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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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순왕후
孝純王后
조선 진종의 왕비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
조선의 세자빈
재위 1727년 9월 29일 ~ 1728년 11월 16일 (음력)
전임 세자빈 어씨 (선의왕후)
후임 세자빈 홍씨 (헌경왕후)
이름
별호 현빈궁(賢嬪宮) · 효순현빈(孝純賢嬪)
시호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
휘호 휘정현숙(徽貞賢淑)
전호 연복전(延福殿)
신상정보
출생일 1715년 12월 28일(1715-12-28)
출생지 조선 한성부 숭교방
사망일 1751년 12월 20일(1751-12-20)(35세) (양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건극당 의춘헌
가문 풍양 조씨
부친 풍릉부원군 조문명
모친 완흥부부인 전주 이씨
배우자 진종 (효장세자)
자녀 정조 (양자)
능묘 영릉(永陵)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89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 趙氏, 1715년 12월 28일(음력 12월 14일) ~ 1751년 12월 20일(음력 11월 14일))는 영조의 장남이자 추존 왕인 진종(眞宗, 효장세자)의 비이며, 정조의 양어머니이다.

효장세자 사후 현빈(賢嬪)에 봉해졌으며, 사후에 효순현빈(孝純賢嬪)의 시호를 받았다. 조카인 세손 산(정조)이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됨에 따라 승통세자빈이 되었다가, 정조가 즉위하여 효순왕후(孝純王后)로 추존하였으며, 대한제국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로 격상되었다.

생애[편집]

조문명 초상(趙文命肖像)
효순왕후의 아버지인 조문명

1716년(숙종 42년) 1월 8일, 조문명(趙文命)의 딸로 태어났으며, 1727년(영조 3년) 정식 간택을 통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효장세자와 가례를 올렸다.[1] 그러나 다음해인 1728년(영조 4년) 효장세자가 10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으므로 후사는 두지 못했다.[2]

1735년(영조 11년), 영조사도세자가 태어나자, 세자빈 조씨를 더이상 빈궁으로 칭할 수 없으므로, 수빈 한씨(粹嬪 韓氏)와 덕빈 윤씨(德嬪 尹氏)의 고사를 따라 세자를 여읜 세자빈에게 빈호를 내려 현빈(賢嬪)으로 봉하였다.[3]

영조는 자녀 중에 딸 화평옹주와 며느리 현빈이 자신의 마음을 잘 헤아려준다며 총애하였다.[4] 영조는 청상과부가 된 현빈을 안타까워하며 아껴주었고, 현빈은 영조가 밤을 좋아하여 밤을 직접 삶아서 올리기도 했다. 영조는 현빈의 행록을 쓰면서 '현빈이 나를 먹이려고 늘 직접 밤을 삶았는데 영원히 졸서(卒逝)하던 날조차 삶아 놓은 밤이 소반에 남아 있었으니, 이는 현빈이 그날도 진상하려 삶아 놓았다가 병이 위독해져 하지 못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5]

1751년(영조 27년) 11월 14일, 창덕궁 건극당(建極黨)의 동실인 의춘헌(宜春軒)에서 병사하였다.[6]

영조가 지은 행록에 의하면 효장세자의 기일(忌日)이 바로 현빈의 시어머니인 정빈 이씨의 기일과 같은 날이라, 효장세자 기일과 정빈 이씨의 기일을 전후해서 매년 소식(素食, 거친밥을 먹음)을 하였는데 그러면 토황(吐黃)하는 병이 생겼고, 그 토황증이 계속 쌓였었다고 한다.[5]

사후[편집]

시호효순현빈(孝純賢嬪)이며, 1752년(영조 28년)에 효장세자의 묘에 합장되었다.[7]

시아버지인 영조
내가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는 것은
세상에 누군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가 없겠는가마는,
나와 빈의 사이 같은 경우는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서로 마음을 알아주면서 지낸 지가 이제 25년이나 되었는데
또 마음을 알아주는 효부(孝婦)를 영결(永訣)하였으니,
이 뒤로는 추모하는 회포와 슬퍼하는 마음을 다시 누구에게 말하면서 풀 수 있겠는가?

(중략)

무신년(1728년)에 눈물이 뒤범벅되어 효장세자의 행록을 지었는데,
이제 이 효부의 행록을 또다시 눈물에 젖어 쓰는구나.
멀리 푸른 하늘을 바라보니, 다만 스스로 억장이 무너질 뿐이다.

(중략)

내가 이제 노쇠한 나이에 전후 아들과 며느리의 행록을 지었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유감이 없다고 하겠으나
옛 슬픔과 지금의 슬픔으로 아픈 마음을 어떻게 비유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눈물을 흘리고 오열하면서 쓰노라니, 밤은 어찌 그다지도 깊단 말인가?
이에 돌에 새겨 영구히 보관하여 먼 후세에 전하게 하노라.

 
《효순현빈묘지명(孝純賢嬪墓誌銘), 영조 지음


1764년(영조 40년) 영조정조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 대통을 잇게 함에 따라 승통세자빈의 호를 얻었으며, 양자인 정조가 즉위하여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면서 현빈 또한 효순왕후(孝純王后)로 추존되었다.[8] 묘소는 영릉(永陵)으로 격상되었으며 파주 삼릉 중 하나이다.

1908년(융희 2년) 대한제국 순종소황후(昭皇后)의 시호를 받고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로 추존되었다.[9]

가족 관계[편집]

효순왕후가 등장하는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각주[편집]

  1. 영조실록》 13권, 영조 3년(1727년 청 옹정(雍正) 5년) 9월 29일 (임오)
    왕세자가 별궁에 나가 친영례를 행하다
  2. 영조실록》 20권, 영조 4년(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11월 16일 (임술)
    왕세자가 창경궁에서 훙서하다
  3.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1735년 청 옹정(雍正) 13년) 3월 16일 (병술)
    효장세자빈 조씨를 책봉하여 현빈으로 삼다
    이날 임금이 명하여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양관·정부·육조 참판 이상을 불러 빈청에서 회의하게 하였는데,

    효빈(孝嬪)·철빈(哲嬪)·소빈(昭嬪)이라는 삼망(三望)을 갖추어 올리니, 의망(擬望)을 더하라고 명하였다.

    또 장빈(莊嬪)·단빈(端嬪)·사빈(思嬪)으로써 의망을 더하였으나, 임금이 여러 글자의 음과 뜻이 모두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여 손수 ‘현(賢)’자를 써서 내리고, 명하여 도감(都監)을 설치해 예조·공조의 판서와 낭청(郞廳) 각각 한 사람씩을 당상·낭청으로 차정하고 옥인(玉印)을 만들어 올리게 하였으며, 내전에서 선사하였는데, 교명과 죽책문은 없었다.

  4.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7월 1일 (계미)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부모 마음을 잘 알아주는 자식이 있는 것이니, 며느리의 경우에는 현빈(賢嬪)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딸의 경우에는 화평옹주(和平翁主)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이제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다."

  5. 《효순현빈묘지문(孝純賢嬪墓誌文)
  6. 영조실록》 74권, 영조 27년(1751년 청 건륭(乾隆) 16년) 11월 14일 (병자)
    현빈이 건극당에서 훙하다
    현빈(賢嬪)이 환후가 있어 약원(藥院)에서 숙직하였다.

    정랑(正郞) 조재홍(趙載洪, 효순왕후의 오빠), 사과(司果) 조재부(趙載溥, 효순왕후의 남동생)에게 별도로 입직할 것을 명하였다.

    이날 밤에 현빈이 건극당(建極堂)에서 훙(薨)하였다.

  7. 영조실록》 75권, 영조 28년(1752년 청 건륭(乾隆) 17년) 1월 22일 (갑신)
  8.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1776년 청 건륭(乾隆) 41년) 3월 19일 (경인)
    효장세자를 진종 대왕, 효순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숭하고 시호를 내리다
  9.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년 대한 융희(隆熙) 2년) 5월 11일
    진종, 헌종, 철종 황제의 존호를 정하다
  10. 대제학 김익희(金益熙, 1610 ~ 1656)의 손녀이며 김만균(金萬均)의 딸
  11. 효종의 6녀 숙경공주의 아들
  12. 영조실록》 38권, 영조 10년(1734년 청 옹정(雍正) 12년) 7월 9일 (임오)
    사망한 고(故) 풍릉 부원군 조문명의 처 이씨에 대한 상장의 예
    고(故) 풍릉 부원군(豐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처(妻) 이씨(李氏)가 갑자기 졸서(卒逝)하였다.

    빈궁(嬪宮)의 거애(擧哀)하는 등의 예절은 부원군의 상례(喪例)에 따라 거행할 것을 명하고,
    상장(喪葬)에 쓰이는 여러 가지 물품과 담군(擔軍)은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상제(喪制)에 따라 해조와 해도로 하여금 넉넉하게 제급하도록 하였다.

전임
정순왕후
조선 역대 왕후
(추존)
후임
(헌경왕후)
효의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