. 낮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였던 요순 임금처럼 정사를 돌봤고, 밤엔 중국 하나라의 걸 임금과 은나라의 주 임금처럼 주색잡기에 능한 임금이라는 뜻이다.[2] 별칭에 걸맞게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편찬 등 큰 업적을 남긴 반면, 거의 매일 밤 곡연(曲宴·임금이 궁중 금원(禁苑)에서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 베풀던 소연)을 베풀며 기생들과 어울렸고 많은 후궁을 거느렸다. 25년의 재위기간에 총 3명의 왕후와 9명의 후궁을 거느리며 그들에게서 16남 12녀를 얻었다. 자식이 너무 많아 궁궐에서 다 기를 수 없게 되자 궐 밖 여염집에 살게 할 정도였다.[2]

서자 차별의 강화[편집]

성종은 태종때 내려진 적서 차별과 서자의 관직 제한을 구체적인 조항으로 명시하여 반포하고, 이를 경국대전에 수록하게 한다. 이때부터 서자(庶子)들은 본격적으로 차별대우를 받게 된다.

1471년(성종 2년)에 반포, 실시된 경국대전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39] 이는 사림파 학자들의 건의를 수용한 성종의 특명으로 삽입한 것이다.

'실행(失行)한 부녀 및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동서의 관직에 임명하지 말라(失行婦女及在家女之所生勿敍東西班職)[39]' 문무관 2품 이상 관리의 양첩 자손[40] 에게는 정3품으로 한정하고 천첩 자손에게는 정5품으로 한정한다. ...(이하 중략)... 7품 이하 관리부터 관직이 없는 자의 양첩의 자손에게는 정5품으로 한정하고 천첩 자손 및 그밖에 천인으로 양민이 된 자는 정7품에 한정한다. ...(이하 생략)... (文武官二品以上良妾子孫限正三品 賤妾子孫限正五品 ...七品以下至無職人良妾子孫限正五品 賤妾子孫及賤人爲良者限正七品...
(吏典 限品敍用 조[39])

재가(재혼)하거나 실행한 부녀의 아들 및 손자, 서얼의 자손은 문과를 응시하지 못하게 하라[39](再婦失行婦女子及孫 庶孼子孫勿許赴文科

(禮典 製科 조[41]

이런 조항이 경국대전에 기재케 된 것은 건국 초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조상 태조 이성계조선초 창업에 막대한 공을 세운 방원을 비롯한 본 부인 한씨의 자식들을 제외하고 계비 강씨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41]

이에 방원은 불만을 품고 세자인 방석과 그 옹호 세력인 서얼 출신의 정도전 등을 힘으로 몰아냈다. 그리고는 방원은 “적서의 구분을 분명히 하였다”라고 공언하였고, 방석 형제를 서얼이라고 불렀다.[41][42]

이후 김종직, 김굉필 등은 한때 서자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폐비 윤씨 문제[편집]

성종은 유지(유언)를 내려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폐비 윤씨를 사사한 것을 공론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아들 세자 융은 성종의 유지를 앞세운 사림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유지를 깨고,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재조사한다.

각주[편집]

  1. http://weekly.donga.com/docs/magazine/weekly/2010/06/14/201006140500041/201006140500041_1.html
  2. 주색 밝힌 ‘밤의 황제’ 서증(暑症) 시달리다 단명 신동아 2014년 1월호
  3. 성종 59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9월 16일(임술) 1번째기사
  4. 성종 59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9월 16일(임술) 2번째기사
  5. 성종 59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9월 19일(을축) 2번째기사
  6. 성종 59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9월 21일(정묘) 5번째기사
  7. 성종 59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9월 21일(정묘) 2번째기사
  8. 성종 63권, 7년(1476 병신 / 명 성화(成化) 12년) 1월 9일(갑인) 1번째기사
  9. 윤호의 딸
  10. 이중 두 마리의 사슴은 연산군에 의해 사살된다.
  11.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3월 25일 병술 7번째기사
    폐비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증하는 교서를 내리다
  12. 중종반정후 삭탈
  13.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6월 2일 정해 10번째기사
    중궁 폐출의 교서를 내리다
  14. 성종실록》 144권, 성종 13년(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8월 16일 임자 1번째기사
    이세좌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다
  15.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3월 28일 기축 9번째기사
  16.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3월 20일 신사 5번째기사
    안양군과 봉안군을 곤장 때리다
    (중략)

    항과 봉은 정씨의 소생이다. 왕이, 모비(母妃) 윤씨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嚴氏)·정씨(鄭氏)의 참소 때문이라 하여, 밤에 엄씨·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가, 항과 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 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에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마구 치되 갖은 참혹한 짓을 하여 마침내 죽였다.

    (중략)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17. 성종실록》 55권, 성종 6년(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5월 20일 무진 4번째기사
    왕자 이효신의 졸기
    왕자(王子) 이효신(李孝信)이 졸(卒)하였다. 태어난 지 겨우 다섯 달이므로, 3일만에 장사하고 관곽(棺槨)을 쓰지 말고 제사에 흰 떡을 쓰고 1백일 만에 그치라고 명하였다.
  18.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6월 12일 정유 3번째기사
    폐비 윤씨의 소생인 왕자가 죽다
    왕자(王子)가 졸(卒)하였는데,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소생이었다.
  19. 중종실록》 4권, 중종 2년(1507년 명 정덕(正德) 2년)10월 16일 병술 1번째기사
    견성군 이돈을 간성군에서 사사하다
  20. 《울진삼달리태실》
    성화 22년(1486년) 12월 초6일 해시에 태어난 왕자 견석의 태실을 성화 23년(1487년) 4월 초7일 조성
  21. 선원록》 및 《왕녀 태실 태지》
  22. 성종실록》 218권, 성종 19년(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7월 14일 을해 1번째기사
    순숙공주가 졸하니 조회와 저자를 3일 동안 정지하다
    순숙공주(順淑公主)가 졸(卒)하니, 조시(朝市)를 3일 동안 정지하였다. 공주는 주상의 딸인데, 나이가 열 한 살이다. 전교하기를,

    "공주는 나이 어린 미성인(未成人)이므로 상장(喪葬)의 모든 일을 일체 반드시 횡간(橫看)에만 따른 것이 아니고 참작해 할 것이며, 빈소(殯所)를 없애고 바로 장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23. 성종실록》 206권, 성종 18년(1487년 명 성화(成化) 23년) 8월 20일 정해 5번째기사
    숙신 옹주의 졸기
    숙신 옹주(淑愼翁主)가 졸(卒)하였다. 임금의 딸인데 나이가 어려서 출가하지 않았었다.
  24. 성종실록》 234권, 성종 20년(1489년 명 홍치(弘治) 2년) 11월 8일 임술 5번째기사
    숙신옹주의 졸기
    숙신옹주(淑愼翁主)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12세이다. 임금이 나이가 어린 것 때문에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염습(斂襲)하고 빈소(殯所)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25. 《공신옹주백자묘지명》
  26. 한명회의 손자
  27. 신승선의 외손자이며 폐비 신씨의 조카
  28. 《왕녀합환아기씨태실(王女合歡阿只氏胎室)》
  29. 성종실록》 188권, 성종 17년 2월 14일 경인 3번째기사 1486년 명 성화(成化) 22년
    공주가 죽었으므로 조하를 정지하라고 전교하다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새로 낳은 공주가 비록 허무하기는 하나 어제 죽었으니, 내일의 조하(朝賀)는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30. 《정순옹주태실》
  31. 이세좌의 외손
  32. 중종실록》 54권, 중종 20년(1525년 명 가정(嘉靖) 4년) 6월 23일 신해 1번째기사
    숙혜옹주의 졸기
  33. 《왕녀정복태실비(王女貞福胎室碑)》
  34. 중종실록》 52권, 중종 20년(1525년 명 가정(嘉靖) 4년) 1월 5일 갑자 1번째기사
    영원위 옹주의 졸기
  35. 양주수종사석탑출토발원문》 보물 제1788호
  36. 귀인 남씨와 남매이며, 의성위 남치원과 사촌
  37. 《왕녀승복아기씨태실(王女承福阿只氏胎室)》
  38. 《정숙옹주묘지명(靜淑翁主墓誌銘)》
  39. 이이화, 한국의 파벌 (어문각, 1983) 224페이지
  40. 평민 출신 첩이 낳은 자손
  41. 이이화, 한국의 파벌 (어문각, 1983) 225페이지
  42.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후궁이나 첩이 아니라 고려시대의 경처와 향처를 별도로 두는 규정에 의해 얻은 정실 부인이었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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