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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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녕군
敬寧君
지위
조선 태종의 왕자
이름
이비(李裶)
이칭 정윤(正尹) · 원윤(元尹)
별호  : 정숙(正淑)
시호 제간(齊簡)
신상정보
출생일 1402년 12월 13일(1402-12-13)[1] (음력)
출생지 조선 경기도 개성
사망일 1458년 9월 9일(1458-09-09) (55세) (음력)
사망지 조선 충청도 충주
부친 태종
모친 효순궁주 김씨
배우자 청원부부인 청풍 김씨
자녀 10남 2녀

경녕군 이비(敬寧君 李裶, 1403년 1월 6일 (1402년 음력 12월 13일[1]) ~ 1458년 10월 15일(음력 9월 9일))는 조선왕족이며 태종의 넷째 아들이자 서장자이다. 자(字)는 정숙(正淑)이다.

생애[편집]

출생[편집]

1402년(태종 2년) 12월 13일, 태종(太宗)과 효순궁주 김씨(孝順宮主)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김씨는 본래 원경왕후가 왕비가 되기 전부터 거느리던 사가의 여종인데, 태종 즉위 후 궁에 들어와 경녕군을 잉태하였고 임신 3개월 째에 궁을 나와 사가에 거주하다가 1402년 12월 13일 진시에 경녕군 이비를 낳았다.[1]

 
임오년 (1402년) 여름 5월에 민씨(원경왕후)의 가비(家婢)로서
본래부터 궁에 들어온 자가 임신하여 3개월이 되자 궁 밖에 나가 살고 있었는데,
민씨가 행랑방에 두고 그 계집종 삼덕(三德)과 함께 있게 하였다.
그 해 12월에 이르러 산삭(産朔)이 되어
이 달 13일 아침에 태동(胎動)하여 배가 아프기 시작하였다.
삼덕이 민씨에게 고하자, 민씨가 문바깥 다듬잇돌 옆에 내다 두게 하였으니,
죽게 하고자 한 것이다.
(중략)


진시(辰時)에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의 원윤(元尹) 이비(李裶)이다.
—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명 영락(永樂) 13년) 12월 15일 (무인)

효순궁주가 경녕군을 낳을 당시, 원경왕후와 그 형제들이 핍박하여 사지로 몰은 일이 있었는데, 훗날 태종은 원경왕후의 동생인 민무휼민무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경녕군 모자(母子)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 죄'를 물어 추국하였다.[2]

 
왕(태종)이 전지하기를,
바람과 추위의 핍박과 옮겨 다니는 괴로움으로 인하여 병을 얻고 또 유종이 났으니,
경녕군 모자(母子)가 함께 산 것이 특별한 천행이었다.

나는 그 때 이런일이 있었는지 미처 알지 못하였다.

지금 내가 늙고 가만히 생각하니 참으로 측은하다.
핏덩어리[赤子]가 기어다니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불쌍히 여기는데,
여러 민씨(閔氏)들이 음참(陰慘)하고 교활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꾀를 내어 기필코 사지(死地)에 두고자 하였으니,
이는 대개 그 종지(宗支, 왕의 자손)를 제거하고자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쌓아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핏덩어리(경녕군)에게 하는 짓이 또한 이와 같이 극악하였다.

그러나 천도가 밝고 어그러지지 않아서, 비록 핏덩어리가 미약함에도
보존하고 도와서 온전하고 편안하게 한 것이 지극하였다.

어찌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로 하여금 그 악한 짓을 이루게 하겠느냐?

이것이 실로 여러 민씨들의 음흉한 일이니
내가 만일 말하지 않는다면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어찌 능히 알겠는가?
진실로 사책(史冊)에 상세히 적어 후세에 분명히 보여
외척으로 하여금 경계할 바를 알게 하라.

—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명 영락(永樂) 13년) 12월 15일 (무인)

왕자 시절[편집]

1416년(태종 16년) 2월, 14세의 나이로 첨총제(僉摠制) 김관(金灌)의 딸과 혼인하였다.[3]

1419년(세종 1년) 상왕 태종의 명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 북경으로 향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황제였던 영락제에게 기린·사자·복록(福祿)과 수현사보탑사(寶塔寺)의 상서로운 그림 5축(軸) 및 어제 서문(御製序文)이 붙은 《신수성리대전(新修性理大全)》과 《사서오경대전》 및 황금 1백 냥(兩), 백금 5백 냥, 색비단(色段羅), 채색 비단(彩絹) 각 50 필, 생 명주(生絹) 5백 필, 말(馬) 12필, 양 5백 마리를 하사받아 돌아왔다.[4]

적모(嫡母) 원경왕후의 상중에 기생 일점홍(一點紅)과 관계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샀는데, 그 후에도 일점홍을 집으로 불러들여 1423년(세종 5년) 대신들의 탄핵을 받았다.[5] 그러나 세종은 형제의 정을 생각하여 그를 벌하지 않았으며 이듬해에는 출입을 금한 것을 풀어주었다.

 
"생각하건대,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가 경자년(1420년)에 원경왕태후의 상 중에
무엄하게도 창기(娼妓) 일점홍(一點紅)과 관계하였으나,
태종 대왕께서 차마 내어놓고 죄주지 못하시어 다만 견책만 하시었고,
일점홍공주(公州)로 내쫓았다가, 도로 그의 역(役)에 속하게 하였으니,
경녕군을 사랑하는 태종의 은혜가 지극히 깊고 또한 간절하였습니다.
이비(李裶)는 마땅히 태종의 명을 추념하여 전날의 마음을 고쳐 깨달아
조금이나마 지극한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여야 할 것인데,
이는 돌보지 아니하고 바야흐로 최질(衰絰, 상복을 입는) 중에 있으면서
슬픔도 잊고 여색에 빠져서 몰래 일점홍을 그 집으로 불러들였으니,
이는 참으로 사람의 자식으로서는 차마 하지 못할 일이옵니다.
이제 헌부에서 그 사정(事情)을 들어 재삼 거듭 청하였는데,
전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신들은 생각건대, 이비(李裶)가 범한 죄가 강상(綱常)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면,
우애가 깊으신 전하의 지극한 인정으로 그 죄를 용서하여도
이에 대해 뭐라 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산릉에 모신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유명(遺命)을 배반하여 거스르고,
상복도 벗기 전에 몰래 창기(娼妓)를 엿보았으니,
강상을 무너뜨리고 윤리를 어지럽히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고,
이는 진실로 국법으로 용서될 수 없는 일이며,
전하께서 사사로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 《세종실록》 20권,
세종 5년(1423년 명 영락(永樂) 21년) 5월 11일 (경인)

1425년(세종 7년) 숭록대부(崇祿大夫)와 1430년(세종 12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 지위에 올랐다.

1433년(세종 15년) 경녕군의 집 기둥에 벼락이 쳐서 세종이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기도 했다.[6] 1449년(세종 31년) 3월에는 장남인 고양군(高陽君)이 사망하였다.

사망[편집]

1458년(세조 4년) 8월, 근정전 월대에서 열린 음복연에 참여하였으며, 한달 후인 9월 9일, 충주에서 사망하였다. 세조는 경녕군이 죽자 조회와 저자를 3일 동안 정지하고, 부의(賻儀)로 쌀과 콩을 합쳐 1백 석과 종이 2백 권, 정포(正布) 40필, 백저포(白苧布) 3필을 하사하였다.[7]

묘역은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음동마을 황금산(黃金山)에 있다. 묘역의 앞에는 경녕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명덕사가 있다.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이력[편집]

  • 1417년(태종 17년) 정헌대부(正憲大夫)
  • 1419년(세종 1년) 명나라 사은사(謝恩使)
  • 1425년(세종 7년) 숭록대부(崇祿大夫)
  • 1430년(세종 12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가족 관계[편집]

  • 측실 : 미상
    • 서장자 : 월성수 거(月城守, 생몰년 미상)
    • 며느리 : 미상
      • 손녀 : 이씨(李氏)
      • 손녀 : 이씨(李氏)
    • 서차남 : 가흥수 적(嘉興守 積, 생몰년 미상)
    • 며느리 : 미상
    • 서3남 : 복성군 영(福城君 潁, 1435 ~ 1487)
    • 며느리 : 신부인 이천 서씨(新夫人 利川 徐氏, 생몰년 미상)
      • 손자 : 송양부수 은산(松陽副守 銀山, 생몰년 미상)
      • 손자 : 안양부수 옥산(安養副守, 생몰년 미상)
      • 손자 : 금릉군 금산(金陵君 錦山, 생몰년 미상)
    • 서4남 : 가림군 추(嘉林君 秋, 1441 ~ 미상)
    • 며느리 : 미상
      • 손자 : 하희정 정
      • 손자 : 악소부수 현손(岳所副守 玄孫, 생몰년 미상)
      • 손자 : 공산군 우(公山君 禹, 생몰년 미상)
    • 서장녀 : 이씨(李氏)[9]
    • 서차녀 : 이씨(李氏)[10]

경녕군이 등장하는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명 영락(永樂) 13년) 12월 15일 (무인)
    왕비 민씨가 경녕군 모자를 사지에 둔 죄를 묻는 왕지를 춘추관에 내리다
  2.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명 영락(永樂) 13년) 12월 21일 (갑신)
    의금부에 명하여 민무휼과 민무회를 국문하게 하다
    의금부에 명하여 민무휼민무회를 국문하게 하였다.

    편전에 나아가 우사간(右司諫) 조계생 · 집의(執義) 정초 ·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이천우 · 박은 · 허조를 불러,

    민무회과 민무휼이 원윤 이비(李裶)의 모자를 죽이고자 한 죄와 세자(양녕대군)에게 불경한 죄를 자세히 말하고, 그 연유를 국문하여 밝게 죄안에 쓰게 하였다.

  3.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2월 2일 (을축)
    정선궁주를 우의정 남재의 손자 남휘에게 시집보내고, 원윤 이비를 장가들게 하다
    제4녀 정선궁주(貞善宮主)를 우의정(右議政) 남재(南在)의 손자 남휘(南暉)에게 시집보내고,

    또 원윤(元尹) 이비(李裶, 경녕군)를 첨총제(僉摠制) 김관(金灌)의 딸에게 장가 들게 하고,

    원윤(元尹) 이인(李䄄, 함녕군)을 중군 경력(中軍經歷)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4.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12월 7일 (정축)
    경녕군 이비가 황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돌아오다
  5. 세종실록》 20권, 세종 5년(1423년 명 영락(永樂) 21년) 5월 11일 (경인)
    우사간이 경녕군을 법대로 처형토록 상소하다
  6.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3월 10일 (계해)
    경녕군의 집 기둥에 벼락이 치니, 해괴제를 행하다
  7. 세조실록》 14권, 세조 4년(1458년 명 천순(天順) 2년) 9월 9일 (계사)
    경녕군 이비의 졸기
  8. 참의(參議) 증찬성(贈贊成) 김관(金灌)의 딸.
  9. 참봉(參奉) 정석균(鄭石均)에게 출가
  10. 현감(縣監) 송계흥(宋繼興)에게 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