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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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
宜嬪 成氏
지위
빈(嬪)
이름
성덕임(成德任)[1]
별호 상의(尙儀, 1780~1782.9)
소용(昭容, 1782.9~1783.2)
의빈(宜嬪, 1783.2~사망 이후)
의빈궁(宜嬪宮, 사망 이후)
안현궁(安峴宮, 사망 이후)
신상정보
출생일 1753년 음력 7월 8일
사망일 1786년 음력 9월 14일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중희당
매장지 의빈창녕성씨지묘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효창원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후궁묘)
왕조 조선 왕조
부친 증 찬성 성윤우
모친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
배우자 정조
자녀 첫째(유산)
둘째(유산)
문효세자
옹주
다섯째(복중 사망)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8월 6일 (음력 7월 8일[2]) ~ 1786년 11월 4일 (음력 9월 14일[3]))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후궁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다. 1762년(영조 38년) 이후 궁녀로 입궁 했고 헌경왕후가 친히 길렀다. 1766년(영조 42년)에 정조가 승은을 내리자 아직 효의왕후에게 자식이 없으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죽음을 맹세하며 사양했다. 정조는 의빈의 뜻은 받아들이되 그 때부터 후궁의 반열에 뒀다. 1773년(영조 49년)에 고전소설 《곽장양문록》 국문 필사에 참여했다. 1780년(정조 4년)에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리자 거듭 사양했고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후궁이 되었다. 두 번의 유산을 겪고 1782년(정조 6년)에 문효세자를, 1784년(정조 8년)에는 옹주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했고 1786년(정조 10년) 음력 9월 14일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만삭의 몸으로 사망했다. 의빈은 궁호를 받은 기록이 전무한데 1787년(정조 11년)부터 의빈궁(宜嬪宮), 안현궁(安峴宮)으로 불리기도 했다. 1873년(고종 10년)에 의빈궁을 저경궁, 대빈궁, 육상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과 함께 궁(宮)이라 했고[4] 1898년(광무 2년)에는 칠궁(七宮)에 속했다.[5] 1908년(융희 2년)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 칠궁에서 폐궁 하고 매안(埋安) 하되 제사는 원소(園所)의 예를 따랐다.[6]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는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다.[7]

생애[편집]

초년기[편집]

출생 및 집안배경[편집]

의빈(宜嬪)의 본관은 창녕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며 1753년(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증 찬성(贈 贊成) 성윤우(成胤祐)와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의 딸로 태어났다.[8]

선조는 증 우찬성 성석연(成石因)이고 8대조 현감 성자심(成子深)에게는 딸인 한극성(韓克誠)의 처만 있고 아들이 없어서 성만종(成萬種)을 양자로 들여 가계를 이었다. 《창녕성씨상곡공파보》에는 이름이 칙(恜)이고 자(字)는 만종(萬種)이라고 기록했다. 고조부 성경(成景)은 군자감 정을 지냈고 증조부 성근립(成謹立)과 조부 성수산(成壽山)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어제의빈묘표》와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의빈의 신분과 집안은 한미했다. 아버지 성윤우는 정조의 외조부 영풍부원군 홍봉한(洪鳳漢)의 청지기[9]였고 승지 한준증(韓俊增)의 청지기로 지내기도 했으며 미포아문의 고직으로 있기도 했다.[10] 1753년(영조 29년)에 교련관으로 무관직에 올라[11] 1754년(영조 30년)에 경복궁 가위장이 되었고[12] 1755년(영조 31년)에 절충장군[13], 가선대부를 거쳐[14] 1761년(영조 37년)에 첨절제사가 되었다.[15] 《승정원일기》및 《이재난고》에 나오는 성윤우는 동일인물로 《무보》, 《갑진왕세자책봉경용호방》, 《창녕성씨상곡공파보》에서 가족 관계가 일치한다.

성윤우는 직장 마시행(馬時行)의 딸인 장흥 마씨(長興 馬氏)와 결혼 하고 부안 임씨와 재혼 하고 단양 지씨(丹陽 池氏)와 삼혼을 했다. 그런데 《창녕성씨세보》와 《창녕성씨상곡공파보》에 따르면 장흥 마씨는 1775년(영조 51년)에 사망했는데[16] 성윤우가 1769년(영조 45년)에 사망하자 장흥 마씨, 부안 임씨와 합장 되고[17] 단양 지씨는 춘성군에 묘가 조성 되었으니 장흥 마씨의 사망 년도 기록은 오류인 것으로 보여 진다.[18]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따르면 성윤우의 누나 또는 동생은 정방(鄭枋)의 첩[19]이고 딸은 홍낙성(洪樂性)의 첩[20]이며 조카는 정득환(鄭得煥)의 첩[21]이라고 했는데 모두 《창녕성씨상곡공파보》에는 기록되지 못했다.

어머니 부안 임씨는 임종주(林宗胄)의 딸로, 임종주는 통례원 인의였는데[22]1786년(정조 10년) 11월 이후에 통덕랑(通德郎)으로 증직 되었다. 부안 임씨는 의빈이 4살이 되는 1756년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3]

궁녀 입궁[편집]

의빈은 아버지 성윤우가 홍봉한의 청지기였던 인연이 계기가 되어 1762년(영조 38년) 이후에 입궁 했고[24] 혜경궁(헌경왕후)이 친히 길렀다. 의빈의 또 다른 입궁 원인에는 전포아문 관리가 7천 냥을 범포해서 성윤우가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사건도 있었다.[25] 성윤우는 1761년(영조 37년)에 첨절제사가 되었는데 재임 중이거나 임기가 끝났을 때, 혹은 이후 다른 관직에 있을 때 생겼을 것으로 보여 진다. 하지만 거액의 횡령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재난고》에는 기록이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다.

궁녀 생활[편집]

첫 번째 승은 거절[편집]

1765년(영조 41년)에 정조는 여색을 가까이 했다.[26] 11월부터는 병을 앓기 시작해서 감기, 복통, 피부질환, 담증, 번열, 현기증, 식은땀 등의 증세를 겪고 1766년(영조 42년) 6월이 지나서야 쾌차 했다.[27] 그해에 정조가 승은을 내렸고, 의빈은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으니 감히 명을 받을 수 없다."고 울면서 말하고 죽음을 맹세하며 사양 했다. 정조는 의빈의 뜻을 받아들이고 종용하지 않았다.[28]

1769년(영조 45년)에는 평소 담벽증을 앓고 있었던[29] 아버지 성윤우가 사망했다.[30]

《곽장양문록》 필사 참여[편집]

1773년(영조 49년) 봄에 청연공주, 청선공주, 궁녀 영희, 경희, 복연과 함께 고전소설 《곽장양문록》(전 10권 10책)을 국문 필사하였다. 이 소설은 필사 시기가 알려진 소설 가운데 최고로 오래된 필사소설이며, 의빈이 필사한 부분의 하단에는 '의빈 글시'라고 표기되어 있다.[31]

후궁 생활[편집]

두 번째 승은 거절 및 승낙[편집]

1780년(정조 4년)에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리자 이번에도 거듭 사양했다. 그러자 정조는 의빈의 하인을 크게 꾸짖고 벌을 내렸고 이에 의빈은 승은을 받아들이고 후궁이 되었다.[32] 의빈이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780년(정조 4년) 2월 21일에 화빈 윤씨의 간택을 앞두고 정조가 “작년 이후로 이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고 전에 이미 낭패를 당하였는데 지금 어찌 다시 거행하겠는가. 이 일을 하고자 해도 면목이 없다.”하고 주저 했었다.[33] 적어도 이 때 이후에 후궁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문효세자와 옹주 출생[편집]

1780년(정조 4년)[34]과 1781년(정조 5년)[35]에 임신 중이었는데 유산 했다.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인시(새벽3시~5시)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36] 이날 혜경궁은 본가에서 데려온 유모 ‘아지’와 몸종 ‘복례’를 호산청으로 보내서 해산을 돕게 했다.[37]

정조는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고[38] 정5품 상의였던 의빈을 정3품 소용의 품계를 내리고[39] 소용방(昭容房)에 대한 공상을 허락했다.[40] 하지만 9월 15일에 영의정 서명선(徐命善)과 호조 판서 김화진(金華鎭) 등이 소용의 궁방에 그 달 사용할 물품을 예에 따라 올릴 것을 청하자 허락하지 않았다. 인심이 예전 같지 못하고 세도가 날로 떨어지는 때에 자신의 본분을 지키지 않고 신하와 내통하게 된다면 정치와 조정에 누가 되기 때문이었다.[41] 같은 날 상정각(誠正閣)에서 열린 차대(次對)에서 정조는 예전에 의빈의 오빠 성식(成軾)에게 "척리로서 폐단을 만들면 극형에 처하는 죄에 이르게 될 것이니 거듭해서 경계하라."고 타이르며 가르쳤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날 외척(外戚)을 단속 한다는 이유로 의빈의 오빠 성식(成軾)을 파면했다.[42] 《이재난고》에 따르면 낮은 벼슬에 불과한 성식이 파면 당한 이유는 문효세자 출생 이후에도 계속 유지 되고 있는 화빈 윤씨의 산실청 때문이었다. 이후 성식은 군문의 명령을 받고 호조 서리가 되었다.[43] 아마도 외척이 된 성식을 왕을 호위하는 군영인 어영청에 두는 대신, 호조에 두는 것이 알맞다고 판단한 듯 하다. 《일성록》속의 성식(成軾)과 《창녕성씨상곡공파보》에 기록된 성식(成湜)은 동일 인물로 대략 1789년(정조 13년)에 부사용이 되었고 이후 성완(成浣)으로 개명 했다.[44]

같은 해 11월에 영의정 서명선 등이 왕자(문효세자)를 원자정호(元子定號) 하라는 명을 내려달라고 아뢰었다. 정조는 “내가 망설였던 것은 복을 아끼려는 뜻에서였지만, 이제 이 일로 끊임없이 서로 버틴다면 도리어 복을 아끼는 뜻이 아니니 또한 염려스럽다.”는 입장을 밝히고는 왕자를 원자로 정했다.[45] 12월에는 영의정 서명선[46], 좌의정 이복원이 원자의 생모에게 품계를 올려야 된다고 아뢰었다.[47] 정조는 왕세자 책봉 후에 하려 했는데 서명선의 주청이 이어지자 승인 했다. 1783년(정조 7년) 2월 19일에 의빈(宜嬪)으로 승격 되었는데 처음에 정조는 빈호를 대신들이 정하라고 했다. 좌의정 이복원과 우의정 김익이 ‘철(哲), 태(泰), 유(裕), 흥(興), 수(綏)’ 자를 말하자 정조가 ‘의(宜)’자로 하라고 직접 정했다.[48]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에 옹주를 낳았다. 이 날은 반가운 비가 내렸고, 정조는“조금 전에 순산(順産)하여 딸을 얻었다. 아들이 있는 데다가 또 딸이 생겼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라 하였다.[49] 7월 2일에는 당시 원자(元子)였던 문효세자가 3세의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 되었다. 정조의 차남 순조가 11세에 왕세자로 책봉된 것과 비교하면 무척 이른 일이었다.[50] 의빈의 오빠 성식(成軾)과 이름 불명의 다른 오빠는 동궁의 내례(內隸)가 되었는데[51] 성식(성완)과 성협(成浹)이었다. 성담(成湛)은 문효세자가 세자로 책봉되기 네 달 전에 사망 했고[52] 성숙(成淑)은 무과에 합격하지 못했으며, 성흡(成洽)은 무과에 합격 했으나 의빈의 막냇동생이었다.

화빈 윤씨 산실청 존속 문제[편집]

화빈 윤씨가 임신하자 1781년(정조 5년) 1월 17일에 산실청을 설치했는데[53] 3월 15일에 정조는 "출산할 징후가 없으니 답답하고 지루하고 기대감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고 했다.[54] 이후 계속 기다렸으나 11월 2일에 임신한지 10여 개월이 되었어도 여전히 출산 소식이 없었다.[55] 의빈은 1780년(정조 5년)과 1781년(정조 6년)에 임신 중이었으나 모두 유산했고 공적인 기록에서 의빈은 1782년(정조 6년) 전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1782년(정조 6년)에 문효세자가 태어나고 원자로 책봉된 후에도 화빈의 산실청은 유지되고 있었다. 대사간 신응현(申應顯)이 이에 대해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니 신하들은 기뻐하고 다행스러워하는 마음만 있어야 하는데 어린 원자를 농락하고 알 수 없는 말을 하여 조정을 의혹 시킨다.”며 벼슬 명부에서 삭제 했다.[56] 신응현은 1789년(정조 13년)에 다시 대사간으로 등용되었다.[57] 세자 책봉을 앞두고 화빈의 산실청이 존속 되고 있는 것은 큰 문제인데 정조의 행동에는 의문이 남는다.

1787년(정조 11년)에 다시 문제가 제기되었다. 산실청이 30개월 동안 유지 되었다는 영의정 김치인의 말을 근거로 보면 화빈의 산실청은 1781년(정조 5년) 1월부터 1783년(정조 7년) 7월까지 존속 되었다. 7월은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된 달이었다. 정조는 1782년(정조 6년) 때와는 다르게 신하들의 주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화빈의 고모부가 되는 조시위(趙時偉)는 1780년(정조 4년) 이후로 임금의 외척을 자칭하면서 조정 일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하고, 문효세자의 출생 때는 “호칭 정하는 일을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는 발언[58], 화빈의 산실청 문제 등으로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다.[59]

본가 증직 연기[편집]

1784년(정조 8년)에 형조판서 조시준이 《속대전》에 왕세자 사친의 본가에 대해 증직하는 규정이 있으니 거행하기를 요청하자 정조는 세밀하게 알아보고 처리하겠다고 했다.[60] 이후 영의정 서명선이 다시 아뢰자 추증에 관해 논의 하다가 거조(임금에게 아뢰는 조항)를 내면 깊이 헤아려 비답을 내리겠다고 했다.[61] 1785년(정조 9년)에는 좌의정 홍낙성이 왕세자 사친의 본가를 증직하는 일이 급하니 시행하기를 요청했으나 정조는 법전 내용이 상세하지 못한 점, 홍봉한의 지처는 어디에 추증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 문효세자를 효의왕후의 아들로 삼았으니 세자 사친의 부친에 대한 추증은 중요한 관계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매번 허락하지 않았다.[62] 12월에 홍낙성이 다시 아뢰자 정조는 급한 것이 아니니 내년 봄을 기다려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재차 미루었다.[63]

1786년(정조 10년)에 좌의정 이복원이 왕세자 사친 본가에 대한 증직은 법전에 이미 행하도록 되어 있고 곧 《선원보략》을 수정하니 즉시 거행해야 한다고 아뢰자, 그제야 정조가 승인 했다.[64]

문효세자와 옹주 요절[편집]

옹주는 1784년 5월에 궁궐 밖으로 피접을 나갔는데 5월 12일에 경풍(驚風)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65][66] 문효세자는 당시 유행하던 홍역으로 1786년 5월 11일 미시(오후 1시~3시)에 창경궁 자경전 동쪽 행각에서 사망했다.

사망[편집]

의빈은 마음이 약해서 칠정(七情, 마음의 병) 증세가 있는데 문효세자 사망 이후 중병에 걸렸고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67] 정조가 1786년(정조 10년) 윤 7월 21일부터 9월 7일까지 창덕궁과 경희궁을 오가며 지낸 것으로 보아 의빈은 늦어도 윤 7월에 경희궁으로 떠나서 9월 초에는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68] 정조는 매일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는 항상 검열했으며 약봉지와 약그릇은 모두 침실 안에 보관하고 쓰는 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786년 9월 14일 미시(오후 1시~3시)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임신 9개월[69]의 몸으로 사망했다.

사인에 대한 추정[편집]

《어제의빈묘지명》과《이재난고》에 기록된 당시 의빈의 증세는 대부분 임신중독증의 증상과 일치한다(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음, 정신 혼미, 사지가 뻣뻣해짐, 명치 부위의 통증 등). 또한 임신중독증의 원인 중 하나가 노산인데, 의빈 성씨 역시 당시 매우 늦은 나이인 34세에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임신중독증은 치명적인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는데, 의빈 성씨 역시 결국 졸하였다.

사후[편집]

예장[편집]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70]

정조는 의빈의 상례(喪禮)를 영빈 이씨의 규례대로 후정(後庭) 1등의 예로 거행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 해에 흉년이 들었고 문효세자를 예장할 때와 칙명을 전달하는 사신의 행차 때 많은 돈을 써서 나랏돈에 손을 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호조 재력도 탕진 되어서 도감(都監)을 세우지 못하고 [71] 모든 비용을 절감하여 호조와 전의감에 특별히 따로 설치하여 예장을 거행하되 절차는 영빈 이씨의 규례를 따랐다.[72][73] 9월 16일 묘시(오전 5시~7시)에 중희당에서 의빈을 입관하고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 빈소를 마련했다.[74] [75] 11월 20일에 효창원(孝昌園) 왼쪽 언덕 임좌(壬坐)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76]

의빈묘(宜嬪墓)는 효창원(孝昌園)과 한 곳에 위치하여 서로 백 걸음쯤 떨어져 있는데 이는 정조가 의빈의 소망을 그대로 따랐다.[77] 숙종숙빈 최씨의 묫자리를 명선공주명혜공주의 묘 근처로 정한 내관(內官) 장후재(張厚載)를 파직 시키고 다시 정하라고 했던 일과 비교하면 이례적이었다.[78] 원래 효창원(孝昌園) 영역은 지금의 효창동, 청파동, 공덕동 일대로 묘역이 굉장히 넓고 송림이 울창했다. 한 곳에 있는 의빈묘(宜嬪墓)는 곡장이 삼면으로 둘러져 있고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한쌍, 문인석 한쌍, 묘상표석, 비각, 제각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의빈묘(宜嬪墓)는 서삼릉 내 후궁 묘역으로, 1944년에 효창원(孝昌園)은 의령원(懿寧園) 앞으로 이장 되었다.[79]

독살설[편집]

1786년(정조 10년) 11월 20일에 상계군(常溪君)이 의문사 하고[80] 12월 1일에 정순왕후는 의빈과 문효세자는 온갖 증세가 처음부터 괴이 했는데 이는 은언군이 아들 상계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독살 했다고 주장하며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식음을 전폐하겠다는 언문 교지를 내렸다.[81] 이후 구선복(具善復)이 상계군(常溪君)을 추대 하려 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82] 구선복은 능지처사 되고[83] 은언군(恩彦君)은 강화도로 유배 되었다.[84] 12월 27일에 손용득(孫龍得)은 내관 이윤묵(李允默)이 의빈을 독살했다는 의혹스러운 소문이 파다하다고 했다. 정조는 의빈의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반드시 직접 검열했기 때문에 근거 없는 말이라고 했다. 이에 손용득은 유배형을 받았고[85] 이윤묵은 당시 이미 유배 중이었다.[86] 또한 민간에서는 화빈 윤씨가 독을 썼다는 소문도 있었다.[87]

사당[편집]

의빈묘[편집]

1786년(정조 10년) 11월 18일에 의빈의 예장을 앞두고 궁(宮)과 묘(墓)의 제향은 영빈 이씨의 전례를 따랐다. 당시 영빈은 시호 의열(義烈)을 자체로 해서 사당은 의열궁(義烈宮), 무덤은 의열묘(義烈墓)로 호칭했다. 의빈은 궁호(宮號)를 정하지 않았고 한성부 북부 안국방(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사당 의빈묘(宜嬪廟)가 세워졌다.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文禧廟)는 사도세자의 사당 경모궁(景慕宮) 남쪽 담장 밖에 있었는데 인정을 헤아려 의빈묘 서쪽 담장 밖으로 옮기게 되면서 모자의 사당이 한 곳에 있게 되었다.[88] 1790년(정조 14년)에 간행된 《문희묘영건청등록》의 정당이하제처 도설(正堂以下諸處 圖說)에 의빈의 사당은 의빈묘로 기록했다.[89]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대의 《승정원일기》에 의빈묘로 호칭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데 정조부터 순종 재위기간 동안 의빈묘라는 명칭만 쓴 것은 아니었다.

의빈궁[편집]

1787년(정조 11년)에 정조가 의빈의 사당을 의빈궁(宜嬪宮)이라고 부른 것이 시초였다.[90] 1797년(정조 21년) 이후에 쓰인 《제물등록》에 따르면 육상궁(숙빈 최씨), 선희궁(영빈 이씨), 의빈궁이 명일(명절, 국경일 총칭)에 작헌례(사당이나 능원에서 술잔을 올리는 예식)를 같은 예로 지냈다. [91] 1799년(정조 23년)에 작성된 《사전사례편고》에는 의빈궁묘, 덕흥궁묘(덕흥대원군), 대빈궁묘(희빈 장씨), 선희궁묘(영빈 이씨)가 사궁(私宮)에 속해 있다고 기록했다.[92] 1865년(고종 2년)에 편찬한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 《대전회통》에는 의빈궁이라고 표시 했다. 즉, 1797년(정조 21년) 이후에 의빈이라는 호칭 자체로 사당을 의빈궁이라고 한 것으로 보여 진다.

안현궁[편집]

1786년(정조 10년)에 의빈의 빈소를 안현의 본궁에 차려서 안현궁(安峴宮)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예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곳이 한성부 남부 회현방 송현에 있어서 송현궁(松峴宮)이라고 했다.[93] 1793년(정조 17년) 황해도 은율현에 있는 안현궁의 궁방[94], 1807년(순조 7년)에 정순왕후의 국장 과정을 담은 《효안전일기》[95], 1832년(순조 32년)에 안현궁의 하인에 대한 일[96], 1879년(고종 16년)에 쓴 《지각관청일기》[97], 1894년(고종 31년)에 간행한 《의판》[98], 1904년(광무 8년)에 수정한 순조의 국장 과정을 담은 《효성전일기》[99] 등에서 안현궁으로 지칭하기도 했는데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칠궁(七宮) 제향 및 폐지[편집]

1873년(고종 10년)에 개편한 《태상지》에서 궁(宮)은 저경궁(인빈 김씨), 육상궁(숙빈 최씨), 경우궁(유빈 박씨), 대빈궁(희빈 장씨), 연호궁(정빈 이씨), 선희궁(영빈 이씨), 의빈궁이 있었다. 이 중에서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의빈궁은 1870년(고종 7년)에 육상궁 별묘에 합봉 했다고 기록 했다.[100] 1898년(광무 2년) 《향수조사책》에서 이 궁들을 칠궁(七宮)으로 호칭 했다.[101] 1908년(융희 2년) 7월 23일에 제사 제도가 개정 되어서 칠궁에서 폐궁(廢宮)되어 매안(埋安)되고 제사는 의소태자문효세자의 원소(園所) 예법을 따랐다.[102] 다만 1908년(융희 2년) 9월 7일에 입안되고 결재 도장이 날인되어 있는 《향비규정(享費規定)》 4책에 의빈궁(宜嬪宮)의 제향(祭享)에 관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빈궁이라는 명칭까지 혁파 되지는 않았다.[103]

정조 어제문(正祖 御製文)[편집]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편집]

의빈 성씨가 사망하자 정조는 묘표(墓表)와 묘지명(墓誌銘)을 손수 지었다. 전면대자(前面大字)는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썼으며 비석 뒷면에 새긴 글은 서용보(徐龍輔)가 썼다. 1786년(정조 10년) 11월 7일[104]에 기록 되었고 비석은 11월에 세워졌다.[105]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문효가 병오(1786년) 5월에 죽고 여섯 달이 지나고 나서 9월 14일 갑신에 빈 또한 죽고 말았다. 석 달 뒤 11월 20일 경인에 율목동 문효의 묘 왼쪽 언덕 묏자리에 장사 지냈다. 빈은 자신을 잃고 문효를 따라 죽기를 늘 소원하더니 비로소 이제 문효의 무덤 곁으로 떠나가 버렸다. 빈은 장차 한을 풀고 문효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빈은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여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능히 이름을 구별할 줄 알고, 단정한 태도와 자세를 수양하고, 맑고 올곧고, 더욱 상서로이 화기로우며 온화했다. 열 살(영조 38년, 1762년) 이후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임금의 친척 집안 여인들이 모두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혈통으로 알았다. 타고난 기품이 아주 훌륭하게 뛰어나 능히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췄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용 했다. 심지어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옳은 길을 도회지에서 똑똑하게 분별하고 확고하게 지키니 적지 아니하게 놀랐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이에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죽음을 맹세했다. 나는 마음을 느끼고 더는 다그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사양했다. 이에 빈의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렸고 그러한 뒤에 비로소 내 명을 받들어 당석(자기 차례가 돌아온 날 밤에 잠자리를 같이 함) 했다. 밤의 세월이 지나 임신함으로써 임인(1782년) 9월에 세자를 낳았다. 이해 소용으로 봉해졌고 귀한 아들로 하여금 빠르게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다. 빈은 자기 의견만 옳다고 여기는 바를 더욱 스스로 억눌렀다. 내전(효의왕후)을 대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하여 예를 갖추고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섬겼다. 시침(임금을 모시고 잠) 할 때는 "이제부터 국세를 의탁할 데가 있지만 위로 내전이 있고 또 후궁이 있습니다."라며 또 번번이 당석이 잘못 되었다며 사양하고 거절하며 피했다.

내전(효의왕후)은 그 자식을 이미 받아들였고, 양육 할 때는 반드시 생모에게 맡겼는데 조정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규칙과 정례였다. 빈은 감히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여 처리하지 않고 내전을 따랐고 내전은 빈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고 점차 자라기를 기다렸다. 빈은 세자를 어루만질 때는 생각하여 몸과 마음가짐을 조심했고, 밤에는 반드시 아침이 밝을 때까지 밝은 촛불을 두었고, 잘 때는 옷을 벗은 적이 없었는데 5년 동안 한 결 같았다. 또 나날이 천한 일을 몸소 했고, 말을 할 때는 극진히 존중히 여기고 공경했다.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면 빈은 "왕세자는 내전(효의왕후)의 아들입니다. 내가 낳았다고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겠습니까?"라고 했다. 빈의 거처는 겨우 비바람을 가리어 막고, 의복과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얼마 되지 않아 변변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지금 지체가 높고 귀한 신분은 이미 나에게는 과분합니다. 도리어 스스로를 자랑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다면 어찌 더욱이 몸에만 재앙이 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궁이 복을 오래 누릴 수 있도록 생활을 검소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처음 (1786년) 5월에 변고가 일어나고 떠나보낼 때 말과 얼굴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이 혹 괴이하게 여겨 어찌 개의치 아니하냐고 물어보니 "내 몸은 내 몸이 아닙니다. 지금 보는 나라는 위태함이 위엄이 머리카락과 같습니다. 다행히 내가 임신 했지만 늘어놓고 슬퍼하고 이와 같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내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과 같아 나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헌데 어찌하여 병이 들었단 말인가? 증세는 의술과 약으로 고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았는데 매일 세수할 때 내가 가서 보고 살폈다. 정신은 혼미하여 어지럽고 사지는 움직일 수 없어도 나를 대할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고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기운을 내서 메아리처럼 응답했다. 임종하기 전날 저녁에 내가 가자 갑자기 슬퍼하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며 청했다. 이에 내가 꾸짖으며 "평상시 나를 볼 때는 근심 어린 얼굴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라고 물었다. 빈이 말하기를 "앞서서 내전(효의왕후)께 아들이 생긴 경사는 축복이었습니다. 천신(신하가 임금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 이름)이 다시 자식을 가져서 종사는 매우 다행이지만, 사심을 마음속으로 억눌러 견뎌내지 못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복이 지나치게 과분해서 끝내 병이 중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마음에 차지 않으나 오직 오래도록 지닌 소원은 죽을 고비에 임하여도 아직 얻지 못하여 근심입니다. 그러니 정전에 자주 가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하면 경사가 있을 것이니, 장차 땅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감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하고 자리에 나아가서 내가 들어가서 보니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전(효의왕후)은 빈이 진실로 나라를 위했다며 정성스럽게 말했는데 거짓됨이 없었다. 지난날을 생각하건대 어찌 아닐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죽음을 잊지 아니하고 맛보는 일과 언행을 조심했는데 빈의 죽음을 슬퍼하고 정성껏 임하는 태도와 마음은 매우 친밀하여 자매를 잃은 마음이었다. 온 궁 안 사람이 모두 빈의 죽음을 한탄하여 한숨 쉬고 슬퍼하며 애처로워했고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빈이 작위를 받고나서 나는 더 엄하게 단단히 단속하여 이따금 사람이 견디지 못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빈은 한 뜻을 기쁘고 좋게 웃어른의 명령을 좇았다. 일이 혹 더욱 은혜에 해당 되면 위축되어 더욱 멀리하고 견지 했으니 자못 겸손했다. 빈의 선산 터가 이롭지 못하여 의논하여 이장하자고 하자 빈이 간하여 말하기를 "천한 집안의 일에 감히 마음대로 안배하여 번잡하게 관청의 돈을 쓰는 것은 사사로운 개인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중한 바인데 네가 불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바라건대 스스로 의복을 팔아서 이장 비용에 보태라."고 일렀다. 동궁의 외가 사친은 규정에 따라 증 찬성에 추증하지만 나는 이전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5월에 문효세자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교지를 내렸는데 빈은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한 집안 사람으로서 분황(죽은 사람에게 벼슬이 추증되면 행하는 의식)을 예로서 중지 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벼슬을 더 높여서 내려주는 것은 곧 국가의 법전이 있는 바인데 감히 전하께서 내려주는 물건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뜻밖에도 어찌 감히 장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내가 빈이 매양 애석해서 따뜻한 밥과 비단, 모시를 내렸으나 도리어 궁의 희빈(姬嬪)만 못하였다. 비록 자기를 굽히고 의지를 꺾어 검소함을 따랐으나 오히려 가난하고 군색함을 염려하며 궁중 사람에게 늘 너그러이 빌려줬다. 결국에 가서는 세상을 떠나자 상자에는 남은 비단이 없어서 염습할 때 모두 시장에서 가져왔고, 살아생전에는 은수저를 만들지 않아서 반함(염습 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림)을 할 때 버드나무로 대신 했다. 궁인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하기를 "빈이 그 청빈함을 잘 알고 지키니 마침내 이에 이른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빈의 두 오라버니는 곤궁하여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으나 사심으로 관여한 적이 없었다. 내가 "조정의 관작은 진실로 부당하게 남수(정해진 범위를 벗어나게 벼슬이나 물품 따위를 함부로 마구 줌)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남는 녹봉으로 저 배고픔과 추위를 구원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빈이 걱정하는 모양으로 대답하길 "궁방이 세워진 이후 한 물건도 제멋대로 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사가의 천인에게 재물의 은덕을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빈의 장례 때 그 친족은 다른 사람에게서 옷과 신발을 빌렸다. 궁빈의 사친은 관직명이 없는 사람은 궁중 출입을 허락을 받을 수 없으나 오래 전부터 본궁에서 접견하라고 허락했었다. 그러나 빈이 본궁에 나가 기거 하면서 사친과 여러 해 동안 격조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문 앞에 이르지 못하게 했다. 말하기를 "올 때 임금에게 여쭈고 아뢰어 뜻을 받들지 아니 하고서는 감히 불러내어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릇 형제가 몹시 가난하여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의탁하고자 하면 가족과 떨어지고자 했다. 단란함은 사람이 항상 품고 있는 심정인데 빈은 어찌 오직 다른 사람과 다르단 말인가. 내가 내린 명령은 한 가지 일이라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조심히 정성껏 지켰는데, 이는 실제로 사실을 경험했다. 궁에서 산지 20여년인데 일찍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좋지 않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혹여 말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거나 의심을 접하면 반드시 자세하고 소상하게 하여 스스로 완전히 타당함에 이르게 했다.

나는 보통 때 집안 밖의 일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빈도 역시 상황을 따르며 술잔을 주고받는데 익숙하고 내명부에 대해 꺼내지 않았다. 내가 혹 처소에 도착할 때면 궁중의 계집종들은 모두 황급히 숨어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뉘우치고 경계함에 힘썼고 아랫사람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았다.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 하고, 다른 일도 가까이 하여 붓글씨도 역시 스스로 범상함을 넘었다. 수리 학문을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고, 정신과 식견은 느끼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 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과 기예도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 아아, 빈의 장사(葬事)에 반드시 내가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지었다. 어찌 재주와 얼굴을 잊지 아니하겠는가.

나는 궁액(각 궁에 있던 하인)을 엄히 다스리고 가까운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하는데 일을 주면 헤아려서 명령을 받드는 일이 적었다. 빈을 후궁 반열에 둔지 20년인데 단단히 타일러서 잘못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게 했다. 이에 곧 명심하고 작은 실수도 하지 않고 조심하며 응대하였는데 법도가 저절로 있었고,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마땅히 출중했다. 이것은 뛰어난 현인도 분명히 어렵다. 본분을 각별히 정성껏 지키며 신분의 엄격함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하였다. 사사로이 윗사람을 찾아가서 청탁하는 일을 경계하고 엄히 끊어내고 가득 이루어놓음에 있어서 염려하였는데 이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에 이른 것이 크고 옳고 그름이 매우 분명하지만 감히 입을 열 수 없고, 일이 되어가는 형세는 손을 댈 수 없으면 능히 오랫동안 정성을 쌓고 있는 힘을 다해 곧바로 나아가 물러서지 않았다. 가진 것의 의리로 하여금 끝내 마땅히 바른 곳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는 책을 읽은 사대부가 쉽게 갖추지 못하는 바이다.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일에 능하고 절개와 지조가 있다고 여기고 전하여져서 당대의 미담이 될 것이다.

후일 빈의 상론(고인의 언행, 인격을 평가함)은 이와 같다. 빈의 출신은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하여 스승에게 배우지 못하고 후궁이 되었지만 학문을 배우지 않아도 알았다. 내전(효의왕후)을 위해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한 것은 하늘과 땅이 마땅히 알고 금석(쇠붙이나 돌로 만든 기구)도 가히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빈은 높음과 귀함, 임금의 은덕을 입은 영광을 즐거움으로 삼기에 거듭 부족하다고 했다. 마음에 잊히지 않는 정성으로 매우 간절히 청하며 반드시 내전에게 정성을 다하겠다고 하며 더구나 장차 상심하고 슬피 울면서 평생 동안 내전을 따르겠다고 지극히 바랐다. 비록 옛날에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충정이지만 배에 칼을 꽂은 정성도 이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으니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에서 드러났음을 경험 할 수 있다. 이에 마땅히 낳은 어진 아들은 영광된 왕세자가 되고, 공을 세워서 국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편안하고, 경사로이 자식을 길러 왕족이 번창되어야 할 터인데 나라의 운세가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 문효세자가 죽은 변이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이에 대략 찬차(시문을 가려 뽑아서 순서를 매김) 하였는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 글이 길어졌다.

그대 빈은 계유년(1753년)생이고 향년 34세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문효세자이고 딸은 해를 못 넘기고 죽었다. 빈의 본관은 창녕이고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시조이다. 인보의 아들은 문하시중으로 지낸 송국이다. 그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고 자는 여완이다. 여완의 큰 아들은 석린이고, 둘째 아들은 석용이며, 셋째 아들은 석인이다. 성석인은 예조판서와 대제학 직위에 올랐었고 시호는 정평인데 이 사람이 빈의 선조다. 그러나 이후 집안이 중간에 계보를 잃어버렸다. 7대조 만종은 제릉(태조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의 무덤) 참봉이고, 고조 성경은 군자감 정이다. 빈의 아버지는 증 찬성 윤우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임씨인데 통례원(조선시대 국가 의례를 관장한 관서) 인의 임종주의 딸이다.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하늘을 따라 정중하게 행동하고 말을 하면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 몸은 정중하게 행동하고 입은 극진한 말을 했으나 복록이 은덕에 보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운명인가보다. 저 고요한 율곡의 언덕은 문효세자가 잠든 곳이니 영원토록 서로를 지켜줄 것이다. 생각하건대 멀고 오랜 세월동안 배회하며 탄식하고 근심할 것이다.

어제의빈묘표(御製宜嬪墓表)[편집]

정조는 1786년에 직접 의빈의 사적 및 덕행을 기리는 글을 썼다.[106]

내가 즉위한지 10년째 되는 병오 9월 갑신일(1786년 음력 9월 14일)에 의빈 성씨가 사망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문효세자가 죽었다. 빈이 임신하여 해산할 달에 거의 이르렀는데 죽었다.

빈은 사망하기 전날 밤에 옷섶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국가의 자손 번창 소망이 효의왕후가 아닌 천한 몸에서 나왔는데 병에 걸려 죽으니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이제부터 자주 효의왕후에게 거둥하시어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고 기르며 지내지 못 한 것을 항상 근심하고 탄식했다. 승은을 받기 시작할 때는 감히 효의왕후를 대신 하여 당석 할 수 없다며 간절히 사양했다. 내가 잠시 틈을 타서 무언가에 빗대어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해도 한 결 같이 온통 매우 간절했다. 더구나 빈은 숨이 끊어져갈 쯤에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완연히 전하니 감동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 표정을 고치고 약속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시침하는 것을 보면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은 항상 정위(정실)가 자신을 핍박하고 근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에 정실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였다. 빈은 병을 앓다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랑에 끌려 잊지 못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후에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빈의 권력과 부귀는 스스로 높여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빈은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한 결 같이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 현명함이 어찌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그리고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생활을 검소하게 하여 복을 오래 누리도록 함)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엄히 다스려서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은총을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지키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분명하게 해냈다. 또한 내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빈은 궁궐 처소에서 지낸지 20년이다.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으며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 빈을 잃은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 7월 8일(1753년 음력 7월 8일) 생이고 득년(향년) 34세다. 본관은 창녕이며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비조(시조)이다. 성인보의 아들은 시중으로 지낸 성송국이다. 시중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며 자는 여완으로 시사했다. 나는 빈의 집안 맏아들이 조상이 엄습하여 세상이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가 제릉참봉 성만종으로 하여금 비로소 집안이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또 다시 삼대 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성경이 군자감 정으로 지냈는데 곧 빈의 7대조로 고조부와 같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다. 빈의 부모는 법도에 따라 추증 되었는데 이는 문효세자의 외조부모였다.
저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와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묏자리)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묻고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찾아오는 사람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해 하도록 할 따름이다.

사랑하는 빈의 불행한 운명은 위에 적힌 사실과 같다.

어제의빈치제제문(御製宜嬪致祭祭文)[편집]

정조가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해 직접 지은 어제 제문이고 1786년(정조 10년) 11월 7일[107]에 작성했다.[108]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內各祭祝文)[편집]

정조가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해 발인부터 3년 탈상 후 담제까지 제사 때마다 지은 어제 제축문(御製 祭祝文)의 서식을 적었다.[109]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後各祭祝文)[편집]

의빈 성씨의 상장례를 모두 마치고 탈상한 후 1년 동안 지낸 각종 제사 때 정조가 작성한 어제 축문을 모은 것이다.[110]

조상[편집]

창녕 성씨(昌寧 成氏) 상곡공파 허백당계[111]

  • 11대 조부 : 예조판서 대제학 성현(禮曹判書 大提學 成俔, 허백당, 1439 ~ 1504)
  • 11대 조모 : 증 정경부인 한산 이씨(贈 貞敬夫人 韓山 李氏) - 상례 이숙(相禮 李塾)의 딸
  • 10대 조부 : 예조판서 대제학 성세창예조판서 대제학 성세창(禮曹判書 大提學 成世昌, 1481 ~ 1548)
  • 10대 조모 : 정경부인 전주 이씨(貞敬夫人 全州 李氏) - 장양부정 이주(長陽副正 李儔)의 딸
  • 10대 조모 : 정경부인 고성 이씨(貞敬夫人 固城 李氏) - 참판 이육(參判 李陸)의 딸
  • 9대 조부 : 증 참판 성해(贈 參判 成諧, 1497 ~ 1556)
  • 9대 조모 : 평산 신씨(平山 申氏) - 사성 신엄(司成 申儼)의 딸
  • 9대 조모 : 철성 이씨(鐵城 李氏) - 판관 이황(判官 李滉)의 딸
  • 8대 조부 : 현감 성자심(縣監 成子深)
  • 8대 조모 : 평산 신씨(平山 申氏) - 진사 신유(進士 申裕)의 딸
  • 7대 조부 : 제릉 참봉 성만종(齊陵 參奉 成萬種)[112]
  • 7대 조모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6대 조부 : 성운(成䉙)
  • 6대 조모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증 영의정 김응무(贈 領議政 金應武)의 딸
  • 5대 조부 : 노사직 성숙양(籚司直 成叔良)
  • 5대 조모 : 대구 백씨(大邱 白氏) - 계공랑 백수(啓功郎 白壽)의 딸
  • 고조부 : 군자감 정 성경(軍資監 正 成景)[113]
  • 고조모 : 김해 김씨(金海 金氏) - 진사 김이남(進士 金爾南)의 딸
  • 증조부 : 증 이조참판 성근립(贈 吏曹參判 成謹立, 1639 ~ 1709)[114]
  • 증조모 : 증 정부인 충주 유씨(贈 貞夫人 忠州 劉氏, 1645 ~ 1705) - 유효천(劉孝天)의 딸

가족관계[편집]

  • 조부 : 증 이조판서 성수산(贈 吏曹判書 成壽山, 1668 ~ 1749)[115]
  • 조모 : 증 정부인 김해 김씨(贈 貞夫人 金海 金氏, 1674 ~ 1698) - 통덕랑 김몽설(通德郎 金夢說)의 딸
  • 조모 : 증 정부인 창원 황씨(贈 貞夫人 昌原 黄氏, 1677 ~ 1747) - 현감 황상(縣監 黃晌)의 딸
    • 백부 : 성윤조(成胤祚)
    • 백모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현감 박성진(縣監 朴成震)의 딸
      • 사촌 : 성호(成灝)
      • 사촌 올케 : 경주 김씨(金海 金氏) - 김후석(金厚錫)의 딸
      • 사촌 : 성연(成淵)
      • 사촌 올케 : 청송 심씨(靑松 沈氏) - 심억(沈億)의 딸
    • 아버지 :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 1709 ~ 1769)
    • 어머니 : 장흥 마씨(長興 馬氏, 1715 ~ 1775) - 직장 마시행(直長 馬時行)의 딸
    • 친어머니 :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 1722 ~ 1756) - 통덕랑 임종주(通德郞 林宗胄)의 딸
    • 어머니 : 단양 지씨(丹陽 池氏)
      • 오빠 : 성담(成湛, 1741 ~ 1783) - 무과(武科)
      • 새언니 : 성주 이씨(星州 李氏, 1739 ~ 1770) - 통덕랑 이후방(通德郞 李后芳)의 딸
      • 새언니 : 전주 이씨(全州 李氏, 1751 ~ 1799)
        • 조카 : 현감 성국민(縣監 成國民, 1766 ~ 1809)
        • 질부 : 강릉 유씨(江陵 劉氏, 1768 ~ 1809) - 유창연(劉昌淵)의 딸, 동지중추부사 유계조(同知中樞府事 兪啓祚)의 손녀
        • 조카 : 성희민(成羲民, 1780 ~ 1809)
        • 질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이학기(李學基)의 딸
      • 오빠 : 절충장군 성협(折衝將軍 成浹, 1742 ~ 1810)
      • 새언니 : 강릉 최씨(江陵 崔氏)
      • 새언니 : 단양 문씨(丹陽 文氏)
        • 조카 : 선략장군 성도민(宣略將軍 成道民)
        • 질부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박춘식(朴春植)의 딸
        • 조카 : 성호민(成皥民)
        • 질부 : 청주 한씨(淸州 韓氏) - 한종휴(韓宗休)의 딸
      • 오빠 : 부사용 성완(副司勇 成浣, 1743 ~ 1806) - 성식(成湜)에서 개명
      • 새언니 : 청주 한씨(淸州 韓氏, 1742~1794)
        • 조카 : 첨정 성순민(僉正 成舜民, 1763 ~ 1849)
        • 질부 : 단양 우씨(丹陽 禹氏) - 우세주(禹世疇)의 딸
        • 조카 : 성덕민(成德民, 1782 ~ 1828)
        • 질부 : 의령 남씨(宜寧 南氏, 1780 ~ 1812) - 남격(南格)의 딸
        • 조카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질서 : 조상주 (趙尙周) - 한양 조씨(漢陽 趙氏)
      • 오빠 : 성숙(成淑)
      • 새언니 : 미상
        • 조카 : 성여민(成與民)
      • 언니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형부 : 강덕순(康德淳) - 승평 강씨(昇平 康氏)
      • 언니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형부 : 윤귀영(尹貴永) - 파평 윤씨(坡平 尹氏)
      • 언니 : 영의정 홍낙성(領議政 洪樂性, 1718∼1798)의 첩[116] - 족보 미등록
      • 동생 : 성흡(成洽) - 무과(武科)
      • 올케 : 금천 나씨(錦川 羅氏) - 나성찬(羅星燦)의 딸
        • 조카 : 성준민(成俊民)
    • 숙부 : 성연지(成淵祉)
    • 고모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고모부 : 정희규(鄭熙揆) - 연일 정씨(延日 鄭氏)
    • 고모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고모부 : 임성징(林聖徴) - 임천 임씨(林川 林氏)
    • 고모 : 공조판서 정방(工曹判書 鄭枋, 1707~1789)의 첩[117] - 족보 미등록
  • 6촌 언니 : 정득환(鄭得煥, 1735~1771)[118]의 첩[119] - 족보 미등록

왕가(王家 : 전주 이씨)

  • 시조부 : 제21대 영조대왕(英祖大王, 1694~1776, 재위 1724~1776)
  • 시조모 :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1757)
  • 시조모 :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1805)
  • 생시조모 : 소유영빈 이씨(昭裕暎嬪 李氏, 1696~1764)
    • 시아버지 : 추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 ~ 1762)
    • 시어머니 : 추존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1735 ~ 1815)
      • 남편 : 제22대 정조선황제 (正祖宣皇帝,1752~1800, 재위 1776~1800)
        • 첫째 : (1780년 음력 12월 이전~음력 12월 8일 이후) 유산
        • 둘째 : (1781년 음력 7월 이전~음력 7월 이후) 유산
        • 아들 : 문효세자 (文孝世子, 1782년 음력 9월 7일~1786년 음력 5월 11일)
        • 딸 : 옹주 (翁主, 1784년 윤달 3월 20일~1784년 음력 5월 12일)
        • 다섯째 : 1786년 음력 10월 출산 예정[120]- 복중 사망

관련 장소[편집]

거둥고개[편집]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로서, 정조가 효창원(孝昌園)에 거둥할 때 넘던 고개였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본래 의빈묘(宜嬪墓)와 효창원(孝昌園)이 한 영역에 있어서 정조는 효창원을 갈 때 의빈묘도 함께 방문 했었다.[121]

홍예동[편집]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공덕동에 있던 마을로서, 지금은 효창공원이 된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소인 효창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마을 이름이었다. 효창원의 봉분을 멀리서 보면 홍예(무지개)처럼 보이기 때문에 홍예분(紅霓墳)이라고도 하였다.[122]

의빈이 등장한 작품(현대)[편집]

소설[편집]

연도 제목 역할 작가 출판사
2020년 궐에서 사랑을 찾다 성화리 이유경 도서출판 윤송
2017년 옷소매 붉은 끝동 성덕임 강미강 도서출판 청어람
2017년 우아한 환생 의빈 성씨 이세 도서출판 청어람
2007년~2008년 이산 정조대왕 성송연 류은경 디오네
2005년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강건희 이혜경 도서출판 청어람
2005년 비단속옷 성연 이혜경 도서출판 청어람

드라마[편집]

연도 방송사 제목 역할 작가 배우
2007년~2008년 MBC 이산 성송연 김이영 이한나(아역) → 한지민(성인)
1989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 의빈 성씨 신봉승 정은숙

예능[편집]

방송일 방송사 제목 역할 배우
2019년 채널A 천일야사 성덕임 송도원
2018년 1월 25일 JTBC 차이나는 클라스》 46회 의빈 성씨
2017년 1월 1일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46회 언빌리버블 스토리 '왕이 사랑한 여자' 성덕임 구민주(아역) → 김하영(성인)

뮤지컬[편집]

연도 주최 주관 제목 역할 배우
2016년 수원시 수원시립공연단 정조-만천명월주인옹 성선우 홍민아

판소리[편집]

연도 주최 주관 제목 역할 배우
2017년 수원시 수원문화재단 정조가 성덕임 신유진

만화[편집]

날짜 장르 제목 소제목 작가 역할
2018년 5월 26일 네이버 웹툰 조선왕조실톡 311. 너같은 여자 처음이다 무적핑크(변지민) 성덕임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1.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德任)이다(昭容成氏 名德任)." 황윤석《이재난고》 권35, 정조 7년(1783) 2월 30일(신묘)
  2. "嬪生于英宗二十九年癸酉七月八日" 정조《어제의빈묘표》
  3.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9월 14일(갑신) 2번째 기사
  4. “宮 儲慶宮 仁嬪金氏 元宗私親, 毓祥宮 淑嬪崔氏 永宗私親, 景祐宮 綏嬪朴氏 純祖私親…大嬪宮 禧嬪張氏 景宗私親, 延祜宮 靖嬪李氏 眞宗私親, 宣禧宮 暎嬪李氏 莊獻私親, 宜嬪宮 宜嬪成氏 文孝私親” 《태상지》 3책
  5. “고려대학교 해외한국학자료센터 - 의빈궁(宜嬪宮)의 주전원(主殿院) 차하장(上下狀)”. 
  6. 《순종실록》2권, 1908년(순종 1년, 융희 2년) 7월 23일 양력 3번째기사
  7.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8. "嬪生于英宗二十九年癸酉七月八日" 정조 《어제의빈묘표》
  9. "元子私親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황윤석 《이재난고》 35권, 1783년(정조 7년) 2월 30일(신묘)
  10. "成昭容父 本故承旨韓俊增廳直也", "成氏之父 爲米布衙門庫直" 황윤석《이재난고》35권, 1784년(정조 8년) 10월 21일(계묘)
  11. 《승정원일기》 영조 29년(1753년) 6월 3일 정해 14/14 기사
  12. 《승정원일기》 영조 30년(1754년) 2월 1일 신사 20/25 기사
  13. 《승정원일기》 영조 31년(1755년) 6월 9일 신해 15/37 기사
  14. 《승정원일기》 영조 31년(1755년) 9월 15일 병술 19/26 기사
  15. 《승정원일기》 영조 37년(1761년) 7월 4일 경자 8/13 기사
  16. "配 長興馬氏 父 直長 時行 乙未生 乙未年 一一月一七日 卒" 《창녕성씨세보》 권4, 《창녕성씨상곡공파보》권1
  17. "墓 高陽郡 碧蹄邑 大慈里 龍伏 原駒洞 癸坐 有碣 三合袝" 《창녕성씨상곡공파보》권1
  18. "配 丹陽池氏 墓 春城郡 新東面 三川里 立石洞"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19. “昌平故判書鄭枋 初以炎文登明經科 近以京妾成姓者 與成嬪爲姑姪”, 황윤석 《이재난고》 44권, 1789년(정조 12년) 12월 10일(신유)
  20. “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亦卽洪樂性妾父”, 황윤석 《이재난고》 35권, 1783년(정조 7년) 2월 30일(신묘)
  21. “成哥之女 今東宮私親成貴人也 貴人之再從姊 卽鄭得煥之妾也”, 황윤석 《이재난고》 36권, 1785년(정조 9년) 9월 24일(경오)
  22. "母曰林贈貞敬夫人引儀宗胄女也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23. “配 扶安林氏 父 通德郎 宗胄 壬寅生 丙子年 六月八日 卒"《창녕성씨상곡공파보》
  24. "踰十歲選入"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25. "元子私親 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亦卽洪樂性妾父 而爲一錢布衙門該吏 犯逋七千兩 幾死而敗 則惠慶宮 爲收昭容于侍側 親鞠育" 황윤석 《이재난고》 35권, 1783년(정조 7년) 2월 30일(신묘)
  26. "乙酉 世孫有患候過進涼物屢朔不瘳洪相慮其頗近女色……." 박하원 《대천록》 3권, 을유(1765년, 영조 41년)
  27. 《일성록》 영조 42년 병술(1766년) 6월 14일(임자) 2번째 기사
  28.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29. "景福宮假衛將 成胤祐呈狀內, 素患痰癖之症, 近又添劇" 《승정원일기》 영조 30년(1754년) 5월 6일 갑신 20/35 기사
  30. "己丑年二月一日卒"《창녕성씨상곡공파보》
  31.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32. "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33. 《일성록》 정조 4년 경자(1780년) 2월 21일(경오) 4번째 기사
  34. ""尹嬪當於正月 就舘設産室 則二月分娩之期明矣 或言 內人中又有受胎者 亦已多月云" 황윤석《이재난고》권33, 정조 4년(1780) 12월 8일(임자)
  35. "自辛丑七月聞 成氏有娠 則嫌不復許來 而跡始疎云." 황윤석《이재난고》 권35, 정조 8년(1784) 10월 22일(갑진)
  36. “以壬寅九月七日寅時誕 世子于昌德宮之讌華堂。是夜。忽有一道紅光照 寢。如出日。比曉 世子誕焉。”김종수《몽오집》 권7, 〈묘지〉문효세자지문
  37. 《한중록》
  38. 《조선왕조실록》 14권, 정조 6년(1782년) 9월 7일 신축 1번째 기사
  39. 《일성록》 정조 6년 임인(1782년) 9월 7일(신축) 1번째 기사
  40. 《일성록》 정조 6년 임인(1782년) 9월 7일(신축) 6번째 기사
  41. 《정조실록》 14권, 정조 6년(1782년) 9월 15일 기유 2번째 기사
  42. 《일성록》정조 6년(1782) 9월 15일(기유) 3번째 기사
  43. 《이재난고》34권, 정조 6년(1782) 9월 초 7일(신축)
  44. "維乾隆五十四年歲次 乙酉 十一月癸未朔十五日 丁酉 國王遣臣 副司勇 成湜" 정조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
  45. 《일성록》 정조 6년 임인(1782) 11월 27일(경신) 1번째 기사
  46. 《일성록》 정조 6년 임인(1782년) 12월 9일(신미) 2번째 기사
  47. 《일성록》 정조 6년 임인(1782년) 12월 28일(경인) 5번째 기사
  48. 《일성록》 정조 7년 계묘(1783년) 2월 19일(경진) 13번째 기사
  49. 《일성록》 정조 8년(1784) 윤 3월 20일(을해) 2번째 기사
  50. 《정조실록》53권, 정조 24년(1800) 1월 1일(을해) 4번째 기사
  51. “有二兄 方爲東宮內隸云”《이재난고》38권, 정조 10년(1786) 5월 12일(갑인)
  52. 長子 湛 一七四一年 辛酉生 癸卯年 三月 一一日 卒" 《창녕성씨상곡공파보》
  53. 《정조실록》 11권, 5년 신축(1781년) 1월 17일(경인) 3번째 기사
  54. 《일성록》 정조 5년 신축(1781년) 3월 15일(무자) 2번째 기사
  55. 《일성록》 정조 5년(1781년) 11월 2일(경자) 5번째 기사
  56. 《정조실록》 15권, 정조 7년(1783년) 3월 3일 갑오 3번째 기사
  57. 《일성록》정조 13년 기유(1789) 2월 26일(계축) 2번째 기사
  58. 《정조대왕행장》
  59. 《일성록》 정조 11년(1787년) 1월 12일(신사) 5번째 기사
  60. 《일성록》 정조 8년 갑진(1784년) 9월 6일(무오) 5번째 기사
  61. 《일성록》 정조 8년 갑진(1784년) 12월 24일(을사) 1번째 기사
  62. 《일성록》 정조 9년 을사(1785년) 4월 24일(계묘) 1번째 기사
  63. 《일성록》 정조 9년 을사(1785년) 12월 6일(신사)
  64. 《일성록》 정조 10년 병오(1786년) 윤7월 29일(경자) 2번째 기사
  65. 《정조실록》17권, 정조 8년(1783) 5월 12일(병인) 1번째 기사
  66.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新生翁主阿只氏, 以驚風奄忽普慟 
  67. 《승정원일기》1610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9월 15일(을유) 15번째 기사
  68. 《이재난고》 38권, 정조 10년(1786) 10월 27일(기사)
  69. "成嬪 又方有娠四朔 則十月 乃産期也" 황윤석 《이재난고》
  70.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1786) 9월 14일(갑신) 2번째 기사
  71. 《승정원일기》1611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9월 16일(병술) 14/14 기사
  72.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16일(병술) 1번째 기사
  73.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18일(무자) 4번째 기사
  74. 《일성록》 정조 10년(1786) 9월 16일(병술) 2번째 기사
  75. 《노상추일기》 4-6, 정조 10년(1786) 9월 16일(병술)
  76. 《일성록》 정조 10년(1786) 11월 20일(경인) 2번째 기사
  77. "今將送 嬪于文孝之側而葬之 此固嬪之願耳" 정조 《어제의빈치제제문》
  78. 《숙종실록》 숙종 44년(1718년) 4월 20일(무술) 1번째 기사
  79. “조선왕조실록사전”. 
  80. 《정조실록》22권, 정조 10년(1786) 11월 20일(경인) 3번째 기사
  81. 《정조실록》22권, 정조 10년(1786) 12월 1일(갑자) 2번째 기사
  82.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1786) 12월 9일(무신) 4번째 기사
  83.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1786년) 12월 22일 신유 1번째 기사
  84. 《정조실록》22권, 정조 10년(1786) 12월 28일(정묘) 2번째 기사
  85. 《일성록》 정조 10년(1786) 12월 27일(병인) 9번째 기사
  86. 《일성록》 정조 10년(1786) 9월 20일(경인) 8번째 기사
  87. 《이재난고》39권, 정조 10년(1786) 10월 24일(갑자)
  88. 《일성록》 정조 11년 정미(1787년) 1월 10일(기묘) 2번째 기사
  89. “외규장각 의궤”. 
  90. 《승정원일기》 1617책 (탈초본 86책) 정조 11년 1월 10일 기묘 54/56 기사
  91. “毓祥宮 宣禧宮 宜嬪宮 名日 祭 酌獻禮同 三宮告 祭“ 《제물등록》 1책
  92. “私宮 德興宮墓 大嬪宮墓 宣禧宮墓 宜嬪宮墓 進排合三十一斗五合三夕……”《사전사례편고》
  93. “서울 중구 역사문화자원”. 
  94.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95. “디지털장서각”. 
  96. 《승정원일기》 2273책(탈초본 114책) 순조 32년(1832년) 1월 28일 병자 37/39 기사
  97. “디지털장서각”. 
  98. “한국학 디지털 아카이브”. 
  99. “디지털장서각”. 
  100. “宮 儲慶宮 仁嬪金氏 元宗私親, 毓祥宮 淑嬪崔氏 永宗私親, 景祐宮 綏嬪朴氏 純祖私親, 毓祥宮別廟合封四宮 庚午合封, 大嬪宮 禧嬪張氏 景宗私親, 延祜宮 靖嬪李氏 眞宗私親, 宣禧宮 暎嬪李氏 莊獻私親, 宜嬪宮 宜嬪成氏 文孝私親” 《태상지》 3책
  101. “七宮 二廟”, “儲慶宮 毓祥宮 延祜宮 景祐宮 永昭廟 文禧廟 大嬪宮 宣禧宮 宜嬪宮” 《향수조사책》 권8
  102. 《순종실록》2권, 1908년(순종 1년) 7월 23일 양력 3번째 기사
  103. “장서각기록유산DB”. 
  104. 《내각일력》 80책 1786년(정조 10년) 11월 7일 정축
  105. “디지털장서각”. 
  106. “장서각 자료”. 
  107. “維乾隆五十一年嵗次丙牛十一月辛未朔初七日丁丑”《어제의빈치제제문》
  108. “디지털장서각”. 
  109. “디지털장서각”. 
  110. “디지털장서각”. 
  111. 《창녕성씨 상곡공파보》, 《창녕성씨 문헌지》
  112. "七代祖萬種齊陵參奉"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113. "高祖景軍資監正"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114. 《창녕성씨 상곡공파보》
  115. 《창녕성씨 상곡공파보》
  116. "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亦卽洪樂性妾父" - 황윤석 《이재난고》
  117. "鄭枋(...)妾成生者與成嬪爲姑姪", "정방의 첩이 성씨인데 더불어 성빈(의빈 성씨)과 고모 조카 사이이다." - 황윤석 《이재난고》
  118.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119. 《이재난고》36권, "成哥之女 今東宮私親成貴人也 貴人之再從姊 卽鄭得煥之妾也"
  120. "成嬪 又方有娠四朔 則十月 乃産期也", -황윤석, 《이재난고》
  121. 서울지명사전 - 거둥고개
  122. 서울지명사전 - 홍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