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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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
의빈, 안현궁, 의빈궁
별명 상의 성씨 (尙儀 成氏, ?~1782.12)
소용 성씨 (昭容 成氏, 1782.9~1783.2)
의빈 성씨 (宜嬪 成氏, 1783.2~사후)
이저 (貳邸, 1784.8~?)[1]
안현궁 (安峴宮, 사후)[2]
의빈궁 (宜嬪宮, 사후)[3]
배우자 정조
자녀 문효세자, 옹주, 셋째(복중 사망)
본명 성덕임(成德任)[4]
왕조 조선 왕조
부친 증 찬성 성윤우
모친 증 정경부인 임씨
출생 1753년 음력 7월 8일
사망 1786년 음력 9월 14일 미시(오후1~3시) 창덕궁 중희당
매장지 의빈창녕성씨지묘[5]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8월 6일(음력 7월 8일) ~ 1786년 11월 4일(음력 9월 14일))의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다.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正祖)가 1766년(영조42년)에 승은을 내렸지만 사양 했다. 15년 뒤, 1781년(정조5년)에 다시 승은을 내렸지만 또 사양 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아랫 사람을 책벌하자 승은을 받아 들이고 후궁이 되었다. 정조가 1766년(영조42년)부터 후궁의 반열에 뒀기 때문에 정조의 첫 번째 후궁이자 유일한 승은후궁이며, 문효세자의 생모이다.

생애[편집]

1753년(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태어났고[6] 이름은 성덕임(成德任)이다. 아버지 성윤우(成胤祐)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의 청지기였으며[7] 어머니 임씨는 통례원 종6품 인의로 재직한 임종의 맏딸이다.

1762년(영조 38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혜경궁 홍씨의 처소 궁녀로 입궁했으며, 혜경궁이 거두어 곁에 두고 친히 길렀다고 한다.[8][9] 공교롭게도 이 해 2월 2일, 정조와 효의왕후가 가례를 올렸으며 윤 5월 21일, 사도세자가 훙서했다. 의빈(宜嬪)이 임오화변(壬午禍變) 이전에 입궁했는지 이후에 입궁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의빈이 입궁한 해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그 해,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장조)를 잃고 살얼음판 같은 정국에서 세 자녀(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를 키워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의빈을 친히 길렀다는 점은 혜경궁이 의빈을 얼마나 아꼈는지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가 직접 지은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1766년(영조 42년),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는 나인이었던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의빈이 울면서 효의왕후가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며 죽음을 맹세했다고 한다. 궁녀가 승은을 거부하는 일은 죽음으로서 죄값을 치러야 할 큰 죄였다. 하지만 정조는 의빈의 뜻을 받아들이고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10]

1778년, 정순왕후가 정조에게 후사를 위해 후궁을 간택하라는 명을 내렸다. 명령문 중에 "궐내 궁인들이 어찌 많지 않다고 하겠는가마는, 주상은 그 본래의 성심으로 볼 때에 미천한 처지의 사람에게서는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라는 내용이 있다.[11] 여기에는 정순왕후가 '정조는 궁녀를 취해서라도 자식을 낳으면 되는데 미천한 사람에게는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속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약 1766년에 정조는 이미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려고 했었다.

정순왕후가 내린 명령문 이후, 1778년(정조 2년) 숙창궁 원빈 홍씨가 간택 후궁으로 입궁 했으나 1779년 음력 5월 7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1780년 음력 3월 12일, 경수궁 화빈 윤씨가 간택 후궁으로 입궁 했다. 하지만 1781년(정조 5년) 음력 1월 17일, 산실청이 설치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해산 했다는 기록은 없다.

정조는 의빈에게 처음 승은을 내리려다 거절당한지 15년 만에 다시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의빈은 또 사양했다. 이에 정조는 의빈의 시종을 크게 꾸짖고 벌을 내렸다. 다만 이번에도 의빈에게는 죄를 직접 추궁하지 않았다. 그러한 연후에 의빈은 마침내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였다. 정조가 지은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에는 ‘지금까지 의빈을 후궁의 반열에 둔지 20년이다.’[12]는 내용이 있다. 내각일력 정조10년(1786년) 11월 7일에 정조가 지은 어제의빈묘지명, 어제의빈묘표, 어제의빈치제제문이 남아 있다. 1786년 기준으로 하면 정조는 1766년부터 의빈을 후궁의 반열에 뒀다. 그렇다면 정조는 1766년, 의빈에게 처음 승은을 내리려고 했다가 거절당했을 때부터 의빈을 후궁으로 여긴 것이다. 그리고 정조가 평생 유일하게 자의적으로 선택한 여인이 되었다.

1782년 음력 4월 30일, 일성록에 의빈이 간접적으로 처음 등장한다.

서유방이 아뢰기를, “그는 나라의 경사를 기다리고 있어서 내려가지 않으려 하는데 해조(該曹)가 발패(發牌)하여 재촉하려고 하므로 현재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13]

나라의 경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당시 정5품 상의(尙儀) 신분이었던 의빈이 임신한 상태였다.

1782년 음력 8월 26일, 의빈이 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서유경을 권초관(捲草官)으로 삼았다. 이때 상의(尙儀: 내명부 정5품) 성씨가 해산할 달이 이르렀기 때문이다.[14]

권초관은 본래 비빈이 해산할 때 권초례를 행하기 위한 임시 관직이다. 그런데 상의의 임신에 권초관을 임명한 것을 보면, 당시 정조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782년 음력 9월 7일 인시(새벽 3시~5시), 의빈은 창덕궁 연화당(讌華堂)에서[15] 문효세자를 낳았다.

"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16]

후사를 잇기 위해 후궁의 간택에 가례청(嘉禮廳)을 설치하고 궁호(宮號)까지 내려서 원빈 홍씨화빈 윤씨를 입궁 시켰지만, 정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정조의 승은(承恩)을 두 번 거절한 뒤에 받아들인 성덕임이라는 승은 궁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다. 당시 정조는 물론이고 왕실과 조정에서는 흥복이자 경사이며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해산 당일 호산청(후궁이 아기를 낳을 때 임시로 설치하는 관청)을 설치하였고[17], 음력 9월 13일에 호산청이 철수 되었다.[18] 혜경궁 홍씨는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을 때 자신의 친정에서 데려온 유모 '아지'와 몸종 '복례'를 보내 도왔다. 정조는 아지의 자손을 관청에서 일하게 했고, 복례에게는 시녀 직위를 내려 의빈의 해산을 도운 공을 치하했다.[19]

궁중 여인은 대개 거처하는 처소에서 아기를 낳았다. 경종은 희빈 장씨의 처소 취선당(就善堂)에서 태어났고, 영조는 숙빈 최씨의 처소 보경당(寶慶堂)에서 태어났고,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처소 경춘전(慶春殿)에서 태어났다. 이로 말미암았을 때 의빈의 처소는 문효세자를 낳은 연화당(讌華堂)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추정을 토대로 보면 당시 상의(정5품)였던 의빈이 전(殿) 다음으로 높은 당(堂)에서 거처했다는 것은 의빈이 왕실에서 어떤 위치였고, 정조에게 얼마나 사랑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화당(讌華堂)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일상 업무를 보던 선정전(宣政殿) 동쪽에 있었다. 왕의 침전이자 집무실로 쓰인 희정당(熙政堂)도 선정전 동쪽에 있었다. 따라서 의빈의 처소는 정조가 나랏일을 하는 전각 주변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중희당도 연화당 근처에 있었다.

일성록에는 의빈이 문효세자를 낳은 당일 정3품 소용으로 봉작 했다는 기록이 있다.[20] 반면 실록에는 그해 음력 12월 28일에 소용으로 봉작 했다는 기록이 있다.[21] 하지만 일성록에 따르면 1782년 음력 9월 7일, “소용방(의빈)에 공상하는 등의 일을 규례대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22], 같은 해 음력 9월 15일 상정각(誠正閣)에서 열린 차대(次對: 임금이 의정부와 삼사의 당상관들과 하는 정책회의)에서 정조가 ‘소용(昭容)’이라고 칭한 기록이 있다.[23]

1783년 음력 2월 19일에 정1품 빈으로 승격되어 의빈(宜嬪)의 빈호를 받았다. 이 때 '의(宜)'는 정조가 직접 정했다.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 수(綏) 자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소용궁에게 올릴 빈호를 의(宜) 자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빈(嬪)으로 봉작(封爵)하는 관교(官敎)는 작년에 이미 옥새를 찍어 하비하였으니, 자호(字號)를 정사를 열어서 거행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지방에 있는 낭관을 재촉해서 올라오게 한 후에 전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24]

원자로 책봉된 왕자군은 1784년(정조8년) 음력 7월 2일, 3세의 어린 나이에 정식으로 왕세자로 책봉 되었다. 이는 정조의 차남 순조가 1800년(정조 24년) 1월 1일, 11세가 되어서야 세자로 책봉받은 것과 비교하면 무척 이른 일이었다.[25]

1784년(정조 8년) 5월 9일(윤 3월 20일)에는 옹주를 낳았다. 이 때, 맏아들 문효세자 때처럼 해산 당일에 호산청이 설치되었고,[26] 6일 뒤에 철수되었다. 하지만 옹주는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된 음력 5월 12일에 졸하였다.[27] 옹주가 죽은 다음날인 5월 13일, 정조가 딸의 사당에 머무르느라 일을 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28]

1786년(정조 10년) 음력 5월 11일에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훙서하였고, 같은 해 음력 9월 14일에는 의빈 성씨도 셋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해산달에 이르러 졸하였다.[29]

사후[편집]

의빈 성씨 졸기[편집]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30]

정조는 의빈 성씨가 사망하자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이때 국사(國事)는 정조 본인과 나랏일을 뜻했다. 이는 정조가 여자에 대한 감정을 유일하게 실록에 드러냈다. 정조는 평생 궁녀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던 왕이었다. 그리고 의빈 성씨의 상제는 영빈 이씨 장례에 따라 1등 후궁의 예로 치러 주었다.

의빈창녕성씨지묘(宜嬪昌寧成氏之墓)[편집]

정조의빈 성씨 사후 아들 문효세자의 묘 왼쪽 산등성이 임좌의 언덕으로 묘지를 정했다. 효창묘(1870년 효창원 승격) 경내에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묘가 함께 있으며 거리는 100걸음 쯤 떨어져 있었다. 원래 효창묘 영역은 지금의 효창동, 청파동, 공덕동 일대였다. 묘역이 굉장히 넓고 송림이 울창하다. 정조는 이 영역을 직접 정했는데 의빈과 문효세자가 죽어서나마 못 다한 정을 나누고 함께 있기를 바라서였다.

·일성록 - 1787년 9월 14일

중희당(重煕堂)에서 승지 홍인호(洪仁浩)를 소견하였다.

홍인호가 아뢰기를,

“신이 효창묘(孝昌墓)에 나아가 반열에 참석하였습니다.”

(중략……)

“잘하였다. 들으니, 효창묘의 소속이 ‘의빈묘(宜嬪墓)와 경계를 나누어 정하여 애초에 서로 관섭(管攝)하지 않았는데 또 침범하여 소란을 피우는 문제가 많다.’고 하였다는데, 달리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안다면 그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이후로는 경계를 나누지 말고 효창묘의 소속으로 하여금 의빈묘를 겸관(兼管)하게 하라. 수호(守護)하는 일 등에 대해 만약 이전처럼 다투고 소란을 피우는 폐단이 있다면 드러나는 대로 엄중히 다스리겠다는 뜻으로 예판은 묘소에 나아가서 각별히 신칙하고 하체(下帖)를 각각 그 직소(直所)에 써서 주라. 호판도 나아가서 묘소 아래에 사들여야 할 전토(田土)를 간심하는 것이 좋겠다. 예판과 호판은 오늘 나가서 석상식(夕上食)을 지낸 뒤에 들어오라고 호조와 예조의 하리(下吏)를 불러와서 분부하고, 연교(筵敎) 1통도 적어 보내도록 하라. 하번 한림(下番翰林)도 나가서 봉심하라.”

하였다.

정조가 의빈과 문효세자를 나란히 묻어주고 효창묘(孝昌墓)와 의빈묘(宜嬪墓)의 경계를 나누지 말고 한 영역으로 보라는 명을 내린 일은 이례적이었다. 본래 후궁 보다 후궁 소생의 신분이 더 높다는 점과 숙종이 숙빈 최씨의 묘 자리를 명선공주명혜공주의 묘 자리 근처로 정할 수 없으니 다시 정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록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일이었다.[31]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생모여도 엄연히 후궁이고 문효세자는 의빈 성씨의 아들이기 전에 왕세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의 뜻이 무색하게 일제강점기 때 의빈 성씨의 무덤은 서삼릉 내 후궁 묘역으로, 문효세자는 의빈 성씨의 무덤에서 2km 떨어진 의령원(懿寧園) 앞으로 강제 이장 당했다.[32]

의빈묘(宜嬪廟)[편집]

조선의 후궁은 왕세자를 낳아도 왕세자는 왕비의 양자로 입적 되기 때문에 생모는 사친(私親)에 불과했다. 이는 장례 예법에 관해서도 차이가 드러난다. 후궁은 왕의 여자이기 전에 엄연히 '신하'였다. 그래서 후궁은 왕명이 있지 않는 이상 죽어서 자식의 곁에 묻힐 수 없었다. 하지만 의빈 성씨의 경우는 다르다.

의빈 성씨의 사당 의빈묘(宜嬪廟)는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안국방(安國坊)에 있었는데, 의빈묘의 서쪽 담 바깥쪽에 아들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文禧廟)가 있다.[33] 원래 문희묘는 경모궁(사도세자 사당) 부근에 건립하려고 했으나 정조는 의빈 성씨 사후 문희묘 건립 터를 이전시켰다. 1789년(정조 13년) 4월에 문희묘가 완성 됐다.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에는 문희묘와 의빈묘까지 그림을 넣어서 제시하여 두 사당의 전체적인 구성을 묘사했다. 즉 문희묘(文禧廟)와 의빈묘(宜嬪廟)는 두 개의 묘가 한 곳에 있으며, 두 묘 사이에는 어재실(御齋室: 왕이 능, 묘에 거동할 때 잠시 머무르던 집)이 있다.[34]

의빈묘(宜嬪廟)와 문희묘(文禧廟)가 함께 있는 것으로 봤을 때

1789년(정조 13년) 1월 16일 문희묘에 거둥하다.
1789년 9월 7일 문희묘에 전작례를 행하였다.
1790년(정조 14년) 5월 10일 문희묘에 나아가 거기에서 밤을 지냈다.

이러한 기록은 정조가 의빈 성씨의 사당에도 거둥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독살 의혹[편집]

"천만 뜻밖에 5월에 원자가 죽는 변고를 만나 성상이 다시 더욱 위태로워졌으나 그래도 조금은 기대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는데, 또 9월에 상의 변고를 당하였다. 궁빈(宮嬪)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처럼 놀라고 마음 아파할 것은 없지만, 나라에 관계됨이 매우 중하기 때문이다. 두 차례 상의 변고에 온갖 병증세가 나타났으므로 처음부터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필경에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히고 담이 떨려 일시라도 세상에 살 마음이 없었다."

[35]

1786년(정조 10년) 12월 1일, 정순왕후가 언문으로 하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정순왕후의 하교에 ‘궁빈(宮嬪)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처럼 놀라고 마음 아파할 것은 없지만’이라는 내용은 정순왕후와 의빈이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의빈이 사망했을 때 조정 안팎에서는 상당히 통탄해 했다. 더군다나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라는 말도 실록에 남아 있다. 의빈과 혜경궁이 친밀하고 정순왕후와 혜경궁이 정적 관계였음을 말미암았을 때, 정순왕후와 의빈의 관계 역시 좋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정조는 의빈 성씨 사망 당시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는 말을 남겼다. 또, 같은 날 기록된 실록에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라는 부분이 있다.[36] 의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정조는 의빈 성씨의 죽음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의빈 성씨가 당시 내관 이윤묵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이에 놀란 정조는 의빈의 치상소에서 바로 이윤묵의 목을 베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죽이지는 않고, 귀양 보냈다. 그러나 정조는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 자신이 항상 직접 검열하였으므로 독살일 리가 없다고 판단, 얼마 뒤 이윤묵을 풀어준다. 대신 이에 연루된 손용득을 친히 신문하여 손용득과 여종 악연을 귀양 보냈다.[37]

1787년(정조 11년) 2월 21일, 전라도 유생인 유학(幼學) 황득중(黃得中) 등 921인이 상소를 올렸다.

"지난 임인년(1782, 정조6) 가을 문효세자(文孝世子)가 탄생한 이후로 영원히 이어질 나라의 무궁한 아름다움을 맡길 곳이 있음을 기뻐하였는데, 홍역을 순하게 치러 경사를 반포한 끝에 갑자기 훙서(薨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피 울었으나, 밤낮으로 간절히 빌었던 것은 오히려 후사(後嗣)의 탄생에 있었습니다. 9월에 의빈(宜嬪)이 졸한 상변(喪變)은 또 어찌 그리 가혹하단 말입니까. 중외(中外)가 놀라 통곡하고 모두의 말이 시끄럽게 들끓으면서 약을 잘못 쓴 역적 의관(醫官)과 젖을 끊은 요적(妖賊) 유모(乳母)에게 죄를 돌리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궐의 일은 비밀스럽고 초야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자세한 내막을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삼가 자전의 전교 가운데 ‘전후의 상변은 증상이 괴이했다.[前後喪變 症形怪底]’는 여덟 자를 본 뒤에야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두들 눈물을 훔치고 이를 갈며 큰소리로 외치며 일어나 말하기를, ‘애통하다. 우리 세자의 상변은 진실로 하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의 짓이다. 앞으로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을 거의 시원하게 씻을 수 있겠구나.’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록 시간만 끌어 끝내 한번도 조사해 밝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극악한 역적들이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가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아, 의관으로 하여금 약을 잘못 쓰게 하고 유모로 하여금 젖을 끊게 한 자는 자연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용렬한 의원에게 맡기는 것도 오히려 불효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역적 의관에게 맡긴 자야 말할 것이 있겠으며, 약을 맛보지 않은 것도 오히려 임금을 시해했다고 하는데 더구나 독약을 투여한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여기에 있고 조사할 만한 자취도 여기에 있습니다. 심지어 ‘후일을 고려했다.’는 공초와 ‘나라의 경사를 칭송하지 않았다.’는 말은 모두 국문할 만하고 조사할 만한 증안(證案)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전하께서는 매번 ‘확실한 것이 없다.[無的]’는 두 글자로, 조사하여 밝히기 어렵다고 핑계를 대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삼사(三司)의 청을 윤허하시어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풀어 주소서."

의빈 성씨 가문 재추천[편집]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 것이야말로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연석에 나온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장수는 이러한 내용으로 거행하라.”하니 이경하(李景夏)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하신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최가(崔哥) 성을 가진 사람은 이미 장임(將任)이었고 이가(李哥) 성을 가진 이도 또한 평안 병사(平安 兵使)로 일한 일이 있습니다. 그 후손들이 선천(宣薦)이 되지 못하였으니 사실 매우 억울한 일입니다.”하였다. 고조가 하교하기를 “군공(軍功)이 있는 사람은 상민(常民)이든 천민(賤民)이든 오히려 불차탁용(不次擢用)하는데 하물며 두 궁(宮)의 사친(私親)의 본가 사람이야 더 말할 게 있는가? 의빈 성씨(宜嬪 成氏)의 가문도 또한 삭천되었으니 일체로 거행하도록 하라.”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일체로 다시 추천하겠습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다시 추천해야 할 사람을 합하면 몇 사람이나 되는가?”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합하면 200여 인인데 하루 아침에 갑자기 모두 다시 추천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세 성(姓)에 대해서는 전부 다시 추천하고 그 나머지는 적합한 사람에게 시행하도록 하라.”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하신 대로 하겠습니다.”하였다.[38]

고종 때에 숙빈 최씨, 영빈 이씨, 의빈 성씨의 가문이 삭천되었는데 고종은 세 가문에 대해서는 전부 다시 추천하라고 하교했다.

칠궁(七宮)[편집]

1898년에 간행된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은 궁내부(조선 말기 왕실에 관한 여러 업무를 총괄하던 관청)에서 때마다 제향(祭享: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을 올리는 곳에서 소용되는 제반 기물, 제수 등의 내역과 수량을 적어놓은 책이다. 8권 [39]에서 저경궁 인빈 김씨, 대빈궁 옥산부대빈 장씨, 육상궁 숙빈 최씨, 연호궁 정빈 이씨, 경우궁 유빈 박씨, 선희궁 영빈 이씨, 의빈궁 의빈 성씨를 ‘칠궁(七宮)’으로 표기 했다. 당시 칠궁(七宮)은 왕과 왕세자를 낳은 생모의 사당이었다. 의빈궁은 문효세자의 생모로서 신주가 칠궁에 봉안되어 있었다.

宜嬪宮四節日四仲朔(의빈궁사절일사중삭)[40]

「대한예전(大韓禮典)」은 대한제국이 독립제국에 맞는 예법을 적은 책이다. 3권 단묘도설(壇廟圖說)에[41]‘의빈궁’이 나오는데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과 마찬가지로 칠궁에 속해 있는 후궁이었다.

宜嬪宮奉 宜嬪 成氏(의빈궁봉 의빈 성씨)[42]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서 의빈 성씨에게 궁호(宮號)를 내렸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향수조사책과 대한예전에서 의빈을 분명하게 ‘의빈궁 의빈 성씨(宜嬪宮 宜嬪 成氏)’라고 명칭하고 칠궁에 봉안 했다.

신위를 이안하는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 의빈궁(宜嬪宮), 경수궁(慶壽宮), 영소묘(永昭廟), 문희묘(文禧廟)에 봉안한 신위는 매안(埋安)하고 해당 궁과 사당은 의빈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 다만 의빈궁과 경수궁의 묘소에는 영소묘와 문희묘의 원소(園所) 예에 따라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고, 매안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43]

그러나 1908년(순종1년) 7월 23일, 개정된 제사 제도에 따라 의빈궁의 신위는 매안(埋安: 신주를 무덤 앞에 묻음) 되었다. 다만 의빈궁의 제사는 원소(園所: 왕세자, 왕세자빈, 왕의 사친 등의 산소)의 예법에 따르라고 했다. 의빈은 정1품 빈(嬪)의 신분으로 사망 했는데 원소(園所)의 예법으로 제사를 지내라는 명을 내린 것으로 보아 어느 쯤에 무품 빈(嬪)으로 추증 된 것으로 추측 된다. 의빈궁의 신위가 매안 되고 칠궁에서 빠지면서 육궁(六宮)이 되었고 후일 순헌황귀비 엄씨의 덕안궁(德安宮)이 봉안 되면서 오늘날의 칠궁(七宮)이 되었다.

의빈궁(宜嬪宮)[편집]

의빈 성씨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서 공식적으로 궁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데, 1787년(정조11년) 1월 10일 일성록에서 정조가 의빈의 호칭을 ‘의빈궁(宜嬪宮)’이라고 했다.[44] 이후 여러 곳에서 의빈궁(宜嬪宮)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사전사례편고(祀典事例便考)」는 1795년(정조19년)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행하는 각종 제사에 관한 규범이나 규정의 사례를 기록하여 예조에서 편찬한 책이다.[45]

육상궁 선희궁 의빈궁 명일제 삼궁 고제(毓祥宮 宣禧宮 宜嬪宮 名日祭 三宮 告祭)

이 책에서 의빈 성씨를 ‘의빈궁(宜嬪宮)’이라고 명칭 하고 육상궁, 선희궁과 함께 삼궁(三宮)이라고 일컬었다.

육상궁(毓祥宮)ㆍ선희궁(宣禧宮)ㆍ귀인방(貴人房)ㆍ화순옹주방(和順翁主房)ㆍ화평옹주방(和平翁主房)ㆍ화협옹주방(和協翁主房)ㆍ화유옹주방(和柔翁主房)ㆍ화령옹주방(和寧翁主房)ㆍ화길옹주방(和吉翁主房)ㆍ청연군주방(淸衍郡主房)ㆍ청선군주방(淸璿郡主房)ㆍ의빈궁(宜嬪宮)ㆍ은신군방(恩信君房)에 바치는 동등의 공납 가운데 상대구어ㆍ생상문어ㆍ대구어란ㆍ대구어고지의 4종을 모두 견감한다.[46]

1798년(정조22년) 음력 4월 21일 일성록에서도 의빈 성씨를 ‘의빈궁(宜嬪宮)’으로 표기 했다. 이 외에도 만기요람(萬機要覽)[47],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48], 영선사절목(營繕司節目)[49], 대한예전(大韓禮典) 등에서 의빈궁(宜嬪宮)이 표기 되어 있다.

안현궁(安峴宮)[편집]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다 의빈의 빈소를 차렸다. 상구(喪柩)를 소난상(小欄床)에다 봉안하고 흰 비단 보자기로 덮고 난 다음 유장(帷帳)을 설치하였다. 단양문(端陽門)을 거처 단봉문(丹鳳門)을 나와서 견여(肩輿)로 옮겨 나아갔다.[50]

1786년(정조10년) 음력 9월 16일 실록에 ‘안현본궁(安峴本宮)’이 처음 등장했다.

안현궁 성씨 정종 후궁 문효세자 대비(安峴宮 成氏 正宗 後宮 文孝世子 大妣)[51]

「의판(儀版)」의 궁묘원(宮墓園)에 안현궁 성씨(安峴宮 成氏)가 정조의 후궁이며 문효세자를 낳은 어머니라고 표기 되어 있다. 즉 안현궁은 의빈 성씨의 사당을 의미한다.

궁호(宮號)[편집]

의빈 성씨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서 궁호를 받았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정조가 직접 ‘의빈궁(宜嬪宮)’이라고 명칭 한 이후 여러 곳에서 의빈을 ‘의빈궁’이라고 표기한 점은 의문스럽다.

의빈이 궁호를 받은 기록 및 교서가 없는 점으로 보아 궁호를 받지 않은 후궁으로 간주했을 때 의빈을 가리키는 명사로 의빈(宜嬪), 의빈방(宜嬪房), 의빈묘(宜嬪廟), 의빈묘(宜嬪墓)여야 한다. 잘못된 표기 외에 여러 이유로 의빈궁(宜嬪宮)으로 지칭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빈의 정식 궁호 기록 및 교서가 없어서 궁호가 없는 정1품 빈(嬪)으로 간주하기에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무리가 있다.

첫째, 사전사례편고(祀典事例便考)에서 육상궁, 선희궁, 의빈궁을 ‘삼궁(三宮)’으로 지칭 했다. 의빈은 생전에 의빈궁으로 불린 적이 없고 정1품 빈(嬪)의 신분으로 사망 했다. 의빈이 문효세자의 생모이나 궁호를 받지 않은 빈(嬪)이라면 삼궁(三宮) 안에 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전사례편고(祀典事例便考)는 국가의 공식 제사 예법을 적은 책인데 의빈(宜嬪)으로 표기해야 될 것을 의빈궁(宜嬪宮)이라고 하고 더군다나 삼궁(三宮)이라고 쓰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째, 의판(儀版)의 궁묘원(宮墓園)에서 정조의 후궁이자 문효세자의 생모를 ‘안현궁 성씨(安峴宮 成氏)’라고 표기 했다. 궁묘원(宮墓園)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자와 왕세손, 왕이나 왕세자를 낳은 후궁,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와 화빈 윤씨의 사당이나 무덤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이다. 의빈을 안현궁(安峴宮)이라고 분명하게 적었다. 의빈에게 궁호가 없었다면 안현궁(安峴宮)이라는 사당이 있을 수 없다. 의판(儀版) 외에 안현궁에 관한 기록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혼전 일기인 효안전일기(孝安殿日記), 지구관청일기(知殼官廳日記), 일성록 순조 32년 1월 28일 기록 등에 나타나 있다.

셋째,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에서 저경궁, 육상궁, 대빈궁, 연호궁, 경우궁, 선희궁, 의빈궁을 칠궁(七宮)이라고 분명하게 표시 했다. 대한예전(大韓禮典)에서 역시 의빈이 저경궁, 육상궁, 대빈궁, 연호궁, 경우궁, 선희궁과 나란히 제사를 받았고 ‘의빈궁봉 의빈 성씨(宜嬪宮奉 宜嬪 成氏)’라고 표기 했다.

넷째, 1908년(순종1년) 7월 23일에 제사 제도가 개정 되면서 의빈궁의 신주는 매안 되고 칠궁에서 제외 되었으나, 제사는 원소(園所: 왕세자, 왕세자빈, 왕의 사친 등의 무덤)의 예법을 따랐다.

이러한 이유로 의빈은 사망 이후 궁호는 의빈궁(宜嬪宮), 사당은 안현궁(安峴宮) 및 의빈궁(宜嬪宮)을 받았다고 간주할 수 있다.

정조의 어제문(御製文)[편집]

일성록 정조11년(1787년) 음력 9월 13일[편집]

"중희당(重煕堂)에서 승지 홍인호(洪仁浩)와 예문관 제학 서유린(徐有隣)을 소견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의빈궁(宜嬪宮)의 치제(致祭)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가 이미 수향(受香)하고 나갔는가?”

하니, 홍인호가 아뢰기를,

“이미 전향(傳香)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상제(祥祭)의 제문은 일찍이 친히 지어 놓은 것이 있으니, 승지는 해궁(該宮)에 나아가서 충의(忠義)로 하여금 축식(祝式)대로 쓰게 하고, 효창묘(孝昌墓)의 향축(香祝) 및 의빈묘의 향축은 서제소(書題所)에 임시로 봉안하였다가 내일 새벽 묘소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을 할 때 섭제(攝祭)를 겸행(兼行)하도록 하라. 섭제 제관은 모두 곧장 나아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52]

정조는 의빈(宜嬪) 사후, 직접 여러 어제문(御製文)을 적었다. 그 중에서 일성록에 정조가 제문을 일찍이 친히 지어 놓은 것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어제비문(御製碑文)[편집]

어제비문이란, 왕이 직접 쓴 비문을 말한다.

"아! 너의 근본이 굳세어서 갖추고 이루어 빈궁(嬪宮)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죽어서 삶을 마치느냐? 지금 이 상황이 참 슬프고, 애통하고, 불쌍하구나. 평상시 화목하게 지냈건만 네가 나를 떠나 죽고 말았으니 너무 애달프고 슬프다. 네가 다시 살아나서 이승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이 한 가지 그리움이 닿아서 네가 굳세게 이룬다면 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서 궁으로 올 것이다. 나아가 느끼면 매우 마음이 아프다. 너는 문효세자의 어머니다. 네가 임신을 해서 낳은 아이가 문효세자이며 내 후계자다. 세자는 이미 두 살 때 글을 깨우쳤다. 너의 근본이 단단해서 임신을 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다. 문효세자가 죽은 후 셋째가 되어 다시 우리 곁에 찾아올 줄 알았건만 하늘과 땅은 오히려 사이를 더 떨어뜨려 놓았다. 이로써 마음 한 가운데가 참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어렵게 얻은 아들 문효세자를 하늘에 견주어 돌아오길 바랐으나 너는 멀리 떠났다. 나는 무릇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너를 데려 올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을 보내 물리칠 방법도 없다. 이로써 느끼니 참 슬프고 애달프다. 앞전에 겪은 일과 비교해도 비교할게 없을 만큼 슬프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도다. 너는 진짜 이승을 떠나는구나. 사랑하는 너는 어질고, 아는 바가 많고, 총명하고, 슬기롭고,밝고, 이치를 훤히 알고, 옳고, 예절을 아는 사람이다. 또 권세를 능히 삼가하고 도리를 지킬 줄 알고 나눌 줄 알았다. 너는 문효세자를 잃었을 때는 예를 다하며 울었고, 쉬지도 못했고, 눈물도 그치지 못했다. 나는 너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네가 잘 못 될까봐 걱정 돼서 돌려 보냈다. 그런데 너의 목숨은 어찌 이리 가느랗단 말이냐? 이제 나는 무릇 중요한 일을 접고 너의 장례를 치러서 살필 것이다. 문효세자의 옆에서 편히 쉬어라. 아들의 무덤에서 멀지 않게끔 아들과 어머니가 좌우에 있도록 할 것이다."

[53]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편집]

정조는 의빈 성씨 사망 후 친히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을 내렸다.[54]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어머니다. 문효세자가 1786년 음력 5월에 세상을 떠나고 여섯 달 뒤 갑신(1786년 음력 9월 14일)에 빈도 세상을 떠났다. 석 달 뒤 경인(1786년 음력 11월 20일)에 고양군 율목동에 있는 문효세자의 묘 왼쪽 산등성이 묏자리에 장례를 치렀다. 빈은 문효세자를 잃자 항상 스스로 죽기를 바랐는데 비로소 문효세자의 곁으로 가버렸다. 이제 빈은 한을 풀고 문효세자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아, 슬프도다! 빈의 일생은 맑고 총명했다. 생후 만 1년이 되자 능히 문자를 구분했으며 예절을 수양하고 바른 품행을 가졌다. 빈은 열 살이 넘어서 궁중에 입궁 했다. 대내(大內: 임금, 왕비, 대비가 거처하는 곳을 두루 이름)에 출입하는 임금의 친척 집안 여인들은 빈이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틀림없이 상서로운 기운을 가졌다고 했다. 그리고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가문 사람 같다고 했다. 빈의 타고난 기품은 아주 훌륭하여 뛰어나게 달랐다. 말과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는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췄으며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또한 빈은 대처(인구가 많고 번화한 지역)에서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옳은 길을 명백히 구별하고 변하지 않고 굳게 지켰다.

내가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빈은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다며 사양했다. 또한 이에 감히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나는 빈의 마음을 느끼고 다시는 재촉하지 못했다. 그 후 15년 동안 널리 후궁(원빈 홍씨, 화빈 윤씨)을 간택했다. 그리고는 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으나 거듭 사양했다. 이에 빈이 사사로이 부리는 하인에게 죄를 꾸짖고 벌을 내리자 빈은 비로소 내 마음을 받아들였다.

빈은 진심으로 내 명을 따라 당석(잠자리) 했고 곧 회임을 하더니 임인년 9월(1782년 음력 9월)에 세자가 태어났다. 이에 소용(정3품)으로 봉작 되었고 귀한 아들로 인하여 빠르게 의빈(정1품)이 되었다. 빈은 자기 의견만 옳게 여기는 것을 더욱 스스로 억눌렀다. 또한 빈은 효의왕후에게 온 정성을 다해 예를 갖췄으며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모셨다. 시침(임금을 모시고 잠)을 할 때는 빈이 "이제부터 국세(나라의 세력, 형편)가 의탁할 데가 있으나 효의왕후가 웃전이고 그 다음이 후궁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또 다시 감히 당석(잠자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항상 간절하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라고 하면서 사양하고 거절하며 피했다.

효의왕후는 이미 빈이 낳은 자식마다 받아들였다. 세자를 양육할 때는 반드시 그 생모에게 맡겼는데 곧 예로부터 조정에서 전해오는 법도였다. 하지만 빈은 생각하던데 감히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효의왕후의 결정을 따름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경과 사랑을 받았다. 이에 효의왕후는 세자가 성장하기를 기다렸고 빈은 세자를 어루만지는데 있어서 생각하고 삼갔다. 그리고 5년 동안 한결같게 밤에는 반드시 등불을 밝혔고, 잠을 자고 아침이 올 때까지 옷을 벗지 않았다. 또한 매일 비천한 일을 몸소 행하였는데 어찌하여 세자를 너무 지나치도록 존중히 여기고 공경 하냐고 물으면 빈은 "세자는 효의왕후의 아들입니다. 어찌 감히 내가 세자를 낳았다고 품위를 높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처소는 겨우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정도였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검소하게 했다. 또한 빈이 이르기를 "지금 지체가 높고 귀함은 이미 넘치도록 사치스럽다. 생각하건대 자기 스스로 자랑하는 바가 넘친다면 어찌 방자함만 있겠는가. 내가 검소한 생활을 해서 세자가 복을 오래 누리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죄악이 따를 것이다."라고 했다.

1786년 음력 5월에 문효세자를 잃었을 때, 말과 얼굴빛이 조금도 근심 걱정이 없는 듯해서 능히 놀라게 했다. 이에 빈은 "내 몸을 일찍이 스스로 내 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지금 나라가 늠름한 위풍이 사라져서 분명히 머리카락에 매달린 것과 같다. 비록 세자의 훙서(薨逝)는 슬프지만, 다행히 내가 회임을 했다. 그런데 만약 방자하게 멋대로 행동한다면 나라에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했다. 헌데 어찌하여 병에 걸렸단 말인가? 빈은 해산할 달에 이르러 기력이 가라앉았는데 그 증세는 의술과 약으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나는 날마다 빈의 처소로 가서 빈이 반드시 깨끗하게 씻는 것을 봤다. 빈은 비록 몸은 움직이기 어렵고 정신은 혼미했지만, 나와 마주할 때는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고 용모를 단정하게 했다. 그리고 내가 말을 하면 빈은 기운을 내서 메아리 같이 대답 했다.

빈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내가 빈에게 가서 소식을 알리자 갑자기 슬퍼하고 한탄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에 나는 빈을 꾸짖으며 "평소에는 나를 볼 때 근심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헌데 오늘은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라고 했다. 그러자 빈은 "효의왕후가 아들을 낳는 것은 생전에 지극한 축복이고 경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천신(임금 앞에서 신하가 자기를 낮추어 이름)이 뜻하지 않은 복을 받아 거듭 회임을 했습니다. 그러나 종묘와 사직을 보면 마음속으로는 극복할 수 있는 일이었습다. 제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복을 받아서 결국 병에 걸리더니 위독해졌습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오래도록 지녀온 소원은 죽을 고비에 임했어도 아직 이루지 못했습니다. 근심하며 바라건대 효의왕후에게 자주 거둥하시어 세자를 얻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곧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장차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저승에서도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나는 빈의 죽음을 예감하고 얼굴빛이 누렇게 변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나는 옷을 입고 빈에게 갔는데 이미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효의왕후는 빈이 나와는 다르게 참으로 나라를 위했다며 정성스럽게 말했는데 그 말에는 참으로 꾸밈이 없었다. 생각건대 어찌 그리 말할 수 있었겠는가? 빈을 잃은 효의왕후는 이와 같이 간절했다. 일찍이 빈의 죽음을 슬퍼하고 두려워 했는데 마치 서로 허물없이 가까이 지내며 정성을 다하는 사이 같았다. 또한 빈을 위로하는 것이 동기(형제, 남매, 자매)를 잃은 것과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애석하게 여기며 탄식하고 애처로이 불렀다. 심지어 빈을 울부짖으며 부르면서 빈을 따라가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때때로 관직을 가진 사람이 견디지 못할 만큼 닦달하고 더욱 엄하게 대했다. 하지만 빈은 내가 일을 맡기면 진심으로 기뻐하며 명을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임금의 은혜를 받는 것을 더더욱 머뭇거리지 않고 멀리 했다. 또한 맡은 일에 대해서는 훌륭하게 해냈지만 겸손하게 행동했다.

나는 빈의 집안 묘지 터가 이롭지 못하여 이장할 것을 의논 했다. 그러자 빈은 “천한 집안 일로 번거로이 관청의 돈을 감히 사사로이 쓰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나는 “그 일은 다소 무겁고 옳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 매우 바라건대 스스로 의복을 팔아서 이장할 돈을 마련해서 터를 고치도록 해라.”고 했다.

나는 일찍이 세자의 외조부모에게 법도에 따라 추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786년 음력 5월에 문효세자를 잃은 후에야 비로소 외조부와 외조모를 각각 증 찬성과 증 정경부인으로 추증하는 교지를 내렸다. 빈은 두렵고 불편한 기색으로 청하기를 “어찌 천한 집안사람을 분황(관직이 추증 될 경우 임명장과 누런 종이에 쓴 복사본 임명장을 받음, 자손은 그 무덤 앞에서 이를 고하고 복사본을 태우는 일)하십니까? 그리하지 마소서.”라고 했다. 그리고 빈은 거듭하여 “추증은 곧 나랏법에 의한 바인데, 감히 전하께서 내려주는 물건과, 뜻밖의 장대한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나는 항상 공이 높은 사람에게 베푸는 혜택을 넉넉하게 주지 않았다.

되돌아 보건대 빈이 입는 의복과 먹는 음식과 재산은 궁중의 후궁만도 못했다. 빈은 비록 뜻을 굽히고 검소함을 좇아 행동했으나 항상 너그럽게 빌려주는 바람에 가난해서 더욱이 걱정스러웠다. 빈이 세상을 떠나고 궁중 사람은 빈의 상자에 남은 비단이 없어서 염습(시신을 목욕 시키고 옷을 입힘)할 때 모두 시장에서 가져 왔다. 빈은 생전에 은수저를 만들지 않아서 반함(염습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리는 일) 할 때 버드나무로 대신 했다. 내명부에서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빈이 지킨 일이 어떤 것인지 진실로 알겠다.”고 말했다.

빈에게는 두 오라버니가 있는데 가난했는데 스스로 살아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베풀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빈은 나에게 “조정의 관직은 본디 부당하게 함부로 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나는 “너는 어찌하여 남은 녹봉으로 두 오라버니의 배고픔과 추위를 구원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빈은 걱정하는 모습으로 “후궁이 된 뒤에 궁방(대군, 공주, 왕자, 후궁 등의 집)의 재물을 하나도 감히 멋대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가의 천한 사람에게 어찌 재물을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빈의 장례 때 그 친족은 대략 옷과 신발을 다른 사람에게서 빌렸다.

궁빈(후궁, 궁녀)의 친족은 아무리 이름이 있어도 관직에 오르지 못하면 궁궐 출입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옛날부터 빈의 친족이 빈을 본궁(本宮)에서 만날 수 있도록 허락 했는데 빈의 친족은 여러 해 동안 본궁에 올 수 없었다. 이는 빈이 “전하의 허락 없이는 감히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해서였다. 오라버니와 동생은 몹시 가난하여 어찌할 수가 없는데 그들이 빈과 친함으로서 도움을 바라면 빈은 떠나려고 애를 썼다. 이에 빈 구석 없이 매우 원만한 사람이 어찌하여 그들에게는 다르게 대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빈은 “전하께서 내린 명령을 한 가지라도 조심하고 정성껏 지키지 않고 어찌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는 내가 경험한 사실이다.

빈은 궁궐에서 지낸 지 20여 년인데 단 한 번도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다. 혹시 곤란한 말다툼을 일으키는 실마리가 생기면 접근하는 것을 꺼려했다. 이에 반드시 완전히 타당함에 이르게 했다. 나는 보통 때 업무상의 문제를 안으로 들이지 않았고 빈은 내명부의 일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익숙하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혹여 내가 궁중에 있는 뜰이나 마당에 가면 궁중의 계집종은 모두 두려워하며 숨었다. 그리고는 함부로 먼저 나서지 못하고 스스로 뉘우치고 경계했다. 빈은 고생하더라도 아랫사람을 엄히 다스렸다. 또한 이 민첩한 여인은 길쌈을 잘하고 음식을 잘 만들었으며 그 외에 다른 일도 잘했다. 또한 문자나 문장을 쓰는 것 역시 보통을 뛰어넘어서 자세하고 분명하게 알았고, 수학을 배우고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다. 그리고 해박한 지식은 닥치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서 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과 예술도 뛰어났다.

아아, 빈은 이미 완전히 갖추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데 장례를 치르고 말았다. 나는 명심하건데 빈의 그 얼굴과 재주를 잊을 수 없다.

나는 궁액(宮掖: 왕의 거처, 궁에 딸려 있는 하인)에 거둥하면 가까운 급사(給事, 문관 종8품)일수록 가혹할 만큼 엄히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나의 명이라면 적은 것도 능히 헤아렸다. 빈을 후궁의 반열에 둔지 20년이다. 빈에게 훈령으로써 단단히 일러서 잘못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게 하면 명심하고 곧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며 사소한 실수도 없었다. 빈은 저절로 법도를 잘 지켰고 항상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으며 남들 보다 뛰어났다. 또한 빈은 항상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고 공경하며 신분에 따른 임무를 틀림없이 해냈다. 이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도 틀림없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빈은 사사로이 웃전을 찾아가서 청탁하는 일을 아주 철저하게 끊고 경계 했는데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키는데 있어서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드는 것처럼 조심했다. 이는 마땅히 사람으로서 행하는 옳은 길을 조심해도 더욱 어려운 일이다. 밝고 아름다운 너는 옳고 그름의 처지를 잘 알았고 관계는 더 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일이 되어가는 형세를 감히 말하지 못해서 무어라 할 수 없고 여전히 수단을 부리더라도, 오랫동안 있는 힘을 다해서 정성을 다하면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물러나지 않았다. 일로 하여금 바로 잡아 다스려서 항상 사람의 도리를 따르면 더 할 나위 없이 아주 정당하며, 이치에 맞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일반 백성 여인도 이 내용과 뜻을 헤아리며 읽는다면 사대부처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쉽지 않은 일을 지혜롭게 구분하면 한 사람이 곧 한 가지 마음을 잘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지키는 절개가 지금 세대에 전해지면 훗날 아름다운 행동에서 드러난 품행으로 전해질 것이다.

빈의 상론(尙論: 고인의 언행, 인격을 평가함)은 이와 같다. 빈의 가문은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하지 못해서 스승에게 학문이나 기예 등을 배우지 못하고 후궁이 되었다. 하지만 배우지 않고도 알았다. 빈이 효의왕후를 위해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한 것은 하늘과 땅이 마땅히 알고 금석(金石: 쇠붙이 돌, 쇠붙이로 만든 기구와 돌로 만든 기구)도 가히 뚫을 수 있다. 빈은 높고 귀함과 임금의 은혜와 덕을 입은 영광을 거듭 즐거움으로 삼기에 부족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음에 잊히지 않는 정성과 매우 간절하게 청하며 반드시 효의왕후에게 정성을 다하겠다고 했다. 더구나 장차 상심하고 슬프게 울면서 평생 동안 효의왕후를 따르겠다고 지극히 바랐다. 비록 옛날에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충성이지만, 배에 칼을 꽂은 정성이라도 이에 적합하지 않다. 돌이켜보면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는데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에서 드러났다. 나는 이에 대해서 증명 되었다.

빈은 마땅히 화목하고 사랑과 인정이 많아서 어진 아들을 낳아서 귀한 몸이 되어 이름이 세상에 빛났다. 보위를 이을 왕세자는 공로가 있어서 나라의 형세가 넓고 큰 경사가 이어지고 번성할 텐데, 나라의 운이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크게 어그러졌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올해 여름 세자가 죽는 일을 당했다. 또한 얼마 뒤에는 빈이 하루아침에 뱃속의 아기와 함께 잘못 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장차 빈의 행적은 그 자취나 흔적이 영영 사라질 것이다. 아아! 이 세상을 떠난 빈이 여럿 가운데서 뛰어나게 우뚝했던 언행을 내가 글로 쓰지 않는다면 누가 전하겠는가. 이를 알지 못하면 자취나 흔적이 영영 사라져서 애석하다. 이 뿐만 아니라 빈에게 한이 될 것이며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마침내 찬차(撰次: 시가나 문장을 가려 뽑아서 차례를 정함) 전체 내용의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했다. 이에 내가 생각하지 못했는데 글이 길어졌다.

빈은 계유년(1753년)에 태어났고 득년(得年: 향년) 34세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문효세자이고 딸은 1년을 못 넘기고 죽었다. 빈은 본관은 창녕이며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시조이다. 성인보의 아들은 문하시중으로 지낸 성송국이다. 시중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며 자는 여완이다. 문정공의 큰 아들은 성석린이며 둘째 아들은 성석용이고 그 다음 아들은 성석인이다. 성석인은 예조판서와 대제학 직위를 맡았으며 시호는 정평인데 이 사람이 빈의 선조다. 그러나 이후 집안이 중간에 계보를 잃어버렸다. 그 후, 7대조 성만종은 제릉(태조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의 무덤) 참봉이고 고조 성경은 군자감 정이다. 빈의 아버지는 증 찬성 성윤우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임씨인데 통례원(조선시대 국가의 의례를 관장하였던 관서) 인의 임종의 맏딸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빈의 장례를 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랜다. 빈은 사랑과 인정이 많고 지극히 옳은 말을 하며, 몸은 정중하게 행동했다. 이에 하늘로부터 감응을 받아 지극히 좋은 복을 받아야만 하는데 그 은덕에 대한 보답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저 고요한 율곡의 무덤은 문효세자의 무덤이니 서로 영원히 지킬 것이다. 생각건대 대대손손 배회 하며 애석해할 것이다.

어제의빈묘표(御製宜嬪墓表)[편집]

의빈 성씨 사후, 정조는 직접 의빈 성씨의 사적 및 덕행을 기리는 글을 썼다.[55] 어제의빈묘표는 2013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조선이 사랑한 글씨' 특별전에서 전시되기도 했다.[56]

어제의빈묘표는 정조가 1786년(정조10년) 쓴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어제의빈묘표의 탁본이 예술의 전당에 전시되었을때 보도자료에[57] 비석 탁본 연도와(혹은 비석을 세운 연도일 수도 있다), 서(書)한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 어제의빈묘표와 어제의빈묘지명이 함께 1책[58]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어제의빈묘지명 또한 1786년(정조 10년)에 쓰였다.

내가 즉위한지 10년째 되는 병오 9월 갑신일(1786년 음력 9월 14일)에 의빈 성씨가 사망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문효세자가 죽었다. 빈이 임신하여 해산할 달에 이르렀는데 죽었다.

  빈은 사망하기 전날 밤에 옷섶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국가의 자손 번창 소망이 효의왕후가 아닌 천한 몸에서 나왔는데 병에 걸려 죽으니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이제부터 자주 효의왕후에게 거둥하시어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고 기르며 지내지 못 한 것을 항상 근심하고 탄식했다. 승은을 받기 시작할 때는 감히 효의왕후를 대신 하여 당석(잠자리) 할 수 없다며 간절히 사양했다. 내가 잠시 틈을 타서 무언가에 빗대어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해도 한 결 같이 온통 매우 간절했다. 더구나 빈은 숨이 끊어져갈 쯤에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완연히 전하니 감동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 표정을 고치고 약속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시침하는 것을 보면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은 항상 정위(정실)가 자신을 핍박하고 근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에 정실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였다. 빈은 병을 앓다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랑에 끌려 잊지 못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후에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빈의 권력과 부귀는 스스로 높여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빈은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한 결 같이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 현명함이 어찌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그리고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생활을 검소하게 하여 복을 오래 누리도록 함)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엄히 다스려서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은총을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지키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분명하게 해냈다. 또한 내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빈은 궁궐 처소에서 지낸지 20년이다.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으며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 빈을 잃은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 7월 8일(1753년 음력 7월 8일) 생이고 득년(향년) 34세다. 본관은 창녕이며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비조(시조)이다. 성인보의 아들은 시중으로 지낸 성송국이다. 시중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며 자는 여완으로 시사했다. 나는 빈의 집안 맏아들이 조상이 엄습하여 세상이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가 제릉참봉 성만종으로 하여금 비로소 집안이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또 다시 삼대 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성정경이 군자감으로 지냈는데 곧 빈의 7대조로 고조부와 같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다. 빈의 부모는 법도에 따라 추증 되었는데 이는 문효세자의 외조부모였다. 
저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와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묏자리)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묻고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찾아오는 사람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해 하도록 할 따름이다.

사랑하는 빈의 불행한 운명은 위에 적힌 사실과 같다.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內各祭祝文)[편집]

의빈 성씨 사후 1786년(정조 10년), 정조가 직접 쓴 글이다. 제축문이란, 제사를 지낼 때 신명에게 고하는 글월을 말한다.[59]

계빈전. 건륭 51년(1786년) 11월 신미삭 19일 기축, 국왕(정조)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세월이 계속 빨리 지나서 왕통을 법적으로 잇게 되었다. 이에 좋은 화살로 하여금 궁독(과거 아들을 낳았을 때 천지 사방을 향해 활을 쏘아 축하하는 뜻을 취함)을 완연히 드러냈다.

조전. 건륭 51년(1786년) 11월 신미삭 19일 기축,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상여를 수레에 실어 이끌고 멀리 기약함에 이르렀다. 어찌하여 길을 떠나는 것인가.

견전. 건륭 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정조)은 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나는 글로서 너를 보내며 장차 상여가 무덤에 무사히 이르기를 바란다. 내 마음은 너를 떠나보내는 것이 어렵고 힘들구나.

노제. 건륭 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정조)은 행부사직 서유경을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가까워진 만사(죽음을 애도)는 그동안의 화목함을 실어 배향(공로가 있는 신하의 사당을 세움)하니 가는 길을 명주로 어여쁘게 채우지만 걱정스럽구나. 임금을 만나고 가는 길이니 서두르지마라.

묘소성빈전. 건륭 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정조)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비단은 일렬로 늘어져 있고 관 줄을 열어 염을 하고 소악을 씌우니 휘장은 소용돌이치는 모양새다. 바람 소리가 슬픈 밤에 술잔을 올린다. 빨리 보고 싶어도 홀연히 떠나버렸다. 지난 날을 돌아보며 제사를 지낸다. 낮은 신분으로 베품을 받아서 아들이 태어난 것을 두려워했구나.

묘소계빈전. 건륭 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정조)은 우부승지 홍명호를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새벽닭이 울 때 너에게 망건을 꿰매달라고 재촉하면 물이 그득하게 흘러가는 모양처럼 봤다. 혁옥(가죽을 펴서 지붕을 삼은 집)에서 아침에 흘러간 물은 해질 무렵의 산에 한 번 떠나가 버렸다. 네가 한줄기의 광명으로 밝게 인도했으나 저승으로서 영원한 이별을 했다.

사후토전. 건륭 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정조)은 총융사 김사목을 보내어 삼가 고한다. 이제 땅의 신에게 속한 의빈 성씨는 여기에 없고 율목동 무덤에 있다. 빈의 행동은 얌전하고 정숙했고 어진 품덕을 갖춘 것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한 골육이 같은 맥락에서 신도 위하였다. 엄숙한 모양으로 꾸짖고 다스리지 않았으며 상서로이 숨겨서 봤다. 작은 힘으로 지켰으나 대가 끊어져 어려워졌다. 천사(千斯)를 삼감으로서 제사에 쓰는 술과 포와 육장을 땅 귀신에게 올리며 청하기를 고한다. 부디 흠향하라.

임광전. 건륭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서정수를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나는 너의 죽음에 대해 반신반의 한다. 근심하는 사람의 마음은 썩은 것과 같다.

제주전. 건륭51년(1786년)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로 하여금 유지한다. 몸이 집으로 돌아온다면 넋도 곧 여기 와서 이 집에서 아무 탈 없이 단장하고 편하게 지낼 텐데 어찌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언덕 구석으로 가서 혼이 되었단 말인가. 임금이 무릇 완연히 의지 했는데 어찌하여 아이는 태어나지 못하고 더욱이 또한 어머니도 멀어졌단 말인가.

초우전(장사를 지낸 후 첫 번째 지내는 제사).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빈이 창덕궁에 살지 않은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 반우(反虞)를 지내고 나서 빈의 신주가 무사히 사당으로 가기를 청한다. 여기에 제사에 쓰는 술과 음식을 올리고 협사(祫事)한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재우(장례를 치룬 다음날 아침에 지내는 제사).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1일 신묘.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돌이켜보니 빈이 창덕궁에 살지 않은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 재우(再虞)를 지내고 때를 맞춰 가서 빈의 자취가 있던 곳에서 모두 함께 울었다. 이에 제사에 쓰는 술과 음식을 올리고 우사(虞事)한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삼우(장사를 지낸 뒤에 사흘 째 되는 날에 지내는 제사).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임진. 국왕은 행부사직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돌이켜보니 빈이 창덕궁에 살지 않은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삼우(三虞) 때 빈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가서 모두 함께 울었다. 제사에 쓰는 술과 음식을 올리고 성사(成事)한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졸곡(삼우제를 지낸 뒤에 곡을 끝낸다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 건륭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갑오. 국왕은 금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돌이켜보니 빈이 창덕궁에 살지 않은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졸곡(卒哭)을 지내고 보니 빈은 여러가지 온갖 일을 겪고 뱃속의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나는 어찌한단 말인가. 제사에 쓰는 술과 음식을 올리고 성사(成事)한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초전(初奠). 건륭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시간이 흘러가서 초하루에 감추어지더니 빈이 돌아오지 않는 한 가지에 탄식하고 속죄한다. 제사에 쓰는 술과 음식을 올려 제를 지낸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망전(상중의 매달 음력 보름날 아침에 제사 때와 같이 음식을 차려서 지냄). 하늘이 준 기회는 그 달 동안 갑자기 옳지 못한 곳으로 가버렸다. 아무리 빈의 자취를 늘어 놓아도 마음은 극에 달하도록 상한 것과 같다. 제사에 쓰는 술과 음식을 올려 제를 지낸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생신차례(죽은 사람의 생일에 지내는 제사). 생각도 못한 일인데 어찌하여 오래 살지 못하고 더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리더니 생일에 제사상을 받는가. 잔치를 하고 즐겁게 놀았었는데 조용하고 잠잠해져버렸다. 공허한 마음으로 생각하니 빈은 난초와 혜초처럼 향기로운 풀로 곧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다. 느른하게(맥이 풀리거나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다) 되돌아보니 내가 무료 할 때 빈과 이야기 하면 서로 더욱 뜻이 맞고 정다웠었다.

…….

건륭 모년 모월 모일 국왕은 모 관직의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왕이 신하를 보내서 제사 지내게 함) 한다. 빈의 대상(大祥: 3년 상을 마치고 탈상하는 제사)은 선희궁(영빈 이씨)의 전례를 따라서 지냈다. 또한 담제(禫祭: 3년상을 치르고 두 달 뒤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고 오랫동안 생각 하는데 세월이 멀어지는 것은 가히 잊을 수 있다. 하지만 더욱더 느끼는 것은 빈이 아니면 내가 잘못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어질게 타이르는 일을 누가 하겠는가? 빈이 죽은 뒤의 명예는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면 더욱 더 높이 받들어져 귀해질 것이다. 이에 제사에 쓰는 술과 여러 음식을 올려서 제사를 지낸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後各祭祝文)[편집]

정조는 죽은 의빈 성씨를 위해 제축문을 썼다.[60]

삭제. 건륭 모년 모월 모일 국왕(정조)은 모 관직의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왕이 신하를 보내서 제사 지내게 함)한다. 쉬지 아니하고 가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새 초하루에 이르렀다. 이에 금의(今儀)를 행하는데 슬프고 애통한 마음을 어찌 견디겠는가. 제사에 쓰는 술과 여러 음식을 올려서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망제.건륭 모년 모월 모일 국왕은 모 관직의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 한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고 달라지는 번영과 쇠락은 이렇게 어찌하여 해와 달처럼 아득히 멀어졌는가. 내 마음은 너무나 아프고 애달프다. 제사에 쓰는 술과 여러 음식을 올려서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생진다례. 건륭 모년 7월 모갑 삭초 8일 모갑 국왕은 모 관직의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 한다. 문효세자의 어머니가 되는 의빈의 일생은 하지가 지났는데도 오로지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감흥이 북받쳐 누를 길이 없는데 어찌하여 아니 돌아오는가. 문효세자를 잃은 너의 예사롭지 않은 슬픔을 생각하건대 잠시 울컥 쏟아진 슬픔이 아니었다. 제사에 쓰는 술과 여러 음식을 올려서 제사를 지내니 흠향하라.

......

기일. 건륭 치세 모갑 9월 모갑삭 14일.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바뀌어서 하지가 지나자 빈의 기신(기일을 높여 이르는 말)이 되었다. 밝은 날 하늘을 따라 정중하게 제사를 지낸다. 빈이 문효세자를 낳던 날 밤에 하늘에서 비춘 붉은 빛은 바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사사로이 말하건대 죽어서 종묘에 봉안 되어도 빈을 영원히 잊을 수 있겠는가.

어제의빈치제제문(御製宜嬪致祭祭文)[편집]

정조는 죽은 의빈 성씨를 위해 치제제문을 썼다. 치제(致祭)란 윗사람이 제사 때 올리는 음식과 죽은 사람에 대해 슬픈 뜻을 표하는 글을 내려서 죽은 아랫사람을 제사하는 일이다. 제문(祭文)이란 제사 음식을 올리고 제사 때 읽는 글을 읽는 일이다.[61]

건륭 51년 병오(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7일 정축

국왕은 의빈 창녕 성씨의 영혼에 유제하니 다음과 같다.

아! 나는 빈의 죽음에 더더욱 이와 같이 슬프다. 죽음으로서 떠나보낸 재앙은 비통하고 참혹하며, 인정과 도리는 끊어질 듯이 아픈 마음이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것보다 심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로지 위로하고 애써 떨쳐 내면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더위와 추위가 바뀌어갔다. 평상시처럼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근심하지 않는 얼굴로 서로 잊고 지내는 듯했는데 빈의 죽음 때문에 이와 같이 슬프다.

아! 빈은 문효세자의 어머니이고 빈이 뱃속에 품은 아이는 문효세자와 같은 기운을 가졌다. 문효세자는 이 아이를 보지 못했지만, 어머니에게 반드시 친밀감을 가지고 소중히 대하며 애틋하게 여기고 그리워하기를 구했을 것이다. 또한 형제가 틀림없이 매우 비슷하고 꼭 닮기를 기대 했을 것이다.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참하며 비통한 마음을 위로할 길은 여기에 있고 도리를 떨쳐낼 방법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뱃속의 아이 또한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문효세자의 남은 흔적과 향기는 쓸어버리듯이 사라져버렸다. 장차 내가 어찌 구하고, 어디에 기대고,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통하며 비참한 마음을 어찌 위로하고, 어찌 달래겠는가? 이에 있어서 지금의 슬픔이 거의 예전의 일보다 심하다. 내가 슬퍼하는 마음이 어찌 오직 빈의 죽음에 대한 슬픔뿐이겠는가?

아아! 후궁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 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빈의 운명은 그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이제 장차 빈을 문효세자의 곁에 보내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무덤이 아주 가까워졌으나 넋은 막힘없이 잘 통하여 끝난 세상을 원통하게 울면서 사별한다. 이로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한을 위로한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아아! 슬프도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의빈성씨유제문(宜嬪成氏諭祭文)[편집]

정조는 1789년에 여러 차례 유제(諭祭)했다. 유제(諭祭)란 임금이 신하를 보내서 제사를 지내게 한다는 뜻이다.[62]

  • 의빈성씨일거월제역기운(宜嬪成氏日居月諸亦旣云): 1월 1일
  • 의빈성씨유제축문 (宜嬪成氏諭祭祝文): 1월 15일
  • 의빈성씨일거월제역··· (宜嬪成氏日居月諸亦···): 2월 1일
  • 의빈성씨시유중춘례유상…(宜嬪成氏時維仲春禮有常…): 2월 24일
  • 의빈성씨일거월제역··· (宜嬪成氏日居月諸亦···): 3월 1일
  • 의빈성씨난엄자진율…(宜嬪成氏難淹者辰聿…): 3월 3일
  • 의빈성씨난엄자진율…(宜嬪成氏難淹者辰聿…): 3월 10일
  • 의빈성씨영허여피도토···(宜嬪成氏盈虛如彼島兎···): 3월 15일
  • 의빈성씨일거월제역··· (宜嬪成氏日居月諸亦···): 4월 1일
  • 의빈성씨영허여피도토···(宜嬪成氏盈虛如彼島兎···): 4월 15일
  • 의빈성씨당실개관재환…(宜嬪成氏堂室改觀載煥…): 4월 24일
  • 의빈성씨진유투벽일의수··· (宜嬪成氏塵牖渝壁一宜修···): 4월 24일
  • 의빈성씨난엄자진율회령(宜嬪成氏難淹者辰聿回令): 5월 5일
  • 의빈성씨일거월제역··· (宜嬪成氏日居月諸亦···): 5월 1일
  • 의빈성씨일거월제역기운(宜嬪成氏日居月諸亦旣云): 5월 1일
  • 의빈성씨영허여피도토상(宜嬪成氏盈虛如彼島兎相): 5월 15일
  • 의빈성씨시유중하례유(宜嬪成氏時維仲夏禮有): 5월 24일
  • 의빈성씨시유중하례유(宜嬪成氏時維仲夏禮有): 5월 28일
  • 의빈성씨일거월제역··· (宜嬪成氏日居月諸亦···): 6월 1일
  • 의빈성씨일거월제역기운 (宜嬪成氏日居月諸亦旣云): 7월 1일
  • 의빈성씨매세차일지필여기…(宜嬪成氏每歲此日至必如期…): 7월 8일
  • 의빈성씨영허여피도토상(宜嬪成氏盈虛如彼島兎相): 7월 15일
  • 의빈성씨일거월제역기운(宜嬪成氏日居月諸亦旣云): 8월 1일
  • 의빈성씨난엄자진율회(宜嬪成氏難淹者辰聿回): 8월 15일
  • 의빈성씨일거월제역기운 (宜嬪成氏日居月諸亦旣云): 9월 1일
  • 의빈성씨난엄자진율회(宜嬪成氏難淹者辰聿回): 9월 9일
  • 의빈성씨세서천역기진복…(宜嬪成氏歲序遷易忌辰復…): 9월 14일
  • 의빈성씨영허여피도토상 (宜嬪成氏盈虛如彼島兎相): 9월 15일
  • 의빈성씨영허여피도토상 (宜嬪成氏盈虛如彼島兎相): 10월 15일
  • 의빈성씨일거월제역기운 (宜嬪成氏日居月諸亦旣云): 11월 1일
  • 의빈성씨시유중동례유(宜嬪成氏時維仲冬禮有): 11월 5일
  • 의빈성씨영허여피도토상(宜嬪成氏盈虛如彼島兎相): 11월 15일
  • 의빈성씨시유가평례유(宜嬪成氏時維嘉平禮有): 12월 8일
  • 의빈성씨영허여피도토상(宜嬪成氏盈虛如彼島兎相): 12월 15일

거둥고개[편집]

1787년 1월 9일: 의빈묘(宜嬪墓)에 이르러 전작례를 행하였다.[63]

1787년 5월 1일: 의빈묘(宜嬪墓)를 두루 살폈다.[64]

1788년 4월 29일: 의빈(宜嬪)의 묘에 임하여 전작(奠酌)했다.[65]

1788년 9월 7일: 의빈묘(宜嬪墓)에 임하여 전작(奠酌)했다.[66]

1788년 11월 5일: 의빈묘(宜嬪墓)에 나아가 전작례를 행하였다.[67]

1789년 4월 25일: 의빈묘(宜嬪廟)에 두루 나아가 묘내(廟內)를 둘러보고 의빈묘(宜嬪墓)에서 다례를 행하였다.[68]

1789년 4월 26일: 의빈묘(宜嬪廟)에 들러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69]

1789년 12월 28일: 의빈묘(宜嬪廟)에 들러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70]

1790년 3월 15일: 의빈묘(宜嬪墓)에 들러 잔을 올렸다.[71]

1790년 3월 24일: 의빈묘(宜嬪廟)에 들렀다.[72]

이처럼 정조는 의빈 성씨의 묘지나 사당에 거둥(왕의 행차) 할 때면 문효세자의 묘지나 사당에도 함께 거둥했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고개가 되었다.[73]

소설 곽장양문록(郭張兩門錄) 필사[편집]

1773년(영조 49년) 봄, 21세의 나이에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당시 20세), 청선공주(당시 18세), 궁녀 영희, 경희, 복연과 함께 국문소설 《곽장양문록》(전 10권 10책)을 필사하였다. 이 소설은 필사 시기가 알려진 소설 가운데 최고로 오래된 필사소설이며, 의빈 성씨가 필사한 부분의 하단에는 '의빈 글시'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작품은 공교롭게도 정조가 즉위식을 했던 경희궁 옆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74][75] 정조는 "의빈의 붓글씨가 범상함을 넘어섰다"고 표현했다.[76]

의빈 성씨가 등장하는 서적[편집]

문효세자국휼고유제축문(文孝世子國恤告由祭祝文)[편집]

宜嬪葬禮時孝昌墓告由祭祝文 爾墓之左卜宜嬪宅往卽在今幽明慟䀌

의빈이 문효세자의 장례 때, 효창묘에 가서 고유제(중대한 일을 치른 뒤에 그 내용을 적어서 사당이나 신명에게 알리는 제사)의 축문을 읽었다. 의빈께서 문효세자의 무덤 곁으로 가서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서럽게 울었다.

문효세자국휼고유제축문(文孝世子國恤告由祭祝文)[77]에서 문효세자의 장례 때 의빈이 효창묘에 갔다는 기록은 정조실록 1786년 윤7월 19일에 정조가 효창묘에서 장례 절차를 지켜봤다는 기록[78]과 상응한다. 따라서 문효세자의 장사를 지낸 날에 정조와 의빈이 효창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재난고[편집]

조선 정조대의 문신 이재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 의빈 성씨의 본명, 가족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다.

昭容成氏名德任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 惠慶宮稱其福相而上亦愛之 許令從所顧屬內庭旣有娠 惠慶宮恒以語上曰德任腹漸高大矣上則微哂而已 尹嬪過三十餘朔産事無實 而元子生 則産廳都提調徐命善等猶請姑待尹氏産期 而不請元子定號 奉朝賀金尙喆亟上疏 引春秋立庶以長之義 請元子定號上意亦然 亟從之徐則竟八度呈辭而遞蓋 昭容本係洪家傔人之女 故老論或以線索甚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이다. 아버지가 홍봉한(혜경궁의 아버지, 정조의 외조부)의 청지기였던 까닭으로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다. 혜경궁은 덕임의 복스럽게 생긴 얼굴을 칭찬했고 임금(정조) 역시 덕임을 사랑했다. 임금(정조)이 내정(임금이 사적인 생활을 하는 궁궐의 내부)에서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하자, 이윽고 임신했다. 혜경궁이 덕임의 임신을 말하자 임금이 덕임의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다며 곧 생긋이 웃었다. 윤빈(화빈 윤씨)의 산실청은 30개월이 넘도록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 원자가 태어났는데 윤씨의 산실청 때문에 원자 정호를 청하지 못했다. 원자 정호를 청하자 임금 역시 그러했다. 소용은 본래 홍봉한 가문 겸인(청지기)의 딸이다.
元子私親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亦卽洪樂性妾父 而爲一錢布衙門該吏 犯逋七千兩 幾死而敗 則惠慶宮 爲收昭容于侍側 親鞠育 旣長轉至追御 今其父已沒 其兄弟方爲別軍職 而中宮又躬自撫養元子 兩宮和氣可幸云
원자의 생모 소용 성씨의 부친은 본래 홍봉한의 청직(양반집에서 잡일을 맡아보거나 시중을 들던 사람)이며 또한 홍낙성의 첩의 부친이다. 잠시 관청의 관리로 있으면서 돈을 벌었으나, 7천냥을 범포(국고에 낼 돈이나 곡식을 써버림)함으로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무너졌다. 곧 혜경궁이 소용 성씨를 거두어 친히 길렀고 소용 성씨는 혜경궁을 모셨다. 이윽고 성씨가 자라자 혜경궁은 임금을 지극히 따르기를 전했다. 지금 부친은 이미 죽고, 형제는 별군직이다. 그리고 중궁(효의왕후)이 원자를 몸소 무양했고, 양궁(兩宮, 대전과 중궁전의 왕과 왕비)은 화기로움을 다행이라고 했다.[79]
成嬪之父 舊□軍門庫直者 已死 有二兄 方爲東宮內隸云
의빈 성씨의 아버지는 예전에 군문 고지기(관아의 창고를 지키고 감시함, 신분 상 노속(奴屬))였는데 이미 죽었다. 그리고 두 오라버니는 세자궁의 액례(액정서에서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중인 계급)와 원례(승정원에 속한 하인)를 아울러 일컫는 내례였다.[80]
追聞 是日寅初 後宮成氏 誕出王子 命依毓祥廟故事 賜爵昭容 大臣等 請陳賀稱慶 而以尹嬪産室廳事 姑今退待 又自軍門賜成氏兄戶曹書吏者武科

추가로 들었는데 그날 인시에 후궁 성씨가 왕자를 낳았다. 명에 따라 육상묘에 갔는데 예로부터 전해오던 일이었다. 후궁 성씨는 소용의 작위를 받았다. 삼정승이 경사를 기뻐하며 진하(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신하들이 모여 임금에게 나아가 축하하는 일)하길 청했다. 그러나 화빈 윤씨의 산실청 때문에 잠시 물러나서 기다렸다. 또한 이로 인하여 성씨의 오라버니는 군문의 명령으로 호조의 서리(중앙 관아에 속하여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맡아보던 하급의 구실아치)가 되었는데 성씨의 오라버니는 무과였다.[81]

五月成昭容所生女 以避寓出處闕外卽夭 命武寵臣任嵂主治喪葬
(1784년) 5월에 의빈 성씨가 낳은 딸이 궁궐 밖으로 피접을 나갔는데 곧 죽었다.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 임율이 명을 받들어 치료 했고 옹주가 사망하자 장례를 치렀다.[82]
成嬪 又方有娠四朔 則十月 乃産期也 上下大小 擧多傳說 而東宮魂宮 命移于新門內慶熙宮 或曰 此因産期 故有忌別移也 或曰 大駕將移御慶熙宮 故先移也
의빈 성씨가 임신 4개월에 우방(습기로 인해 생기는 담을 말리고 소변이 혼탁한 병) 처방을 받았다. 더구나 10월에 해산을 앞두고 있었다. 위아래 크고 작은 계급이 제시한 많은 전언에 따르면 문효세자의 혼궁(왕세자의 장례 뒤 3년 동안 신위를 모시던 궁)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명을 내려 의빈 성씨를 돈의문으로 나가게 하여 경희궁으로 보냈다. 혹은 이르기를 해산할 시기를 원인으로 하여금 옛날부터 경희궁으로 옮기는 것을 금한다고 했다. 혹은 이르기를 임금이 가마를 타고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고로 경희궁으로 옮겼다고 한다.[83]

이재난고 내용을 토대로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5월 21일에 정조가 문효세자의 혼궁을 경희궁으로 정했으며.[84] 윤7월 15일에는 문효세자의 혼궁을 경희궁으로 보냈다고 한다.[85] 그리고 정조는 1786년 윤7월 20일에 경희궁에 머물렀다. 윤7월 21일부터 9월 7일까지 정조가 경희궁에서 머물렀거나 다녀갔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남아있다. 이로 말미암았을 때, 의빈은 문효세자가 죽은 뒤에 잠시 창덕궁을 떠나 경희궁으로 피접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조가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아버렸으나 날마다 반드시 깨끗하게 씻었는데 이는 내가 친히 가서 보았다(彌月沈頓而日必盥頮爲予之).”는 내용과 정조가 9월 7일 이후 의빈이 사망하는 9월 14일까지 경희궁에 거둥했다는 기록이 없는 점을 봤을 때, 의빈은 병이 위중해지자 창덕궁으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한 추정 근거로는 어제의빈묘지명에서 “임종하기 전날 밤 내가 의빈에게 가서 물으니 문득 말을 하는데 있어서 슬픔과 한탄이 가득했고 눈물을 흘렸다.(屬纊之前夕予臨問則忽辭致悽惋淚)”는 내용과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입고 자리에 나아가기를 마쳤다. 내가 들어가서 보니 이미 어찌 할 수가 없었다(及詰朝起正衣就席而訖予入視已無奈矣).”는 내용이다. 승정원일기 역시 9월 13일과 14일에 정조가 창덕궁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렇듯 의빈은 경희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9월에 병이 위중해지자 창덕궁으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어제의빈묘지명의 내용과 정조가 9월 14일 창덕궁 중희당에서 의빈 성씨가 사망했다고 말한 점[86]을 봤을 때 창덕궁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宜嬪成氏 在本第方待十月産期 而經産男子 子孔而母亦逝 自上哀慟 朝廷致慰
의빈 성씨의 10월 산기를 대비해 약으로 살폈다. 아들을 낳은 경험이 있는데. 어머니(의빈 성씨)와 태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임금이 슬피 울부짖었고 조정에서는 임금을 위로했다.[87]

의빈과 뱃 속의 아이 모두 사망하자 정조가 애통해 했다.

成嬪 子懸之證 暴發而逝 盖和嬪尹氏所密毒也 故尹亟罪黜
의빈은 자현(임신 때에 태기가 조화되지 못하고 위로 치밀어 가슴이 부어오르는 것처럼 아픈 병증) 병세가 있었고 사망했다. 대개 화빈 윤씨가 독을 썼다고 했다. 윤씨에게 심히 죄를 물어 내쫓았다.[88]

조선왕조실록에 정조가 의빈의 병이 이상하다고 했는데, 이재난고에서 의빈이 자현증이 있었다고 한다. 화빈 윤씨는 효의왕후를 분수에 지나치게 질투했고 의빈 성씨를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저주했고 그 죄로 인해 대궐 안에 엄히 가두어졌었다.[89] 그 이후 화빈 윤씨는 독을 썼다는 의혹으로 60세에 졸할 때까지 행적이 없다.[90]

한중록[편집]

"아지는 내 유모로 (중략) 1782년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도 산실에 들어와 수고하니, 앞뒤로 거의 스무 차례가 넘는지라. 그 공이 적지 아니하니, 주상이 공을 표창하여 제 자손을 관청에서 일하게 하여 후한 녹봉을 받게 하시고, 저를 후히 대하셔 천한 몸에 당치 못할 은혜와 영광을 많이 주시니라."

"복례는 1782년 문효세자 태어날 때 몸과 마음을 다한 공이 있어 주상께서 공을 갚으셔서 시녀 직위를 주시니, 제 영광이 지극하더라."

혜경궁 홍씨는 자신이 곁에 두고 친히 기른 며느리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을 때 친정에서 데려온 유모 아지와 몸종 복례를 보내 해산을 도왔다. 정조 역시 아지와 복례의 공을 치하했다.

"정조께서 후사가 늦어 나라의 근심이 크다가, 1782년 문효를 얻어 처음으로 경사로워하니라. 그런데 1786년 5월에는 문효가, 그해 9월에는 문효의 생모 의빈이 죽는 변을 당하니, 슬픔과 걱정으로 귀한 몸을 손상하시어, 내 임금을 위하여 두려워하며 애를 태우니라."

한중록에 의빈 성씨의 죽음이 짧게 언급되어 있다.

《청장관전서》[편집]

"19일, 의빈(宜嬪)을 예장(禮葬)할 때 제전차사원(祭奠差使員) 및 사후토제관(祠垕土祭官)으로 차출되었다. 20일, 묘소에 있었다. 21일, 본아에 있었다. 22일, 녹비(鹿皮) 1장을 하사받았는데 이는 의빈 장례 때의 일이다."

승가사[편집]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인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다.[91]

의빈 성씨 가족 일화[편집]

문효세자 출생 후 파면 당한 성식(成軾)[편집]

"내가 이르기를,

“내가 조신(朝臣)들에게 유시(諭示)하고 싶은 것이 있다. 예로부터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왕실의 척족(戚族)들은 매양 연줄을 타고 내통하여 조정에 해를 끼친 폐단이 많았다. 더구나 부덕한 내가 대비하고 더 금지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한 폐단을 장차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므로 내가 즉위한 뒤로 척리(戚里)들을 단속하는 것을 먼저 처리할 중요한 일로 삼았으니, 나의 이러한 마음을 경들도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심이 예전만 못하고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는 때를 당하여 만약 이 무리들이 자신의 본분을 지키지 않고 조정의 신하와 혹 서로 내통한다면 치화(治化)에 누가 될 뿐만이 아니니, 어찌 조정이 대단히 수치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것을 염려하여 일전에 소용(昭容)의 오라비를 합문(閤門) 밖에 불러 놓고 만일 이러한 폐단이 있게 되면 극형에 처하는 죄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거듭거듭 신칙(申飭)하고 유시(諭示)하였다. 오늘 연석(筵席)에 오른 제신(諸臣)들에게 어찌 이러한 염려가 있겠는가마는 모쪼록 이 하교를 듣고 서로 타일러 훈계하게 되기를 나는 바란다.”

하니, 서명선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으니 물러가 각자 경계하고 신칙할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듣건대, 소용의 오라비 성식(成軾)이 현재 어영청 군교의 직임을 맡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로 하여금 외인(外人)과 내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 금장(禁將)이 어영대장을 겸하고 있으니 즉시 그의 직임을 태거(汰去)하라.

하니, 사직 이경무(李敬懋)가 아뢰기를,

“마땅히 하교하신 대로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하였다."

[92]

정조는 문효세자가 태어난 뒤, 의빈의 친척들이 연줄을 타고 내통하여 조정에 해를 끼칠까봐 경계했다. 의빈은 혜경궁과 친밀하고 언니는 홍낙성의 첩이었다. 아버지 성윤우는 홍봉한의 청지기였지만, 이재난고에 의빈이 소용이 되기 전에 사망 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성윤우는 1782년 이전에 사망했다. 의빈에게는 별군직(別軍職)을 지낸 두 오빠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어영청 군교로 지낸 성식(成軾)이었다.


어영청 군교는 낮은 벼슬인데 정조는 성식을 편전 앞문 밖에 불러서 문효세자와 의빈의 연줄을 타고 내통하면 극형으로 다스릴 것이라며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고 가르쳤었다. 하지만 1782년 음력 9월 15일, 어영청 금위대장(종2품)에게 성식이 다른 사람과 내통하는 일이 생기면 안 되니 파면하라는 명을 내렸다.


정조 스스로 가까운 사람일수록 때로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엄히 다스린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정조는 의빈의 혈족 중에서 가장 출세했거나 또는 영리했을 성식을 파면하는 조치를 내려서 내통을 미연에 방지한 것으로 추정 된다. 그러나 이재난고에 따르면 의빈의 고모는 정방(鄭 枋, 1707~1789)[93]의 첩인데 의빈과 그 첩 덕분에 공조판서(정2품)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조카 정복환(鄭福煥, 1736~1790)[94]은 옥당 벼슬(수찬, 교리, 응교, 제학)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 추정했을 때, 성식이 파면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족관계[편집]

본가 창녕 성씨(昌寧 成氏)

  • 7대조부 : 성만종(成萬種) - 제릉 참봉(종9품)[95]
    • 고조부 : 성경(成景) - 군자감 정(정3품)[96]
      • 아버지 :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97], 미상~1782 이전)[98][99]
      • 어머니 : 증 정경부인 임씨(贈 貞敬夫人 林氏, 생몰년 미상)[100][101]
        • 오빠 : 이름 미상 - 별군직[102][103]
        • 오빠 : 성식(成軾, 생몰년 미상) - 어영청 군교, 별군직[104]
        • 언니 : 성씨(成氏)[105][106]
      • 고모 : 성씨(成氏)[107][108]

왕가(王家 : 전주 이씨)

  • 시조부 : 제21대 영조대왕(英祖大王, 1694~1776, 재위 1724~1776)
  • 시조모 :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1757)
  • 시조모 :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1805)
  • 생시조모 : 소유영빈 이씨(昭裕暎嬪 李氏, 1696~1764)
    • 시아버지 : 추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 ~ 1762)
    • 시어머니 : 추존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1735 ~ 1815)
      • 남편 : 제22대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1752~1800, 재위 1776~1800)
        • 아들 :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 음력 9월 7일~1786 음력 05월 11일)
        • 딸 : 옹주 (翁主, 1784 음력 윤달 3월 20일 ~1784년 음력 5월 12일)
        •  ? : (1786년 음력 9월 14일) - 복중 사망

의빈 성씨가 등장한 작품[편집]

연도 장르 제목 역할 배우
2017년 로맨스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 성덕임
2017년 로맨스소설 《우아한 환생》 의빈 성씨
2017년 KBS1 드라마 (제작 중단) 《다산 정약용》 의빈 성씨 정한비
2017년 1월 1일 MBC 예능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46회 언빌리버블 스토리 '왕이 사랑한 여자' 성덕임 구민주(아역) → 김하영(성인)
2016년 수원시립공연단 창작뮤지컬 《정조-만천명월주인옹》 성선우 홍민아
2007년~2008년 드라마소설 《이산 정조대왕》 성송연
2007년~2008년 MBC 드라마 이산 성송연 이한나(아역) → 한지민(성인)
2005년 로맨스소설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강건희
2005년 로맨스소설 《비단속옷》 성연

함께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

각주[편집]

  1. “일성록 - 정조8년 음력 8월 3일”. 
  2. “의판(儀版)”. 
  3. “대한예전”. 
  4. “昭容成氏 名德任”,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德任)이다." - 황윤석, 《이재난고
  5. <두산백과>
  6. "英宗二十九年癸酉七月八日", "영종(영조) 29년 계유년 7월 8일" - 정조, <어제의빈묘표>
  7.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 "아버지가 故홍봉한의 청지기였던 까닭으로 혜경궁의 궁녀로 입궁했다." - 황윤석 <이재난고>
  8. "十歲選入掖庭", "10세에 입궁했다."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9. "惠慶宮 爲收昭容于侍側 親鞠育" - 황윤석 <이재난고>
  10.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 
  11. “정조실록”. 
  12. “어제의빈묘지명 - 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 
  13. “일성록”. 
  14. “정조실록”. 
  15. "壬寅九月七日寅時誕世子于昌德宮之讌華堂", 김종수 <문효세자지문>
  16. “정조실록”. 
  17. <일성록>
  18. "傳于徐有防曰, 護産廳, 已過七日, 自今日撤直, 捲草官及醫官·中使·內外下屬等, 竝書啓", 서유방이 말하기를 “호산청이 유지된 지 7일이 지났으니 이제 철수하는 게 바릅니다. 권초관에 아울러 중사와 여러 안팎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울러 관련된 문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19. 《한중록》
  20. “일성록 - 정조6년 음력 9월 7일”. 
  21. “정조실록 - 정조6년 음력 12월 28일”. 
  22. “일성록 - 정조6년 음력 9월 7일”. 
  23. “일성록 - 정조6년 음력 9월 15일”. 
  24. “일성록 - 정조7년 2월 19일”. 
  25. <정조실록>
  26. <정조실록> 호산청을 설치하다
  27. <정조실록>
  28. <정조실록>
  29. "嬪方有娠幾臨月而嬪遂歿矣", "빈이 임신하여 해산달에 이르렀는데 죽었다."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30. “조선왕조실록 - 정조10년 9월 14일”. 
  31. <숙종실록>
  32. 드라마 ‘이산’ 정조의 가족들 서삼릉에 무덤 있어
  33. “정조실록 13년 4월 25일”. 
  34.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 
  35. <정조실록>
  36. “정조실록”. 
  37. <정조실록>
  38. “고종실록”. 
  39. “향수조사책 8권”. 
  40. “의빈궁사절일사중삭(宜嬪宮四節日四仲朔)”. 
  41. “대한예전3권 단묘도설”. 
  42. “대한예전3권 단묘도설”. 
  43. “순종실록”. 
  44. “정조실록 - 1787년 1월 10일”. 
  45. “사전사례편고”. 
  46. “일성록”. 
  47. “만기요람”. 
  48. “향수조사책”. 
  49. “영선사절목”. 
  50. “정조실록”. 
  51. “의판(儀版)”. 
  52. “일성록 - 정조11년 음력 9월 13일”. 
  53. http://instiz.net/pt/3901524
  54. “장서각 자료”. 
  55. “장서각 자료”. 
  56. <조선이 사랑한 글씨>
  57.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한신대>
  58.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59.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60.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61.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62. “장서각”. 
  63. “일성록”. 
  64. “일성록”. 
  65. “일성록”. 
  66. “일성록”. 
  67. “일성록”. 
  68. “일성록”. 
  69. “일성록”. 
  70. “정조실록”. 
  71. “일성록”. 
  72. “일성록”. 
  73. <서울지명사전>
  74. <"리어카서 건지고, 표구점서 구출하고">
  7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곽장양문록>
  76. "筆翰亦自超凡", "붓글씨 또한 범상함을 넘어섰다"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77. “문효세자국휼고유제축문(文孝世子國恤告由祭祝文)”. 
  78. “정조실록 1786년 윤7월 19일”. 
  79. “이재난고”. 
  80. “이재난고”. 
  81. “이재난고 34권”. 
  82. “이재난고 35권”. 
  83. “이재난고38”. 
  84. “승정원일기”. 
  85. “승정원일기”. 
  86. “승정원일기”. 
  87. “이재난고”. 
  88. “이재난고 39권”. 
  89. "和嬪尹氏 僭妬於中宮 喑詛於成嬪 因此得罪 自內嚴囚 方有降宮爲房之議", 황윤석 <이재난고>
  90. 김창겸, 김선주, 권순형, 이순구, 이성임, 임혜련 (2015년 7월 10일). 《한국 왕실여성 인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343쪽. ISBN 9791186178669. 
  91. <승가사>
  92. “일성록 - 정조11년 음력 9월 15일”. 
  93. “한국역대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 
  94.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95. "七代祖萬種齊陵參奉"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96. "高祖景軍資監正"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97. "贈贊成胤祐"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98. "成昭容之父(...)今其父已沒" - 황윤석 <이재난고>
  99. 홍봉한의 청지기
  100. 통례원 인의(종6품)임종의 맏딸
  101. "母曰林贈貞敬夫人引儀宗胄女也", "어머니는 인의 임종의 맏딸 정경부인 임씨이다"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102. "有二娚窮窶", "두 오라비가 있었는데 가난했다"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103. "其兄弟方爲別軍職" - 황윤석 <이재난고>
  104. “일성록 - 정조6년 9월 15일”. 
  105. 영의정 홍낙성의 첩
  106. "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亦卽洪樂性妾父" - 황윤석 <이재난고>
  107. 공조판서 정방(鄭枋, 1707~1789)의 첩
  108. "鄭枋(...)妾成生者與成嬪爲姑姪", "정방의 첩이 성씨인데 더불어 의빈(의빈 성씨)과 고모 조카 사이이다." - 황윤석 <이재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