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위화도 회군
제2차 요동 정벌의 일부
날짜1388년 음력 5월 22일 ~ 음력 6월 3일
장소
결과

쿠데타 세력의 결정적 승리

교전국
고려 고려 고려 요동 정벌군
지휘관
우왕
최영
안소
정승가
조민수 (좌군도통사, 서열 1위)
이성계 (우군도통사, 서열 2위)
심덕부 (서경도원수, 서열 3위)
정지 (안주도도원수, 서열 4위)
왕안덕 (양광도도원수)
박위 (경상도상원수)
지용기 (안주도상원수)
최공철 (조전원수)
변안열
김백흥
배극렴 (조전원수)
이지란 (조전원수)
남은
조인옥
병력
불명 6만 이상
피해 규모
불명 불명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은 고려 말기 1388년(우왕 14) 음력 5월, 요동 정벌차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른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 이성계개경(開京)으로 회군(回軍)한 사건이다.[1]

원인[편집]

1388년,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의 요구로 “철령(鐵嶺)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로(開元路)에서 관할하던 군민(軍民)이 소속해 있던 곳이니, 중국인·여진인(女眞人)·달달인(達達人)·고려인(高麗人)을 그대로 요동(遼東)에 소속시켜야 된다.”라는 친서가 전해졌다.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원나라 영토였다는 이유로 반환하라는 이같은 요구가 이르자 명나라와의 실력 대결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고려1369년(공민왕 18)부터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왔는데, 우왕 때의 친원정책 이후 명나라는 무리한 세공(歲貢)을 요구하고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기 일수였다. 요동은 남만주 요하(遼河)의 동쪽 지방으로, 1360~70년대 초에 고려는 이 지역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이곳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에게까지 통치 영역을 넓히고자 세 차례 출정해 일정한 성과를 거둔 적이 있었다.

과정[편집]

1388년우왕의 심복인 최영이성계를 끌어들여 친위 혁명을 이룩했다. 우왕의 왕권을 위협하던 집권세력인 이인임·임견미·염흥방·도길부 등이 제거되고, 우왕의 왕권을 지지하는 최영이 이성계와 더불어 연합정권을 수립했다.

이후 명의 무리한 철령위 요구가 이어지자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단행하게 된다.

우왕서경(西京, 평양)에 머물면서 전국에서 5만 여명의 군사를 징발하고 압록강에 부교를 만들어, 최영은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로 삼아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였다.

조민수의 휘하에는 서경도원수 심덕부, 양광도도원수 왕안덕, 경상도상원수 박위, 조전원수 최공철 등이 소속되었고, 이성계의 휘하에는 안주도도원수 정지, 안주도상원수 지용기, 조전원수 배극렴, 이지란(이두란), 이화 등이 소속되었다.

요동 출정은 본래 이성계의 본의와 소원은 아니지만 출정군은 5월 24일(음력 4월 18일) 평양을 출발하여 6월 11일(음력 5월 7일)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진주하였다. 때마침 큰 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사졸(士卒) 중 환자가 발생하게 되자, 이성계는 군사를 더 이상 진군시키지 않고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조민수(曺敏修)와 상의,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의 운반이 곤란하다는 등 4가지 불가론을 왕께 올리며 회군을 청하였다. 이후 다시 한 번 간해 정 출병을 할 것이면 가을에 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우왕과 최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계와 조민수는 다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지만,평양에 있던 우왕과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과섭찰리사 김완을 보내 속히 진군(進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이성계 등은 또 한 번 평양에 사람을 보내어 회군시킬 것을 청하고 허락을 구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역시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이 이에 이르자 이성계는 마침내 회군의 뜻을 결심하고 드디어 6월 26일(음력 5월 22일) 회군하였다.

돌연한 회군에 우왕최영평양에서 송도(松都, 개경)로 급히 귀경하여, 이성계군에 반격해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와 조민수의 선발대를 격파하고, 이후 조민수의 본대까지 격파하는 활약을 보였으나[2]전력의 압도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성계,조민수 군에게 체포되었다.

고려군 최영은 회군 9일 만인 7월 4일(음력 6월 1일)에 개경에 당도한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高峰縣, 고양)에 귀양 갔으며, 그 해 12월에 개경으로 압송돼 처형되었고,우왕강화도로 추방됐다가 역시 1년뒤 아들 창왕과 함께 처형당하게 된다.

사불가론[편집]

이성계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자, 다음과 같은 4가지 근거(四不可)[3] 를 들며 반대하였다.

  •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공격할 수 없다.
  •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 셋째,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 넷째,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사불가론에 대해선 역사학자들은 이성계가 한낱 장군으로서 고려 국왕에게 적국인 명나라를 큰 나라라고 부르는 반역죄 같은 행동은 할 수 없을 것을 이유로 사불가론은 명나라의 정벌을 임명받은 이성계가 쿠데타로 조선을 건국하고 명나라와 친선하기 위해 후세에 지은 것으로 본다.

논란[편집]

느린 진군 속도는 고의적이었는가?

당시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19일이 걸렸고, 위화도에서 14일 체류하였으나 회군에는 9일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들어 이성계는 출병 때부터 고의로 병력을 느리게 진군시켰다는 논란이 있다.

특히 회군 시에는 “사냥을 하면서 속도를 늦췄다.”고 하는데 전해지듯 2배 이상 빠르게 도착했다는 사실에 논란이 되었다. 죽고 사는 급박한 상황에 사냥을 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과연 고의적이었을까라는 의문이 있다. 그러나 회군을 정당화하기 위해 비와 군량 문제로 진군이 늦어졌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막상 회군때는 비와 군량 문제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회군한 것을 보았을때 회군의 명분을 쌓기 위한 고의적인 진군 속도 늦추기라는 것에 무게가 더욱 실린다.

회군은 우발적인가? 계획적인가?

현재도 위화도 회군이 우발적이다와 계획적이다로 주장이 나뉘어 있다. 당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태조실록의 태조실록 1권, 총서 133번째기사공양왕이 태조의 집에 가서 위문하다. 조인옥 등 52명이 태조를 추대하기로 결정하다 라는 기사와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2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정도전·남은·심효생·박위·유만수의 졸기 기사와 고려사 남은 전을 보면 남은과 조인옥 등이 '위화도 회군' 당시부터 이성계에게 군사를 되돌리자는 의견을 올렸고, 또 이성계가 왕위에 앉도록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보면 계획적인 행동이라는 것에 설득력이 실린다.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는 한 쪽에서는 당시 고려 말, 민중들의 생각과 사회 정서를 반영한 것이 위화도 회군이었다고 정황을 이해하는 반면,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측의 권력을 잡기 위한 계획적인 행보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의 패전으로 인해 실각한 후 처형된 최영이 역대 우리나라 인물들중 가장 민간에서 신으로 많이 모시는 인물이 된 것과 이성계에 대해서는 '성계육','성계탕' 등의 저주섞인 발언들이나 그에 대해 부정적인 민간전승들이 긍정적인 민간 전승보다 훨씬 많은 것을 생각하면 십중팔구 당시 백성들은 최영에 더 깊은 호감과 이해를 가졌다고 해도 틀린 말만은 아닐 것이다.

요동정벌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당시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은 '10만명', '5만명', '3만8천명' 학자들의 주장이 각각 다르다. 실록에는 5만명이라 기록되어 있어 이를 기준으로 가정해본다. 하지만 당시의 좌군통제사 조민수, 우군통제사 이성계가 이끈 총병력은 좌우군 3만 8,830인으로 싸울 수 있는 순수한 병력은 고작 3만 8,830인이었다.

학자들은 논한다. 최영요동 정벌 계획은 상승세를 타고 있는 명나라와 한판 붙어 생사를 걸자는 뜻이 아니라 '요동의 주인은 고려이다'라는 의지를 보여주자는 결의, 즉 당초 명나라고려의 생각을 전해주고 철군할 생각였다는 것이다. 만리장성 밖의 땅은 원래 고려의 땅이었으며 남경에 근거지를 확보한 명나라요동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에서였다. 이는 증원군을 준비하지 않은 것에 여실히 증명되었다. 그러나 요동정벌이 단순히 군사적인 시위라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는 것이 최영은 이미 요동정벌을 계획하면서 철령 이북을 접수하러 온 명나라 군사 21명을 죽이고, 나머지 5명은 구금하고, 또 홍인계와 이억을 보내 실제 요동에 들어가 적의 군사 기지를 파괴하는 면을 보여서 단순한 군사적 시위라고 보기에 어려운 면이 있다. 어쨌든 일각의 이야기대로 요동정벌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면 고려는 중국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어 동아시아의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요동정벌에 대해 음모론적 시각으로 최영요동 정벌 계획은 신진사대부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사위인 우왕의 위협세력으로 성장한 이성계를 사지에 몰아넣기 위한 출정이었다고 일부 학자들은 논한다. 당시의 좌군통제사 조민수, 우군통제사 이성계가 이끈 총병력은 좌우군 3만 8,830인, 사역인 1만 1,634인 등 총 5만이므로 어찌 5만 병력으로 300만 대군을 당할 수 있었겠냐는 논리에서다. 요동 정벌이 실패하고 이성계가 전장에서 전사하게 되면 왕권은 강화되고 패하여 돌아오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회이기에 요동정벌군의 최고사령관으로 명받았던 팔도도통사 최영은 출진하지 않고 평양에 남은 것이 이를 반증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반대로, 조선의 입장에서 쓰여진 고려사 우왕세가 · 고려사 최영 열전 · 고려사절요 · 동국통감 · 조선왕조실록(태조편) 등의 어느 기록에서도 최영이 평소 이성계를 시기하고 의심했다는 기록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핑계로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했다라는 이야기가 없고, 또 '위화도 회군' 후 최영을 붙잡아 심문을 했지만 요동정벌이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이였다는 최영 본인의 자백을 받아내지 못했고 그랬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오히려 고려사 이인임 열전에서 이인임을 탄핵한 윤소종의 상소의 내용에서 최영과 이인임을 비교하면서 최영에 대해서 장군과 재상으로 30년을 있으면서 그가 잘못한 것은 요동정벌 하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고 그 요동정벌의 본심도 대대로 전해 오는 국토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말을 했고 최영의 부재시 역모를 우려한 우왕의 만류로 최영이 요동정벌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는 고려사 최영전의 기록 등을 보았을때 음모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지고, 만약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였다면 이후 고려는 치명적인 군사력 약화가 일어나 이후 명과의 재대결을 할 수 없는 사태로 갈 수 있을 것이고, 또 대다수의 병력을 얻은 이성계의 역습 반란을 받을시, 살아남기 어려워지고, 상식적으로 한 나라의 권력자가 의심가는 사람에게 국가의 병력 대부분을 준다면 이는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행동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 있다.

결과[편집]

이성계의 이러한 거사는 신·구 세력의 교체를 의미하는 동시에, 후일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사대부 중에서 급진 개혁 세력이 조선 왕조를 창건하는 기초가 확립되었다. 공민왕 후반부터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신흥 무인 세력과 동맹 관계를 통해 확실한 세력 범위를 설정할 수 있었지만 고려의 충직한 신료로 대표되는 최영은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입장을 모두 수용하지 않았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즉, 우왕 즉위 초 당시의 신진사대부들은 이인임·최영 정권과 대립하였다. 이후 북쪽에서 홍건적, 남쪽에서 왜구가 침입하자 최영, 이성계 등은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는데, 최영·이성계의 연합으로 이인임 일파가 제거되자 정도전조준이 이끄는 급진 신진사대부 세력들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고려의 충직한 신료로 대표되는 최영을 배척하고 최영 축출·우왕 폐위 → 조민수 축출·창왕 폐위 → 공양왕 옹립 등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말과 조선초의 온건 신진사대부들인 이색,정몽주,권근,변계량,원천석 등이 최영을 찬양하는 시들을 쓰는등, 최영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최영이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의 입장을 수용하지 않고, 또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이 최영을 배척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정도전,조준 등의 조선왕조 건국을 주도한 급진신진사대부에 한해 최영을 배척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이와 같은 수순을 밟은 정도전,조준 등의 급진 신진사대부들은 기반을 공고히 한 이후에, 과전법을 실시하여 후에 조선 개국공신이 되는 급진 신진사대부들의 경제적인 기반을 공고히 하였으며, 이후 1392년 공양왕에게 강제로 선위(임금의 자리를 물려줌)를 요구하여 조선이 개국하게 되는 대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양재홍 글, 스위치 그림 (2011). 《한국사 사전》. 지경사. ISBN 9788931923315. 
  2.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 태조실록에는 이 때 최영이 조민수의 본대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성계의 본대를 격파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최영이 조민수보다 더 나은 이성계의 본대를 상대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또 설령 조민수에게 압도적인 병력으로 최영을 붙잡아둔 후 자신은 최영의 부하인 안소가 지키는 성문 쪽으로 공격하는 작전을 쓸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이 경우 왜 '개성 전투' 이후 조민수의 영향력이 커져 그가 이성계의 뜻을 거스르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옹립시켰는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는 이성계의 본대를 최영이 격파하고 있는 사이에 조민수의 본대가 안소의 방어선을 뚫고 최영의 배후를 쳐 이성계와 조민수의 앞뒤의 협공으로 이성계가 승리할 수 있었던 정황이 추측된다.
  3. 조선왕조실록 - 태조실록 - 총서 83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

참고 자료[편집]

  • 「고려 우왕대의 정치권력의 성격과 그 추이」, 박천식, 전북사학(1980년)
  • 「고려왕조사 이야기」, 최영의 죽음과 우왕의 폐위, 정성희 저, 청아출판사(2007년, 379~418p)
  • 「108가지 결정」, 위화도 회군(1388년), 함규진 저, 페이퍼로드(2008년, 141~145p)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