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Picto infobox prétendant à un trône.png
의빈 성씨
宜嬪 成氏
지위
빈(嬪)
이름
성덕임(成德任)[1]
별호 상의(尙儀, 1780~1782.9)
소용(昭容, 1782.9~1783.2)
의빈(宜嬪, 1783.2~사후)
의빈궁(宜嬪宮, 사망 이후)
안현궁(安峴宮, 사망 이후)
신상정보
출생일 1753년 음력 7월 8일
사망일 1786년 음력 9월 14일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중희당
매장지 의빈창녕성씨지묘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효창원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후궁묘)
왕조 조선 왕조
부친 증 찬성 성윤우
모친 증 정경부인 임씨
배우자 정조
자녀 첫째(유산)
둘째(유산)
문효세자
옹주
다섯째(복중 사망)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8월 6일 (음력 7월 8일[2]) ~ 1786년 11월 4일 (음력 9월 14일[3]))의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다. 1762년(영조 38년) 이후 궁녀로 입궁 했고 헌경왕후가 친히 길렀다. 1766년(영조 42년)에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승은을 내리자 사양했다. 정조는 뜻은 받아들이되 그 때부터 후궁의 반열에 뒀다. 1773년(영조 49년)에 국문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했다. 1780년(정조 4년)에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리자 거듭 사양했고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후궁이 되었다. 두 번의 유산을 겪고 문효세자옹주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했으며 1786년(정조 10년) 음력 9월 14일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만삭으로 사망했다. 1898년(광무 2년)에 의빈궁(宜嬪宮)이 칠궁(七宮)에 속했다. 1908년(융희 2년)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 칠궁에서 제외 되었고 제사는 원소(園所)의 예를 따랐다.

생애[편집]

출생 및 궁녀 입궁[편집]

의빈 성씨의 이름은 덕임(德任)이고 1753년(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태어났다.[2] 아버지는 증 찬성 성윤우(成胤祐)이고 어머니는 통례원 인의(引儀) 임종주(林宗胄)의 딸인 증 정경부인 임씨이다. 아버지 성윤우가 본디 홍봉한(洪鳳漢)의 청지기(廳直)였던 까닭으로 1762년(영조 38년) 이후[4] 혜경궁 홍씨의 궁녀로 입궁했다.[5]

소설 곽장양문록(郭張兩門錄) 필사[편집]

1773년(영조 49년) 봄에 청연공주, 청선공주, 궁녀 영희, 경희, 복연과 함께 국문소설 『곽장양문록』(전 10권 10책)을 필사하였다. 이 소설은 필사 시기가 알려진 소설 가운데 최고로 오래된 필사소설이며, 의빈이 필사한 부분의 하단에는 '의빈 글시'라고 표기되어 있다.[6]

승은 거절[편집]

1766년(영조 42년)에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승은을 내리자 의빈은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죽음을 맹세하며 사양했다.[7] 정조는 의빈의 뜻을 받아들여 종용하지 않다가 1780년(정조 4년)에 다시 승은을 내리자 거듭 사양했다. 그러자 정조는 의빈의 하인을 크게 꾸짖고 벌을 내렸고 이에 의빈은 승은을 받아들이고 후궁이 되었다.[8]

후궁 시절[편집]

1780년(정조 4년)[9]과 1781년(정조 5년)[10]에 임신 중이었는데 유산 했다.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인시(새벽3시~5시)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11] 이날 혜경궁은 본가에서 데려온 유모 ‘아지’와 몸종 ‘복례’를 호산청으로 보내서 해산을 돕게 했다.[12] 당시 정5품 상의였던 의빈은 문효세자 출생 당일에 정3품 소용으로 봉해졌다.[13]

9월 15일에 상정각(誠正閣)에서 열린 차대(次對)에서 정조가 외척(外戚)을 단속 한다는 이유로 의빈의 오빠 성식(成軾)을 파면했다.[14] 『이재난고』에 따르면 낮은 벼슬에 불과한 성식이 파면 당한 이유는 문효세자 출생 이후 계속 유지 되고 있는 화빈 윤씨의 산실청 때문이었다. 이후 성식은 군문의 명령을 받고 호조 서리가 되었다.[15]

같은 해 11월 27일에는 문효세자의 원자 위호가 정해졌고 1783년 2월 19일에 의빈(宜嬪)으로 승격 되었는데 빈호 '의(宜)'는 정조가 직접 정했다.[16]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에 옹주를 낳았고[17] 7월 2일에는 당시 원자(元子)였던 문효세자가 3세의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 되었다. 정조의 차남 순조가 11세에 왕세자로 책봉된 것과 비교하면 무척 이른 일이었다.[18] 그리고 의빈의 오빠 성식(成軾)과 이름 불명의 다른 오빠는 동궁의 내례(內隸)가 되었다.[19]

자녀 요절[편집]

1780년(정조 4년) 12월과 1781년(정조 5년) 7월에 임신 중이었으나 두 번 유산했다. 옹주는 1784년 5월에 궁궐 밖으로 피접을 나갔는데 5월 12일에 경풍(驚風)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20][21] 문효세자는 당시 유행하던 홍역으로 1786년 5월 11일 미시(오후 1시~3시)에 창경궁 자경전 동쪽 행각에서 사망했다.

사망[편집]

의빈은 마음이 약해서 칠정(七情) 증세가 있는데 문효세자 사망 이후 중병에 걸렸고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22] 정조가 1786년(정조 10년) 윤 7월 21일부터 9월 7일까지 창덕궁과 경희궁을 오가며 지낸 것으로 보아 의빈은 늦어도 윤 7월에 경희궁으로 떠나서 9월 초에는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23] 정조는 매일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는 항상 검열했으며 약봉지와 약그릇은 모두 침실 안에 보관하고 쓰는 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786년 9월 14일 미시(오후 1시~3시)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임신 9개월[24]의 몸으로 사망했다.

사망 이후[편집]

예장(禮葬)[편집]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25]

정조는 의빈의 상례(喪禮)를 영빈 이씨의 규례대로 후정(後庭) 1등의 예로 거행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 해에 흉년이 들었고 문효세자를 예장할 때와 칙명을 전달하는 사신의 행차 때 많은 돈을 써서 나랏돈에 손을 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호조 재력도 탕진 되어서 도감(都監)을 세우지 못하고 [26] 모든 비용을 절감하여 호조와 전의감에 특별히 따로 설치하여 예장을 거행하되 절차는 영빈 이씨의 규례를 따랐다.[27][28] 9월 16일 묘시(오전 5시~7시)에 중희당에서 의빈을 입관하고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 빈소를 마련했다.[29] [30] 11월 20일에 효창원(孝昌園) 왼쪽 언덕 임좌(壬坐)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31]

의빈묘(宜嬪墓)는 효창원(孝昌園)과 한 곳에 위치하여 서로 백 걸음쯤 떨어져 있는데 이는 정조가 의빈의 소망을 그대로 따랐다. 숙종숙빈 최씨의 묫자리를 명선공주명혜공주의 묘 근처로 정한 내관(內官) 장후재(張厚載)를 파직 시키고 다시 정하라고 했던 일과 비교하면 이례적이었다.[32] 원래 효창원(孝昌園) 영역은 지금의 효창동, 청파동, 공덕동 일대로 묘역이 굉장히 넓고 송림이 울창했다. 한 곳에 있는 의빈묘(宜嬪墓)는 곡장이 삼면으로 둘러져 있고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한쌍, 문인석 한쌍, 묘상표석, 비각, 제각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의빈묘(宜嬪墓)는 서삼릉 내 후궁 묘역으로, 효창원(孝昌園)은 의령원(懿寧園) 앞으로 강제 이장 당했다.[33]

독살설[편집]

1786년(정조 10년) 11월 20일에 상계군(常溪君)이 의문사 하고[34] 12월 1일에 정순왕후는 의빈과 문효세자는 온갖 증세가 처음부터 괴이 했는데 이는 은언군이 아들 상계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독살 했다고 주장하며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식음을 전폐하겠다는 언문 교지를 내렸다.[35] 이후 구선복(具善復)이 상계군(常溪君)을 추대 하려 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36] 은언군(恩彦君)은 강화도로 유배 되었다.[37] 12월 27일에 손용득(孫龍得)은 내관 이윤묵(李允默)이 의빈을 독살했다는 의혹스러운 소문이 파다하다고 했다. 정조는 의빈의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반드시 직접 검열했기 때문에 근거 없는 말이라고 했다. 이에 손용득은 유배형을 받았고[38] 이윤묵은 당시 이미 유배 중이었다.[39] 또한 민간에서는 화빈 윤씨가 독을 썼다는 소문도 있었다.[40]

사당[편집]

의빈의 빈소를 안현의 본궁에 차렸기 때문에 ‘안현궁(安峴宮)’[41] [42] [43]으로도 불리기는 했으나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1790년(정조 14년)에 편찬한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의 정당이하제처(正堂以下諸處)에 의빈의 사당이 ‘의빈묘(宜嬪廟)’로 표기 했다.[44] 1797년(정조 21년)에 작성한 『제물등록(祭物謄錄)』에는 육상궁(숙빈 최씨), 선희궁(영빈 이씨), 의빈궁을 ‘삼궁(三宮)’이라고 지칭 했다.[45] 1799년(정조 23년)에 편찬한 『사전사례편고(祀典事例便考)』 의 사궁(私宮)에는 덕흥궁묘(德興宮墓), 대빈궁묘(大嬪宮墓), 선희궁묘(宣禧宮墓)에 이어 의빈궁묘(宜嬪宮墓)가 나와 있다.[46] 이로 말미암아 1797년(정조 21년) 이후에는 ‘의빈궁(宜嬪宮)’이 사당 명칭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빈궁을 주제로 한 고서나 고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순조, 고종, 순종 때 편찬하거나 작성된 『만기요람(萬機要覽)』[47],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48], 『태상지(太常志)』[49], 『대한예전(大韓禮典)』[50],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51], 「영선사절목(營繕司節目)」 [52], 「능안(陵案)」[53]등에 ‘의빈궁(宜嬪宮)’이 남아 있다.

칠궁(七宮) 제향 및 폐지[편집]

의빈궁(宜嬪宮)은 1898년(광무 2년)에 칠궁(七宮) 중 하나에 들어갔는데[54] 같은 해에 편찬한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 8책 칠궁이묘(七宮二廟) 제향조사책(祭享調査冊)에 의빈궁의 제사에 대해 수록 되어 있다. 1908년(융희 2년) 7월 23일에 제사 제도가 개정 되어서 칠궁에서 폐궁(廢宮)되어 매안(埋安)되고 제사는 의소태자문효세자의 원소(園所) 예법을 따랐다.[55] 다만 1909년(융희 3년) 9월 7일에 입안되고 결재 도장이 날인되어 있는 『향비규정(享費規定)』 4책에 의빈궁(宜嬪宮)의 제향(祭享)에 관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의빈궁이라는 명칭이 혁파 되지는 않았다.[56]

정조 어제문(正祖 御製文)[편집]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편집]

의빈 성씨가 사망하자 정조는 묘표(墓表)와 묘지명(墓誌銘)을 손수 지었다. 전면대자(前面大字)는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썼으며 비석 뒷면에 새긴 글은 서용보(徐龍輔)가 썼다. 1786년(정조 10년) 이후에 기록 되었고 비석은 11월에 세워졌다.[57]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문효가 병오(1786년) 5월에 죽고 여섯 달이 지나고 나서 9월 14일 갑신에 빈 또한 죽고 말았다. 석 달 뒤 11월 20일 경인에 율목동 문효의 묘 왼쪽 언덕 묏자리에 장사 지냈다. 빈은 자신을 잃고 문효를 따라 죽기를 늘 소원하더니 비로소 이제 문효의 무덤 곁으로 떠나가 버렸다. 빈은 장차 한을 풀고 문효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빈은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여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능히 이름을 구별할 줄 알고, 단정한 태도와 자세를 수양하고, 맑고 올곧고, 더욱 상서로이 화기로우며 온화했다. 열 살(영조 38년, 1762년)이 넘어 궁중에 들어왔는데 임금의 친척 집안 여인들이 모두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혈통으로 알았다. 타고난 기품이 아주 훌륭하게 뛰어나 능히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췄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용 했다. 심지어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옳은 길을 도회지에서 똑똑하게 분별하고 확고하게 지키니 적지 아니하게 놀랐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이에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죽음을 맹세했다. 나는 마음을 느끼고 더는 다그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사양했다. 이에 빈의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렸고 그러한 뒤에 비로소 내 명을 받들어 당석(자기 차례가 돌아온 날 밤에 잠자리를 같이 함) 했다. 밤의 세월이 지나 임신함으로써 임인(1782년) 9월에 세자를 낳았다. 이해 소용으로 봉해졌고 귀한 아들로 하여금 빠르게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다. 빈은 자기 의견만 옳다고 여기는 바를 더욱 스스로 억눌렀다. 내전(효의왕후)을 대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하여 예를 갖추고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섬겼다. 시침(임금을 모시고 잠) 할 때는 "이제부터 국세를 의탁할 데가 있지만 위로 내전이 있고 또 후궁이 있습니다."라며 또 번번이 당석이 잘못 되었다며 사양하고 거절하며 피했다.

내전(효의왕후)은 그 자식을 이미 받아들였고, 양육 할 때는 반드시 생모에게 맡겼는데 조정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규칙과 정례였다. 빈은 감히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여 처리하지 않고 내전을 따랐고 내전은 빈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고 점차 자라기를 기다렸다. 빈은 세자를 어루만질 때는 생각하여 몸과 마음가짐을 조심했고, 밤에는 반드시 아침이 밝을 때까지 밝은 촛불을 두었고, 잘 때는 옷을 벗은 적이 없었는데 5년 동안 한 결 같았다. 또 나날이 천한 일을 몸소 했고, 말을 할 때는 극진히 존중히 여기고 공경했다.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면 빈은 "왕세자는 내전(효의왕후)의 아들입니다. 내가 낳았다고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겠습니까?"라고 했다. 빈의 거처는 겨우 비바람을 가리어 막고, 의복과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얼마 되지 않아 변변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지금 지체가 높고 귀한 신분은 이미 나에게는 과분합니다. 도리어 스스로를 자랑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다면 어찌 더욱이 몸에만 재앙이 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궁이 복을 오래 누릴 수 있도록 생활을 검소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처음 (1786년) 5월에 변고가 일어나고 떠나보낼 때 말과 얼굴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이 혹 괴이하게 여겨 어찌 개의치 아니하냐고 물어보니 "내 몸은 내 몸이 아닙니다. 지금 보는 나라는 위태함이 위엄이 머리카락과 같습니다. 다행히 내가 임신 했지만 늘어놓고 슬퍼하고 이와 같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내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과 같아 나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헌데 어찌하여 병이 들었단 말인가? 증세는 의술과 약으로 고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았는데 매일 세수할 때 내가 가서 보고 살폈다. 정신은 혼미하여 어지럽고 사지는 움직일 수 없어도 나를 대할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고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기운을 내서 메아리처럼 응답했다. 임종하기 전날 저녁에 내가 가자 갑자기 슬퍼하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며 청했다. 이에 내가 꾸짖으며 "평상시 나를 볼 때는 근심 어린 얼굴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라고 물었다. 빈이 말하기를 "앞서서 내전(효의왕후)께 아들이 생긴 경사는 축복이었습니다. 천신(신하가 임금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 이름)이 다시 자식을 가져서 종사는 매우 다행이지만, 사심을 마음속으로 억눌러 견뎌내지 못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복이 지나치게 과분해서 끝내 병이 중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마음에 차지 않으나 오직 오래도록 지닌 소원은 죽을 고비에 임하여도 아직 얻지 못하여 근심입니다. 그러니 정전에 자주 가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하면 경사가 있을 것이니, 장차 땅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감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하고 자리에 나아가서 내가 들어가서 보니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전(효의왕후)은 빈이 진실로 나라를 위했다며 정성스럽게 말했는데 거짓됨이 없었다. 지난날을 생각하건대 어찌 아닐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죽음을 잊지 아니하고 맛보는 일과 언행을 조심했는데 빈의 죽음을 슬퍼하고 정성껏 임하는 태도와 마음은 매우 친밀하여 자매를 잃은 마음이었다. 온 궁 안 사람이 모두 빈의 죽음을 한탄하여 한숨 쉬고 슬퍼하며 애처로워했고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빈이 작위를 받고나서 나는 더 엄하게 단단히 단속하여 이따금 사람이 견디지 못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빈은 한 뜻을 기쁘고 좋게 웃어른의 명령을 좇았다. 일이 혹 더욱 은혜에 해당 되면 위축되어 더욱 멀리하고 견지 했으니 자못 겸손했다. 빈의 선산 터가 이롭지 못하여 의논하여 이장하자고 하자 빈이 간하여 말하기를 "천한 집안의 일에 감히 마음대로 안배하여 번잡하게 관청의 돈을 쓰는 것은 사사로운 개인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중한 바인데 네가 불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바라건대 스스로 의복을 팔아서 이장 비용에 보태라."고 일렀다. 동궁의 외가 사친은 규정에 따라 증 찬성에 추증하지만 나는 이전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5월에 문효세자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교지를 내렸는데 빈은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한 집안 사람으로서 분황(죽은 사람에게 벼슬이 추증되면 행하는 의식)을 예로서 중지 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벼슬을 더 높여서 내려주는 것은 곧 국가의 법전이 있는 바인데 감히 전하께서 내려주는 물건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뜻밖에도 어찌 감히 장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내가 빈이 매양 애석해서 따뜻한 밥과 비단, 모시를 내렸으나 도리어 궁의 희빈(姬嬪)만 못하였다. 비록 자기를 굽히고 의지를 꺾어 검소함을 따랐으나 오히려 가난하고 군색함을 염려하며 궁중 사람에게 늘 너그러이 빌려줬다. 결국에 가서는 세상을 떠나자 상자에는 남은 비단이 없어서 염습할 때 모두 시장에서 가져왔고, 살아생전에는 은수저를 만들지 않아서 반함(염습 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림)을 할 때 버드나무로 대신 했다. 궁인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하기를 "빈이 그 청빈함을 잘 알고 지키니 마침내 이에 이른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빈의 두 오라버니는 곤궁하여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으나 사심으로 관여한 적이 없었다. 내가 "조정의 관작은 진실로 부당하게 남수(정해진 범위를 벗어나게 벼슬이나 물품 따위를 함부로 마구 줌)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남는 녹봉으로 저 배고픔과 추위를 구원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빈이 걱정하는 모양으로 대답하길 "궁방이 세워진 이후 한 물건도 제멋대로 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사가의 천인에게 재물의 은덕을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빈의 장례 때 그 친족은 다른 사람에게서 옷과 신발을 빌렸다. 궁빈의 사친은 관직명이 없는 사람은 궁중 출입을 허락을 받을 수 없으나 오래 전부터 본궁에서 접견하라고 허락했었다. 그러나 빈이 본궁에 나가 기거 하면서 사친과 여러 해 동안 격조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문 앞에 이르지 못하게 했다. 말하기를 "올 때 임금에게 여쭈고 아뢰어 뜻을 받들지 아니 하고서는 감히 불러내어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릇 형제가 몹시 가난하여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의탁하고자 하면 가족과 떨어지고자 했다. 단란함은 사람이 항상 품고 있는 심정인데 빈은 어찌 오직 다른 사람과 다르단 말인가. 내가 내린 명령은 한 가지 일이라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조심히 정성껏 지켰는데, 이는 실제로 사실을 경험했다. 궁에서 산지 20여년인데 일찍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좋지 않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혹여 말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거나 의심을 접하면 반드시 자세하고 소상하게 하여 스스로 완전히 타당함에 이르게 했다.

나는 보통 때 집안 밖의 일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빈도 역시 상황을 따르며 술잔을 주고받는데 익숙하고 내명부에 대해 꺼내지 않았다. 내가 혹 처소에 도착할 때면 궁중의 계집종들은 모두 황급히 숨어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뉘우치고 경계함에 힘썼고 아랫사람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았다.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 하고, 다른 일도 가까이 하여 붓글씨도 역시 스스로 범상함을 넘었다. 수리 학문을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고, 정신과 식견은 느끼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 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과 기예도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 아아, 빈의 장사(葬事)에 반드시 내가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지었다. 어찌 재주와 얼굴을 잊지 아니하겠는가.

나는 궁액(각 궁에 있던 하인)을 엄히 다스리고 가까운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하는데 일을 주면 헤아려서 명령을 받드는 일이 적었다. 빈을 후궁 반열에 둔지 20년인데 단단히 타일러서 잘못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게 했다. 이에 곧 명심하고 작은 실수도 하지 않고 조심하며 응대하였는데 법도가 저절로 있었고,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마땅히 출중했다. 이것은 뛰어난 현인도 분명히 어렵다. 본분을 각별히 정성껏 지키며 신분의 엄격함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하였다. 사사로이 윗사람을 찾아가서 청탁하는 일을 경계하고 엄히 끊어내고 가득 이루어놓음에 있어서 염려하였는데 이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에 이른 것이 크고 옳고 그름이 매우 분명하지만 감히 입을 열 수 없고, 일이 되어가는 형세는 손을 댈 수 없으면 능히 오랫동안 정성을 쌓고 있는 힘을 다해 곧바로 나아가 물러서지 않았다. 가진 것의 의리로 하여금 끝내 마땅히 바른 곳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는 책을 읽은 사대부가 쉽게 갖추지 못하는 바이다.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일에 능하고 절개와 지조가 있다고 여기고 전하여져서 당대의 미담이 될 것이다.

후일 빈의 상론(고인의 언행, 인격을 평가함)은 이와 같다. 빈의 출신은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하여 스승에게 배우지 못하고 후궁이 되었지만 학문을 배우지 않아도 알았다. 내전(효의왕후)을 위해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한 것은 하늘과 땅이 마땅히 알고 금석(쇠붙이나 돌로 만든 기구)도 가히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빈은 높음과 귀함, 임금의 은덕을 입은 영광을 즐거움으로 삼기에 거듭 부족하다고 했다. 마음에 잊히지 않는 정성으로 매우 간절히 청하며 반드시 내전에게 정성을 다하겠다고 하며 더구나 장차 상심하고 슬피 울면서 평생 동안 내전을 따르겠다고 지극히 바랐다. 비록 옛날에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충정이지만 배에 칼을 꽂은 정성도 이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으니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에서 드러났음을 경험 할 수 있다. 이에 마땅히 낳은 어진 아들은 영광된 왕세자가 되고, 공을 세워서 국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편안하고, 경사로이 자식을 길러 왕족이 번창되어야 할 터인데 나라의 운세가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 문효세자가 죽은 변이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이에 대략 찬차(시문을 가려 뽑아서 순서를 매김) 하였는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 글이 길어졌다.

그대 빈은 계유년(1753년)생이고 향년 34세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문효세자이고 딸은 해를 못 넘기고 죽었다. 빈의 본관은 창녕이고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시조이다. 인보의 아들은 문하시중으로 지낸 송국이다. 그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고 자는 여완이다. 여완의 큰 아들은 석린이고, 둘째 아들은 석용이며, 셋째 아들은 석인이다. 성석인은 예조판서와 대제학 직위에 올랐었고 시호는 정평인데 이 사람이 빈의 선조다. 그러나 이후 집안이 중간에 계보를 잃어버렸다. 7대조 만종은 제릉(태조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의 무덤) 참봉이고, 고조 성경은 군자감 정이다. 빈의 아버지는 증 찬성 윤우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임씨인데 통례원(조선시대 국가 의례를 관장한 관서) 인의 임종주의 딸이다.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하늘을 따라 정중하게 행동하고 말을 하면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 몸은 정중하게 행동하고 입은 극진한 말을 했으나 복록이 은덕에 보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운명인가보다. 저 고요한 율곡의 언덕은 문효세자가 잠든 곳이니 영원토록 서로를 지켜줄 것이다. 생각하건대 멀고 오랜 세월동안 배회하며 탄식하고 근심할 것이다.

어제의빈묘표(御製宜嬪墓表)[편집]

정조는 1786년에 직접 의빈의 사적 및 덕행을 기리는 글을 썼다.[58]

내가 즉위한지 10년째 되는 병오 9월 갑신일(1786년 음력 9월 14일)에 의빈 성씨가 사망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문효세자가 죽었다. 빈이 임신하여 해산할 달에 거의 이르렀는데 죽었다.

빈은 사망하기 전날 밤에 옷섶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국가의 자손 번창 소망이 효의왕후가 아닌 천한 몸에서 나왔는데 병에 걸려 죽으니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이제부터 자주 효의왕후에게 거둥하시어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고 기르며 지내지 못 한 것을 항상 근심하고 탄식했다. 승은을 받기 시작할 때는 감히 효의왕후를 대신 하여 당석 할 수 없다며 간절히 사양했다. 내가 잠시 틈을 타서 무언가에 빗대어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해도 한 결 같이 온통 매우 간절했다. 더구나 빈은 숨이 끊어져갈 쯤에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완연히 전하니 감동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 표정을 고치고 약속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시침하는 것을 보면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은 항상 정위(정실)가 자신을 핍박하고 근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에 정실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였다. 빈은 병을 앓다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랑에 끌려 잊지 못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후에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빈의 권력과 부귀는 스스로 높여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빈은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한 결 같이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 현명함이 어찌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그리고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생활을 검소하게 하여 복을 오래 누리도록 함)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엄히 다스려서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은총을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지키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분명하게 해냈다. 또한 내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빈은 궁궐 처소에서 지낸지 20년이다.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으며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 빈을 잃은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 7월 8일(1753년 음력 7월 8일) 생이고 득년(향년) 34세다. 본관은 창녕이며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비조(시조)이다. 성인보의 아들은 시중으로 지낸 성송국이다. 시중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며 자는 여완으로 시사했다. 나는 빈의 집안 맏아들이 조상이 엄습하여 세상이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가 제릉참봉 성만종으로 하여금 비로소 집안이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또 다시 삼대 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성경이 군자감 정으로 지냈는데 곧 빈의 7대조로 고조부와 같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다. 빈의 부모는 법도에 따라 추증 되었는데 이는 문효세자의 외조부모였다.
저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와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묏자리)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묻고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찾아오는 사람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해 하도록 할 따름이다.

사랑하는 빈의 불행한 운명은 위에 적힌 사실과 같다.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內各祭祝文)[편집]

정조가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해 발인부터 3년 탈상 후 담제까지 제사 때마다 지은 어제 제축문(御製 祭祝文)의 서식을 적었다.[59]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後各祭祝文)[편집]

의빈 성씨의 상장례를 모두 마치고 탈상한 후 1년 동안 지낸 각종 제사 때 정조가 작성한 어제 축문을 모은 것이다.[60]


조상[편집]

창녕 성씨(昌寧 成氏) 상곡공파 허백당계

  • 11대조부 : 예조판서 대제학 성현(俔, 허백당)
  • 10대조부 : 예조판서 대제학 성세창(世昌)
  • 9대조부 : 증 참판 성해(諧)
  • 8대조부 : 진사 현감 성자심(子深)
  • 7대조부 : 제릉 참봉 성만종(齊陵 參奉 成萬種)[61]
  • 6대조부 : 성운(成䉙)
  • 5대조부 : 노사직 성숙양(籚司直 成叔良)
  • 고조부 : 군자감 정 성경(軍資監 正 成景)[62]
  • 증조부 : 증 이조참판 성근립(贈 吏曹參判 成謹立)[63]
  • 조부 : 증 이조판서 성수산(贈 吏曹判書 成壽山)[64]

가족관계[편집]

  • 아버지 :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65], ? ~ 1783년 6월 11일 이전)[66]
  • 어머니 : 증 정경부인 임씨(贈 貞敬夫人 林氏)[67]
    • 오빠 : 성식(成軾) - 어영청 군교, 별군직, 동궁 내례
    • 오빠 : 성씨 - 별군직[68], 동궁내례
    • 언니 : 영의정 홍낙성(領議政 洪樂性, 1718∼1798)의 첩[69]

  • 고모 : 공조판서 정방(工曹判書 鄭枋, 1707~1789)의 첩[70]
  • 6촌 언니 : 정득환(鄭得煥, 1735~1771)[71]의 첩[72]


왕가(王家 : 전주 이씨)

  • 시조부 : 제21대 영조대왕(英祖大王, 1694~1776, 재위 1724~1776)
  • 시조모 :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1757)
  • 시조모 :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1805)
  • 생시조모 : 소유영빈 이씨(昭裕暎嬪 李氏, 1696~1764)
    • 시아버지 : 추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 ~ 1762)
    • 시어머니 : 추존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1735 ~ 1815)
      • 남편 : 제22대 정조선황제 (正祖宣皇帝,1752~1800, 재위 1776~1800)
        • 첫째 : (1780년 음력 12월 이전~음력 12월 8일 이후) 유산
        • 둘째 : (1781년 음력 7월 이전~음력 7월 이후) 유산
        • 아들 : 문효세자 (文孝世子, 1782년 음력 9월 7일~1786년 음력 5월 11일)
        • 딸 : 옹주 (翁主, 1784년 윤달 3월 20일~1784년 음력 5월 12일)
        • 다섯째 : 1786년 음력 10월 출산 예정[73]- 복중 사망

관련 장소[편집]

거둥고개[편집]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로서, 정조가 효창원(孝昌園)에 거둥할 때 넘던 고개였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본래 의빈묘(宜嬪墓)와 효창원(孝昌園)이 한 영역에 있어서 정조는 효창원을 갈 때 의빈묘도 함께 방문 했었다.[74]

홍예동[편집]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공덕동에 있던 마을로서, 지금은 효창공원이 된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소인 효창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마을 이름이었다. 효창원의 봉분을 멀리서 보면 홍예(무지개)처럼 보이기 때문에 홍예분(紅霓墳)이라고도 하였다.[75]

의빈이 등장한 작품(현대)[편집]

소설[편집]

연도 장르 제목 역할 비중 직업
2019년 소설 《대소설의 시대》 성덕임 주연 궁녀
2017년 로맨스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 성덕임 주연 궁녀
2017년 로맨스소설 《우아한 환생》 의빈 성씨 조연 궁녀
2016년 네이버 웹소설 《정조의 궁인》 성주아 조연 궁녀
2007년~2008년 드라마소설 《이산 정조대왕》 성송연 주연 도화서 다모
2005년 로맨스소설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강건희 주연 콘티 작가
2005년 로맨스소설 《비단속옷》 성연 주연 세자익위사 우익위

드라마[편집]

연도 방송사 제목 역할 배우
2017년 KBS1 《다산 정약용》(제작 중단) 의빈 성씨 정한비
2007년~2008년 MBC 이산 성송연 이한나(아역) → 한지민(성인)

예능[편집]

방송일 방송사 제목 역할 배우
2019년 채널A 천일야사 성덕임 송도원
2018년 1월 25일 JTBC 차이나는 클라스》 46회 의빈 성씨
2017년 1월 1일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46회 언빌리버블 스토리 '왕이 사랑한 여자' 성덕임 구민주(아역) → 김하영(성인)

뮤지컬[편집]

연도 주최 주관 제목 역할 배우
2016년 수원시 수원시립공연단 《정조-만천명월주인옹》 성선우 홍민아

판소리[편집]

연도 주최 주관 제목 역할 배우
2017년 수원시 수원문화재단 《정조가》 성덕임 신유진

만화[편집]

날짜 장르 제목 소제목 작가 역할
2018년 5월 26일 네이버 웹툰 조선왕조실톡 311. 너같은 여자 처음이다 무적핑크(변지민) 성덕임

함께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1. 황윤석, 『이재난고』 권35, 정조 7년(1783) 2월 30일(신묘),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德任)이다(昭容成氏 名德任)."
  2. 정조,「어제 의빈 묘표」, "嬪生于英宗二十九年癸酉七月八日"
  3. 『정조실록』 권22, 정조 10년(1786) 9월 14일(갑신) 2번째 기사
  4. 「어제의빈묘지명」
  5. 황윤석, 『이재난고』 권35, 정조 7년(1783) 2월 30일(신묘)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곽장양문록』
  7. 정조 -「어제 의빈 묘지명」,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焉."
  8. 정조 - 「어제의빈묘지명」, "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
  9. 황윤석,『이재난고』 권33, 정조 4년(1780) 12월 8일(임자), "尹嬪當於正月 就舘設産室 則二月分娩之期明矣 或言 內人中又有受胎者 亦已多月云"
  10. 황윤석, 『이재난고』 권35, 정조 8년(1784) 10월 22일(갑진), "自辛丑七月聞 成氏有娠 則嫌不復許來 而跡始疎云."
  11. 김종수, 『몽오집』 권7, 「묘지」, 문효세자지문, “以壬寅九月七日寅時誕 世子于昌德宮之讌華堂。是夜。忽有一道紅光照 寢。如出日。比曉 世子誕焉。”
  12. 『한중록』
  13. 『일성록』 정조 6년(1782) 9월 7일(신축)
  14. 『일성록』 정조 6년(1782) 9월 15일(기유) 3번째 기사
  15. 『이재난고』34권, 정조 6년(1782) 9월 초 7일(신축)
  16. 『일성록』 정조 7년(1783) 2월 19일(경진) 13번째 기사
  17. 『일성록』 정조 8년(1784) 윤 3월 20일(을해) 2번째 기사
  18. 『정조실록』53권, 정조 24년(1800) 1월 1일(을해) 4번째 기사
  19. 『이재난고』38권, 정조 10년(1786) 5월 12일(갑인), “有二兄 方爲東宮內隸云”
  20. 『정조실록』17권, 정조 8년(1783) 5월 12일(병인) 1번째 기사
  21.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新生翁主阿只氏, 以驚風奄忽普慟 
  22. 『승정원일기』1610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9월 15일(을유) 15번째 기사
  23. 『이재난고』 38권, 정조 10년(1786) 10월 27일(기사)
  24. "成嬪 又方有娠四朔 則十月 乃産期也", -황윤석, 《이재난고》
  25.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1786) 9월 14일(갑신) 2번째 기사
  26. 『승정원일기』 1611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9월 16일(병술) 14/14 기사
  27.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16일(병술) 1번째 기사
  28.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18일(무자) 4번째 기사
  29. 『일성록』 정조 10년(1786) 9월 16일(병술) 2번째 기사
  30. 『노상추일기』 4-6, 정조 10년(1786) 9월 16일(병술)
  31.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20일(경인) 2번째 기사
  32. 『숙종실록』 숙종 44년(1718년) 4월 20일(무술) 1번째 기사
  33. 조선왕조실록사전 - 효창원
  34.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1786) 11월 20일(경인) 3번째 기사
  35.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1786) 12월 1일(갑자) 2번째 기사
  36.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1786) 12월 9일(무신) 4번째 기사
  37.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1786) 12월 28일(정묘) 2번째 기사
  38. 『일성록』 정조 10년(1786) 12월 27일(병인) 9번째 기사
  39. 『일성록』 정조 10년(1786) 9월 20일(경인) 8번째 기사
  40. 『이재난고』 39권, 정조 10년(1786) 10월 24일(갑자)
  41.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 황해도 은율현 안현궁 궁방_1793년(黃海道 殷栗縣 安峴宮 宮房_1793年)
  42. 『승정원일기』 2273책(탈초본 114책) 순조 32년 1월 28일 병자 37/39 기사
  43. 「의판(儀版)」 궁묘원(宮墓園)
  44.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4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제물등록(祭物謄錄)』 1권
  46. 장서각기록유산DB - 사전사례편고 전(祀典事例便考 全) 23면
  47. 한국고전종합DB
  4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9.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50. 장서각기록유산DB
  51. 장서각기록유산DB
  52. 디지털 장서각
  53. 디지털 장서각
  54. 고려대학교 해외한국학자료센터 – 의빈궁의 주전원 차하장
  55. 『순종실록』 2권, 1908년(순종 1년) 7월 23일 양력 3번째 기사
  56. 디지털 장서각 - 1909년 향비규정(享費規定) {2}
  57.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어제의빈묘표지명(御製宜嬪墓表誌銘)
  58. “장서각 자료”. 
  59.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內各祭祝文)
  60.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後各祭祝文)
  61. "七代祖萬種齊陵參奉"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62. "高祖景軍資監正"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63. 《창녕성씨 상곡공파보》
  64. 《창녕성씨 상곡공파보》
  65. "贈贊成胤祐"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66. "成昭容之父(...)今其父已沒" - 황윤석 『이재난고』 32권
  67. "母曰林贈貞敬夫人引儀宗胄女也", "어머니는 인의 임종주의 딸 정경부인 임씨이다"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68. 『이재난고』35권, 정조 7년(1783) 4월 11일(신미), “兄弟方爲別軍職”
  69. "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亦卽洪樂性妾父" - 황윤석 『이재난고』
  70. "鄭枋(...)妾成生者與成嬪爲姑姪", "정방의 첩이 성씨인데 더불어 성빈(의빈 성씨)과 고모 조카 사이이다." - 황윤석 『이재난고』
  7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72. 『이재난고』36권, "成哥之女 今東宮私親成貴人也 貴人之再從姊 卽鄭得煥之妾也"
  73. "成嬪 又方有娠四朔 則十月 乃産期也", -황윤석, 《이재난고》
  74. 서울지명사전 - 거둥고개
  75. 서울지명사전 - 홍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