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Picto infobox military.png
강순(康純)
생애 1390년 ~ 1468년 10월 27일
출생지 조선 충청남도 남포
사망지 조선 한성부
별명 태초, 시호장민공(莊敏公)
복무 조선
최종 계급 품계: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관직: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급)
주요 참전 여진족 토벌, 이시애의 난
기타 이력 원종공신 2등,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1등, 신천부원군, 의정부영의정(정1품급), 시호는 장민

강순(康純, 1390년 ~ 1468년 10월 27일)은 조선 세종, 세조 때의 명장, 정치가이다. 본관은 신천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친정 종손자이자 상산부원군 증 영돈령부사 강윤성의 증손이다. 왜구여진족을 여러 번 토벌하여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고, 관직은 의정부우의정 신천부원군에 이르렀다.

남이의 옥사에 연루되어 국문 후 거열형을 당했으며, 조선 순조의정부우의정 남공철의 상소로 복권되었다. 자는 태초이고 시호는 장민(莊敏)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강순은 황해남도 신천에서 병마절도사 강진행(康鎭行)의 아들로 태어났다. 강조강지연의 후손으로, 신덕왕후의 친정아버지 상산부원군 증 영돈령부사 강윤성의 증손이었다. 그의 집안은 조선 왕실의 가까운 인척이었으나 무안대군, 의안대군제2차 왕자의 난 당시 태종 이방원의 손에 처형당했으므로 그의 가계는 사실상 몰락했었다. 그는 군인으로 훈공을 세워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관료 생활[편집]

음보로 관직에 올라 여러 벼슬을 지냈다. 1443년 제주도 지대정현사로 부임하였다. 1443년과 1444년 제주도를 침략한 왜구의 선박을 발견하고 격추하고 왜구 몇명을 생포하였다. 그 뒤 첨지중추원사, 상호군 등을 거쳐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다. 1443년 회령도호부사가 되고 1450년군기감사, 첨지중추원사 를 거쳐 평안도 조전절제사가 됐고, 1451년 황해도 조전절제사가 되었다. 1455년 12월 원종공신 2등관에 녹훈되었다. 세조 즉위 후 1456년(세조 2년) 판의주목사, 1458년 다시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가 중추원부사로 승진했다. 1459년 행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가 1460년 행 상호군으로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절단이 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1460년 봄 판길주목사, 판영북진도호부사를 거쳐 그해 9월 여진족 모린위 부락을 토벌하였다. 바로 자헌대부로 승자하여 종성절제사로 부임하였다. 1461년 함길도 도절제사, 1465년 중추원사, 1466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

북방 정벌[편집]

1467년이시애의 난 때 진북장군(鎭北將軍)에 임명되어 손소(孫昭), 어유소를 대동하고 함께 난을 진압하러 나가 함경도 홍원, 북청 등지에서 공을 세우고 되돌아와 적개공신에 녹훈되었다.

같은 해 국경을 넘어 여진족의 소굴인 건주위를 칠 때, 서정 장군이 되어 우장군 남이, 좌장군 어유소와 함께 출전하여 여진족 지도자 이만주 부자를 죽이는 등 많은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조선으로부터는 군공 1등(軍功一等)에 녹훈되었다. 명나라 헌종으로 부터는 은 20냥과 비단을 하사 받았다. 이후로 그의 벼슬이 차차 올라 의정부우의정이 되었다.

모함과 죽음[편집]

1468년(세조 13년) 그는 신천부원군으로 봉군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 세조가 문둥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예종이 즉위한 해에 반란을 꾀했다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남이와 함께 추국을 당한 뒤 죽음을 당했다.

사후[편집]

유자광은 국문장에서 고문을 당한 남이와 엮었고 강순도 국문을 당하다 남이거열형(車裂刑)을 본 후 그 자신도 거열형을 당했다.

고문에 정신을 잃고 억지 자백에 응했다가 사형을 선고받는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강순은, “남이야! 너는 나와 무슨 원수가 졌기로 나를 끌어넣었느냐?” 하니, 남이는 “여보시오 ㅇ 상! 나도 참으로 원통하오! 당신은 원상으로 내가 누명을 쓰고 죽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있오? 그래서 우상도 같이 죽어야 싸다고 여긴 것이오!” 하고 조롱하였다. 거열형 직후 시신은 7일간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가 누군가에 의해 수습되었다.

그 뒤 충청남도 보령군 청연역 뒤쪽 배자산 아래에 안장했다가 뒤에 보령군 미산면에 이장되었고, 1818년(순조 18년)에 당시 의정부우의정 남공철의 건의로 복권되었고, 1871년 고종 때 가서 시호가 추서된다. 시호는 장민공(莊敏公)이다.

가족 관계[편집]

본가(신천 강씨)

  • 증조부 강윤성(康允成)
    • 대고모 신덕왕후
    • 대고숙 태조
    • 할아버지 : 강윤부(康允富)
      • 아버지 강진행(康鎭行, ? - 1453년)
      • 어머니 : 이름모름
        • 동생 : 강말생(康末生)
        • 동생 : 이름 미상
        • 제수 : 복수(卜守)
          • 조카 : 강금무적(康金無赤)
        • 동생 이름 미상
        • 제수 : 명근(命斤)
        • 동생 : 강아지(康阿只)
      • 서모, 이름 미상, 아버지 강진행의 첩
        • 서제 : 강춘생(康春生)

처가(전주 이씨)

  • 부인 : 전주이씨(全州李氏[1], ? - ?, 병조참의 이확의 딸)
    • 아들 : 강공이(康孔伊, ? - 1468년)
    • 자부 : 이름 미상, 고모뻘 되는 친척이 명나라 영종의 후궁[2]이므로 의금부(義禁府)에 특명을 받아 연좌되지 않았다.[3]
    • 차남 : 강석손(康碩孫, ? - ?)
    • 첩부 : 옥금(玉今[4],? - ?, 아들 강석손의 첩, 하동(河東)에 관비가 되었다.)
    • 첩부 : 관음비(觀音非[4]), 사천(泗川)의 관비가 되었다.)
  • 계비 : 부귀(富貴[4],? - ?)
  • 계비 : 중비(仲非[5], ? - 1471년 3월 17일)
  • 후첩 : 춘월(春月, 웅천(熊川)의 관비로 끌려갔다.[4]
  • 후첩 : 월비(月非, 신숙주의 노비가 되었다.[6])

기타[편집]

사후 그의 가족은 노비로 전락했고 공신들에게 분배되었다. 그의 후처로 후에 여종이 된 중비(仲非)는 자신의 종이었던 막산(莫山)과 함께 거평군(居平君) 이복(李復)의 종으로 분배되었다.[7] 그러나 중비막산과 간통하였다가 옛 상전의 아내와 종의 관계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참수되었다.[7]

각주[편집]

  1. 세조실록 44권, 세조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12월 26일(무오) 1번째기사 "우의정 강순의 아내가 연좌로 고부 관노로 있는 아비 이확을 용서할 것을 청하다"
  2. 영종의 아들 성화제에게는 태비가 된다.
  3. 예종실록 1권, 예종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0월 30일(병진) 9번째기사
  4. 예종실록 3권, 예종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2월 3일(무자) 2번째기사
  5.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 신묘 / 명 성화(成化) 7년) 3월 17일(경인) 5번째기사
  6. 예종실록 3권, 예종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1월 13일(무진) 1번째기사
  7.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 신묘 / 명 성화(成化) 7년) 3월 17일(경인) 5번째기사

관련 항목[편집]

외부 링크[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