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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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戊午士禍/戊午史禍
참가자 연산군·유자광훈구파
장소 조선 조선
날짜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사망자 김일손 등의 사림파
원인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가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에 대해 ≪성종실록≫에 실린 사초 <조의제문>을 트집 잡음
결과 김종직 부관참시
많은 선비들이 죽거나 귀양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유자광연산군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이다. 사건이 일어난 1498년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史’(사)자를 넣어 한자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표기한다.

배경[편집]

사림파가 중앙에 등용되어 관계에 나오기는 성종 때부터다.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김종직을 중심으로한 사림파를 주로 삼사[1]를 중심으로 기용한다. 그러나 사림파의 성리학 근본주의적 행태는 말년의 성종까지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그 아들 연산군은 이런 사림파의 행태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사림파도 연산군의 국정방식이 못마땅했고 그 결과 삼사연산군 즉위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릴 정도[2]로 국왕과의 대립이 있었다.

사건의 흐름[편집]

김일손의 사초[편집]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 성종 때 등용되어 춘추관에 사관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당시 쓰던 사초에서 상당히 문제의 소지가 많고 신빙성도 매우 부족한 기록을 자주 실었는데 그렇게 기록한 사초중 특히 위험했던 사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세조가 아들의 후궁 권귀인을 불러 불륜을 시도했지만 권귀인이 이를 거부했다는 내용과 다른 후궁인 소훈 윤씨와의 불륜을 암시하는 기록[3]
    • 둘다 허반(許磐)을 통해 들은 일[3]로, 그 허반은 수십년 전인 14살때에 홍태손(洪泰孫)과 허반(許磻-동명이인)이 하던 대화를 기억해 말해준 것이다. 무엇보다 허반이 말해준 원래 이야기는 권씨의 경우 의경세자의 장례 후 시아버지 세조가 고기를 권하자 예법에 따라 거부했는데 세조가 화를 내자 도망간일을 두고, 윤씨는 세조가 선물을 많이준 것과 궁궐로 초대할 때 타고올 가마로 왕이 쓰는 어가를 보내준 일을 두고 이렇게 썼다.[4] 증거의 신빙성도 부족하고 주장의 비약이 매우 심각하며, 더불어 정황상 세조는 후궁이 거의없을 정도로 여색에 무심한 사람이라 이런 불륜을 저지렀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 소릉(昭陵)의 무덤을 파서 유해를 바닷가에 버렸다.'
    • 조문숙(趙文琡)에게 들은 일로[3], 그러나 정작 단종의 어머니의 묘는 이장되어 격하면 되었지 무덤은 남마있는 상황이라 완전히 틀린 기록이다. 그리고 무오사화 이전에 김일손은 소릉이 바다에 버려지지 않았음을 알았고 소릉의 복구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린적이 있었는데, 이를 볼때 김일손이 이렇게 중요하고 위험한 글을 쓰면서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내용이다.
  • 승려 학조가 술법으로 궁궐을 조종하고, 왕족 부인들과 불륜을 저지르며, 그 중 영웅대군의 부인 송씨와 군장사(窘長寺)에서 불륜을 저질렀다.
    • 학조가 전횡을 저지르는것을 과장해서 썼고 왕자의 부인들이 학조에게 선물을 많이 주는 것을 간통으로 모함했으며, 그중 송씨의 불륜은 박경이 말해주었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박경이 말해준것은 동대문에 송씨가 불륜을 저지른다는 비방서가 전부였다.[3]
  • 계유정난때 황보숭과 김종직이 살해당한 것을 "황보(皇甫)·김(金)이 죽었다"라고 기록
    • 김종직이 두사람이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선 두사람은 절개를 지킬수도 없이 갑자기 암살되어 인물에 대한 평가가 틀린 부분은 둘째치더라도 이부분이 세조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기록이라 위험한 기록이었다.
  • "노산(魯山-단종의 격하된 군호)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기록
    • 최맹한에게 들은 일로[5] 후대에 단종릉을 찾을 때의 기록으로 보아 어느정도 사실관계와 유사하다. 그리고 세조의 정통성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글이라 연산군과 조선왕실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사초였다.
  • 김종직이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기 위해 쓴 조의제문
    • 바로 위에 단종의 시신 기사 바로 뒤에 쓴 글로 김일손의 증언에 따르면 김종직은 이걸 써서 (세조에게)분노했다고 증언했으며, 적어도 만약 김종직이 그럴의도가 없었어도 김일손은 스승의 시를 세조를 비판하기 위해 사초에 기록한다.

모두 조선왕실을 모욕하거나 정통성을 공격하는 내용들로 그중 상당수가 신빙성이 부족하거나 사실이 아닌 기록들이 많았다. 때문에 연산군도 다른 부분보다 실록의 사초에 허위사실을 기록한 부분을 먼저 지적할 정도로 김일손 사초의 신빙성 문제는 심각했다.

사초의 발견[편집]

한편 이 김일손의 사초는 생각보다 오랜기간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성중엄, 윤효손등 편수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손이 사초를 너무 형식에 맞지 않고 뒤죽박죽 써버렸고 위의 문제된 기록외에도 신빙성 없는 기록들이 너무 많아서[3] 상관들이나 편수관들이 조잡한 김일손의 사초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종 사망후 성종실록을 쓰기위해 모든 사초를 모으면서 김일손의 사초도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편 김일손은 훗날 증언에서 이시기에 이극돈이 자신을 비방하는 내용을 사초에서 삭제해줄 것을 부탁했는 말을 주변에서 들었다고 중종때 사관들은 이것때문에 이극돈이 원한을 가지고 김일손 사초를 공개했다고 주장한다. 일단 김일손이 이극돈을 비난하는 사초를 쓴거는 이극돈의 증언으로도 확인되는 부분이지만 이극돈이 사초의 삭제를 부탁했다는 주장은 김일손의 착각이거나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은게, 앞에서 말한대로 당시 김일손의 사초는 (문제적인 내용과는 별개로)매우 조잡해서 실록편수관들도 크게 신경쓰지 않던 사초였고, 무엇보다 사초의 사사로운 수정은 당시에는 목숨을 걸고해야하는 중범죄로, 특히 이극돈은 예종시절에 실록청에서 일하면서 부하와 동료들이 사초를 함부로 수정하다가 처형당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목도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극돈은 사초의 공개를 막으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를 전부가져오라는 국왕 연산군의 지시에 처음에는 후대에 공정성을 위해 반대했고 뒤이어 연산이 윽박을 지르자 간신히 문제되는 부분을 발췌하는 것으로 수습했던 인물이다. 만약 이극돈 등이 막지 않았더라면 김일손의 사초가 전부 열람되어 무오사화는 더 크고 잔혹한 사화로 확대되었을 것이고 특히 김일손의 사초내용이 역모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극돈과 당상들은 사화의 확대를 막기위해 정말 목숨을 걸고 막았던 것이다.

그리고 정황상 특이한 부분이 있는데 당시 무오사화 직전 김일손은 경상도 청도군에 요양중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초를 발췌해서 확인한 날짜가 11일이었는데 김일손은 바로 다음날인 12일에 한양으로 잡혀와서 심문을 받는다. 조선시대 기준으로라면 한양에서 청도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십수일이 걸리는 거리인데 이말인 즉슨 이극돈 이하 실록청 관리들이 사초를 발췌해 전부터 김일손을 잡기위해 미리 사람을 보냈다는 것이다. 실제 실록에서(작성중)

이극돈과 유자광, 신수근[편집]

실록[6]을 따르면 그 일의 발단은 사림파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간원 헌납으로 있던 적에 ‘극돈과 성준이 윗분의 뜻이라 하여 장차 우(牛)·이(李)의 당(黨)을 이루려 하네.’[7]라며 다소 깔보는 투로 이극돈(李克墩)을 가축인 소에 비유하며 올렸던 소(蔬)였다.

이극돈은 중도보수의 점잖은 관료로 사림과 훈구의 대립과는 관계가 없었으나, 김일손으로부터 다소 모욕적인 언사를 받고나서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 분노한 이극돈이 이에 실록청을 열어서 김일손이 썼던 사초(史草)를 들여보니, 자신의 모자란 점을 썼을 뿐만 아니라 성종실록임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적 일을 들추고 있었다. 그는 유자광에게 찾아가 의논을 하였고, 유자광은 "머뭇거릴 일이 아니다"며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에게 가 세조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그들에게 합류를 요청했다[8].

이처럼 국왕을 제외하면, 유자광은 무오사화의 발생과 전개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성종김종직과 해묵은 원한이 있었는데 때마침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와 관련해 상의를 해오자 민첩하게 사건을 주도했다. 그는 "지금은 조정을 개혁하는 시기니 크게 처벌해야지, 심상하게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말로 자신의 의지를 밝혔고, 사건의 확대와 엄벌을 주도했다. 그러나 자신의 의도대로 사건이 전개되지 않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들고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준 것"이라고 말하며 즉시 주석을 달고 구절마다 해석해 국왕이 쉽게 알도록 했다.[9]

신수근김종직이나 김일손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출세를 반대한 것이 삼사(사림)였기에, 김종직, 김일손과 함께 사림을 숙청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두 사람과 합류를 하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 또한 즉위 이후 삼사와의 대립으로, 유자광의 말을 듣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 여겨 죄인을 심문하라 명했다. 그러나 사화의 확대에 유일하게 반대했던 노사신(盧思愼)은 유자광과 국왕을 말렸지만, 결국 연산군유자광의 손을 들어주기에 이른다.

처벌[편집]

이 사건을 빌미로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져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 등 상당수의 사림 세력과 관련자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면되었다. 연산군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우선 이 일파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을 비방하였다는 죄를 씌워 죽이고, 강겸,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난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귀양을 보냈다.

이종준, 최부,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귀양을 보냈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영향[편집]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실록청 당상관들과 신진 사대부들이 숙청된 뒤 유자광은 그 위세가 더해져 훗날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사림파의 정계진출이 어려워졌으며 이는 연산군이 폐위된 까닭인 연산군의 측근정치를 가속화시킨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2. 김범,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p.135
  3.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연산 4년 7월 12일 
  4.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연산 4년 7월 15일 
  5.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연산 4년 7월 13일 
  6. 연산 4년 7월 29일 2번째기사
  7. 앞과 같음, 交相傾軋, 將成牛、李之黨。
  8. 연산군일기, 4.7.29계해
  9. 연산군일기, 4.7.29계해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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