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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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 남씨 (貴人 南氏)
숙의, 귀인
별명 숙의 남씨(淑儀 南氏)
배우자 조선 성종
왕조 조선 왕조
부친 남흔(南炘)
국적 조선

귀인 남씨(貴人 南氏)는 조선 성종후궁이다.

생애[편집]

생년은 미상이고, 본관은 의령이며, 감찰(監察) 남흔(南忻)의 첫째 딸, 또는 셋째 딸이다.[1] 성종의 후궁이 된 것은 1480년(성종 11년)에서 1490년(성종 21년) 사이로서 최초 봉작은 숙의(淑儀)였다.[2]

성종 사후에는 대비의 이어소에 있으면서 연산군과 간음하였다.[3] 1506년(연산군 12년) 연산군과의 간음에 대한 기사에는 숙의(淑儀)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중종 연간에 귀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4] 1527년(중종 22년)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사헌부가 상소하기를,

“(중략) 선왕의 후궁을 융숭하게 대우하고 자전(慈殿)을 받들어 모심은 이것이 진실로 지극한 성효(聖孝)이십니다. 그러나 남귀인(南貴人) 같은 이는 간사스러워 은총이 있는 곳이면 번번이 따라 붙어 은밀히 사주(使嗾)해서 성세(聲勢)를 조장하니, 어찌 궁중에 오래 거처하게 하여 가정(家政)을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중략) 하였는데, 이 소(疏)를 헌부(憲府)에 내리면서 일렀다. “소 가운데 열거한 많은 일은 모두가 위에서 모르는 일이다. 또 장래의 일에 대해 위로 하여금 반복하여 성찰(省察)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니, 그 뜻이 지당하다. 가사(家舍)가 제도에 지나친다는 일은 위에서는 모르고 있다. 법사(法司)에서 스스로 검속할 것이다. 남귀인(南貴人)은 선왕의 후궁이므로 돌아갈 곳이 있다. 그러나 자전을 받듦으로 하여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론(輿論)이 이러하다면 반드시 스스로 처신할 것이다. (하략)”
- 《조선왕조실록》 중종 59권, 22년(1527 정해 / 명 가정(嘉靖) 6년) 5월 18일(갑오) 2번째 기사

가족관계[편집]

  • 아버지 : 남흔(南炘)
  • 어머니 : 전주 이씨 - 이래(李徠)의 둘째 딸[5]
    • 오빠 또는 남동생 : 남조원
    • 오빠 또는 남동생 : 남응원
    • 오빠 또는 남동생 : 남섭원
    • 올케 : 휘정옹주 - 성종과 명빈 김씨의 딸
    • 언니 또는 여동생 : 남씨
    • 형부 또는 제부 : 윤승세(尹承世)
      • 조카 : 윤내(尹鼐)
      • 조카며느리 : 경휘옹주 - 성종과 숙용 권씨의 딸
    • 언니 또는 여동생 : 남씨
    • 형부 또는 제부 : 김상(金祥)
    • 남편 : 조선 성종
  • 숙부 : 남경(南憬)
  • 숙모 : 거창 신씨 - 신승선의 딸, 폐비 신씨와 자매
    • 사촌 : 남치원(南致元)
    • 사촌 올케 : 경순옹주 - 성종과 숙용 심씨의 딸

각주, 출처[편집]

  1. 《의령남씨족보》에 남흔(南炘)의 첫째 딸이 성종의 후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선원록》에 기록된 외조부 이래(李徠)의 족보에는 셋째 딸로 되어 있다.
  2. 남흔(南炘)이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첩 매화(梅花)와 간통하여 외방에 정배되었으나, 후에 그 딸이 숙의로 뽑혀 들어가 승지에 제배되었다고 한다. 남흔이 간통 사건으로 부처된 것이 1480년이니 그 딸이 숙의로 간택된 것도 그 이후가 될 것이다. 남흔이 다시 등용된 1482년, 늦어도 그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등용된 1490년 이전에는 후궁이 된 것으로 보인다.
  3. 《조선왕조실록》중종 1권, 1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9월 2일(무인) 2번째 기사.
  4. 《조선왕조실록》중종 21권, 10년(1515 을해 / 명 정덕(正德) 10년) 3월 19일(병자) 2번째 기사.
  5. 《의령남씨족보》, 《선원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