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의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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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의왕후
(효의선황후)
세손빈(세자빈)
재위 1762년 ~ 1776년
전임자 혜빈 홍씨(혜경궁, 헌경왕후)
후임자 빈궁 조씨(신정왕후)
왕비
재위 1776년 ~ 1800년
전임자 정순왕후
후임자 순원왕후
왕대비
재위 1800년 ~ 1821년
전임자 정순왕후(예순왕대비)
후임자 순원왕후(명경왕대비)
추존 황후
재위 추존
별명 세손빈, 왕대비
배우자 정조
자녀 없음
부모 김시묵 / 당성부부인 홍씨
출생 영조 29년(1753) 음력 12월 13일
가회방(嘉會坊) 사저
사망 순조 21년(1821) 음력 3월 9일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능묘 건릉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1754년 1월 5일 (1753년 음력 12월 13일) ~ 1821년 4월 10일 (음력 3월 9일)는 조선 정조의 왕비로 성은 김씨이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시호와 존호는 장휘예경자수효의왕후(莊徽睿敬慈粹孝懿王后)이다. 1899년 고종황제가 정조를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함과 동시에 그녀를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로 추존하게 된다.

생애[편집]

아버지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이고, 어머니는 당성 부부인(唐城府夫人) 홍씨이다. 정조의 배필이 된 까닭은 그녀가 현종명성왕후의 친정집안인 청풍 김씨라는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명성왕후가 숙종을 낳았듯이, 정조의 배필이 되어 후손을 낳기를 바라는 영조의 뜻이었다.[1] 그녀가 세손빈이 된 후 그녀의 사촌여동생도 시모인 혜경궁의 남동생과 혼인하여 왕실과 이중삼중으로 인척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삼간택을 거쳐 별궁으로 들어갔으나 천연두를 앓아 이듬해인 1762년(영조 38년) 2월 10세에 세손과 가례를 올리고 세손빈(世孫嬪)으로 책봉되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고, 슬하에 소생이 없어 수빈 박씨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정조 승하 후 왕대비에 올랐다. 정조 때부터 순조 때까지 수많은 존호가 올랐으나 검소하고 깨끗한 탓에 모두 거절하여 사후에 존호로 예경자수를 받았고, 효심이 깊어 정순왕후 등을 극진히 모셨다. 69세의 일기로 승하하였고 정조와 함께 합장한 건릉(健陵)에 능이 있다. 사후 시호는 예경자수효의왕후(睿敬慈粹孝懿王后)였다가 고종때 장휘(莊徽)의 존호가 추시되었고,[2] 1898년 대한제국 때 선황후(宣皇后)로 추존되었다.

《한중록》[편집]

"윤득양의 딸에게 영조의 마음이 기울고 궁중 소견들도 그러하니라. (중략) 경모궁께서 김시묵의 집이 아니 될까 걱정하시다가 거기로 결정되니 기쁨이 넘치시더라."

영조는 세손빈으로 윤득양의 딸[3]을 마음에 들어했으나 최종적으로는 김시묵의 딸인 효의왕후가 간택되었다.

"세손이 본디 성품이 담담하여 빈궁과 금실이 친밀치 못하신데다가, 정처가 손에 화와 복을 쥐고 앉아 죽음을 마다않고 세손의 부부 사이를 말리니, 설사 화락하고자 하신들 어찌 감히 하실 수 있으리오. 이리 하여서는 후사를 볼 가망이 없으니, 아버지께서는 세손 부부가 금실이 좋아져 쉬 원자 생산하시기를 밤낮으로 빌고 비시니라. 그리고 아버지께서 궁궐에 들어와 세손을 뵐 때면 "그리 마소서" 간절히 간언하시고, 다른 형제들도 근심과 탄식이 측량할 수 없더라."

정조와 효의왕후의 금슬은 좋지 못했다.

대신의 문후와 약원의 문안 문제[편집]

1782년(정조 6년), 이택징·이유백의 상소에서 효의왕후에 대한 문후를 지적하는 기록이 있는데[4] 이에 대한 정조의 말.

문후(問候)하는 한 조항에 이르러서는 경 등은 조정에 벼슬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지위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혹시라도 고례(故例)를 모르고서 전에 없던 일을 창출했을 리가 있겠는가? 당후(堂后)의 일기(日記)를 상고하여 보면 애당초 개략적인 것도 볼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약원(藥院)에 계사(啓辭)되어 있지 않으며, 열성조(列聖朝)에서 전래된 고규(古規)에도 본디 이미 행해진 전례가 없으니, 경 등에게 무슨 인혐해야 할 의의가 있겠는가? 이것을 가지고 다시 일삼아 제설(提說)하지 않는 것이 가하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상소에서 비록 선조(先朝) 때 입시하였을 적에 귀로 들었다고 하였지만, 그가 조정에 벼슬한 이후의 행적에 대해 《정원일기(政院日記)》를 거슬러 고열(考閱)하여 보았는데, 당초 곤전(坤殿)의 문후(問候)에 관련된 연석(筵席)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가 이른바 직접 들었다는 것은 어느 곳에서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제 이에 더없이 중한 일을 이처럼 군부(君父) 앞에서 질언(質言)하기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세도(世道)가 여기에 이르렀고 인심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두루 돌아보고 생각하여 봄에 모두 내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들이었다. 내가 과연 스스로 반성하기에 급급하여 우선 이 일에 대해 흑백(黑白)을 가릴 겨를이 없으니, 경 등은 불가불 나의 이런 뜻을 알아야 한다. 경 등은 이에 대해 다시 무슨 일푼이나마 편안하기 어려운 마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대의(大義)가 달려 있는 것이어서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중하니, 경 등은 반드시 이 의의를 생각토록 하라." 하였다.

— <정조실록> 1782년(정조 6년) 5월 29일

1788년(정조 12년), 정조는 약원에게 이미 아침 문안을 하였으면 저녁 문안은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명령을 내리는데 날짜를 보면 효의왕후의 상상임신을 알게 되고 '산실청을 철수'[5][6]하기 며칠 전에 내린 명령으로 보인다.

그 후 1796년(정조 20년), 약원 제조는 중궁전의 병증을 걱정하고 있다.

약원 제조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중궁전의 증후는 회기(蛔氣)인 듯한데 아직도 회복되지 않으시니 그지없이 초조하고 걱정스럽습니다. 게다가 의관 정희태(丁希泰)의 귀가 몹시 어둡기 때문에 병증을 소상히 의논하지 못해서 합당한 약제를 아직 복용하지 못하고 계시니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회기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거동하고 수라를 드는 것은 평상시와 같으니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 <일성록> 1796년(정조20년) 9월19일

1801년(순조 1년) 1월과 2월, 이택징·이유백을 두 차례 언급[7][8] 한 상소가 있는데 이에 대한 정순왕후의 하교.

차대(次對)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서명선(徐命善)은 일찍이 문후(問候)를 철폐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 대간(臺諫)의 말은 진실로 지나친 것이었다."

하였는데,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사가(私家)의 문적(文蹟)에는 간혹 그런 말이 있다고 하나, 상세히 알 수 없습니다. 또 그 당시에 상신(相臣)은 또한 누구인지 적실히 알지 못하며, 대계(臺啓) 가운데에서도 성명을 지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자,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그렇다면 대간이 논한 바는 서명선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 아니였는가?"

하니, 심환지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는데,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만약 일차 문안(日次問安)을 하지 않았다면 의리가 막대하여 법으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지만 일차 문안을 이미 예에 따라 하였으니, 진실로 문안을 철폐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순조실록> 1801년(순조 1년) 2월 23일

정조 사후 선대왕인 정조에 의해 이택징·이유백의 신원이 복관되고 그 당시 그들이 상소했던 것은 효의왕후를 위해 충성을 다해 진언한 것이었다고 신하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정조·정순왕후·심환지의 말과 일성록에서 볼 수 있듯 효의왕후에 대한 대신의 문후와 약원의 문안이 철폐된 것은 아니다.

상상임신[편집]

정조의 후궁 화빈 윤씨의 임신은 왕실의 첫 임신 소식이었는데 임신하자마자 미리 설치한 산실청이 30여개월 이상 지속된 채 출산 소식이 없었고. 그 이후 정조가 비빈들의 임신과 출산에 공통으로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출산일이 임박하거나 당일에 호산청/산실청을 설치하고 철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효의왕후의 상상임신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효의왕후는 1787년(정조 11년), 임신하였다. 정조는 산실청을 설치하자는 신하들의 주청을 두 번이나 거절하고[9][10] 해산달에야 산실청을 설치하였다.[11] 그러나 이후 상상임신임이 드러나 1년 뒤인 1788년(정조 12년) 음력 12월 30일, 산실청이 철수되었다. 정조는 이후 1790년(정조 14년) 음력 6월 18일, 후궁 수빈 박씨조선 순조를 낳자 순조를 효의왕후의 양자로 삼았다.

기타[편집]

  • 고전소설 《숙창궁입궐일기》에 등장한다. 후궁 원빈 홍씨(숙창궁)의 조현례 과정을 그린 이 소설에서 효의왕후는 더위를 핑계로 원빈 홍씨의 인사 받기를 며칠이나 미루는 모습을 보인다. 필사연대나 작자를 추단하기는 어려우나,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풍산홍씨(豊山洪氏) 가문, 특히 정조 때의 세도가였던 홍국영(洪國榮) 일가의 인물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12]
  • 홍국영이 효의왕후의 음식에 독을 넣으려다 실패해 몰락했다는 야사가 전하나 정확한 근거는 없다.
  • 정조는 효의왕후의 아버지 김시묵에 대해 "김시묵은 반드시 화완에게 청하여 홍인한을 정승이 되게 하려고 하였고, 홍인한은 또 정후겸에게 비밀히 부탁하여 김시묵을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되게 하려고 하였다. 김시묵이 또 일찍이 나에게, 홍인한이 그 형보다 나으니 정승을 삼을 만하다고 하였다."[13]

가족 관계[편집]

본가 청풍 김씨(淸風 金氏)

  • 조부 : 증 영의정 효정공 김성집(贈 領議政 孝靖公 金聖集)
  • 조모 : 임원군 이표(林原君 李杓)의 딸 완산 이씨(完山 李氏)
  • 친조부 : 병조판서 증 좌찬성 효정공 김성응(兵祚判書 贈 左贊成 孝靖公 金聖應, 1699~1764)
  • 친조모 : 홍우녕(洪禹寧, 1660~1717)의 딸 남양 홍씨(南陽 洪氏)
    • 아버지 : 좌참찬 증 영의정 청원부원군 정익공 김시묵(左參贊 贈 領議政 淸原府院君 靖翼公 金時默, 1722~1772)
  • 외조부 : 통덕랑 남직관(通德郞 南直寬, 1692~1761)
  • 외조모 : 호조참판 돈녕부지사 여필용(戶曹參判 敦寧府知事 呂必容, 1655~?)의 딸 함양 여씨(咸陽 呂氏)
    • 어머니 : 의춘부부인 의령 남씨(宜春府夫人 宜寧 南氏, 1721~1746)
      • 이복오빠 : 공조참의 김기대(工曹參議 金基大, 1738~1777)
  • 외조부 : 성천진관병마절제도위 홍상언(成川鎭管兵馬節制都尉 洪尙彦, 1701~1763)
  • 외조모 : 김재중(金載重)의 딸 의성 김씨(義城 金氏)
    • 친어머니 : 당성부부인 남양 홍씨(唐城府夫人 南陽 洪氏, ?~1791)
      • 친오빠 : 김기종(金基種)

왕가(王家 : 전주 이씨)


효의왕후를 연기한 배우[편집]

각주[편집]

  1. “조선왕조실록 - 효의왕후의 천릉지문(五世繼昔寔爲宗國)”. 
  2.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 효의 왕후 검색 결과.
  3. “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 10월 29일 갑오 2번째기사”. 
  4. <정조실록>
  5. “<일성록> 1788년(정조 12년) 12월 24일”. 
  6. “<정조실록> 1788년(정조 12년) 12월 30일”. 
  7. “<순조실록>”. 
  8. <순조실록>
  9. <정조실록>
  10. <정조실록>
  11. <정조실록>
  12.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숙창궁입궐일기>
  13. “존현각일기 1776년(영조 52년)”. 
  14. 의빈 성씨 소생
  15. 수빈 박씨 소생


전임
정순왕후
(효순왕후)
(헌경왕후)
조선 역대 왕후
1776년 ~ 1800년
후임
순원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