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빈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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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빈 이씨
靖嬪 李氏
정빈 이씨의 사당
정빈 이씨의 사당
지위
조선 영조의 후궁
이름
별호 소훈 이씨 (昭訓 李氏)
소원 이씨 (昭媛 李氏)
시호 온희(溫僖)
신상정보
출생일 1694년
사망일 1721년 11월 16일 (음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순화방 창의궁
능묘 수길원
부친 이후철(李後哲)
모친 김해 김씨(金海金氏)
배우자 영조
자녀 1남 2녀
화억옹주, 진종, 화순옹주

정빈 이씨(靖嬪 李氏, 1694년 ~ 1721년 음력 11월 16일)는 조선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어머니이다.

생애[편집]

1694년(숙종 20년) 의정부좌찬성추증된 이후철(李後哲)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부사과 김매일(金梅一)의 딸 김해 김씨이다.[1]

1701년(숙종 27년), 8세의 나이로 입궁하였다. 이후 영조가 연잉군(延礽君)이던 왕자 시절에 그의 첩이 되었다. 그녀의 가계 배경과 어떤 이유로 입궁하여 궁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연잉군 또한 왕자의 신분으로 어떻게 궁인을 첩실로 들였는지 또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궁을 나와 연잉군의 사저인 창의궁(彰義宮)에 머물렀다.

1717년(숙종 43년), 훗날 화억옹주로 추증되는 장녀 향염(香艶)을 낳았으나 1년만에 요절하였고, 1719년(숙종 45년)에는 장남 만복(萬福, 효장세자)을, 다음해에는 차녀 향이(香怡, 화순옹주)를 낳았다.

1721년(경종 1년), 연잉군이 경종왕세제로 책봉되면서 세제궁의 종5품 소훈(昭訓)이 되었고 입궁하여 궐내에서 생활하였다. 같은해 11월 16일 갑작스럽게 병을 앓아 장동 사제로 출궁했으나 그날 밤에 사망하였다. 연잉군은 이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직접 《소훈이씨제문(昭訓李氏祭文)》을 지었다. 12월 14일, 양주 고령동(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6), 숙빈 최씨의 묘소인 소령원 근처에 안장되었으며, 묘소의 이름은 수길원(綏吉園)이다.

사후[편집]

정빈 이씨의 사당인 연호궁

1722년(경종 2년), 환관 장세상(張世相) 등이 궁녀들과 공모해 이소훈을 독살하였다는 발고가 있었고, 이 사건은 신임사화로 번지게 된다.

1724년(영조 원년), 영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내명부 정4품 소원(昭媛)에 추증되었으며, 1725년(영조 2년), 아들 경의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내명부 정1품인 정빈(靖嬪)으로 추증되었다.[2]

1762년(영조 37년), 영조의 명으로 정조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었는데, 이후 정조가 즉위하여 양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면서, 진종의 어머니 정빈 이씨 또한 온희(溫僖)의 시호와 수길원(綏吉園)의 원호, 연호궁(延祜宮)의 궁호가 추상되었다. 연호궁은 칠궁의 하나이다.

치제문[편집]

보물 제1491호 연잉군 초상
영조가 즉위하기 전 연잉군 시절의 초상화로, 21세때의 모습이다.

정빈 이씨 사망 당시 왕세제였던 연잉군(영조)은, 이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직접 제문을 지었다.

명분은 비록 남자와 여자이지만 생각은 친구사이여서
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대요, 그대의 마음을 아는 자는 나였다.
두 아이(효장세자, 화순옹주)가 장성하여 만약 생모를 묻는다면 내가 장차 무슨 말로 답하겠는가?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오장을 도려내는 듯하다.
아침에는 나와 마주하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저녁에는 병이 심하여 말하지 못하였으니
그 날 광경의 참혹함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이것이 곧 운명인가? 운명이 아닌가?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방년 스물여덟이 어찌 청춘이 아니겠으며,
운명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간사한 이에게 화를 내리는 이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소훈 이씨 제문

왕세제가 상궁 이씨를 보내고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소훈이씨의 영구 앞에서 전을 올리고 말합니다.
오호 애재라. 세상에 어찌 애통한 아픔이 없겠으리오마는 어찌 내가 오늘 당한 일과 같은 것이 있겠는가!
오호라! 완순한 성품과 우아한 기질을 가지고 양가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입궁하였다.
그대가 뽑혀 들어 왔을 때에 나 또한 나이가 어렸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처신하는 바가 규범과 법도가 있었으니 진실로 내가 남몰래 탄복한 바이다.

(중략)

규중에서 경사스럽게 자식을 낳아 길러 자손이 번성하였으니, 내가 일찍이
“선을 쌓은 사람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으리니 뒷날 자손이 번성 하는 기쁨은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고 백년을 기한하여 그 복을 누릴 것이다” 라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하나의 질병에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오호 통재라.

(중략)

이 삶은 끝났으니, 가는 것이 애통하다.
저승과 이승이 영원이 갈라져 소식이 서로 통하기가 어렵고,
소리를 머금고 슬퍼하니 눈물이 흐르는 시내를 이루었으며,
슬픔을 품고 제문을 지으니 목메어 차마 못 짓겠네.
촛불 아래에서 붓을 적시니 글자가 제대로 써지지 못하였다.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

(중략)

영혼이여! 멀리 가지 않았으면, 이 슬픈 정을 살펴다오.
아! 나의 도가 다하도다! 내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를 위해서 통곡하겠는가!
온화한 말과 낭낭한 소리를 어느 날에 다시 듣고,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낯빛을 어느 때에 다시 보겠는가?
매사 슬픔이 더해지고 물건마다 마음이 상하니 바야흐로 함께 살면서 해로하고자 했는데
어찌하여 합하였다가는 다시 이별하게 되었는가!
날마다 더욱 애달파서 이 정을 억제하기 어렵구나.
죽은 후에 의탁할 곳이 있으니 밝은 혼령에 의지할 것이다.
길택을 정하였으니 나의 마음이 위로된다. 이에 여관을 보내어 술을 대신 드리게 하니
영혼은 아느냐? 영혼은 아느냐?
지금 내 이 글은 나의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하소연하는 것이니
어찌 차마 글을 꾸미고 지나치게 칭찬하여 평소 삼가고 경계하는 마음을 저버리겠는가!

 

— 1721년 11월 19일, 연잉군(영조) 지음
현대어 번역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증 의정부 좌찬성 이준철(贈 議政府 左贊成 李竣哲, 생몰년 미상)
  • 어머니 : 증 정경부인 김해 김씨(貞敬夫人 金海 金氏, 생몰년 미상)
    • 남편 : 영조(英祖, 1694~1776)
      • 장녀 : 화억옹주(和憶翁主, 1717~1718)
      • 장남 : 진종(眞宗, 1719~1728)
        • 며느리 : 효순왕후 조씨 (孝順王后 趙氏, 1715 ~ 1751)
      • 차녀 : 화순옹주 (和順翁主, 1720~1758)
        • 사위 :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정빈함성이씨묘지(靖嬪咸城李氏墓地〉
    靖嬪李氏甲戌生系出咸陽考後哲通訓母金氏副司果梅一女
    정빈 이씨는 갑술생(1694년)으로, 가계는 함양이며 아버지는 통훈대부 후철(後哲)이고, 어머니 김씨는 부사과(副司果, 종6품 무관) 매일(梅一)의 딸이다.
  2. 영조실록》 3권, 영조 1년(1725년 청 옹정(雍正) 3년) 2월 27일 (을미)
    왕세자를 탄생한 소원 이씨를 정빈으로 추증하다
    소원(昭媛) 이씨(李氏)를 정빈(靖嬪)에 추증(追贈)했는데, 왕세자(王世子)를 탄생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