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응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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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응대군
永膺大君
지위
조선 세종의 왕자
이름
이염(李琰)
이칭 영흥대군(永興大君, 1441년)
역양대군(歷陽大君, 1447년)
시호 경효(敬孝)
신상정보
출생일 1434년 4월 15일(1434-04-15) (음력)
사망일 1467년 2월 2일(1467-02-02) (32세) (음력)
능묘 영응대군 묘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부친 세종
모친 소헌왕후 심씨
배우자 대방부부인 송씨
춘성부부인 정씨
연성부부인 김씨
자녀 1남 3녀
길안현주, 청풍군, 배사종의 처, 조덕온의 처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년 5월 23일 (음력 4월 15일) ~ 1467년 3월 7일 (음력 2월 2일))은 조선의 왕족이며 세종소헌왕후의 여덟째 아들로, 문종세조의 동복 동생이다. 세종이 계양군과 더불어 가장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문종세조 또한 총애하였다.

생애[편집]

탄생과 대군시절[편집]

1434년(세종 16년) 4월 15일, 세종의 열다섯번째 아들이자, 소헌왕후의 여덟째 아들로 태어났다.[1]

세종과 소헌왕후에게는 막내 아들이며 세종이 자신의 아들들 중 가장 사랑하였는데, 실제로 《세종실록》과 《단종실록》, 《세조실록》 등에서 영응대군과 관련한 기사에는 '매우 사랑하여(甚愛)', '가장 사랑하여(最鍾愛 · 鍾愛)', '사랑하는 아들(愛子)', '총애하여(寵愛)' 등의 표현이 등장하며, 세종 스스로도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라 매우 사랑한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2]

궁중에서 다른 왕자들이 세종을 칭할 때 '진상(進上)'이라 칭하였는데, 세종은 영응대군에게만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였다.[3]

1441년(세종 23년), 영흥대군(永興大君)에 봉해졌으며, 1447년(세종 29년) 역양대군(歷陽大君)으로, 다시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임금이 평강현(平康縣) 노벌(蘆伐)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세자가 활과 화살을 가지고 수레 앞에 서 있는데,
짐승이 앞을 지나가므로 쏘니 살에 맞아 거꾸러졌다.
여러 대군(大君)들도 모두 이리저리 달리면서 활을 쏘았다.
이때 영흥대군(永興大君) 이염(李琰)이 나이 바야흐로 아홉 살인데,
임금이 그를 대단히 사랑하여 만약 쫓기다 지친 짐승이 엎드려 있으면,
가던 연(輦)을 멈추게 하고서 사람을 시켜 염의 말을 그리로 몰게 하여 쏘게 하였다.
율평(栗平)에서 사냥하고 재송평(裁松平)에 머물렀다.

 

— 《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1442년 명 정통(正統) 7년) 3월 7일 (무진)

1445년(세종 27년) 4월 21일, 송복원(宋復元)의 딸 대방부부인 송씨(帶方府夫人 宋氏)와 혼인하였다.

영흥대군(永興大君) 이염(李琰)이 행 통례문 판관 송복원(宋復元)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임금이 대군을 사랑하여 모든 보내는 물품을 여러 아들과 달리한 것은 다 기록할 수 없다.

 

— 《세종실록》 108권,
세종 27년(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4월 21일 (갑자)


세종은 영응대군의 집을 영건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안국방의 민가를 헐어 영응대군의 집을 지어주라 하였다.

1449년(세종 31년), 세종은 영응대군의 아내인 대방부부인 송씨에게 병이 있자 폐하여 내쫓았다. 이후 영응대군은 참판 정충경의 딸 춘성군부인을 계부인으로 맞아들였다.[4]

1450년(세종 32년), 세종은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과 수양대군(세조)을 불러 유교를 내리며 본인 사후에도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할 것을 명하며 영응대군을 잘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였다.[5] 세종은 병세가 심해지자 영응대군의 집으로 이어하였으며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6]

1453년(단종 1년), 영응대군은 첫번째 아내인 대방부부인 송씨를 그리워하여 서로 몰래 만났는데, 이에 춘성군부인 정씨를 내치고 송씨와 재결합하였다.[7]

세조를 지지하여 세조 즉위 후 많은 총애를 받았으며 왕실 종친으로 각종 행사와 연회에 참석하였다.

사망[편집]

1467년(세조 13년) 2월 2일 졸하였다. 세조는 매우 슬퍼하며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예조에 명하여 장례를 후하게 치를것을 전지하였다. 묘는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에 있다.

영응대군 이염의 졸기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이 졸(卒)하였다.
염(琰)은 세종(世宗)의 여덟째 아들로서,
겨우 말을 할 줄 알 적에 어린아이를 조각하여 만든 화촉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초[燭]가 타면 반드시 〈초에 조각한〉 어린아이에게 미치게 될 것이니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니,
세종이 이를 크게 기특하게 여기었다.
처음에 영흥대군(永興大君)에 봉하였다가 뒤에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고쳤다.
세종이 매우 사랑하여 일찍이 염(琰)을 세조(世祖)에게 부탁하였으므로,
세조가 보살펴 주기를 여러 아우들보다 특별히 하였다.
염이 일찍이 병이 드니, 세조가 매우 염려하여 무릇 병이 나을 수 있는 것은 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고,
중사(中使)의 왕래가 길에 끊이지 아니하였다.
염은 천자(天資)가 순후(醇厚)하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며, 음률(音律)에 밝았다.
세종이 일찍이 내탕고의 진귀한 보물을 염에게 모두 주려고 하다가 이를 하지 못하고 훙(薨)하였으므로,
문종(文宗)이 즉위하고 얼마 있다가 내탕고의 보물을 내려 주어 그 집으로 다 가져갔다.
이로써 어부(御府)의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보화(寶貨)가 모두 염에게로 돌아가니, 그 재물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자못 검소하고 절약하여 사치를 일삼지 아니하고,
입시(入侍)하여서도 겸공(謙恭)하고 근각(謹恪)하여
조금도 과실이 있지 아니하므로, 세조가 매우 중히 여기었다.
(중략)


가족 관계[편집]


각주[편집]

  1. 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1434년 명 선덕(宣德) 9년) 4월 15일 (임술)
    왕자가 탄생하니, 바로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이다.
  2. 세종실록》 122권, 세종 30년(1448년 명 정통(正統) 13년) 12월 14일 (병인)
    "영응대군은 늦게 낳은 아들이라, 친히 길러서 매우 사랑하여 ···" (중략)
  3. 영응대군 신도비
  4. 세종실록》 124권, 세종 31년(1449년 명 정통(正統) 14년) 6월 26일 (갑술)
    영응대군 이염이 죽은 부윤 정충경의 딸에게 장가들다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이 죽은 부윤(府尹) 정충경(鄭忠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임금이 이염(李琰)을 사랑하기를 여러 아들 중에 특별히 달리 하여, 여러 만금의 진귀한 보물을 상사(賞賜)하였다.
  5. 세조실록》 1권, 총서
    세종이 문종과 세조에게 유교를 전하다
    경오년(1450년) 정월에 세종문종(文宗)과 세조(世祖)를 불러 유교(遺敎)를 전하니, 그 유교에,

    "나라를 가진 자는 멸망을 은휘(隱諱)하지 않으며, 삶을 가진 자는 죽음을 은휘하지 않는다.

    내 이제 너희 두 사람에게 말하거니와, 대저 신하들이란 임금이 죽는 그 날로 즉시 그 형제들의 허물을 공격하는 법이다. 내가 죽는 날에는 너희 형제의 허물을 말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내 말을 잊지 말고 항상 친애하는 마음을 위주(爲主)로 하면 밖의 사람들이 능히 이간(離間)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부득이 해서 비록 죄를 주더라도 재삼(再三) 생각하고 그 정리(情理)를 익히 헤아려서 속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 옳을 것이다.

    내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효령대군(孝寧大君) 등을 공격하는 자가 많았는데, 내가 아니었던들 능히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응대군(永膺大君)이 항상 내 곁에서 밥을 먹었는데, 이는 그 소중함이 음식먹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때 세종의 병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매사를 반드시 세조에게 명하였기 때문에 항상 대내(大內)에 있었는데, 세조가 5일간을 음식을 먹지 않다가 세종이 회복됨을 보고서야 비로소 음식을 먹었다.

  6.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2월 17일 (임진)
    임금이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훙하다
  7. 단종실록》 9권, 단종 1년(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11월 28일 (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