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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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세자
文孝世子
왕세자(王世子)
별칭
이순(李㬀)
신상정보
출생일 1782년 10월 13일(1782-10-13)
출생지 조선의 기 조선 한성부 창덕궁 연화당 인시(3시~5시)[1]
사망일 1786년 6월 6일 (3세)
사망지 조선의 기 조선 한성부 창경궁 자경전 동쪽 행각
매장지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효창원[2]
왕조 조선의 기 조선
가문 전주 이씨
부친 정조
모친 의빈 성씨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년 10월 13일(음력 9월 7일) ~ 1786년 6월 6일(음력 5월 11일))는 조선왕세자(王世子)이자 제22대 정조의 장자이며, 의빈 성씨에게서 얻은 첫아들이기도 하다. 휘는 순(㬀),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제23대 순조의 이복 형이다.

탄생 일화[편집]

정조가 손수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문효세자 탄생에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문효세자의 생모 의빈 성씨는 영풍부원군 홍봉한(헌경왕후의 부친이자 정조의 외조부) 가문 청지기 성윤우의 딸이다. 헌경왕후의 처소 궁녀로 입궁하여 일하다 정조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되었고, 문효세자를 낳았다.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是歲封昭容旋進秩宜嬪以子貴也
처음 승은을 내리려 했을 때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으니 울면서 감히 받을 수 없다며 사양하고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나(정조)는 이를 느끼고 다시 재촉하지 않았다. 이후 15년 동안 후궁(원빈 홍씨, 화빈 윤씨)을 널리 뽑았고, 다시 에게 명하였으나 또 굳이 사양했다. 그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꾸짖고 벌한 연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명을 따랐다. 저녁의 세월이 지나 임신하여 임인년 9월에 원자(문효세자)를 낳았다. 이에 소용(昭容)으로 봉해지고, 오래지 않아 아들의 귀함에 의빈(宜嬪)으로 품계가 올랐다.[3]

생애[편집]

1782년 음력 9월 7일 새벽, 조선 제 22대 임금인 정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효세자가 태어났을 당시 정조는 매우 기뻐했다.[4]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 정조, 《정조실록》

아들이 없던 정조는 아들의 탄생을 소원하였고 따라서 원자(元子)로 봉하고 그가 3살(22개월 만 1세) 때 바로 왕세자(王世子)로 책봉했던 것이다.[5] 그러나 문효세자는 1786년 6월 6일(음력 5월 11일) 미시(未時)에 5세의 나이에 홍역으로 창경궁(昌慶宮) 자경전(慈慶殿) 동쪽 행각에서 훙서하였다.[6][7]

문효세자 태실[편집]

아기비 앞면 : 건륭 47년생 9월 초7일 인시생 원자아기씨 태실 (乾隆四十七年九月初七日寅時生元子阿只氏胎室)
아기비 뒷면 : 건륭 48년생 9월 초6일 립 (乾隆四十八年九月初六日立)
태지석 앞면 : 임인년 9월 초7일 인시 생/원자아기씨 태 (壬寅年九月初七日寅時 生/元子阿只氏胎)
태지석 뒷면 : 건륭 48년 9월 초6일생 오시(午時) 장 (乾隆四十八年九月初六日午時藏)

왕실 자녀의 태를 봉안한 곳을 태실이라고 한다. 1783년(정조 7년) 문효세자의 태를 봉안하였다. 용문사 대장전 뒷산 두운암 근처 50m 거리에 봉안하였다. 태실은 일제 강점기 때 이왕직에서 그 내부를 수거해 가고 비석만 남아 있다. 다소 파괴된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8] 경북 예천군 용문사길 285-30번지 용문면 내지리 산 81에 위치하고 있다.[9] 예천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태실이 있어서 정조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지역이다.[10]

문효세자 관련 궁중행사도[편집]

18세기 이후에는 왕세자로 책봉되는 장면이나 왕세자의 교육과 관련된 동궁의례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행사도 제작이 활기를 띠었다. '문효세자책례계병'이나,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 의식을 그린 '왕세자입학도첩' 등이 대표적인 예.[11]

정조는 왕세자의 통과의례를 궁중행사도로 남겼다. 《문효세자책례계병(文孝世子冊禮契屛)》(1784)과 《문효세자보양청계병(文孝世子輔養廳契屛)》(1784)[12] 은 왕세자 책봉례와 보양관 상견례를 그린 병풍이다. 원자가 왕세자로 책봉되는 의례인 책례를 기념하여 병풍을 제작한 경우가 이 전[13][14] 에도 있었지만 책례 장면 주제로 삼은 것은 이 병풍이 유일하다. 《진하도(陳賀圖)》(1783)와 《을사친정계병(乙巳親政契屛)》(1785)은 문효세자 탄생을 기념하여 왕실 어른에게 존호를 올린 의례와 세자궁인 중희당에서 펼쳐진 친림 도목정사[親政]를 그렸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문효세자와 관련되어 있다. 현존하는 정조시대 행사도 병풍은 《화성원행도병》을 제외한 4점이 모두 문효세자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후에 왕세자두후평복진하도병(1879)이 문효세자책례계병을 참고하여 제작하였다고 한다.[15]

사후[편집]

꿈인가, 참인가, 꿈이라 하여 반드시 꿈도 아닐 것이고 참이라 하여 반드시 참도 아닐 것이다.
 
— 정조,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16]

1786년(정조 10) 5월 14일 시호를 의논하여 온효(溫孝)라고 하였다가[17] 1786년(정조 10) 5월 22일 문효(文孝)로 개정하였다.[18] 연암 박지원이 <문효세자진향문>을 썼고, 몽오 김종수가 <문효세자지문>을 썼다.[19] 정조 대의 문신 이성원이 쓴 시문집 《조은집》에 <문효세자만장>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20]

문희묘[편집]

1789년(정조 13년) 4월에 문희묘(文禧廟)가 완성됐다. 문희묘는 문효세자의 사당이다. 문희묘를 처음에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 남쪽 담장 바깥으로 정했었는데,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가 졸하면서 의빈묘(宜嬪廟) 근처에 문희묘를 복지하고 사당 터를 의빈궁 서쪽 담장 밖으로 옮겨 정해 두 사당이 함께 있게 되었다.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에 문희묘와 의빈묘까지 그림을 넣어서 제시하여 두 사당의 전체적인 공간 구성을 묘사했다. 즉, 문희묘(文禧廟)와 의빈묘(宜嬪廟)는 두 개의 사당이 한 곳에 있으며, 두 묘 사이에는 어재실(御齋室: 왕이 능, 묘에 거동할 때 잠시 머무르던 집)이 있다. 그리고 의빈묘 구성은 문희묘와 비슷하다.[21]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에 의빈 성씨의 사당도 함께 있는 것으로 봤을 때, 문희묘는 문효세자의 사당이지만 의빈 성씨를 가리키는 명사이기도 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 1789년 문희묘가 완성 되었을 때를 기준으로, 1789년(정조 13년) 1월 16일 문희묘에 거둥하다. 1789년 9월 7일 문희묘에 전작례를 행하였다. 1790년(정조 14년) 5월 10일 문희묘에 나아가 거기에서 밤을 지냈다. 기록은 문효세자는 물론이고 의빈 성씨도 포함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효창원[편집]

문효세자의 무덤. 서울 용산구 효창동(孝昌洞)에 생모 의빈 성씨의 무덤과 함께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으로 강제이장되었다. 때문에 현재는 의령원(의소세자의 무덤)과 함께 있다. 효창원의 옛 터는 현재 효창공원 자리이다.

관련 장소[편집]

승가사[편집]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인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22]

거둥고개[편집]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의 행차)하였고, 이 때문에 오늘날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23]

홍예동[편집]

마포구 신공덕동에 있던 마을로서, 지금은 효창공원이 된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소인 효창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마을 이름이었다. 효창원의 봉분을 멀리서 보면 홍예(무지개)처럼 보이기 때문에 홍예분(紅霓墳)이라고도 하였다.[24]

가족 관계[편집]

왕가(王家 : 전주 이씨)
  • 조부 : 추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1762)
  • 조모 : 추존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1735~1815)
  • 외조부 :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 생몰년 미상)
  • 외조모 : 증 정경부인 임씨(贈 貞敬夫人 林氏)[25]
    • 친어머니 :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1786)
      • 형제 : 유산(1781~1781)
      • 동생 : 옹주(翁主, 1784~1784)
      • 동생 : 복중 사망(1786~1786)

문효세자가 등장한 작품[편집]

연도 장르 제목 역할 배우
2017년 로맨스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 문효세자
2017년 로맨스소설 《우아한 환생》 문효세자
2011년 소설 《문효》 이종운
2007년~2008년 드라마소설 《이산 정조대왕》 문효세자
2007년~2008년 MBC 드라마 이산 문효세자 차재돌
2005년 로맨스소설 《비단속옷》 문효세자

관련 항목[편집]

출처[편집]

  1. "壬寅九月七日寅時誕世子于昌德宮之讌華堂", 김종수《문효세자지문》
  2. 일제강점기 때,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에서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강제이장
  3. “어제의빈묘지명”. 
  4. 정조 14권, 6년(1782 임인 / 청 건륭(乾隆) 47년) 9월 7일(신축) 1번째기사 "문효세자의 탄생을 기뻐하다"
  5. 정조 18권, 8년(1784 갑진 / 청 건륭(乾隆) 49년) 7월 2일(을묘) 1번째기사 "원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다"
  6. 정조 21권, 10년(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5월 11일(계축) 1번째기사 "왕세자가 훙서하다"
  7. “문희묘일기”. 
  8. “예천군청”. 
  9. 왕실 자손의 胎(태)를 묻고 福(복)을 기원하다 "경북일보 2014년 6월 16일자 참조"
  10. <예천서 사도세자·문종 태실서 석물 무더기 발견>
  11. 황정연, 박정혜, 강민기, 윤진영 (2011년 5월 9일). 《왕과 국가의 회화》. 돌베개. ISBN 9788971994221. 
  12. <문효세자보양청계병>
  13. 1690년(숙종 16년) 경종의 왕세자 책례를 기념하여 책례도감에서 발의한 병풍은 산수인물도를 주제로 삼았으며.
  14. 1800년(정조 24년) 순조의 왕세자 책례를 기념하여 선전관청에서 발의한 병풍은 요지연도(瑤池宴圖)를 주제로 그렸다.
  15. 유재빈 (2016). “정조의 세자 위상 강화와 〈문효세자책례계병〉(1784)”. 《미술사와 시각문화》 17 (0): 90-117. ISSN 1599-7324. 
  16. “규장각한국학연구원url=http://kyujanggak.snu.ac.kr/_Print/HEJ/HEJ_NODEVIEW.jsp?lclass=01&subtype=cg&sclass=&ntype=hj&type=MOK&ptype=list&cn=GK10321_00&mclass=&savetype=”. 
  17. 정조 21권, 10년(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5월 14일(병진) 2번째기사 "빈청에서 왕세자의 시호를 정하다"
  18. 정조 21권, 10년(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5월 22일(갑자) 2번째기사 "왕세자의 시호를 ‘문효’로 개정하다"
  19. <문효세자지문>
  2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조은집>
  21.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 
  22. <승가사>
  23. <서울지명사전 - 거둥고개>
  24. <서울지명사전 - 홍예동>
  25. 통례원 인의 임종의 맏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