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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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
상의, 소용, 의빈, 이저, 성빈, 성의빈, 의빈궁
별명 상의 성씨 (尙儀 成氏, ?~1782.12)
소용 성씨 (昭容 成氏, 1782.9~1783.2)
의빈 성씨 (宜嬪 成氏, 1783.2~사후)
이저 (貳邸, 1784.8~?)[1]
성빈 (成嬪, 1783.2~사후)
성의빈 (成宜嬪, 1783.2~사후)
의빈궁 (宜嬪宮, 사후)
배우자 정조
자녀 문효세자, 옹주, 셋째(복중 사망)
본명 성덕임(成德任)[2]
왕조 조선 왕조
부친 증 찬성 성윤우
모친 증 정경부인 임씨
출생 1753년 음력 7월 8일
사망 1786년 음력 9월 14일
매장지 의빈창녕성씨지묘[3]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8월 6일(음력 7월 8일) ~ 1786년 11월 4일(음력 9월 14일) )는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유일한 승은후궁으로 문효세자의 생모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생애[편집]

1753년 8월 6일(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태어났고[4] 이름은 성덕임(成德任)이다. 아버지 성윤우(成胤祐)는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청지기였으며[5] 어머니 임씨는 통례원 종6품 인의로 재직한 임종의 맏딸이다. 1762년(영조 38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으며, 혜경궁이 거두어 곁에 두고 친히 길렀다고 한다.[6][7]


공교롭게도 이 해 음력 2월 2일, 정조와 효의왕후가 가례를 올렸으며 윤 5월 21일, 사도세자가 죽었다. 의빈(宜嬪)이 임오화변(壬午禍變) 이전에 입궁 했는지 이후에 입궁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의빈이 입궁한 해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그 해,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장조)를 잃고 살얼음판 같은 정국에서 세 자녀(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를 키워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의빈을 친히 길렀다는 점은 혜경궁이 의빈을 얼마나 아꼈는지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가 직접 지은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약 1766년(추정), 당시 세손이던 정조는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의빈이 울면서 효의왕후가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며 죽음을 맹세했다고 한다. 궁녀가 승은을 거부하는 일은 죽음으로서 죄값을 치러야 할 큰 죄였다. 하지만 정조는 의빈의 뜻을 받아들이고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8]


1778년, 정순왕후가 정조에게 후사를 위해 후궁을 간택하라는 명을 내렸다. 명령문 중에 "궐내 궁인들이 어찌 많지 않다고 하겠는가마는, 주상은 그 본래의 성심으로 볼 때에 미천한 처지의 사람에게서는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라는 내용이 있다.[9] 여기에는 정순왕후가 "정조는 궁녀를 취해서라도 자식을 낳으면 되는데 미천한 사람에게는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속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약 1766년에 정조는 이미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려고 했었다.


정순왕후가 내린 명령문 이후, 1778년(정조 2년) 숙창궁 원빈 홍씨가 간택 후궁으로 입궁 했으나 1779년 음력 5월 7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1780년 음력 3월 12일, 경수궁 화빈 윤씨가 간택 후궁으로 입궁 했다. 하지만 1781년(정조 5년) 음력 1월 17일, 산실청이 설치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해산 했다는 기록은 없다.


정조는 의빈에게 처음 승은을 내리려다 거절당한지 15년 만에 다시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의빈은 또 사양했다. 이에 정조는 의빈의 시종을 크게 꾸짖고 벌을 내렸다. 다만 이번에도 의빈에게는 죄를 직접 추궁하지 않았다. 그러한 연후에 의빈은 마침내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였다. 정조가 지은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에는 ‘지금까지 의빈을 후궁의 반열에 둔지 20년이다.’[10]는 내용이 있다. 간행연도는 적혀 있지 않지만 1786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1786년을 기준으로 하면 정조는 1766년부터 의빈을 후궁의 반열에 뒀다. 그렇다면 정조는 1766년, 의빈에게 처음 승은을 내리려고 했다가 거절당했을 때부터 쭉 의빈을 마음에 뒀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의빈은 정조가 평생 동안 유일하게 자의적으로 선택한 여인이 되었다.


1782년 음력 4월 30일, 일성록에 의빈이 간접적으로 처음 등장한다.[11]

"서유방이 아뢰기를, “그는 나라의 경사를 기다리고 있어서 내려가지 않으려 하는데 해조(該曹)가 발패(發牌)하여 재촉하려고 하므로 현재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나라의 경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당시 정5품, 상의(尙儀) 신분이던 의빈이 임신한 상태였다.


1782년 음력 8월 26일, 의빈이 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12]

"서유경을 권초관(捲草官)으로 삼았다. 이때 상의(尙儀-내명부 정5품) 성씨가 해산할 달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권초관은 본래 비빈이 해산할 때 권초례를 행하기 위한 임시 관직이다. 그런데 일개 상의의 임신에 권초관을 임명한 것을 보면, 당시 정조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782년 음력 9월 7일 인시(새벽 3시~5시), 의빈은 창덕궁 연화당(讌華堂)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13]

"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4]

후사를 잇기 위해 후궁의 간택에 가례청(嘉禮廳)을 설치하고 궁호(宮號)까지 내려서 원빈 홍씨화빈 윤씨를 입궁 시켰지만, 정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정조의 승은(承恩)을 두 번 거절한 뒤에 받아들인 성덕임이라는 승은 궁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다. 당시 정조는 물론이고 왕실과 조정에서는 흥복이자 경사이며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해산 당일, 호산청(후궁이 아기를 낳을 때 임시로 설치하는 관청)이 설치되었고 음력 9월 13일에 철수 되었다.[15] 혜경궁 홍씨는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을 때 자신의 친정에서 데려온 몸종 '복례'와 유모 '아지'를 보내 도왔다. 복례는 문효세자의 출산을 도운 공으로 시녀 직위를 받았다.[16]


궁중 여인은 대개 거처하는 처소에서 아기를 낳았다. 경종은 희빈 장씨의 처소 취선당(就善堂)에서 태어났고, 영조는 숙빈 최씨의 처소 보경당(寶慶堂)에서 태어났고,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처소 경춘전(慶春殿)에서 태어났다. 이로 말미암았을 때 의빈의 처소는 문효세자를 낳은 연화당(讌華堂)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추정을 토대로 보면 당시 상의(정5품)였던 의빈이 전(殿) 다음으로 높은 당(堂)에서 거처했다는 것은 의빈이 왕실에서 어떤 위치였고, 정조에게 얼마나 사랑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화당(讌華堂)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일상 업무를 보던 선정전(宣政殿) 동쪽에 있었다. 왕의 침전이자 집무실로 쓰인 희정당(熙政堂)도 선정전 동쪽에 있었다. 따라서 의빈의 처소는 정조가 나랏일을 하는 전각 주변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중희당도 연화당 근처에 있었다.


일성록에는 의빈이 문효세자를 낳은 당일 정3품 소용으로 봉작 했다는 기록이 있다.[17] 반면 실록에는 그해 음력 12월 28일에 소용으로 봉작 했다는 기록이 있다.[18] 하지만 일성록에 따르면 1782년 음력 9월 7일, “소용방(의빈)에 공상하는 등의 일을 규례대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19], 같은 해 음력 9월 15일 상정각(誠正閣)에서 열린 차대(次對: 임금이 의정부와 삼사의 당상관들과 하는 정책회의)에서 정조가 ‘소용(昭容)’이라고 칭한 기록이 있다.[20]


1783년 음력 2월 19일에 정1품 빈으로 승격되어 의빈(宜嬪)의 빈호를 받았다. 이 때 '의(宜)'는 정조가 직접 정했다.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 수(綏) 자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소용궁에게 올릴 빈호를 의(宜) 자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빈(嬪)으로 봉작(封爵)하는 관교(官敎)는 작년에 이미 옥새를 찍어 하비하였으니, 자호(字號)를 정사를 열어서 거행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지방에 있는 낭관을 재촉해서 올라오게 한 후에 전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21]


원자로 책봉된 왕자군은 1784년(정조8년) 음력 7월 2일, 3세의 어린 나이에 정식으로 왕세자로 책봉 되었다. 이는 정조의 둘째 아들 조선 순조가 1800년(정조 24년) 1월 1일, 11세가 되어서야 세자로 책봉받은 것과 비교하면 무척 이른 일이었다.[22]


1784년(정조 8년) 5월 9일(윤 3월 20일)에는 옹주를 낳았다. 이 때, 맏아들 문효세자 때처럼 해산 당일에 호산청이 설치되었고,[23] 6일 뒤에 철수되었다. 하지만 옹주는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된 음력 5월 12일에 졸하였다.[24] 옹주가 죽은 다음날인 5월 13일, 정조가 딸의 사당에 머무르느라 일을 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25]


1786년(정조 10년) 음력 5월 11일에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훙서하였고, 같은 해 음력 9월 14일에는 의빈 성씨도 셋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해산달에 이르러 졸하였다.[26]

소설 곽장양문록(郭張兩門錄) 필사[편집]

1773년(영조 49년) 봄, 21세의 나이에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당시 20세), 청선공주(당시 18세), 궁녀 영희, 경희, 복연과 함께 국문소설 《곽장양문록》(전 10권 10책)을 필사하였다. 이 소설은 필사 시기가 알려진 소설 가운데 최고로 오래된 필사소설이며, 의빈 성씨가 필사한 부분의 하단에는 '의빈 글시'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작품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27][28] 정조는 "의빈의 붓글씨가 범상함을 넘어섰다"고 표현했다.[29]


의빈 성씨 사후 정조가 내린 어제문(御製文)[편집]

일성록 정조11년(1787년) 음력 9월 13일[편집]

"중희당(重煕堂)에서 승지 홍인호(洪仁浩)와 예문관 제학 서유린(徐有隣)을 소견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의빈궁(宜嬪宮)의 치제(致祭)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가 이미 수향(受香)하고 나갔는가?”

하니, 홍인호가 아뢰기를,

“이미 전향(傳香)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상제(祥祭)의 제문은 일찍이 친히 지어 놓은 것이 있으니, 승지는 해궁(該宮)에 나아가서 충의(忠義)로 하여금 축식(祝式)대로 쓰게 하고, 효창묘(孝昌墓)의 향축(香祝) 및 의빈묘의 향축은 서제소(書題所)에 임시로 봉안하였다가 내일 새벽 묘소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을 할 때 섭제(攝祭)를 겸행(兼行)하도록 하라. 섭제 제관은 모두 곧장 나아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30]

정조는 의빈(宜嬪) 사후, 직접 여러 어제문(御製文)을 적었다. 그 중에서 일성록에 정조가 제문을 일찍이 친히 지어 놓은 것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어제비문(御製碑文)[편집]

어제비문이란, 왕이 직접 쓴 비문을 말한다.

"아! 너의 근본이 굳세어서 갖추고 이루어 빈궁(嬪宮)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죽어서 삶을 마치느냐? 지금 이 상황이 참 슬프고, 애통하고, 불쌍하구나. 평상시 화목하게 지냈건만 네가 나를 떠나 죽고 말았으니 너무 애달프고 슬프다. 네가 다시 살아나서 이승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이 한 가지 그리움이 닿아서 네가 굳세게 이룬다면 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서 궁으로 올 것이다. 나아가 느끼면 매우 마음이 아프다. 너는 문효세자의 어머니다. 네가 임신을 해서 낳은 아이가 문효세자이며 내 후계자다. 세자는 이미 두 살 때 글을 깨우쳤다. 너의 근본이 단단해서 임신을 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다. 문효세자가 죽은 후 셋째가 되어 다시 우리 곁에 찾아올 줄 알았건만 하늘과 땅은 오히려 사이를 더 떨어뜨려 놓았다. 이로써 마음 한 가운데가 참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어렵게 얻은 아들 문효세자를 하늘에 견주어 돌아오길 바랐으나 너는 멀리 떠났다. 나는 무릇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너를 데려 올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을 보내 물리칠 방법도 없다. 이로써 느끼니 참 슬프고 애달프다. 앞전에 겪은 일과 비교해도 비교할게 없을 만큼 슬프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도다. 너는 진짜 이승을 떠나는구나. 사랑하는 너는 어질고, 아는 바가 많고, 총명하고, 슬기롭고,밝고, 이치를 훤히 알고, 옳고, 예절을 아는 사람이다. 또 권세를 능히 삼가하고 도리를 지킬 줄 알고 나눌 줄 알았다. 너는 문효세자를 잃었을 때는 예를 다하며 울었고, 쉬지도 못했고, 눈물도 그치지 못했다. 나는 너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네가 잘 못 될까봐 걱정 돼서 돌려 보냈다. 그런데 너의 목숨은 어찌 이리 가느랗단 말이냐? 이제 나는 무릇 중요한 일을 접고 너의 장례를 치러서 살필 것이다. 문효세자의 옆에서 편히 쉬어라. 아들의 무덤에서 멀지 않게끔 아들과 어머니가 좌우에 있도록 할 것이다."

[31]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편집]

정조는 의빈 성씨 사망 후 친히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을 내렸다. [32]


어제의빈묘표(御製宜嬪墓表)[편집]

의빈 성씨 사후, 정조는 직접 의빈 성씨의 사적 및 덕행을 기리는 글을 썼다. [33]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內各祭祝文)[편집]

의빈 성씨 사후 1786년(정조 10년), 정조가 직접 쓴 글이다. 제축문이란, 제사를 지낼 때 신명에게 고하는 글월을 말한다.[34]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後各祭祝文)[편집]

정조는 죽은 의빈 성씨를 위해 제축문을 썼다.[35]


의빈성씨유제축문(宜嬪成氏諭祭祝文)[편집]

1789년(정조 13년)에는 의빈성씨유제축문(宜嬪成氏諭祭祝文)을 받았다. 유제축문이란, 왕이 죽은 공신을 위해 직접 내려주는 글을 말한다.[36]


어제의빈치제제문(御製宜嬪致祭祭文)[편집]

정조는 죽은 의빈 성씨를 위해 치제제문을 썼다. 치제(致祭)란 윗사람이 제사 때 올리는 음식과 죽은 사람에 대해 슬픈 뜻을 표하는 글을 내려서 죽은 아랫사람을 제사하는 일이다. 제문(祭文)이란 제사 음식을 올리고 제사 때 읽는 글을 읽는 일이다.

"維乾隆五十一年嵗次丙牛十一月辛未朔初七日丁丑國王諭祭于宜嬪昌寧成氏之靈若曰丧禍之憯毒 情理之痛割莫甚於哭文孝而必寛譬理遣日月邁矣寒暑換矣平居笑語慽容不作憺然若相忘則哀爲嬪之歿而若哀乎嗚呼嬪是文孝之母也嬪之腹之兒是文孝之同氣也文孝不可見而必求其親愛思慕者乎其母必待其肖似髣髴者乎其同氣痛割憯毒之寛譬在是理遣在是今嬪旣奄忽腹之兒又未及生乎世文孝之遺塵餘馥遂泯然如掃矣予將求之於何待之於何而所以痛割憯毒者亦何由以寛譬何由而理遣乎予自嬪歿之後始覺文孝之從以日逺哀其日逺而日愈不忘於是乎今之哀殆甚於昔之哀而其所以哀之者豈惟哀嬪之歿乎嗚呼在嬪妾而識道理如其賢也居榮貴而守謹約宜其祿也纔丧文孝淚猶未乾而又與在腹之兒同歸化盡嬪之命其亦可哀之甚也今將送嬪于文孝之側而葬之此固嬪之願耳玄隧宻邇魂氣流通終天泣訣之恨氷以爲慰而亦哀予之不能忘哀也其然乎不然乎嗚呼哀哉尙饗"

[37]

의빈성씨 사후 관련 문서[편집]

의빈 성씨 만장[편집]

  • 의빈 성씨 만장(宜嬪 成氏 挽章)

이성원(李性源, 1725~1790)[38]이 쓴 시문집 조은집(潮隱集)에 <의빈성씨만장>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39]


  • 의빈궁만장(宜嬪宮挽章)[40]

이복원(李福源, 1719~1792)[41]이 쓴 쌍계유고(雙溪遺稿)에 수록 되어 있으며, 발행연도는 미상이다.

"聖王家法正。潛德夢蘭宜。每覿溫文質。深知鍾毓基。端陽胡舛理。復月又虛期。西寢歸依地。千秋慰孝慈。素性惇天秩。丹誠奉小君。河睢承化夙。禖燕祝釐勤。懿行三宮䀌。奎章百世芬。憧憧宗國念。來慶逝猶欣。"


  • 의빈만사(宜嬪輓詞)[42]

조 경(趙 璥, 1727~1789)[43]이 쓴 하서집(荷棲集)에 수록 되어 있으며, 발행연도는 1789년이다.

"煌煌奎彩賁貞珉。宸語悽悲泣萬人。天上曾無私惠澤。女中還有諫爭臣。齎誠每祝坤闈慶。乘化長隨鶴馭賓。况復平生謙謹德。賣衣纔得葬其親。"

하서집(荷棲集)에는 조 경(趙 璥)이 정조의 명을 받고, 의빈을 애도하는 시문을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製進宜嬪輓詞)


  • 의빈성씨만(宜嬪成氏輓)[44]

김재찬(金載瓚, 1746~1827)[45]이 쓴 해석유고((海石遺稿)에 수록 되어 있으며, 발행연도는 미상이다.

"含徽挺茂仰端莊。椒掖親承日月光。九御班中仍進爵。天生淑德誕元良。

其二 樛木春深咏葛覃。洋洋聖化繼周南。丹心斷斷惟憂國。每向坤闈祝百男。

其三 宗國靡依五月餘。休祥惟待燕煤初。倚蘭未卜宮椒萎。蕙路西風哭祖車。

其四 居寵若驚自守嚴。令儀令德又謙謙。貴爲嬪御淸如水。遺篋何曾有寸縑。

其五 不以慽容見至尊。天心猶格病中言。栗林墓貌長隣近。應抱哀寃到九原。"


  • 의빈만장(宜嬪輓章)[46]

서형수(徐瀅修, 1749~1824)[47]가 쓴 명고전집(明皐全集)에 수록 되어 있으며, 발행연도는 미상이다.

"閨儀肅肅小星詩。月色蠅聲侍寢時。每向坤闈祈聖嗣。芳心不敢幸恩私。

其二 禖郊弓襡筮休祥。誕我元良赤芾煌。一自尊榮愈抑損。了無綾帛侈宮箱。

其三 天心人事苦難推。五月吾東率土悲。猶幸腹中方毓慶。強將言笑謝諸姬。

其四 纔經厄運届昌期。玉質躬擔萬世基。朝野皆祈彌月誕。邈然神理遽如斯。

其五 虗月宮機斂典刑。白雲歸訪鶴驂停。西岡松栢相隣近。庶慰泉臺寂寞靈。"


  • 성의빈만사(成宜嬪挽詞)[48]

김조순(金祖淳, 1765~1832)[49]이 쓴 풍고집(楓皐集)에 수록 되어 있으며, 발행연도는 1854년이다.

"曾自瑤臺降紫雲。飄然來傍聖明君。衣綈辭輦何須道。淑德宜傳女史芬。

天心眷我壬寅秋。滿寢紅光誕降休。與奪悤悤神理漠。五年如夢四重謳。"


  • 의빈만장(宜嬪輓章)[50]

홍인모(洪仁謨, 1755~1812)[51]가 쓴 족수당집(足睡堂集)에 수록 되어 있으며, 발행연도는 1824년이다. 홍인모의 아버지는 홍낙성[52]이고 의빈의 언니는 홍낙성의 첩이었다.

"芳質初承聖主恩。榮名懿德後庭尊。慶祥甲觀徵無地。萬事人間一夢翻。

端陽哀淚白鬚滋。痛哭銅闈國勢危。耿耿須臾無死願。眞祥重覩日南時。 天公荒老理乖常。纔半年間又降殃。玉碎香摧悲不暇。那堪酷禍說胎殤。 至誠惓惓仰坤宮。淑德稀聞列女中。華衮宸章昭日月。忠言又復在臨終。 妝臺寂寞掩寒帷。漏滴銀壺曉響悲。惟有上林殘月在。宮娥應廢小星詩。 靈輀又逐鶴驂廻。雲引丹旌栗洞隈。千載相依冥漠裏。猶堪慰處最堪哀。"


정조 생전[편집]

  • 의빈묘도형(宜嬪墓圖形)
  • 의빈성씨매세차일지필여기···(宜嬪成氏每歲此日至必如期···)
  • 의빈성씨난엄자진율회령(宜嬪成氏難淹者辰聿回令)
  • 의빈성씨시유가평례유(宜嬪成氏時維嘉平禮有)
  • 의빈성씨세서천역기진복···(宜嬪成氏歲序遷易忌辰復···)
  • 의빈성씨시유중춘례유상···(宜嬪成氏時維仲春禮有常···)
  • 의빈성씨영허여피도토상(宜嬪成氏盈虛如彼島兎相)
  • 의빈성씨시유중하례유(宜嬪成氏時維仲夏禮有)
  • 의빈성씨일거월제역기운(宜嬪成氏日居月諸亦旣云)
  • 의빈성씨진유투벽일의수··(宜嬪成氏塵牖渝壁一宜修···)
  • 의빈성씨당실개관재환···(宜嬪成氏堂室改觀載煥···)
  • 의빈성씨시유중동례유(宜嬪成氏時維仲冬禮有)


정조 사후[편집]

  • 의빈성씨회갑일치제제문(宜嬪回甲日致祭祭文)
  • 의빈회갑일치제제문계유(宜嬪回甲日致祭祭文癸酉)
  • 의빈묘견내시치제제문(宜嬪廟遣內侍致祭祭文)
  • 의빈묘현내시 치제제문(宜嬪墓遣內侍 致祭祭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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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사후[편집]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

[54]

정조는 의빈 성씨가 사망하자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때 국사(國事)는 정조 본인과 나랏일을 뜻했다. 이는 정조가 여자에 대한 감정을 유일하게 실록에 드러냈다. 정조는 평생 궁녀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던 왕이었다. 그리고 의빈 성씨의 상제는 영빈 이씨 장례에 따라 1등 후궁의 예로 치러 주었다.


1797년(정조 21년)에는 육상궁선희궁의빈궁명일제삼궁고제(毓祥宮宣禧宮宜嬪宮名日祭三宮告祭)를 지낸 기록이 남아 있다. 육상궁은 숙빈 최씨의 사당, 선희궁은 영빈 이씨의 사당이다. 의빈 성씨가 정조의 증조모, 조모와 함께 제사를 받았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55] 종로구 안국동에 '의빈궁(宜嬪宮)'이라는 사당이 있었다. 이후 신주는 1870년(고종 7년) 육상궁(毓祥宮) 안의 별묘에 모셔졌다.[56] 1874년(고종 11년), 재정을 아끼기 위해 의빈 성씨의 가문을 삭천하였다.[57] 1908년(순종 1년)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한 후궁이라 하여 칠궁에 포함되지 못하고 순종 때에 신위를 땅에 묻었다. 대신 1년에 한 번씩 원소(園所)의 예에 따라 제사를 지내라고 했는데 원소(園所)는 왕의 사친, 왕세자, 왕세자빈의 예다.[58]


독살 의혹[편집]

"천만 뜻밖에 5월에 원자가 죽는 변고를 만나 성상이 다시 더욱 위태로워졌으나 그래도 조금은 기대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는데, 또 9월에 상의 변고를 당하였다. 궁빈(宮嬪)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처럼 놀라고 마음 아파할 것은 없지만, 나라에 관계됨이 매우 중하기 때문이다. 두 차례 상의 변고에 온갖 병증세가 나타났으므로 처음부터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필경에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히고 담이 떨려 일시라도 세상에 살 마음이 없었다."

[59]

1786년(정조 10년) 12월 1일, 정순왕후가 언문으로 하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정순왕후의 하교에 ‘궁빈(宮嬪)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처럼 놀라고 마음 아파할 것은 없지만’이라는 내용은 정순왕후와 의빈이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의빈이 사망했을 때 조정 안팎에서는 상당히 통탄해 했다. 더군다나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라는 말도 실록에 남아 있다. 의빈과 혜경궁이 친밀하고 정순왕후와 혜경궁이 정적 관계였음을 말미암았을 때, 정순왕후와 의빈의 관계 역시 좋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정조는 의빈 성씨 사망 당시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는 말을 남겼다. 또, 같은 날 기록된 실록에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라는 부분이 있다.[60] 의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정조는 의빈 성씨의 죽음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의빈 성씨가 당시 내관 이윤묵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이에 놀란 정조는 의빈의 치상소에서 바로 이윤묵의 목을 베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죽이지는 않고, 귀양 보냈다. 그러나 정조는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 자신이 항상 직접 검열하였으므로 독살일 리가 없다고 판단, 얼마 뒤 이윤묵을 풀어준다. 대신 이에 연루된 손용득을 친히 신문하여 손용득과 여종 악연을 귀양 보냈다.[61]


1787년(정조 11년) 2월 21일, 전라도 유생인 유학(幼學) 황득중(黃得中) 등 921인이 상소를 올렸다.

"지난 임인년(1782, 정조6) 가을 문효세자(文孝世子)가 탄생한 이후로 영원히 이어질 나라의 무궁한 아름다움을 맡길 곳이 있음을 기뻐하였는데,  홍역을 순하게 치러 경사를 반포한 끝에 갑자기 훙서(薨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피 울었으나, 밤낮으로 간절히 빌었던 것은 오히려 후사(後嗣)의 탄생에 있었습니다. 9월에 의빈(宜嬪)이 졸한 상변(喪變)은 또 어찌 그리 가혹하단 말입니까. 중외(中外)가 놀라 통곡하고 모두의 말이 시끄럽게 들끓으면서 약을 잘못 쓴 역적 의관(醫官)과 젖을 끊은 요적(妖賊) 유모(乳母)에게 죄를 돌리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궐의 일은 비밀스럽고 초야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자세한 내막을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삼가 자전의 전교 가운데 ‘전후의 상변은 증상이 괴이했다.[前後喪變 症形怪底]’는 여덟 자를 본 뒤에야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두들 눈물을 훔치고 이를 갈며 큰소리로 외치며 일어나 말하기를, ‘애통하다. 우리 세자의 상변은 진실로 하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의 짓이다. 앞으로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을 거의 시원하게 씻을 수 있겠구나.’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록 시간만 끌어 끝내 한번도 조사해 밝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극악한 역적들이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가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아, 의관으로 하여금 약을 잘못 쓰게 하고 유모로 하여금 젖을 끊게 한 자는 자연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용렬한 의원에게 맡기는 것도 오히려 불효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역적 의관에게 맡긴 자야 말할 것이 있겠으며, 약을 맛보지 않은 것도 오히려 임금을 시해했다고 하는데 더구나 독약을 투여한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여기에 있고 조사할 만한 자취도 여기에 있습니다. 심지어 ‘후일을 고려했다.’는 공초와 ‘나라의 경사를 칭송하지 않았다.’는 말은 모두 국문할 만하고 조사할 만한 증안(證案)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전하께서는 매번 ‘확실한 것이 없다.[無的]’는 두 글자로, 조사하여 밝히기 어렵다고 핑계를 대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삼사(三司)의 청을 윤허하시어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풀어 주소서."


의빈창녕성씨지묘(宜嬪昌寧成氏之墓)[편집]

정조의빈 성씨 사후 아들 문효세자의 묘 왼쪽 산등성이 임좌의 언덕으로 묘지를 마련했다. 효창묘(1870년 효창원 승격) 경내에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묘가 함께 있었고 거리는 100걸음 쯤 떨어져 있었다.

원래 효창묘 영역은 지금의 효창동, 청파동, 공덕동 일대였다. 묘역이 굉장히 넓고 송림이 울창했으며 풍수지리상 명당이었다. 정조는 이 영역을 직접 정했는데 의빈과 문효세자가 죽어서나마 못 다한 정을 나누고 함께 있기를 바라서였다.

정조가 의빈과 문효세자를 나란히 묻어준 일은 이례적이었다. 본래 후궁 보다 후궁의 자녀들 신분이 더 높다는 점과 숙종숙빈 최씨의 묘 자리를 공주의 묘 자리 근처로 정할 수 없다며 다시 정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전례를 보면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62]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의빈 성씨의 무덤은 서삼릉 내 후궁 묘역으로, 문효세자는 의빈 성씨의 무덤에서 2km 떨어진 의령원(懿寧園) 앞으로 강제 이장 당했다.[63]


거둥고개[편집]

1788년(정조 12년) 7월 8일, 승지를 보내어 의빈묘(宜嬪墓)에 치제(致祭, 임금이 공신이 죽었을 때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는 것)하였다.[64] 1789년(정조 13년) 4월 25일, 의빈묘(宜嬪墓)에 가서 다례(명절날이나 조상의 생일 또는 매달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 따위를 맞아 지내는 제사)를 행하였다.[65] 1789년(정조 13년) 4월 26일, 의빈묘에 가서 별다례(명절, 음력 초하루나 보름 외에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드리는 차례)를 행하였다.[66] 1789년(정조 13년) 12월 28일, 의빈묘(宜嬪廟)에 들러 전작례(奠酌禮, 왕이 왕비가 되지 못하고 돌아간 조상이나 왕자, 왕녀를 임금이 몸소 제사 지내는 예)를 행하였다.[67] 1790년(정조 14년) 3월 24일, 의빈묘(宜嬪廟)에 들렀다는 기록이 있다.[68] 이처럼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의 행차)하였고, 이 때문에 오늘날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69]


문희묘(文禧廟)[편집]

조선의 후궁은 왕세자를 낳아도 왕세자는 왕비의 양자로 입적 되기 때문에 생모는 사친(私親)에 불과했다. 이는 장례 예법에 관해서도 차이가 드러난다. 후궁은 왕의 여자이기 전에 엄연히 '신하'였다. 그래서 후궁은 왕명이 있지 않는 이상 죽어서 자식의 곁에 묻힐 수 없었다. 하지만 의빈 성씨의 경우는 다르다.

의빈 성씨의 사당 의빈궁(宜嬪宮)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안국방(安國坊)에 있었는데, 의빈궁의 서쪽 담 바깥쪽에 아들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文禧廟)가 있다.[70] 원래 문희묘는 경모궁(사도세자 사당) 부근에 건립하려고 했으나 정조는 의빈 성씨 사후 문희묘 건립 터를 이전시켰다. 1789년(정조 13년) 4월에 문희묘가 완성 됐다.

문희묘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 사당이다. 하지만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에 문희묘와 의빈묘까지 그림을 넣어서 제시하여 두 사당의 전체적인 구성을 묘사했다. 즉 문희묘(文禧廟)와 의빈묘(宜嬪廟)는 두 개의 묘가 한 곳에 있으며, 두 묘 사이에는 어재실(御齋室: 왕이 능, 묘에 거동할 때 잠시 머무르던 집)이 있다. 그리고 의빈묘 구성은 문희묘와 비슷하다.[71]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에 의빈 성씨의 사당도 함께 있는 것으로 봤을 때, 문희묘는 엄연히 문효세자의 사당이지만 의빈 성씨를 가리키는 명사이기도 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 1789년 문희묘가 완성 되었을 때를 기준으로, 1789년(정조 13년) 1월 16일 문희묘에 거둥하다. 1789년 9월 7일 문희묘에 전작례를 행하였다. 1790년(정조 14년) 5월 10일 문희묘에 나아가 거기에서 밤을 지냈다. 기록은 문효세자는 물론이고 의빈 성씨도 포함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의빈 성씨 사후 의빈궁(宜嬪宮)과 의빈묘(宜嬪廟)가 나란히 쓰이는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의빈궁(宜嬪宮)[편집]

대한예전목록(大韓禮典目錄)에 나타나 있는 제사 예법에 화령전(華寧殿, 화성행궁 옆에 정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전각)을 비롯하여 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기 전), 저경궁(儲慶宮, 인빈 김씨), 대빈궁(大嬪宮, 희빈 장씨), 육상궁(毓祥宮, 숙빈 최씨), 연호궁(延祜宮, 정빈 이씨), 선희궁(宣禧宮, 영빈 이씨), 경우궁(景祐宮, 수빈 박씨)에 이어서 의빈궁(宜嬪宮)이 나와 있다.

대한예전목록(大韓禮典目錄)이 쓰였을 당시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정조의 할머니였다. 엄연히 따지면 왕을 낳은 후궁은 아니었다. 하지만 1899년, 사도세자가 장종(1901년에 장조의황제로 추존)으로 추존 됐다. 반면 의빈 성씨문효세자를 낳은 정조의 후궁이지만 왕을 낳은 후궁은 아니었다. 하지만 1908년 순종이 제사 칙령을 발표하기 전까지 의빈 성씨는 계속 왕을 낳은 후궁과 대등한 대우를 받았다. 의빈 성씨가 이 같은 대우를 받은 데는 영빈 이씨의 전례를 따랐는지, 그 외에 다른 명령이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성빈 수묘군 안만길 준호구[편집]

1858년(철종 9년), 의빈 성씨의 수묘군으로 근무한 안만길이 발급한 준호구이다. 양주목의 행정구역을 연구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72] 1861년(철종 12년)에는 안장손이 의빈 성씨의 수묘군으로 근무했다.[73]


이재난고[편집]

조선 정조대의 문신 이재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 의빈 성씨의 본명, 가족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다.

昭容成氏名德任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 惠慶宮稱其福相而上亦愛之 許令從所顧屬內庭旣有娠 惠慶宮恒以語上曰德任腹漸高大矣上則微哂而已 尹嬪過三十餘朔産事無實 而元子生 則産廳都提調徐命善等猶請姑待尹氏産期 而不請元子定號 奉朝賀金尙喆亟上疏 引春秋立庶以長之義 請元子定號上意亦然 亟從之徐則竟八度呈辭而遞蓋 昭容本係洪家傔人之女 故老論或以線索甚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이다. 아버지가 홍봉한(정조의 외조부)의 청지기였던 까닭으로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다. 혜경궁이 서로 그 복을 일컫었고 임금(정조) 역시 덕임을 사랑했다. 내정(임금이 사적인 생활을 하는 궁궐의 내부)에 드는 것을 허락했고, 이윽고 임신했다. 혜경궁이 덕임의 임신을 말하자 임금은 조용히 웃었다. 윤빈(화빈 윤씨)의 산실청은 30개월이 넘도록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 덕임이 원자를 낳았지만 윤씨의 산실청 때문에 원자 정호를 청하지 못했다. 원자 정호를 청하자 임금 역시 그러했다. 소용은 본래 홍봉한 가문에서 일하던 시종의 딸이다."


문효세자 출생 후 파면 당한 성식(成軾)[편집]

"내가 이르기를,

“내가 조신(朝臣)들에게 유시(諭示)하고 싶은 것이 있다. 예로부터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왕실의 척족(戚族)들은 매양 연줄을 타고 내통하여 조정에 해를 끼친 폐단이 많았다. 더구나 부덕한 내가 대비하고 더 금지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한 폐단을 장차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므로 내가 즉위한 뒤로 척리(戚里)들을 단속하는 것을 먼저 처리할 중요한 일로 삼았으니, 나의 이러한 마음을 경들도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심이 예전만 못하고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는 때를 당하여 만약 이 무리들이 자신의 본분을 지키지 않고 조정의 신하와 혹 서로 내통한다면 치화(治化)에 누가 될 뿐만이 아니니, 어찌 조정이 대단히 수치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것을 염려하여 일전에 소용(昭容)의 오라비를 합문(閤門) 밖에 불러 놓고 만일 이러한 폐단이 있게 되면 극형에 처하는 죄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거듭거듭 신칙(申飭)하고 유시(諭示)하였다. 오늘 연석(筵席)에 오른 제신(諸臣)들에게 어찌 이러한 염려가 있겠는가마는 모쪼록 이 하교를 듣고 서로 타일러 훈계하게 되기를 나는 바란다.”

하니, 서명선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으니 물러가 각자 경계하고 신칙할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듣건대, 소용의 오라비 성식(成軾)이 현재 어영청 군교의 직임을 맡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로 하여금 외인(外人)과 내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 금장(禁將)이 어영대장을 겸하고 있으니 즉시 그의 직임을 태거(汰去)하라.

하니, 사직 이경무(李敬懋)가 아뢰기를,

“마땅히 하교하신 대로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하였다."

[74]

정조는 문효세자가 태어난 뒤, 의빈의 친척들이 연줄을 타고 내통하여 조정에 해를 끼칠까봐 경계했다. 의빈은 혜경궁과 친밀하고 언니는 홍낙성의 첩이었다. 아버지 성윤우는 홍봉한의 청지기였지만, 이재난고에 의빈이 소용이 되기 전에 사망 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성윤우는 1782년 이전에 사망했다. 의빈에게는 별군직(別軍職)을 지낸 두 오빠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어영청 군교로 지낸 성식(成軾)이었다.


어영청 군교는 낮은 벼슬인데 정조는 성식을 편전 앞문 밖에 불러서 문효세자와 의빈의 연줄을 타고 내통하면 극형으로 다스릴 것이라며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고 가르쳤었다. 하지만 1782년 음력 9월 15일, 어영청 금위대장(종2품)에게 성식이 다른 사람과 내통하는 일이 생기면 안 되니 파면하라는 명을 내렸다.


정조 스스로 가까운 사람일수록 때로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엄히 다스린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정조는 의빈의 혈족 중에서 가장 출세했거나 또는 영리했을 성식을 파면하는 조치를 내려서 내통을 미연에 방지한 것으로 추정 된다. 그러나 이재난고에 따르면 의빈의 고모는 정방(鄭 枋, 1707~1789)[75]의 첩인데 의빈과 그 첩 덕분에 공조판서(정2품)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조카 정복환(鄭福煥, 1736~1790)[76]은 옥당 벼슬(수찬, 교리, 응교, 제학)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 추정했을 때, 성식이 파면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족관계[편집]

창녕 성씨(昌寧 成氏)

  • 7대조부 : 성만종(成萬種) - 제릉 참봉(종9품)[77]
  • 고조부 : 성경(成景) - 군자감 정(정3품)[78]
  • 아버지 : 증찬성 성윤우(成胤祐[79], ?~1782년 이전)[80] - 홍봉한의 청지기
  • 어머니 : 증정경부인 임씨 - 통례원 인의(종6품) 임종의 맏딸[81]
  • 고모 : 공조판서 정방(鄭枋, 1707년~1789년)의 첩[86]


왕가(王家 : 전주 이씨)


미디어[편집]

연도 제목 역할 배우 장르
2016 《우아한 환생》 의빈 성씨 네이버 웹소설
2016 《정조-만천명월주인옹》 성선우 홍민아 수원시립공연단 창작뮤지컬
2007~2008 이산 성송연 이한나(1~4회) → 한지민(5~74회) MBC 드라마
2005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강건희 소설
2005 《비단속옷》 성연 소설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일성록 - 정조8년 음력 8월 3일”. 
  2. “昭容成氏 名德任”,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德任)이다." - 황윤석, 《이재난고
  3. <두산백과>
  4. "英宗二十九年癸酉七月八日", "영종(영조) 29년 계유년 7월 8일", - 어제의빈묘표
  5.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 "아버지가 홍봉한의 청지기였던 까닭으로 혜경궁의 궁녀로 입궁했다.", - 황윤석《이재난고》
  6. "十歲選入掖庭", "10세에 입궁했다.", - 어제의빈묘지명
  7. "惠慶宮 爲收昭容于侍側 親鞠育", - 황윤석 《이재난고》
  8.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 
  9. “정조실록”. 
  10. “어제의빈묘지명 - 後庭之列廿載于玆”. 
  11. “일성록 - 정조6년 음력 4월 30일”. 
  12. <정조실록>
  13. "壬寅九月七日寅時誕世子于昌德宮之讌華堂", 김종수《문효세자지문》
  14. “조선왕조실록 - 정조6년 음력 9월 7일”. 
  15. "傳于徐有防曰, 護産廳, 已過七日, 自今日撤直, 捲草官及醫官·中使·內外下屬等, 竝書啓", 서유방이 말하기를 “호산청이 유지된 지 7일이 지났으니 이제 철수하는 게 바릅니다. 권초관에 아울러 중사와 여러 안팎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울러 관련된 문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16. 《한중록》
  17. “일성록 - 정조6년 음력 9월 7일”. 
  18. “정조실록 - 정조6년 음력 12월 28일”. 
  19. “일성록 - 정조6년 음력 9월 7일”. 
  20. “일성록 - 정조6년 음력 9월 15일”. 
  21. “일성록 - 정조7년 2월 19일”. 
  22. <정조실록>
  23. <정조실록 - 호산청을 설치하다>
  24. <정조실록>
  25. <정조실록>
  26. "嬪方有娠幾臨月而嬪遂歿矣", "빈이 임신하여 해산달에 이르렀는데 죽었다.", 《어제의빈묘지명》
  27. <"리어카서 건지고, 표구점서 구출하고">
  2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곽장양문록>
  29. "筆翰亦自超凡", "붓글씨 또한 범상함을 넘어섰다",《어제의빈묘지명》
  30. “일성록 - 정조11년 음력 9월 13일”. 
  31. http://instiz.net/pt/3901524
  32. “장서각 자료”. 
  33. “장서각 자료”. 
  34.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35.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36. <한국학자료센터 - 의빈성씨유제문>
  37.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38. “한민족문화대백과”. 
  3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조은집>
  40. “한민족고전종합DB”. 
  41. “한민족문화대백과”. 
  42. “한국고전종합DB”. 
  43. “조 경(趙 璥)”. 
  44. “한국고전DB”. 
  45. “김재찬”. 
  46. {{웹 인용|제목=한국고전종합DB|url=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M&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M&seojiId=kc_mm_a582&gunchaId=av001&muncheId=01&finId=047&NodeId=&setid=2431967&Pos=1&TotalCount=3&searchUrl=ok>
  47. “두산백과”. 
  48. {{웹 인용|제목=한국고전종합DB|url=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M&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M&seojiId=kc_mm_a600&gunchaId=av001&muncheId=01&finId=018&NodeId=&setid=2432349&Pos=0&TotalCount=1&searchUrl=ok>
  49. “위키백과 - 김조순”. 
  50. {{웹 인용|제목=한국고전종합DB|url=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M&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M&seojiId=kc_mm_b472&gunchaId=av001&muncheId=01&finId=113&NodeId=&setid=2431967&Pos=2&TotalCount=3&searchUrl=ok>
  51. “한민족문화대백과 - 홍인모”. 
  52. “위키백과 - 홍낙성”. 
  53. “왕실장서각”. 
  54. “조선왕조실록 - 정조10년 9월 14일”. 
  55. 《육상궁선희궁의빈궁명일제삼궁고제(毓祥宮宣禧宮宜嬪宮名日祭三宮告祭)》. 
  56. “고종실록”. 
  57. <고종실록>
  58. <순종실록>
  59. <정조실록>
  60. “정조실록”. 
  61. <정조실록>
  62. <숙종실록>
  63. 드라마 ‘이산’ 정조의 가족들 서삼릉에 무덤 있어
  64. <정조실록>
  65. <정조실록>
  66. <정조실록>
  67. <정조실록>
  68. <정조실록>
  69. <서울지명사전>
  70. “정조실록 13년 4월 25일”. 
  71.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 
  72. <한국향토문화사전>
  73. <향토문화대전>
  74. “일성록 - 정조11년 음력 9월 15일”. 
  75. “한국역대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 
  76.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77. "七代祖萬種齊陵參奉", 《어제의빈묘지명》
  78. "高祖景軍資監正", 《어제의빈묘지명》
  79. "贈贊成胤祐", - 어제의빈묘지명
  80. "成昭容之父(...)今其父已沒", 황윤석 《이재난고》
  81. "母曰林贈貞敬夫人引儀宗胄女也", "어머니는 인의 임종의 맏딸 증정경부인 임씨이다", - 어제의빈묘지명
  82. "有二娚窮窶", "두 오라비가 있었는데 가난했다", - 어제의빈묘지명
  83. "其兄弟方爲別軍職", 황윤석 《이재난고》
  84. “일성록 - 정조6년 9월 15일”. 
  85. "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亦卽洪樂性妾父", 황윤석 《이재난고》
  86. "鄭枋(...)妾成生者與成嬪爲姑姪", "정방의 첩이 성씨인데 더불어 성빈(의빈 성씨)과 고모 조카 사이이다.", 황윤석 《이재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