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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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경
李浚慶
출생 1499년 음력 12월 27일
경기도 광주군
사망 1572년 음력 7월 7일 (74세)
경기도 광주군
필명 자(字)는 원길(原吉)
호(號)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직업 문인, 사상가, 정치가, 시인, 서예가
국적 조선
활동기간 1516년 ~ 1572년
장르 한시, 시조, 서예
부모 이수정(부), 신씨 부인(모)
친지 이세좌(조부)
이윤경(형)
이연경(족척)
이중경(족척)
배우자 김씨 부인
종교 유교(성리학)

이준경(李浚慶, 1499년 ~ 1572년)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서예가, 학자이다. 자(字)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본관은 광주(廣州)이다.[1] 영의정을 지냈으며, 선조 묘정에 종사 되었다.

이력[편집]

기묘사화 때 갇힌 죄없는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주장하다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고 쫓겨났다. 명종의 고명대신으로 그의 유명을 받들어 하성군(훗날의 선조)을 옹립했다.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정사에 임하여 명재상으로 칭송받았다. 사림파의 급진적 개혁에 반대하였고, 신진 사림(훗날의 동인)과 기성 사림(훗날의 서인)의 분쟁을 조정하다가 신진사림의 정적(政敵)으로 지목되어 이이, 기대승 등의 공격을 받았다. 이이와 심하게 갈등하던 그는 이이의 인격을 의심하는 발언을 하여 그와 척을 지게 된다. 죽기 직전 붕당의 폐단이 나라의 혼란이 되리라는 유언을 올렸다가 이이의 공격을 받았으나, 유성룡 등이 그를 변호하여 처벌을 면했다.[2]

이연경조광조의 문인이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추서되었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할아버지는 이세좌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이수정(李守貞)이다. 할아버지 이세좌는 성종승정원좌승지폐비 윤씨를 사사하라는 명을 받고 금부도사와 함께 사약을 들고 폐비 윤씨를 찾아가 사사를 목격했는데, 이때 그의 할머니는 우리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면서 염려했다 한다. 이준경이 6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할아버지 이세좌와 아버지 이수정이 사사되었다.

수학과 과거 급제[편집]

1504년 연산군 때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형 이윤경과 함께 괴산으로 유배되었으나, 1506년 중종 반정으로 풀려나왔다.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16세 때부터 이연경조광조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이연경과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정여창으로 이어지는 사림의 학맥을 계승한다.

그 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이 되었으나, 중종 14년(1519년) 기묘사화사림파를 옹호하여 죄없는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주장하다가 김안로에 의해 파직되었다. 이후 향리에 칩거하며 문밖 출입을 끊고 독서와 수양으로 성리학에 정진했다. 그 뒤 김안로가 사사된 후 복직되었다.

정치 활동[편집]

사림 보호와 을사사화[편집]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승정원승지, 형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조판서로 승진하여 되돌아왔고 대사헌,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우찬성, 좌찬성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을사사화 당시 이언적과 함께 신진 사림파와 선비들을 보호하려 애썼으나 실패하였다. 대사헌으로 있던 1550년(명종 5년)에는 정적(政敵)이었던 이기의 탄핵으로 대윤 윤임의 일파로 몰려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 1551년 석방되어 지중추부사로 복귀했다.

을묘왜변 토평[편집]

1553년(명종 8년) 함경도 도순변사로 출정하여 북방여진족의 반란을 진무했다. 1555년 호남왜구들이 쳐들어와 해안가의 군현이 함락되자,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을묘왜변을 진압하고 왜구를 격퇴시킨 공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555년(명종 10년) 전라도도순찰사로서 내륙 깊숙이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고 돌아와 의정부우찬성병조판서가 되었다. 1558년 의정부우의정에 오른 이후 좌의정을 거쳐 1565년 영의정이 된다.

영의정 재직[편집]

영의정이 되자 이량이 퇴출당하면서 국정을 주도하여, 척신 윤원형을 축출하는 한편 조광조를 신원하여 문묘(文廟)에 종사하고, 심통원을 축출하였으며, 궐내 불당을 해체하고 불교 억압 정책과 소격서를 혁파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한 정치가 정착되도록 노력했다.

영의정 시절 명종이 죽자 좌의정 심통원과 함께 왕의 임종을 지키며 고명대신으로 명종의 유지를 받들었는데, 심통원이 다른 뜻을 품고 하성군을 지지하지 않자, 그를 창고에 가둔 뒤 원상으로서 국사(國史)를 총괄했고, 왕의 유명을 받들어 선조를 옹립했다. 한편 선조 즉위 시 그는 새 왕은 명철하기는 하지만 그릇이 큰 인물은 아니다. 예의가 바르기는 해도 절대 겸손한 성품은 아니다 라는 평을 하였고[3], 이는 그대로 선조와 다른 이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 후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선조에게 정몽주의 후손을 벼슬에 등용시킬 것을 건의하였으며, 홍수와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세금을 덜게 할 것을 부탁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이와의 갈등[편집]

한편 이준경은 명종 말엽~선조 즉위 초를 전후하여 파벌, 붕당을 조장하는 이들이 있다고 여러번 지적했고 그 중심의 인물로 이이, 심의겸 등을 지목했다. 선조 즉위 초 신진 사류의 한사람인 이이의 거침없는 발언과 비판에 염증을 느낀 사람 중에는 이준경도 있었다. 원로대신들 중 허엽과 이준경 등은 율곡을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분을 터뜨렸다.[4]

이준경의 친구 중에는 백인걸이 있었다. 율곡 이이의 솔직함과 냉정함에 화가 난 이준경은 백인걸을 찾아가 항의를 한 일도 있다. 한번은 이준경이 백인걸을 찾아와 "자네가 추천한 이 아무개라는 인간이 왜 그 모양인가?[4]" 하고 드러내놓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 발언이 이이의 귀에 들어가면서 이이는 이준경을 상당히 안좋게 생각했고, 그 역시 이이의 인격을 의심하였다.

후에 이준경이 병으로 임종하기 직전에 사림들이 당을 나누어서 싸울 것을 예견하였다. 그리고 당쟁의 중심인물로 이이를 지목하였다. 화가 난 이이는 이준경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이이는 붕당정치를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니며, 사람은 각자 사상이 다를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이에 의하면 붕당은 국가정치를 문란하게 하는 무리가 아니라 뜻이 맞는 이들끼리의 모임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소인이 무리를 이루듯, 뜻을 같이 하는 군자들끼리 집단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또한 상대방 정당이라고 해서 전부 소인배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준경이 당쟁을 예견하는 글을 쓰자 이이는 이준경을 향해,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사악하다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사사로운 붕당을 깨뜨려야 합니다. 신이 보건대 오늘날 사람들은 간혹 잘못된 행실이나 법에 어긋난 일이 없는 사람이 있더라도 말 한마디가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으며, (반대로) 행검(行檢)을 유의하지 않고 독서에 힘을 쓰지 않더라도 고담준론으로 붕당을 맺은 자에 대해서는 고상한 풍치가 있다고 여겨 마침내 허위풍조를 빚어내고 말았습니다. 군자는 모두 조정에서 집정하게 하여 의심하지 마시고 소인은 내버려두어 자기들끼리 어울리게 해야 하니 지금은 곧 전하께서 공정하게 듣고 두루 살펴서 이 폐단을 힘써 없앨 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내는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사림 인사들은 율곡 이이의 종조부 이기가 이준경과 원수였던 것과, 관료생활 초반 그의 솔직함을 비판하고 예의 없는 인간으로 몰고간 것에 대한 한풀이로 해석하였다. 뒤늦게 1575년 을해당론으로 동인, 서인 분당이 확실해지자, 이이는 그의 당론을 인정하고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였다.

사후[편집]

1572년(선조 5년) 죽기 직전 붕당의 폐단이 나라의 혼란이 되리라는 유언과 경영에 관하여 4가지 조목으로 된 유소(遺疏)를 올리고 죽었다. 그중 붕당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앞으로 국가가 난국에 빠질 것이라는 내용은 많은 파문을 일으켜 이이·유성룡 등 신진 사류들은 이를 격렬히 부정하면서 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으나 이 예언은 몇 년 후 동서분당으로 현실화되었다. 그가 선조 즉위 시 했던 발언 역시 문제시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이이, 류성룡 등의 공격을 받았고 이후에도 계속 이이의 공격을 받았으나, 류성룡 등이 그를 변호하여 처벌을 면한다. 그 뒤 사후 4년만에 붕당이 출현하자 이이도 생각을 바꾸게 된다. 후일 충정(忠正)의 시호가 내려졌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학봉은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추서되었다.

이준경선생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부인과 함께 장사지낸 합장묘이며, 긴 돌을 이용하여 봉분 아랫부분을 둘렀다. 묘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으며, 상석 앞에는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문인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근래에 세운 것인데, 원래의 비문은 노수신이 지어 선조 18년(1585)에 세운 것으로 마모가 심해 현재는 수원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서 보관하고 있다. 1987년 2월 1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되었다.

선조 묘정에 종사되고,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편집]

  • 동고유고 (東皐遺稿)
  • 조선풍속 (朝鮮風俗)

[편집]

秋夜卽事 / 어느 가을밤에

愁陰連結鬱秋懷 (수음연결울추회) / 흐린 날 뒤 따르니 울적한 가을

默坐深堂對酒杯 (묵좌심당대주배) / 가만히 깊이 숨어 술잔만 든다

明月不隨雲盡沒 (명월불수운진몰) / 밝은달 따르지 않고 구름 속에 숨었으니

長風時爲客吹開 (장풍시위객취개) / 긴 바람만 객을 위해 불어오누나

가족 관계[편집]

  • 부인 : 김양진의 딸
    • 아들 : 이예열(李禮悅)
    • 자부 : 장언방의 딸
      • 양손자 : 이사수(李士修) - 생부 : 이계열
    • 아들 : 이선열(李善悅) - 일찍 죽음
    • 아들 : 이덕열(李德悅)
      • 자부 : 허우의 딸
      • 손자 : 이사영(李士潁)
      • 서자 : 이정직(李廷直)

기타[편집]

영의정 재임 시절 아들이 홍문관 관리 후보로 올라오자 "내 아들이라서 누구보다 실력이 모자라다는 것을 잘 안다"며 명단에서 빼버린 일화가 있다.[5]아들 이덕열은 그의 사촌형제 이유경(李有慶)의 양자로 보냈다. 이덕열의 아들이 이사성으로 뒷날 허균의 사위가 된다.

죽기 직전에 붕당의 출현과, 당쟁으로 나라가 망할 것이라 예언하여 화제가 되었다. 임종 전에 당쟁을 예견했다가 이이의 비판을 받았다. 후일 당쟁 예언이 사실로 나타나자 율곡 이이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이때 유성룡 등이 이준경을 옹호하였으므로 훗날 영남 유림들의 추앙을 받아 그 자손 이인좌가 충청도와 영남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심통원[6]와도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는 동인남인이 그를 추종, 추앙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이인좌[편집]

이인좌는 광주이문 이준경의 자손이 아니며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음을 알려드립니다.(광주이씨 좌통례공파 칠곡종회)

이인좌 이운징의 본관 오류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보기에는 의심스럽고 의혹된 내용이 있어 다음과 같이 그 실체를 광주이씨 족보와 참조내용을 참고하여 알려드립니다.

이인좌는 全州李氏 세종 4남 임영대군파 후손이며 전주이씨 세종4남 임영대군파보에도 엄연히 나타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콘텐츠진흥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이인좌에 관한 본향이 廣州로 표기되어 있으며 조부 운징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광주이 족보상에 이준경(동고정승)의 아들 3남 덕열은 양자 출하여 사촌 이유경의 자로 입적하였고, 그 3세후손 동명이인 이운징(1653-1729,2.3)은 통덕랑 충의위모장군이었으며 전주이씨 이운징은( ? -1717) 강원 전라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손자가 이인좌 입니다.

해프닝 일까요? 아니면 역사조작일까요?
이인좌,이운징이 광주이문이라는 잘못된 기록이 저의 기억엔 오래 전부터 인터넷에서 회자 되었으나 일부 사이트는 수정되었으나 아직도 잘못된 기록이 방치되고 있습니다. 한국 콘텐츠진흥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빠른 시일내 수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역사는 이긴 자들의 기록만을 중시할 뿐 패한 자는 만고의 역적이 될 수 밖에 없었으며, 역사는 이인좌의 난이라 칭하고, 이를 진압한 자들은 만고의 충신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시각에서 볼 때 이인좌는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 탄을 왕위에 옹립하고자 쿠테타를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난 비극의 장본인이었습니다. 비슷한 예로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반정과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반정을 일으킨 혁명은 성공한 쿠테타였으나, 이인좌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참고자료[편집]

이운징(李雲徵,이인좌의 조부) (참조: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미상∼1717년(숙종 4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7] 증조부는 이몽상(李夢祥)이고, 조부는 이정신(李廷臣)이며, 부친은 이응시(李應蓍)[8] 1728년(영조 4) 무신병란을 일으킨 이인좌(李麟佐)는 손자이다.

1678년(숙종 4) 문재(文才)와 조행(操行)이 뛰어나고 지려(智慮)와 용력(勇力)이 뛰어나 오정위 (吳挺緯)와 이원정(李元禎)의 추천으로 곧바로 6품에 발탁되어 호남의 수령(守令)직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호남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잘 다스린 공적이 인정되어 영의정 허적(許積)의 추천으로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에 임명되었다. 이때 숙종은 이운징이 쓸 만한 재주가 있다고 하여 남쪽 고을에서 발탁하여 임명한 것이니 모름지기 직무에 충실할 것을 특별히 유시하였다. 그러나 1680년(숙종 6)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과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섬으로 유배당하였다. 1689년(숙종15) 사헌부장령으로 다시 등용되어 집의, 승지를 거쳐 강원도관찰사,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형 이의징(李義徵)과 악한 짓을 같이 하여 권세를 탐내고 화를 만들기를 좋아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 귀양조치 당하였다가, 1699년(숙종 25)에 관직이 삭탈된채 시골로 보내어졌으며, 1710년(숙종 36)에 유배가 해제되었다.

각주[편집]

  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 서인은 그가 죽은 뒤에 처벌할 것을 주장해왔다.
  3. 이한우, 조선의 숨은 왕 문제적 인물 송익필로 읽는 당쟁의 역사 (도서출판 해냄, 2010) 32페이지
  4. 백완기, <한국사학에 바란다 - 열린 마음으로 6 율곡으로부터 교훈을> 《한국사시민강좌 제37집》 (일조각, 2005)
  5.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101385141
  6. 심의겸의 종조부
  7. 손자 이인좌(李麟佐)를 참고하여 본관을 광주(廣州)에서 전주(全州)로 수정함.
  8. 부 이응시(李應蓍)의 문과방목을 참고하여 부, 조, 증조를 추가함.

관련 항목[편집]

참고 문헌[편집]

전임
김수동
조선섭정
1568년 2월 ~ 1568년 3월
후임
박승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