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대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제안대군
齊安大君
대군(大君)
별칭
이현
李琄
별호 자(字)는 국보(國寶)
시호는 영효(靈孝)
신상정보
출생일 1466년 2월 13일(1466-02-13)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일 1525년 12월 14일 (59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대군 사저
부친 정양군 이순(양부)[1]
예종 이황(생부)
모친 풍천군부인 진주 강씨(양모)
안순왕후 한씨(생모)
장순왕후 한씨(적모)
배우자 상산부부인 상주 김씨(초실)
승평부부인 순천 박씨(계실)
자녀 낙풍군 이파(양자)
기타 친인척 세종대왕(증조부)
평원대군(양조부)
세조(친조부)
강자평(양외조부)
한백륜(친외조부)
인성대군(이복 형)
현숙공주(동복 누나)
의경세자(친백부)
월산대군(사촌형이자 손윗동서)
승평부대부인(처형이자 사촌형수)
성종(사촌 형)
공혜왕후(사촌형수)
폐비 윤씨(사촌형수)
정현왕후(사촌형수)
연산군(5촌 조카)
중종(5촌 조카)
종교 유교(성리학)

제안대군 이현(齊安大君 李琄, 1466년 2월 13일 ~ 1525년 12월 14일)은 조선왕족 종실이다.

이력[편집]

그는 조선 제8대 국왕 예종안순왕후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9세 때였던 1474년 5촌 종숙부 정양군(평원대군의 양자, 1492년에 향년 51세로 훙서)에게 입양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현(琄), 이(李), 는 국보(國寶), 시호는 영효(靈孝)이며 본관전주(全州)이다.

생애[편집]

세조 12년(1466년) 당시 세자이던 아버지 예종(睿宗)과 세자의 종5품 후궁인 소훈(昭訓) 한씨(안순왕후)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전주 이씨(全州 李氏)다. 예종의 세자빈이던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는 인성대군 이분(李糞)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죽었고, 뒤이어 입궐한 소훈 한씨는 세자의 후궁이었으나 빈의 공상(供上)과 예로 대우받았다. 이복 형 인성대군이 세조 9년(1463년) 3세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예종 즉위년(1468년)에 원자(제안군)로 책봉되었다.

예종 1년(1469년) 아버지 예종이 임종할 당시, 왕위승계 1순위였으나 나이가 4세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조모 정희왕후가 백부 의경세자의 차남이자 대군의 종형인 자을산군 이혈(성종)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왕위승계에서 밀려났다. 성종 1년(1470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 봉해졌다. 봉작을 받기에는 이른 나이였으나, 직계를 대접한다는 방계의 명분이 컸다.

성종 5년(1474년) 증조부 세종의 적7남인 종조부 평원대군 임(琳)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평원대군은 요절하여 후사가 없었다. 이러한 조처는 성종 초기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가 한명회(韓明澮)의 신권 강화에 맞서,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역모에 휘말려 죽음에 이르기 쉬운 왕실 종친을 보호하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결과라는 견해도 있다.

첫 부인은 김수말(金守末)의 딸로, 성종 10년(1479년) 이혼하고 박중선(朴仲善)의 딸과 재혼하였으며, 이후에 김씨와 다시 합치게 된다. 그러나 자식을 두지는 못하였다. 연산군의 총희(寵姬) 장녹수는 그의 집 종이었다. 장녹수가 대군의 노비가 된 이유는 대군저의 가노(家奴)와 혼인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평생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특히 그는 성악(聲樂)을 즐기고 사죽관현(絲竹管絃)을 연주하기를 좋아하는 등 풍류에 심취하였다. 당질 연산군과 친분이 두터웠으나, 1506년 중종 반정 이후에도 별다른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중종에게도 연산군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당숙부가 되므로 중종 20년(1525년) 60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까지 일생 왕실 종친으로 존대를 받았다.[2]

사후[편집]

그의 아들 이파(李葩)는 생전 왕족으로 예우받지 못하다가 1872년 고종 때 가서 낙풍군(洛豐君)에 추증되었다. 동시에 이파의 아들, 손자들에게도 제안대군의 적손, 적중손, 적증손의 예로써 각각 군의 작위가 추증되었다.

다사다난한 결혼 생활[편집]

부인과의 이혼[편집]

훗날, 대군이 김씨와의 재결합을 청원할 때, 반대명분이 된 성종의 회고에 따르면, 대군은 남이 상처(喪妻)하였다는 것을 들으면 말하기를,『김씨는 언제나 죽을 것인가?』하고, 국가에 순릉(順陵)의 상(喪)(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한씨의 초상)이 있음을 듣고서는 말하기를,『나도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될 수 있을까?』하는 등 김씨를 미워했다고 한다.[3] 마침내 김씨가 풍병(風病)을 얻어서 거동이 불편하고 치료하여도 차도가 없자 대군은 성종에게 김씨와의 이혼을 청하고 잔병치레가 잦아 후사를 일찍보고자 하는 안순왕후의 뜻을 감안한 성종은 이를 허락한다. 대군의 나이 14세 때이다.

前 부인과의 밀회[편집]

첫부인 김씨와 이혼하고 박씨와 재혼한지 3년 후인 성종 13년(1482),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정광세(鄭光世)가 대군이 전부인 김씨와 은밀히 사통한다고 성종에게 보고하여 그 사실 확인과 처벌이 여러 차례 논해졌다. 심지어 김씨의 아버지인 김수말이 대군을 유인했다는 죄목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성종이 대군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번번히 감싸는 바람에 유야무야 되었다.

둘째 부인의 동성애 추문[편집]

성종 13년(1482년), 형방 승지(刑房承旨) 강자평(姜子平)이 대군의 부인 박씨가 여종들과 동침한 혐의를 들어 당사자인 내은금(內隱今)·금음물(今音勿)·둔가미(屯加未)를 추궁하였으며 이들은 박씨의 유혹에 의한 것이라고 진술했다.[4] 이 사실은 왕대비 안순왕후에게 보고되고 대비전에서는 내관(內官) 안중경(安仲敬)과 서경생(徐敬生)을 시켜서 박씨를 직접 추궁하게 한다. 박씨는 본인의 뜻이 아니라 여종들이 자신을 겁간하려 했으며, 이 사실이 알려질 경우, 처벌을 두려워한 이들의 교사로 본인에 의한 것이라 고하였다고 진술한다.[5] 이에 우의정(右議政) 홍응(洪應)과 우부승지(右副承旨) 강자평(姜子平)이 직접 의금부(義禁府)에서 죄인들을 국문하여 박씨에 대한 모함이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성종은 이들에게 장형 100대와 유형에 처하고, 특히 주범 금음물에게는 관비형을 더한다.

둘째 부인 박씨와의 이혼[편집]

박씨의 추문이 불거진 같은 해, 대왕대비 정희왕후와 왕대비 안순왕후는 제안대군의 이혼의사를 성종에게 전달한다. 성종은 박씨의 누명도 벗겨진 탓에 별다르게 허물이 없음을 들어 반대하고, 신료들의 견해도 같음을 확인하지만 안순왕후는 며느리 박씨가 불순함을 이유를 들자 신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혼을 허락한다.[6]

전부인 김씨와의 재결합[편집]

성종 16년(1485년), 대군은 성종에게 다시 김씨와 재결합하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협박조의 내용이었다. 성종은 내키지 않았으나 숙부인 선왕(예종)의 원자였던 대군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처지에 후사마저 끊기게 할 수 없다는 마음의 빚이 있었고, 아들의 고집이 쎄고, 어리석고 병도 있다는 숙모 안순왕후의 당부 또한 더한 탓에 이를 공론화 한다. 이에 신료들은 김씨는 허물이 아닌 질병이 이혼사유였고, 둘째부인 박씨는 이미 죽었으며, 김씨의 질병이 완치됐음을 들어 허락할 것을 청하고 성종은 마침내 이를 수락한다.[7] 대군의 나이 20세 때이다.

독신 생활[편집]

연산군 4년(1498년) 어머니 안순왕후의 상을 입은 뒤부터는 홀로 거처했다고 전해진다.

일화[편집]

패관잡기》에 실린 일화[편집]

명종조에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제안대군의 일화가 실려있는데,

제안대군 이현은 예종 대왕의 아들로 성품이 어리석었다. 일찍이 문턱에 걸터앉아 있다가 거지를 보고 그 종에게 말하기를,
『쌀이 없으면 꿀떡의 찌꺼기를 먹으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
한 말과 같다.
여자의 음문은 더럽다 하여 죽을 때까지 남녀 관계를 몰랐다. 성종은 예종이 후사가 없음을 가슴 아프게 여겨 일찍이,
『제안에게 남녀 관계를 알 수 있게 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
하였더니, 한 궁녀가 자청하여 시험해 보기로 하고, 드디어 그 집에 가서 밤중에 그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의 음경을 더듬어 보았더니 바로 일어서고 빳빳하였다. 곧 몸을 굴려 서로 맞추었더니, 제안이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물을 가져오라 하여 자꾸 그것을 씻으면서 잇달아
『 더럽다.』
고 부르짖었다.
일찍이 제안이 여자를 5ㆍ6명을 데리고 문밖에서 산보하는 것을 보았는데, 한 여자 종이 도랑에서 오줌 누는 것을 제안이 몸을 구부리고 엿보고서 말하기를,
『바로 메추리 둥지 같구나.』

하였는데, 그것은 음모가 무성한 것을 이름이다.

중종조에 상의원(尙衣院)에서 서각(犀角)으로 만든 띠를 바쳤는데, 품질이 아주 좋았다. 제안대군이 보고 허리에 띠고 차비문 밖에 가서 아뢰어 청하기를,
『이 띠를 신에게 하사하소서.』

하니, 임금이 웃으며 주었다.

혹자는, 「제안이 실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만약 종실의 맏아들로 어질고 덕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몸을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늘 스스로 감춘 것이다.」하기도 하는데, 「남녀 사이의 욕망은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어서 인정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인데, 평생토록 여자를 더럽다 하여 가까이하지 않은 것은 실지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하였다.

연산군이 대군저에 뇌영원을 설치하다[편집]

명하여, 제안 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의 집에 가흥청(假興淸)을 두고 뇌영원(蕾英院)이라 부르게 하였다. — 연산 58권, 11년(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년) 6월 27일(경진) 3번째기사

가흥청(假興淸)은 정식기생을 일컫는 흥청(興淸)을 선발하기 전의 예비기생이다. 왕실이 필요에 따라 종친의 저택을 임시로 사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군의 저택은 수진방(壽進坊 :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53번지)에 위치하며, 실록에 따르면 다른 종친의 저택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고 한다. 흥청의 규모와 거리적 편리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대군의 저택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 봉작(封爵)을 받기 전에 사망한 대군ㆍ왕자와 출가하기 전에 사망한 공주ㆍ옹주들을 합사(合祀 : 합동으로 제사를 모심)하는 사우(祠宇)로 변모하였고, 수진궁(壽進宮)으로 불린다.

두모포 정자[편집]

두모포(豆毛浦)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동호대교 북단에 존재하는 포구이다. 연산 12년(1506), 이곳의 주민을 내쫓고 정자를 세우니, 연산군의 음행에 사용되었다. 중종 1년(1506), 정자는 대군에게 하사된다. 중종 11년(1516), 이 정자의 기둥이 임금의 색인 주홍빛으로 칠해졌다 하여 문제가 되었다. 결국 왕명으로 주홍칠을 벗겨내게 된다.

『두모포 정자는 폐조(廢朝) 때 지은 것으로 기둥에 주홍칠을 하여 과연 참람할 듯하니, 제안대군의 종들을 시켜 주홍칠을 긁어내도록 하라.』 — 중종 26권, 11년(1516 병자 / 명 정덕(正德) 11년) 11월 15일(임진) 4번째기사

사적인 일로 계청하고 퇴청을 거부하다[편집]

정원이 아뢰기를,
『 제안 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이 와서 말하기를 「종이 헌부(憲府)에서 법을 범하여 갇혔는데 놓아 보내게 하여 달라.」 하였는데, 이 일은 헌부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전일 상께서도 「대군 등이 사사로운 일로 계청(啓請)하면 입계(入啓)하지 말아야 한다.」고 분부하셨으므로 신들이 감히 입계하지 못합니다마는, 이제 폐문(閉門)할 것인데 대군이 아직도 빈청(賓廳)에 있고 나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 대군에게 민망한 일이 있더라도 법에 따라 상언(上言)을 올려야 할 것이고, 사사로운 일을 와서 아뢰어서는 안된다. 대군·왕자군(王子君)이 사사로운 일을 아뢸 수 없는 것은 《후속록(後續錄)》에 그 법이 있으니, 이 뜻으로 말하도록 하라. 또, 대군이 지혜롭지 못한 것을 조정에서 누가 모르겠는가? 지금 이처럼 와서 아뢰는 것은 그 하인에게 꾐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며, 유문(留門)하게 만든 것도 부당하니, 형조(刑曹)를 시켜 현(琄)의 집의 장무 서제(掌務書題)와 사지 노자(事知奴子) 를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 중종 52권, 19년(1524 갑신 / 명 가정(嘉靖) 3년) 12월 13일(계묘) 4번째기사

극에서 묘사된 제안대군[편집]

연산군의 일대기는 극화된 적이 많다. 이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가 제안대군이다. 임사홍 부자와 더불어 보통 연산군의 난행(亂行)을 독려하는 인물이거나, 연산군의 모성결핍을 깊이 이해하고 위안을 주는 인물로 묘사되곤 했다.

KBS에서 제작, 방영한 드라마《장녹수》(1995)의 한 장면에서는, 대군(백윤식 扮)이 입궐하여 종형 성종(현석 扮)과 우연히 마주하여 손가락을 써가면서 둘째부인을 소박하고 첫부인에게 다시 장가들었노라고 자랑하고, 이에 성종은 의아해 하면서 축하의 말을 건네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왕실 종친의 모든 민, 형사상의 일을 처결해야 했던 국왕이 직접 처리한 사안을 모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오류이다. 또한 풍천위(豊川尉) 임광재(任光載)에게 하가한 현숙공주(서갑숙 扮)는 대군의 누이동생이 아니라 누나이다.

가족관계[편집]

  • 친조부 :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 - 조선 제4대 왕 세종(世宗)의 제2적자
  • 친조모 :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 양조부 : 평원대군(平原大君) - 조선 제4대 왕 세종(世宗)의 제7적자
  • 양조모 : 강녕부부인 홍씨(江寧府夫人 洪氏) - 홍이용(洪利用)의 딸
  • 부왕 : 조선 제8대 왕 예종(睿宗) -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의 제2적자
  • 모후 :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 이복 형 : 인성대군(仁城大君) -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소생.
    • 누나 : 현숙공주(顯肅公主) - 풍천위(豊川尉) 임광재(任光載)에게 하가.
    • 여동생 : 혜순공주(惠順公主) - 조졸.
  • 정부인 : 상산부부인 상산 김씨(象山府夫人 尙山金氏) - 사도시정(司?寺正) 김수말(金守末)의 딸
  • 계부인 : 승평부부인 순천 박씨(昇平府夫人 順天朴氏) - 평양군(朴仲善) 증영의정(贈領議政) 박중선(朴仲善)의 딸
  • 계부인 승평부부인 순천 박씨는 사촌 형 월산대군부인 박씨와 박원종의 누이동생으로 월산대군(성종의 친형이자 제안대군의 종형)의 처인 언니 박씨와 같은 명칭인 승평부부인의 호칭을 쓰고 있다. 월산대군의 처인 승평부부인은 연산군으로부터 승평부대부인으로 격상되었다.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평판[편집]

제안대군은 성격이 어리석어서 남녀 관계의 일을 몰랐고, 날마다 풍류잡히며 음식 대접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러나 더러는 행사가 예에 맞는 것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거짓 어리석은 체하는 것이라고 했다.[2] 한편 제안대군에게는 자식이 없었는데, 《어우야담》에는 자식을 두면 누를 초래할까 두려워 여색을 가까이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8]

시호[편집]

시호는 영효(靈孝)이다. 부지런하지 않고도 이름을 낸 것이 영(靈)이고, 어버이를 사랑함이 효(孝)이다. 대군은 행동거지가 엉뚱해 자주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됐으나 홀어머니 안순왕후에게는 효성이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묘소[편집]

원래는 경기도 성남시 수진동에 있었으나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이곡리로 이장했다. 김씨 부인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수진동에 있던 박씨 부인 묘는 화장하여 묘를 없애고 사당에 위패만 봉안하고 있다 한다.

각주[편집]

  1. 작은할아버지 임영대군 이구의 셋째 적자이며 평원대군 이임의 양자로 출계.
  2. 중종 56권, 20년(1525 을유 / 명 가정(嘉靖) 4년) 12월 14일(무술) 7번째기사
  3. 《성종실록》16년(1485) 5월 29일 1번째 기사
  4. 《성종실록》 13년(1482) 6월 11일 1번째 기사
  5. 《성종실록》 13년(1482) 6월 16일 2번째 기사
  6. 《성종실록》 13년(1482) 12월 11일 4번째 기사
  7. 《성종실록》16년(1485) 7월 12일 2번째 기사
  8. 이덕일, 《조선 선비 살해사건2》, 다산초당, 2006, p.30, ISBN 89-91147-68-2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