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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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애왕
新羅 景哀王
지위
신라의 제55대 국왕
재위 924년 ~ 927년
전임 경명왕
후임 경순왕
이름
박위응(朴魏膺)
묘호 없음
시호 경애(景哀)
신상정보
사망일 927년
모친 의성왕후(義成王后)
자녀 박교순(朴交舜),박순현(朴舜玄)

경애왕(景哀王, ? ~ 927년, 재위: 924년 ~ 927년)은 신라의 제55대 이다. 성은 (朴), 이름은 위응(魏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신덕왕(神德王)의 둘째 아들이며 경명왕(景明王)의 아우이다.

927년 후백제 견훤이 경주를 침공한 뒤, 자결을 강요받아 포석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아들 계림대군 박순현(鷄林大君 朴舜玄)은 경주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다.

생애[편집]

포석정

경애왕은 신덕왕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 김씨이다. 924년 형인 경명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생이다. 경명왕이 죽은 뒤 경명왕의 아들들이 나이가 어렸기에 대신 왕위를 이어받아 924년에 즉위하여, 왕이 될 무렵, 신라는 재정적으로 몹시 가난한 상태였으며, 고려, 후백제의 압박으로 영토는 계속 줄어들었다. 경애왕은 고려와 동맹을 맺어 세력 회복을 목표로 하였지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王建)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5년 고울부장군(高鬱府將軍) 능문(能文)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 (지금의 진주시 일대)를 다스리던 왕봉규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고,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은 전쟁을 잠시 중단하기로 합의했으나, 견훤이 볼모로 보냈던 진호가 고려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926년 후백제는 고려를 다시 공격하였다.

927년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군대에게 붙잡혔다고 알려졌다. 종합해 보면, 경애왕은 주연을 즐긴것이 아니라, 문노를 모신 사당인 포석사에서 나라의 안위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1][2][3] 경애왕이 견훤에 의해 사망하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자살을 강요당하여, 결국 경애왕은 자살하였고, 그의 이종 사촌인 김부경순왕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한편, 경애왕 때 황룡사에 백좌경설(百座經說)을 설치하고 선승(禪僧)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百座通說禪敎)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

가계[편집]

  • 부왕 : 신덕왕(神德王, ? ~917, 재위:912~917)
  • 모후 : 의성왕후 김씨(義成王后 金氏)
    • 왕비 : 미상
    • 동생 : 박효렴(朴孝廉)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참고[편집]

각주[편집]

전 대
경명왕
제55대 신라 국왕
924년 - 927년
후 대
경순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