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빈 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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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빈 신씨(信嬪 辛氏, ? ~ 1435년), 신녕옹주(信寧翁主) 또는 신녕궁주(愼寧宮主)는 조선 태종의 후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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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 |
빈 | |
이름 | |
별호 | 신녕옹주(信寧翁主), 신녕궁주(愼寧宮主) |
신상정보 | |
출생지 | 조선 |
사망일 | 1435년 |
사망지 | 조선 |
매장지 | 신빈신씨묘역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로223번안길 7 (도곡리)) |
왕조 | 조선 왕조 |
부친 | 신영귀 (辛永貴) |
배우자 | 태종 |
자녀 | 함녕군, 온녕군, 근녕군, 정신옹주, 정정옹주, 숙정옹주, 소신옹주, 숙녕옹주, 숙경옹주, 숙근옹주, |
생애[편집]
본관은 영월로, 검교 공조참의(檢校工曹參議) 신영귀(辛永貴)의 딸로, 본래는 원경왕후 민씨의 나인이었으나 1402년(태종 2년) 함녕군(諴寧君) 인(裀)을 낳고, 1414년 1월 13일 그 아들 인(裀)이 정윤(正尹)으로 봉해짐과 동시에 신녕옹주(信寧翁主)가 되었다.[1] 그 후, 1422년(세종 4년) 태종이 병으로 누워있을 때 간호를 하여 신녕궁주(愼寧宮主)로 봉해졌고[2], 고종 대(1872년)에 정1품 신빈(信嬪)으로 추증되었다. 신빈 신씨는 총애를 받아 큰 권세를 누렸다. 원경왕후 사후에는 내명부를 총괄하며 내명부 상급권한을 누렸고 많은 일을 하였다.
1422년(세종 4), 그녀는 의빈 권씨와 함께 출가하였는데 《법화경(法華經)》을 등사하려 하여 세종은 종이를 주고 불경을 쓰게 하였다.[3]
1423년(세종 5), 신씨가 태종의 복을 빌고자 하여 세종은 문소전(文昭殿)의 불당(佛堂)에 금으로 불경을 쓰게 하였다.[4]
능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 13번지에 있다. 2001년 9월 18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신영귀(辛永貴)
- 자녀[5]
- 장남 : 함녕군(諴寧君) 이인(李裀)
- 부인 : 전주군부인 전주 최씨(全州郡夫人 全州崔氏) - 좌의정(左議政) 최사강(崔士康)의 딸
- 장남 : 덕성군 이도공 민(德城君 夷悼公 敏, 1430년 - 1473년)
- 차남 : 온녕군(溫寧君) 이정(李裎)
- 부인 : 익산군부인 순천 박씨(益山郡夫人 順天 朴氏) - 부정(副正) 증찬성(贈贊成) 박안명(朴安命)의 딸.
- 장녀 : 정신옹주(貞信翁主)
- 사위 :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
- 차녀 : 정정옹주(貞靜翁主)
- 사위 :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
- 삼녀 : 숙정옹주(淑貞翁主)
- 사위 :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
- 사녀 : 소신옹주(昭信翁主)
- 사위 : 유천위(柔川尉) 강이공(康夷公) 변효순(邊孝順)
- 오녀 : 숙녕옹주(淑寧翁主)
- 사위 : 파성군(坡城君) 윤우(尹愚)
- 육녀 : 숙경옹주(淑慶翁主)
- 사위 : 좌익공신(佐翼功臣)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
- 칠녀 : 숙근옹주(淑謹翁主)
- 사위 : 좌익공신(佐翼功臣)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
같이 보기[편집]
- 신빈신씨묘역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5호
각주[편집]
- ↑ 《조선왕조실록》태종 27권, 14년(1414 갑오 / 명 영락(永樂) 12년) 1월 13일(무자)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세종 15권, 4년(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2월 20일(정미)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세종 16권
- ↑ 《조선왕조실록》세종 21권
- ↑ 신녕 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3남 7녀를 낳았는데, 장남 인(裀)이 공녕군(恭寧君)에 봉해졌으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조선왕조실록》태종 36권, 18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11월 8일(갑인) 6번째기사
신녕궁주(愼寧宮主) 신(辛)씨가 졸하였다. 태종이 총애하여 함녕군(諴寧君) 이인(李裀)·온녕군(溫寧君) 이정(李裎)과 일곱 옹주(翁主)를 낳았다. 《조선왕조실록》세종 67권, 17년(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년) 2월 2일(갑진) 2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