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경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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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녕군의 출생 년도에 대하여[편집]

경녕군의 출생년도를 1395년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다음의 근거를 보면,

경녕군의 출생은 정확히 1402년 12월 13일이 맞습니다.

<근거 자료>

경녕군이 1395년 12월 13일에 출생하였다는 주장은 경녕군이 1402년 12월 13일에 출생한 것으로 수정하시면 좋겠습니다.

근거 1) 조선왕조실록 태종 15년 을미 (1415, 영락13) 12월 15일(무인)

민씨(정비)가 모자(효빈과 경녕군)를 사지에 둔 죄를 묻는 왕지를 춘추관에 내리다

춘추관(春秋館)에 왕지(王旨)를 내리었다. 하루 전에 임금이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황희(黃喜)·이조 판서(吏曹判書) 박은(朴訔)·지신사(知申事)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민씨(閔氏)가 음참(陰慘)하고 교활(狡猾)하여 원윤(元尹) 이비(李裶)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자를 사지(死地)에 둔 죄를 갖추 써서 왕지(王旨)를 내리고자 하다가, 제술(製述)한 것이 뜻에 맞지 않아서 하지 않았다. 
박은이 아뢰기를,
“인신(人臣)이 비록 음식을 대하여서라도 인군의 다수(多壽)하고 다남(多男)하기를 축원하는데, 왕자(王子)가 태어난 날에 어찌 이러한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왕지를 내리지 않더   라도 신 등이 이미 들었으니, 감히 묵묵히 있고 청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전지하기를,

“내가 다시 상량(商量)하겠으니 경 등은 각각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이틀 후에 경승부 윤(敬承府尹) 변계량(卞季良)을 불러 왕지(王旨)를 지어 춘추관(春秋館)에 내리었다.
“태종 2년. 임오년(1402년) 여름 5월에 민씨(閔氏)의 가비(家婢)로서 본래부터 궁에 들어온 자(효빈 김씨)가 임신하여 3개월이 된 뒤에 나가서 밖에 거(居)하고 있었는데, 민씨가 행랑방에 두고 그 계집종 삼덕(三德)과 함께 있게 하였다. 
그 해 12월에 이르러 산삭(産朔)이 되어 이 달 13일 아침에 태동(胎動)하여 배가 아프기 시작하였다. 삼덕이 민씨에게 고하자, 민씨가 문 바깥 다듬잇돌 옆에 내다 두게 하였으니, 죽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 형으로 이름이 화상(和尙)이라는 자가 불쌍히 여기어, 담에 서까래[椽木] 두어 개를 걸치고 거적으로 덮어서 겨우 바람과 해를 가리었다. 진시(辰時)에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의 원윤(元尹) 이비(李裶)이다. 
그날 민씨가 그 계집종 소장(小庄)·금대(金臺) 등을 시켜 부축하여 끌고 아이를 안고 숭교리(崇敎里) 궁노(宮奴)인 벌개(伐介)의 집 앞 토담집에 옮겨 두고, 또 사람을 시켜 화상이 가져온 금침·요자리를 빼앗았다. 
종 한상좌(韓上佐)란 자가 있어 그 추위를 무릅쓰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어 마의(馬衣)를 주어서 7일이 지나도 죽지 않았다. 
민씨가 또 그 아비와 화상으로 하여금 데려다 소에 실어 교하(交河)의 집으로 보냈다. 바람과 추위의 핍박과 옮겨 다니는 괴로움으로 인하여 병을 얻고 또 유종(乳腫 : 유방염으로 젖이 곪는 종기)이 났으니, 그 모자가 함께 산 것이 특별한 천행이었다. 
내가 그 때에 알지 못하였다. 지금 내가 늙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핏덩어리[赤子]가 기어 다니는 것을 사람이 모두 불쌍히 여기는데, 여러 민(閔)가[민무구·민무질]가 음참(陰慘)하고 교활하여 여러 방법으로 꾀를 내어 반드시 사지(死地)에 두고자 하였으니, 대개 그 종지(宗支)를 제거하기를 꾀하는 생각이 마음에 쌓인 것이 오래 되었으므로, 그 핏덩어리에게 하는 짓이 또한 이와 같이 극악하였다. 
그러나 천도가 밝고 어그러지지 않아서, 비록 핏덩어리가 미약함에도 보존하고 도와서 온전하고 편안하게 한 것이 지극하였다. 어찌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로 하여금 그 악한 짓을 이루게 하겠느냐? 이것이 실로 여러 민가의 음흉한 일이다. 내가 만일 말하지 않는다면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어찌 능히 알겠는가? 참으로 마땅히 사책(史冊)에 상세히 써서 후세에 밝게 보이어 외척으로 하여금 경계할 바를 알게 하라.”
왕지가 이미 내려지자, 지관사(知館事) 이숙번(李叔蕃)이 왕지를 적어 대간에 이문(移文)하고자 하였다. 영관사(領館事) 하윤(河崙)이 지체하므로 이숙번이 위태한 말로 하윤을 공동(恐動)하니 하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근거 2) 세종 1년 기해(1419,영락 17) 12월7일 (정축) 경녕군 이비가 황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돌아오다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와 찬성 정역(鄭易), 형조 참판 홍여방(洪汝方) 등이 북경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기린·사자·복록(福祿)과 수현사(隨現寺)와 보탑사(寶塔寺)의 상서로운 그림 5축(軸)을 하사하였다. 복록은 당나귀와 같으나 높고 크며, 목은 길고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는데, 사람들이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황제가 스스로 복록이라고 이름한 것이라 한다. 황제가 비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는데, 예부에 명하여 세자 이제(李禔)가 조현(朝見)할 때의 예(例)에 의하여 접대하게 하고,

하루는 비를 전(殿) 위에 오르게 하고, 황제가 어좌에서 내려와 비가 꿇어앉은 곳까지 와서, 한 손으로 모자를 벗기고, 한 손으로 상투를 어루만지면서,


너의 아버지(태종)와 너의 형(세종 : 1397년 생)이 모두 왕이고, 너는 걱정 없는 처지에 있으니, 평소에 힘쓰는 바가 없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학문을 공부하든가, 활쏘기를 공부하든가, 자중하고 근신하면서 글을 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