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표
원두표(元斗杓, 1593년 ~ 1664년)는 조선후기의 문신, 공신이다. 인조반정에 가담하였으며 서인 중진으로 원당의 당수였다.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灘叟)·탄옹(灘翁),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원주(原州)시중공계이다. 박지계의 문인이다.
생애[편집]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아버지 원계군(原溪君) 원유남(元裕男) 등 여러 대신들과 힘을 합하여 인조반정에 성공하였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뽑히고 평원군으로 책봉되었다. 또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전주 부윤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위하여 어영대장을 지냈다. 이후에는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경상도관찰사로 전출되었다. 이후 호조판서로 임명되었으며 그 후 효종 때 호조판서, 공조판서, 좌참찬, 판의금부사, 형조판서를 지내고 연이어 개성유수를 한 뒤 다시 판의금부사,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뒤 우의정, 현종 때 좌의정에 올라 내의원·군기시의 도제조를 겸하였다. 실록에서는 김자점의 옥을 두고 원두표가 빚어내 만든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 그 손자 원몽린은 효종의 다섯째 딸 숙경공주와 혼인하여 흥평위(興平尉)에 봉해졌다.[2]
사후[편집]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에 있다. 석물로는 묘비 1기, 상석,향로석,혼유석 각 1기, 문인석,망주석 각 1쌍 및 계체석 등이 있다. 묘역에서 30m 아래에 신도비가 있다. 망주석은 폭이 185㎝의 규모로 좌우측 모두 올라가는 형태의 쥐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문인석의 형태는 양관조복(梁冠朝服)에 홀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양관의 무(武)에는 여의운문을 장식하였다. 조복의 앞면에는 홀을 쥔 손등으로부터 포(袍)의 주름이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고 뒷면에는 여지문양이 있는 대(帶)와 후수(後綬)와 패옥(佩玉)을 양각으로 묘사하였다. 신도비는 원두표 사후 102년 만에 건립된 것이다. 2004년 5월 17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 5대조 : 원중륙(元仲稑)
- 고조부 : 원팽조(元彭祖) 1473년-1542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역임.
- 증조부 : 원송수(元松壽)
- 할아버지 : 원호(元豪)
- 아버지 : 원유남(元裕男)
- 부인 : 삭녕 최씨, 최동식(崔東式)의 딸
- 장남 : 원만석(元萬石)
- 손자 : 원몽은(元夢殷) - 생부 원만춘
- 차남 : 원만리(元萬里)
- 손자 : 원몽린(元夢麟)
- 손자 : 원몽익(元夢翼)
- 삼남 : 원만춘(元萬春)
- 손자 : 원몽헌(元夢軒)
- 손자 : 원몽은
- 사위 : 이민서(李敏敍)
- 외손자 : 이관명(李觀命)
- 외손자 : 이건명(李健命)
- 외손서 : 홍중기(洪重箕)
- 외손서 : 남학명(南鶴鳴)
- 외손서 : 김창립(金昌立)
- 장남 : 원만석(元萬石)
- 측실 : 이름모름
- 서자 : 원만동(元萬東)
- 서자 : 원만웅(元萬雄)
- 서자 : 원만령(元萬齡)
- 서자 : 원만적(元萬敵)
- 부인 : 삭녕 최씨, 최동식(崔東式)의 딸
- 아버지 : 원유남(元裕男)
- 할아버지 : 원호(元豪)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기타[편집]
그의 원당은 산당에 패하여 몰락하였으나 후일 소론계에 흡수되었다.
각주[편집]
관련 항목[편집]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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