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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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國

698년926년
 

 

 

History of Korea-Inter-country Age-830 CE.gif
기원후 830년경. 보라색이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
정치
공용어 고구려어[출처 필요], 말갈어[1][2]
정부 형태 군주제
가독부
698년 ~ 719년
820년 ~ 830년
906년 ~ 926년

고왕(초대)
선왕 (10대)
대인선(말대)

현재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기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의 기 러시아

발해(渤海, 698년 ~ 926년)는 고구려 멸망 이후 대조영이 건국한 국가이다. 698년부터 926년까지 약 228년간 한반도 동북부와 만주, 연해주 등에 걸쳐 존속하였다. 713년 발해(渤海)로 국명을 채택하였다고 여겨진다. 발해를 일컫는 별칭으로는 진국(振國), 고려국(高麗國), 북국(北國), 말갈국(靺鞨國), 발해말갈(渤海靺鞨)[3], 해동성국(海東盛國) 등이 있다.

발해국왕은 고구려와 같이 천손(天孫)임을 자처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였다. 무왕문왕대에 , 신라, 일본과 외교를 수립하고 교통로를 통해 무역이 성행하였으며 8세기부터 9세기까지 동아시아의 세력균형과 안정이 이루어졌다. 이후의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9세기 중엽 선왕(宣王)대에 이르러 요동을 점령하고 동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최대의 판도를 이루었고, 5경 15부 62주의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최전성기를 구가하였다. 926년 거란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역사[편집]

한국의 역사
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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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역사
선사시대
단군조선 동호 예맥 숙신
전한 위만조선 흉노
부여
후한 오환 선비 읍루
고구려
(공손군벌)
서진 (평주)
모용선비 우문선비
전연 (평주)
전진 (평주)
후연 (평주)
북연
북위 (영주) 거란 고막해 실위
동위 (영주) 두막루 물길
북제 (영주)
북주 (영주)
말갈
(영주) (송막도독부) (요악도독부) (실위도독부) 발해 (흑수도독부)
오대 십국 (영주) (거란) 발해
(상경도)   (동란국) 여진
(중경도) (정안국)
(동경도)
(동경로)
(상경로)
(함평로)
(북경로)
동요국 동진국
(요양행성)
(요동도사) (노아간도지휘사사)
건주 해서 야인
(훌룬국)
(후금국)
  러시아
제국

(동삼성)
(외만주)
중화민국
(동삼성)
소련
(극동)
만주국
중화인민공화국
(동북)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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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편집]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의 땅을 평양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대조영과 걸걸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민으로 영주(榮州)로 이주하게 되었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사리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도중 말갈을 이끌던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을 이끌던 대사리 걸걸중상이 죽으면서 그들이 이끌던 무리를 대조영이 이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4]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 당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에 위치한 읍루동모산(東牟山)[5] 기슭을 차지하고, 곧 진국(震國, 振國)을 건국[출처 필요] 혹은 진국왕(振國王)을 자칭하고, 말갈을 건국했다.[6][7]

당 중종은 대조영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출처 필요], 705년 책봉을 시도했지만, 불발되었다.[8]

713년, 당 예종은 낭장(郎將) 최흔(崔昕)을 보내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고 다스리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9]로 만들어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의 벼슬을 추가했다.[10], 또한 당나라 조정은 발해를 신라와 같이 이웃 국가로 인정하여 국제적으로 안정성을 보장하였고, 당의 세계질서에 편입하는 듯이 하였고, 발해는 곧 새로운 민족명이 되었다.[11][12]

성장[편집]

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대무예는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말갈족들을 복속시키고 만주 북부 일대 전체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영토확장의 편리성과 지방세력의 약화, 즉 왕권강화를 위해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 현덕부로 옮긴다. 이러한 발해의 급속한 세력 확대는 주변 나라들을 긴장시켰다. 가령 당나라는 발해 북쪽의 흑수부(흑수말갈)와 연합하여 대응해 나갔다.

흑수말갈과 당의 연합에 반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 문제를 둘러싼 외교 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족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張文休)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여 산둥(山東)의 등주(登州)[13]급습하여 순식간에 점령 자사 위준을 죽였다. 한편, 요서의 마도산(馬都山)에서 대문예가 이끄는 당나라 군과 격돌하였다. 이때 신라는 당나라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발해에 출병하였으나, 겨울에 공격하여 진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737년 무왕이 죽고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즉위하여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문왕 시기에도 영토 확장은 계속되어 동북 방면의 말갈을 복속시켜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였다.

발전[편집]

문왕은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756년 수도를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세력의 주된 이동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농사를 짓기에도 한층 수월한 지역이었다. 발해의 수도가 상경으로 옮겨진 이후에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발해는 당의 문물도 수용하여 3성(三省)[14]과 6부(六部)[15]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상경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 각지를 연결하는 대외 무역에 더 힘을 쏟았다. 발해는 문왕 때부터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었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종래의 대립 관계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돌궐 및 일본 등과도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였고, 762년 당나라는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직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

한편 문왕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16]로 천도하였으나, 5대 성왕(成王) 때 다시 상경 용천부로 천도하였다. 상경 용천부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대원의(大元義)·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喜王)·간왕(簡王)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국력은 지도층의 내분으로 점점 약화되었다.

9세기 전반, 간왕의 종부(從夫)이며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渤)의 4대손,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으로 즉위하였다. 그의 치세 동안 당은 발해의 융성함을 일컬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발해는 선왕 시기에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켰다. 또 요동 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 유역을 기습적으로 점령하고, 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兎州)를 잠시 동안 설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지방에는 주 밑에는 여러 개의 현을 두었고, 부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5개의 부에는 경을 두었다. 5경은 당시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멸망[편집]

선왕 사후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부 학자는 비슷한 시기에 분화한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발해의 멸망 원인으로 주장되었지만 명확하게 입증되지 못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발해 귀족들의 지도층 내분을 발해 멸망의 원인으로 꼽는다.

916년 거란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부족을 통일하고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925년 음력 12월 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였고, 발해는 요나라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결국 발해는 보름여 만인 926년 3월 1일(음력 1월 15일) 대인선이 항복을 청함으로써 발해는 멸망하였다.[17]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는 발해의 옛 땅에 동란국(東丹國)을 세우고 요나라 황제의 맏아들 야율배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발해 유민들의 부흥 운동1116년까지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발해의 후예임을 칭하며 존립한 대표적인 나라는 정안국, 흥요국, 대발해국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요나라와 금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연표[편집]

연도 성명 연호 설명
668 고구려 멸망. 사리걸걸중상 · 대조영 부자 영주로 강제 이주 됨.
698 대조영 영주 탈출 후 당의 추격군을 격퇴하고,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모아, 발해 건국. 고왕 즉위.
719 대무예 고왕 붕어(崩御). 무왕 즉위, 연호 인안.
732 인안 14년 대장 장문휴를 보내어 수군으로 당의 등주를 침공, 거란, 와 연합해 요서 마도산 침공
733 인안 15년 당 현종,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 공격. 신라도 협조하였으나 폭설로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
737 대흠무 인안 19년 무왕 붕어. 문왕 즉위, 연호 대흥.
756 대흥 20년 상경으로 천도(遷都).
793 대흥 57년 문왕 붕어. 동생 대원의가 즉위했으나 폐위되었고 수 개월 후 사망.
" 대화여 성왕 즉위, 연호 중흥.
794 대숭린 중흥2년 성왕 붕어. 강왕 즉위, 연호 정력.
809 대원유 정력16년 강왕 붕어. 정왕 즉위, 연호 영덕.
812 대언의 영덕4년 정왕 붕어. 희왕 즉위, 연호 주작.
817 대명충 주작6년 희왕 붕어. 간왕 즉위, 연호 태시.
818 대인수 태시2년 간왕 붕어. 선왕 즉위, 연호 건흥. 신라를 공격, 북쪽 부락을 공략.
830 대인수 건흥13년 선왕 붕어.
831 대이진 건흥14년 대이진 즉위. 연호 함화.
857 대건황 함화27년 대이진 붕어. 대건황 즉위.
871 대현석 대정15년 대건황 붕어. 대현석 즉위.
894 대위해 천복24년 대현석 붕어. 대위해 즉위.
906 대인선 ?13년 대위해 붕어. 대인선 즉위.
906 청태7년 신라와 비밀리에 연계를 맺음.
924 청태19년 발해의 거란 침입, 요주자사를 죽이고 백성들을 빼앗음.
925 청태20년 발해인 장군 500여 명 고려로 망명. 12월, 거란이 발해에 침입.
926 청태21년 거란군, 부여부 점거. 발해 멸망. 국명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거란 태자 야율배가 지배.
934 대광현 청태29년 대광현 발해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귀순.

국호[편집]

초기 국호[편집]

발해의 초기 국호에 대한 학설도 다양한데, 금향(金香)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화인민공화국 사학자들은 《신당서》의 "말갈이란 명칭을 버리고 발해라 하였다."라는 기술을 근거로 대조영이 거란, 선비, 돌궐 등 여러 북방민족과 같이 민족명에서 국호를 차용하였고, 결코 진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18]

A.L.이블리예프는 698년, 대조영은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진 왕국의 통치자를 선포했다고 서술하면서 당의 책봉은 발해를 신라와 같이 이웃 국가로 인정하여 국제적으로 안정성을 보장함으로써 새로운 말갈 국가를 당의 세계질서에 편입한 것이라 하면서 이로서 대조영에게 발해라는 명칭은 새로운 말갈국의 명칭이 되었고, 민족명이 되었다고 주장했다.[19]

대한민국은 발해의 초기 국호를 진국으로 보고있는데, 진(振)과 진(震)의 발음이 서로 유사하므로, 대조영은 국호를 정할 때 걸걸중상이 당에게 받았던 진국공(震國公)이라는 호칭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20]

김종복은 《구당서》에 근거하여, 발해의 초기 국호가 진이지만, 그 국호는 대조영이 713년, 발해군왕에 책봉되었을때가 아닌 문왕대부터 버리고 발해라 일컬었다고 추측했다.[2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장국종은 발해국호는 698년에 사용하였고, 그 이전에는 걸걸중상에 의해 건국된 진국이라는 공국이 선행하였으며, 그것이 대조영에 의해 발해로 확대되었다고 주장했다.[22][23]

발해 국호 유래[편집]

김육불산동의 발해군과 발해 국호를 연관시키면서 발해와 말갈이 음성학적으로 동일음이기 때문에 발해라 명명하였다고 주장하였다.[24] 그러나 조평춘은 말갈이 발해로 와전되었다는 학설을 반박하면서, 발해 국호가 바다에서 유래한 명칭이며 당나라가 자국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의도로 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토록 했다고 주장했다.[25]

정치[편집]

중앙의 정치 조직[편집]

중앙의 정치조직은 3성(三省)[14]과 6부(六部)[15]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체제를 구성하였다. 3성 6부 밑에는 5감(五監)·9시(九侍) 등의 기구를 두었다.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고구려의 전통을 살려서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이 외에도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중정대, 서적 관리를 맡은 문적원, 중앙의 최고교육기관인 주자감 등이 있었다.

발해의 지방 조직[편집]

발해의 지방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는데(오늘날의 광역시에 해당), 국도(國都)인 상경(上京)[26]과 중경(中京)[27]·동경(東京)[28]·남경(南京)[29]·서경(西京)[30]을 가리킨다. 서경과 남경은 통설만 있을 뿐, 아직 완벽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최근 북한학계가 동경을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로 비정하고있다.[31]

상경은 당의 장안성(長安城)을 모델로하여 외성(外城)[32]·내성(內城)[33]을 두고 시가지를 바둑판같이 구획하였다. 지방행정의 중심인 15부에는 도독을 두어 지방 행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부 아래에는 62주를 설치하여 자사를 파견하고, 그 아래 다시 현을 두고 현승을 파견하였다. 지방행정의 말단인 촌락은 주로 말갈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촌장을 매개로 지배하였다.[34] 최근 러시아연해주에선 발해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가 발굴되면서 연해주가 발해에 속해있었음을 증명 되었다.[35]

고구려 계승 표방[편집]

속일본기》에 기록된 728년, 무왕이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는 "무예는 황송스럽게도 대국(大國)을 맡아 외람되게 여러 번을 함부로 총괄하며,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習俗)을 가지고 있습니다."라 적혀있고, 발해 사신을 고려 사신, 발해악을 고려악, 발해 문왕역시 스스로를 고려국왕 대흠무라 자칭하는 등 고구려 계승국임을 일본에 표출했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발해는 고구려 기피증에 걸린 당나라와 마찰을 방지하기 위해 대당 외교용 국호이고, 실제 내부 국호는 고려라는 주장을 하지만, 《속일본기》에 나오는 발해, 발해로(渤海路), 발해사(渤海使) 등의 용어는 은폐하고, 발해의 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사(高麗使),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하였다는 기록만으로 발해와 고구려의 관계를 단순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36][37]

그러나 재일교포 출신으로서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과 와세다대학교 조선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목간학회 회장을 역임 중인 리성시(李成市)에 따르면, 중국 동북부에서 흥기했던 여러 민족들은 심지어 금나라에 이르기까지 왕권과 기원의 정통성을 부여, 고구려에서 찾고있었는데, 이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대외적으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여 정치적 우위를 지키고자 하는 의도이며, 고구려 계승이 곧 바로 혈연적 계승관계로 연결시킬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38]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인 송기호는 발해에게서 이러한 고구려 계승 의식이 표출된 이유는 여러 정황상 대조영말갈족이지만, 고구려에 귀속되어, 일정부분 고구려화 되었고, 걸걸중상을 거치면서 더욱 가속화되어 말갈계 고구려인으로서, 고구려 귀속의식이 나타나게 되어 훗날 발해국을 운영하는 기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39]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이종욱은 이성시와 견해를 조금 달리하여, 발해에는 고구려인들이 많이 살았고,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더욱이 속말말갈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장군으로 근무한 바 있기에 새로운 왕국을 갖출 정보와 힘이 있었지만, 그러한 발해 왕국에 살게된 고구려인들은 한국·한국인을 형성한 원류에서 떨어져 나간 역사 속의 한국인들로 현재 한국인들에 혈연적 계승성이 없는 집단이라고 지적했다.[40]


사회 및 주민구성[편집]

지배층의 구성[편집]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만에 고구려의 옛 땅에서 건국되었다. 발해 지배층의 족속 구성에 대해서 여러 학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송막기문》에 발해의 왕은 옛부터 대씨를 성으로 삼으며, 우성에는 고, 장, 양, 두, 오, 이씨 등이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발해 지배계층 성씨 70% 이상이 고구려 계통이라고 추정하는데,[41],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림호성이 발견한 기록에 전해지는 발해인 201명 가운데 그 수가 33명으로 16.41%를 차지하는 것이 고(高)씨다.[42] 하지만, 발해 고씨는 대체적으로 고구려 귀족 성씨였지만, 말갈인들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고,[43] 이외에 하씨, 양씨, 오씨, 이씨 등의 성씨는 고구려계와 한계 그리고 말갈계가 공유하는 성씨일 가능성이 높으며,[44] 발해 지배층 성씨에 대씨와 이씨를 가진 속말말갈인을 더 하면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에서 말갈인의 비율이 더 높다는 반론도 존재한다.[45]

정효공주묘가 발견된 육정산 고분군에도 이를 뒷받침할 고고학적 성과가 있는데, 제 1구역의 102호묘에서 출토된 금속제 교구(鉸具)와 띠돈은 영길 사리파 고분군 제 9호묘에서 나온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유형의 금속제 교구(鉸具)와 띠돈은 속말말갈계 유적에서 빈번하게 출토되는 유물이며,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에서도 출토된 바 있고, 제 2구역에서는 202호묘와 205호묘에서 대표적인 형식의 말갈토기가 출토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205호묘에서는 고구려 양식의 토기도 출토되었는데, 함께 출토된 다른 부장품들이 말갈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는 것을 볼 때 피장자가 고구려 계통이라기 보다는 말갈인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206호묘에서 출토된 옥수석 재질의 구슬들과 207호묘에서 출토된 방울도 말갈 무덤에서 흔히 출토되는 유물로서, 이들 역시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에서 비슷한 구슬과 방울이 발견되었다. 이처럼 육정산 고분군의 석축묘에서 말갈식 토기와 장신구가 출토되었으며, 이와 유사한 양식의 부장품이 사리파 고분군이나 아무르 지역의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에서도 확인된다.[46]

또, 속말말갈의 중진통형관(重唇筒形罐)은 고구려계의 토기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속말말갈 유적에서는 가장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기물로서 발해 후기에 오면 상경회령부를 비롯한 상층부에는 소멸되지만, 상경성 부근의 일반고분에서는 계속 존재하는 양상을 보이며 상경과 거리가 멀수록 수량도 상경부근보다 많다. 이는 발해 상층의 낙후된 토기공예 기술이 선진적인 토기제작 기술에 의해 대체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발해건국 당시 말갈들의 이런 토기제작 전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문화와의 접촉에서 새것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적으로 쇠퇴되어 가고 있음을 반영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47]

서강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인 이종욱은 자신의 저서인 《고구려의 역사》에서 발해에는 고구려인들이 많이 살았고,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으며, 더욱이 속말말갈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장군으로 있었기에 새로운 왕국을 세울 정보와 힘을 갖출 수 있었던 것 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발해에 살게된 고구려인들은 한국·한국인을 형성한 원류에서 떨어져 나간 역사 속의 한국인들로 현대 한국인에게 피를 전해 줄 기회를 잃게 된 집단이라고 일축했다.

발해사에 대한 세계 각국의 학설들[편집]

발해는 구성원은 고구려인과 말갈인 그리고 위구르, 실위, 해, 습, 거란, 소그드인 등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주민구성과, 발해사의 주체는 각국 학계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다.

대부분의 대한민국의 학계와 서방의 학계 그리고 일부 일본 학자들은 발해 건국의 주체는 고구려유민과 말갈이며 발해를 다민족연합국가로 보고 있다.[출처 필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와 일부 소수의 남한 학계에서는 발해건국의 주체가 고구려족이라 주장하고 있다.[출처 필요]

중국러시아 학계와 대부분의 일본 학계는 발해건국의 주체가 퉁구스족 속말말갈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발해는 말갈의 민족국가이자 말갈국이라 주장하고 있다. [48] [49]

이 외에도 많은 학설들이 난립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발해인들이 직접 남긴 역사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해인들의 정체성과, 사회 및 주민구성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현재 대한민국 학계가 바라보는 발해사[편집]

현재 대한민국의 교과서에는,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과 다수의 말갈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해당 학설은 20세기 초 일본에서 제기된 것으로서 대한민국의 학계역시 한동안 이 학설을 정설로 받아들였다.[출처 필요]

하지면 현재 발해사에 대한 대한민국 학계의 통설은 , 발해의 주민구성에서 고구려인과 말갈인의 비율은 큰 차이가 없었다고 보고 있다.[출처 필요]

일부 대한민국의 학계에서는, 말갈이란 변방민에 대한 범칭이자 멸칭이었으므로 발해건국에 참여한 말갈인 역시 고구려인이며, 발해사의 주체는 고구려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출처 필요]

경제[편집]

발해의 귀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무역을 통하여 당나라의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여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발해는 9세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농업에서는 기후 조건의 한계로 콩, 조, 보리, 기장 등을 재배하는 밭농사가 중심이었다.특히, 목축이나 수렵도 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솔빈부의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모피, 녹용, 사향 등도 많이 생산되어 수출하였다. 어업도 발달하여 고기잡이 도구가 개량되었고 송어, 문어, 대게, 고래 등 다양한 어종을 잡았다. 수공업은 철·구리·금은 등 금속가공업과 삼베·명주·비단 등의 직물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다.세금으로는 조세, 공물, 부역 등이 있었다. 발해는 당나라,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다. 이때 사신과 더불어 상인들이 동행하여 무역하였다

상업[편집]

발해의 상업은 농업, 수공업, 목축과 수렵 등이 발전하면서 상호간의 교환 관계로 촉진이 되어 발달하게 되었고, 영토상으로도 각기 다른 자연 지리적 조건을 가진 광대한 지역을 포괄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제반 사정들로 생산 부문 간, 주민 상호 간에 생산물을 교환하는 국내 상업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건국 이후 국가 통치 체제가 정비되면서 교통망이 발달하게 되어 국내외의 교류로 상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해 상업의 발달은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와 서고성의 도시 구조를 통해 발해의 수도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의 田 자형의 리방제, 계급 신분별 거주지의 구분을 그대로 계승하여 건설되었다. 용천부의 외성은 ‘전(田)’자 모양의 리방제 모양으로 도시의 주민들이 살던 집과 절터, 시장터, 기타 시설물들의 자리들이 나타나 있으며, 외성 거리는 일반 주민 지역, 중성은 주로 중앙 관청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이렇게 용천부는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발해의 수도에도 평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어용 시전 상업과 장거래 상업이 조직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0]

교육[편집]

문왕 때 학문 연구 기관인 주자감을 세웠으며, 관리들이 학습시킬 수 있게 서적원이라는 기관을 만들었다. 주자감에서는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휴학생 중에는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였고, 이거정 등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유교 지식인으로 활동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정혜공주 묘지와 정효공주 묘지가 세련된 4·6 변려체로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발해에서는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몇 편의 한시가 현재 전하는데, 양태사왕효렴의 작품이 유명하다.

문화[편집]

발해 유적지에 나온 용머리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당나라, 말갈의 문화가 섞인 것이었으며, 당나라와 요나라의 역사서에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점을 들어 발해가 고급 문화를 향유했음을 시사한다.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공주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또한 정효공주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이런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51]

발해의 지상 건물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 터를 통해 당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본떠 설계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52]

발해에서 발견되는 절터나 불상 등은 고구려의 양식을 따른 것이 많다. 다른 조각상도 고구려의 것을 닮아서 소박하며 힘찬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53]

또한 자기 공예가 발달하여 가볍고 광택이 있었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였으며, 당나라 사람이 자주 구해갔다고 한다.[53]

종교[편집]

불교[편집]

불교의 삼보인 불, 법, 승이 전래되어 수용, 발전되면서 발해의 문화는 한층 더 발전하게 된다. 삼보의 불이란 부처의 혼과 정긴을 의미하는데 불교가 수용 됨으로써 부처의 이러한 정신을 따르기 위한 예배를 위해 당대 모든 역량을 다해 최고급 불상과 불탑, 사찰등을 만들었다. 삼보 중에 법이란 불교의 경전 즉 부처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보는데 불교가 수용, 발전 되면서 고대문화가 무속에서 문자가 있는 고급문화로 발전하게 된다. 불교를 통해 교육과 학문도 발전하게 된다. 승이란 석가모니의 뜻을 앞정소 따르는 승려들을 말하는데 불교가 존래, 발전되면거 많은 승려들이 구복과 경전연구를 위해 국제적 왕래를 하면서 경제,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불교는 종교를 넘어 사상과 학문, 교육 등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발해에서 불교가 성행하였다는 사실은 예배의 중심지인 사찰이 많이 건축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확인 된 발해의 절터는 모두 40여 곳이다. 돈화의 구국지역에서 한 곳, 상경일대에서 10여곳, 중경 일대에거 13곳, 동경 일대에서 9곳이 확인되었고 흑룡강성 동녕현의 대승자성 안에서도 절터로 보이는 곳이 조사되었다. 또한 럿;아 연해주 아브리코스 절터 등 5곳 함경도 일대에서도 5개의 절터가 확인되었다. 불탑도 많이 발견되는데 화룡시 용두산 고분군의 정효공주 무덤탑, 훈춘 마적달탑 압록강 상류의 장백 조선족 자치현의 영광탑 등이 유명하다. 또한 상경성터에 6미터나 되는 석등과 거대 석불이 남아 있는 것도 발해의 불교 수준을 알게한다. 이 곳에서는 불상만 1000여점 가까이 출토되었다. 불상에는 돌로 만든 석불, 철로 만든 철불, 구리에 금칠을 한 금동불 그리고 구리의 동불, 구리의 소조불, 마른옻칠을 한 건칠불 등이 출토되었으며 벽화에도 불상이 그려져 있었다.불상 중 전불이라는 틀에서 뽑아낸 불상도 많았다.

발해의 불교는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60년 이상 수도였던 상경성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관음신앙이란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반복 염불하여 현세의 권한에서 벗어나서 영험을 얻고 복을 얻고자하는 신앙을 말한다. 관음신앙은 화염경, 법화경 등 여려 경전 속에서 신앙을 체득하여 여러 형태의 불상을 만들어 숭배하였다. 동경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법화신앙이란 법화경을 중심으로 깨달음의 단계인 성문승, 영각승, 보살승의 3승이 1불승 하나로 통섭되는 회삼귀일을 이루려는 신앙형태를 맣안다. 이를 신앙하는 많은 사람들은 석가불과 다보불이 다보탑 안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을 만들어 숭배하였다.

도교[편집]

도교는 신선사상을 기반으로 자연 발생하여 노장사상&유교&불교 그리고 통속적인 여러 신앙 요소들을 받아 들여 형성된 종교입니다. 도교가 성행한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금액환단백문결, 해객론 등에서 발해인 이광현을 통해 기록된 도교의 흔적및 당에 보낸 마노궤는 신선(神仙)한 글을 담는데 사용하였고 불로장생의 명약으로 수은 등을 선물 하였던 점 노장 경전인 장자를 인용하고 공주의 출생을 무악, 무산신녀, 신선 등으로 표현 하며 묘지명을 도교와 관련 있는 고사로 인용하는점에서 도교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경교[편집]

경교는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 입니다. 네스토리우스교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368~450)이 주장한 양성설(dyophysitism)을 따르는 종파들을 말합니다. 서양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네스토리우스교는 그 특유의 끝이 넓게 펼쳐진 톡특한 모습의 십자가 석관으로 만든 네스토리우스교의 선교사와 신도들의 무덤이 중앙아시아,중국에서도 발견되었으며 발해의 영토였던 러시아 연해주 아브리코스절터의 십자가 점토판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경교가 퍼질 수 있었던 까닭은 적극적으로 현지의 문화와 결합하였기 때문에 발해에서도 받아 들여졌으며 경교의 유적은 모두 불교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군사[편집]

발해의 군사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지배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54]

발해의 군사제도 완비 과정은 크게 3시기로 분별하여 살필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건국 초기 확장된 영토 범위에 행정 제도를 마련한 시기, 두 번째 시기는 [신당서] 발해전에 기록되어 있는 10위 설치 시기, 세 번째 시기는 내양왕(內養王) 왕종우(王宗禹)가 발해에 사신으로 다녀온 이후 발해의 군사 상황에 대해 보고한 시기이다.

첫 번째 시기[편집]

첫 번째 시기는 전반적으로 제도가 마련되는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과거 고구려의 유제(遺制)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시기로 군사와 행정을 겸직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유취국사] 권193에는 "발해는 사방이 2천 리에 달하며 주현 관역이 없고,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들은 말갈인들이 많고 토인이 적다. 모두 토인을 촌장으로 삼는데, 대촌에는 도독(都督)이라고 부르고 다음은 자사(刺史)라고 부르며 그 아래의 백성은 모두 수령이라고 부른다." 라고 기록하였는데, 도독이나 자사는 아마도 발해국의 지방 행정 장관으로, 예를 들면 약흘주도독, 목저주자사, 현토주자사와 같은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제도가 마련된 초기이므로 전 왕조 고구려의 유제가 곳곳에 남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에 대한 구획도 아직 미비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긴장 관계가 조성된 지역을 중심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모습이 보인다.

고왕·무왕 시기의 지속적인 영토 팽창을 통하여 강역권이 확정되고, 그 확정된 강역과 인구 및 세수의 확보를 통해서 관제의 개편과 완비가 이루어졌다. 건국 초기 승병이 몇 만명에 불과하였던 상황에 비추어 보면 발해는 확대된 강역과 인구에 대한 전반적인 조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특히 발해는 주변의 강국인 당(唐)·돌궐·거란·흑수말갈·신라 등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고, 초기의 강력한 정복 전쟁으로 인하여 주변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다. 또한 당의 압제에서 벗어나 천신만고 끝에 나라를 세웠고 전 시대의 패주였던 고구려의 멸망을 목도했던 발해에게는 더욱 군사적 측면에서의 강화와 정비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발해가 확장된 강역 범위에 고구려의 유제를 바탕으로 새로운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기반을 닦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기[편집]

두 번째 시기는 [신당서] 발해전에 기록된 중앙 부서와 10위가 설치되는 시기이다. 중앙에 설치된 3성 가운데 하나인 정당성(政堂省)에서는 군대를 관리하고 선발하며, 지도와 전차·수레·무기를 관리하는 관할 부서인 지부(智部)가 설치되어 있고, 그 하위에도 융부(戎部), 수부(水部) 등 실무 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758년 일본에 사신으로 간 양승경(楊承慶)의 경우는 중앙 관직인 보국대장군겸장군((輔國大將軍兼將軍)과 지방 장관의 관직인 목저주자사(木底州刺史) 및 중앙의 국방을 담당하는 실무 부서로 보인다. 그러나 중앙의 관직 체계에서 그 명칭이 보이지 않아 그 연원을 살피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이와 같이 발해는 제도를 완비해 가는 과정에서 군사를 담당하는 중심 부서로서 지부와 그 하위 부서인 융부 또는 병서를 설치하여 조직화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발해에는 "좌·우맹분위(左右猛賁衛), 좌·우웅위(左右熊衛), 좌·우비위(左右羆衛), 남좌·우위(南左右衛), 북좌·우위(北左右衛)가 있었으며 각각 대장군과 장군이 1인씩 있었다."고 하여, 발해에 10위 제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당나라의 16위 혹은 12위와 같은 맥락에서 출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각 위(衛)에는 대장군 1명, 장군 1명을 두었는데, 이것은 당나라 모든 위의 상장군(上將軍)과 장군(將軍)에 해당한다. 10위는 왕실 내외의 경비를 담당하며 지방의 부병(府兵)을 관할한다. 1960년 발해 상경 용천부 황성 유지(遺址) 서남쪽에서 발해 '천문군지인(天門軍之印 : 발해 군사 조직의 하나인 '천문군'의 관인으로 전서체로 새겼다. 이 관인은 1960년 상경 용천부 황성 서남쪽에서 발견되었으며, 크기는 5.3×5.3cm이다. 이 관인의 발견은 발해에 새로운 군사 조직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점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발해의 위에 소속된 군대가 황성(皇城)의 각 성문을 나누어 지켰음을 보여준다.

한편 [속일본기]에는 728년에 온 사신단 가운데 유장군(游將軍) 과의도위(果毅都尉) 덕주(徳周)가 포함되어 있다. 과의도위는 당나라 군사 제도의 명칭을 따른 것이다. 당나라 부병제에는 위로는 위(衛)와 아래로는 절충부(折衝府)가 있다. 절충부에는 다시 상(上)·중(中)·하(下)의 구별이 있는데, 각 부에는 절충도위(折衝都尉) 1명과 좌·우의 과의도위 2명이 있다. 상부(上府)의 과의도위는 종5품하, 중부(中府)의 과의도위는 정6품상, 하부(下府)의 과의도위는 종6품하에 해당된다. 발해의 경우 과의도위의 존재는 아마도 당의 부병제(府兵制)를 본받아 주·현에 부병을 설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건국 초기 일본으로 간 사신들의 관직을 살펴보면 ○○장군·보국대장군 등 무관직을 지닌 인물들이 중심이다. 자사는 조서를 받들어 주를 감찰하는 지방 행정장관이고, 대장군 및 장군의 경우는 무관의 최고 지위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무관직이 보이고 있는 것은 이들이 사행(使行)을 갈 시기에는 이미 제도적인 측면에서 정비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시기[편집]

세 번째 시기는 내양왕 왕종우가 발해 사행을 다녀온 이후 발해의 군사 상황을 보고한 시기이다. 832년 왕종우가 발해에서 돌아와 당 문종에게 올린 보고에서 "발해에는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이 있고, 좌우삼군(左右三軍)과 120사(司)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판단하면, 초기의 장군직을 지닌 제도에서 좌우 10위로 정비되었다가 왕종우가 사행을 마치고 복명(復命)할 당시에는 이미 좌우신책군과 좌우삼군 그리고 120사의 군사 조직으로 확대 개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좌우삼군에 대해서 당나라의 제도를 예로 들면, 좌삼군은 좌룡무(左龍武), 좌신무(左神武), 좌우림(左羽林) 삼군이고, 우삼군은 우룡무(右龍武), 우신무(右神武), 우우림(右羽林) 삼군이다. 이 6군은 모두 위군(衛軍)이다.

왕종우의 보고 내용을 보면, 발해의 군제 조직도 당나라를 모방하여 위군(衛軍)과 부병(府兵)을 설치하였다고 생각된다. 당나라 제도는 위군과 부병을 나누어 설치하였고, 호를 계산하여 병졸을 충당하였다. 경사(京師)의 금군(禁軍)이 가장 많았을 때에는 16위에 이르렀고, 매 위 마다 만 명 이상이었다. 지방에는 부병을 설치하여 전국에 모두 634개의 부를 설치하였다. 부에는 낭장(郞將)을 두고 각각 제위(諸衞)의 통치를 받도록 예속시켰다. 이러한 엄격하고 방대한 군사 기구는 발해에 대해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이를 모방하여 10위와 신책군 등을 설치하였다.

발해가 당나라를 모방하여 부병을 설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사서에 기록이 없다. 그러나 발해가 장기적으로 대외 팽창을 통해서 강역을 확장한 것과 무관 가운데 자사, 낭장, 과의도위, 별장 등이 존재했던 것에 근거하면, 발해에는 부병제를 실시하였을 것이다. 동시에 [신당서] 발해전에서 "발해 부여부는 거란의 변경에 있는데, 항상 강병을 설치하여 거란을 방비하였다." 라고 하여 발해에 10위 이외에도 각 부에 분명히 지방병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부병과 유사하여 변경의 대외 작전을 공고하게 하는 중요한 군사력이 되었다. 낭장·별장 등의 무관직은 모두 대무예 통치 시기에 출현한 것으로 이 시기 발해가 이미 당나라의 군제를 모방하여 금군과 지방군을 설치하여 군제를 실시하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발해인은 본래 장정 3명이면 호랑이도 잡을 정도로 용맹함을 숭상하였으므로 군인이 된 자는 자연이 매우 용맹하였을 것이다. 그 군대의 수도 초기의 승병 수만에서 점차 후기의 수십만으로 확대되었다. 대무예 통치 시기에 발해의 병력은 고구려 30만 대군의 1/3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연히 생산과 정복이 상호 결합된 군사 통치 시기에는 노약자나 어린이나 모두 군사가 되었고, 심지어는 한 집안의 부자와 형제가 모두 군대에 포함되어 대외 전쟁의 수요를 충족시켰을 것이다.

발해는 건국 이후에 확장된 강역에 행정적인 편제를 실시하였으며, 군사조직의 설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발해는 긴장 관계가 첨예한 부여부에는 항상 강병을 주둔시킬 정도로 군사적인 역량을 집중시켰고, 초기에 일본으로 파견된 사신단은 주로 무관이 그 중역을 담당했다. 이후 흑수말갈과의 전쟁, 당나라와의 전쟁을 통해서 군사적인 역량을 확장하였으며, 비로소 제도적인 정비가 완비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 발해는 중앙 부서에 군사적 역량의 전반을 담당하는 지부와 그 산하에 융부, 수부를 설치하여 일원적인 제도를 마련하였다. 발해는 당의 부병제를 모방하여 10위를 설치하고, 더 나아가서는 좌우신책군과 좌우삼군, 그리고 120사로 군 체계의 개편을 도모하였다.[55]

외교[편집]

신라와의 관계[편집]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국제 정세 및 신라의 대당 관계에 따라 달라졌다. 대조영은 초기에 신라에 사절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을 것을 희망하였고, 신라는 이에 고왕에게 대아찬직을 수여하여 화답하였다. 또 다른 주장은 당시 신라가 나당전쟁의 앙금으로 당과의 국교가 일시 단절되는 상황도 이들 관계에 기여했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신라는 발해가 자국의 영토를 침입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발해의 무왕당시 발해는 당과 신라 모두에게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 되었었는데 신라 성덕왕(聖德王)이 721년에 국경지대에 설치한 북경장성(北境長城)은 발해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었다. 732년 등주를 공격당한 당나라는 발해에 대한 보복전을 개시하였는데 이 전쟁에 신라를 개입시키고자 하였다. 신라는 이에 응하기는 했으나 실질적인 군사 도움을 주었는지는 미지수이다.[18] 이후 발해의 지속적인 세력 남하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734년 다시 단독으로 발해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로 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애초보다 더욱 소원해졌다. 그러나 문왕대에 이르러, 당과 발해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신라와의 긴장관계도 점차 완화되어 갔다.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발해와 신라간의 교역을 쉽게 하기위한 길, 즉 ‘신라도’의 개설인데 이를 통해 사신을 파견하고 상호 경유하였다. 하지만 8세기 이후 당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당은 발해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당시 발해는 돌궐 및 거란과 합세하여 급속히 세력을 성장시켜 나가고 있었으며, 당은 신라를 통해 이를 견재하려 하였다. 당은 733년 신라에게 발해 공격을 요구하며 성덕왕에게 최고위 관직(문신관인 종1품 개부의동삼사와 독자적 군사권을 가진 영해군사직)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신라는 이를 명분으로 당과의 완충지대였던 패강 지역에 군사를 주둔시킬 수 있었으며 이후 신라의 영토로 인정받았다. 이처럼 당의 등거리 외교에 이용된 신라와의 관계는 점차 발해와 신라 양국간의 대립적인 관계로 변질되어 갔고 양 국간의 무역이나 교류에도 불구하고 상호 이질적인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56]

당과의 관계[편집]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는 처음에는 별로 좋지 않았다. 당이 발해 건국 초기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적 토벌을 강행하였지만 발해에게 계속된 패배에 의해 기존의 토벌방침을 바꾸어 발해를 인정하고 국교를 수립하게 된다. 여기에는 영주지역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맞물려 있었으며, 동북정책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당은 먼저 사신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회유함으로써 발해의 토벌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그 결과 대조영은 왕자를 당에 파견하였고 당은 대조영을 책봉함으로써 국교를 수립하였다. 거란과 돌궐 등이 당의 변방지역을 공격하면서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지만, 8년이 지난 713년에 관계가 정상화 되었다. 이후 무왕이 왕위에 올랐고 당과의 친선관계를 맺은 흑수말갈의 토벌을 위해 공격하려 하자 그의 동생 대문예는 당과의 전쟁을 걱정하여 토벌에 반대하게 되고 그 결과 대문예가 당에 망명하게 되는데 무왕이 당에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자 거절하니 결국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 당의 등주 등을 공격(장문휴로 하여금)하고 대문예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실패하여 무산되고, 당과 신라의 협공이 실패한 후 신라의 독자적인 공격, 거란의 당으로의 복속 등 국제정세가 발해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더 이상의 강경책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736년 당과 발해는 상호간에 표류하고 있는 사신과 포로들을 교환함으로써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이후 문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두 차례 사신을 당에 파견하였으며 표서피 1000장과 건문어100구를 바치는 등을 통해 관계회복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결과 문왕은 당의 책봉을 받게 되고 두 국가 간의 관계는 완전히 회복될 수 있었다.[57]

일본과의 관계[편집]

727년 발해 무왕 때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이후 양국은 지속적인 교류관계를 유지해 왔다. 초기의 발해와 일본과의 관계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후에는 문화적 교류와 상업('일본도'를 통해)이 발달하였다.하지만 초기에도 꼭 정치적인 외교로만 일괄된 것이 아니라 경제 및 문화 교류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으며 발해의 필요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일본의 필요성 역시 개입되어있다는 사실이 사료를 통해 드러난다. 하나의 예로 첫번재 사절단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고재덕 일행은 담비가죽 300장을 비롯한 교역물품을 가져갔는데, 이에 대해 일본은 비단수건10필, 거친명주 20필, 명주실100구, 면 200돈을 답례품으로 주었다고 되어있다. 이는 발해사가 가져간 모피가 일본사회에 미친 영향이 자뭇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말하는 초기의 정치적 성격이란 당시 당/신라 등과 대립하고 있던 상황에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통해 그들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919년까지 발해는 일본을 총34차례 방문하였고, 일본은 발해를 13차례 방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총 47회에 이르는 교류는 양국간에 긴밀한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발해는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고려국왕이라는 호칭을 쓰며 자국이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알렸다. 일본 역시 발해를 고구려 계승 국가로 인정하며 견발해사를 파견하였다. 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종종 대립국면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여기에 대해 일본측은 자국을 방문해 오는 발해에 대해 일본이 주도적위치에서 외교적 요구를 내세웠고 발해는 이에 순응해왔다고 이해하고 있지만(군신의 관계성립), 이는 선점적인 권리를 역사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의견이다. 743년 일본과 신라는 국교를 일시단절한 이후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우호적이었고, 일본은 후지와라 정권 때 신라 침공 계획을 세웠는데 발해의 협조를 얻기 위해 발해에 사신을 더 많이 파견하기도 했다. 일본과 발해는 발해 멸망 직전까지 이러한 우호적 관계를 수립했으며, 이는 발해의 균형 외교책이 거둔 실리이기도 했다[58][59][60]

거란과의 관계[편집]

사실 거란은 한국사상에서 관계사의 빈도나 영향력의 강도를 볼때 중국/일본/말갈 다음으로 관계가 깊었다고 볼 수 있다. 거란족은 4세기 후반부터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데 초기부터 부여/고구려와 교섭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는 고구려에 대하여 종속과 비종속적 관계를 계속 이어왔으며 640년대 전반부터 종주국인 당나라를 대리하여 고구려 공격의 최선봉으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4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중반 경에 이르기까지 중국 왕조와 고구려 발해 이 3대 세력의 중간에서 끊임없이 공격과 위협으로 존망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전부터 거란에게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던 당과 회골이 쇠퇴/멸망하고 발해역시 9세기 내부갈등으로 내리막길에 다르며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런 국제정세를 기회삼아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907년에 최초의 거란족 왕조 거란조를 세운다.초기 거란을 세운후 903년 봄 여진을 정벌하여 3백호를 잡아 데려왔고, 이어 해습, 동북여진을 토벌하였으며, 908년 10월에는 진동해구에 성을 쌓아 교통로를 차단하고 909년 정월에는 요동으로 915년에는 압록강까지 나아갔다.916년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918년 요양고성으로 행차하던 중 요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919년 이 고성을 보성하여 쌓은 후 한인과 발해인을 함께 이주시켜 요양에 거주하게 한다. 요양지역을 더욱 적극 경영하기 위해 요주를 후원기지로 두지만 발해가 요주를 공격하면서 두 국간의 충돌이 피할 수 없게 되고, 제일의 목표가 서방의 유목민 평정과 남방의 중국을 제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던 거란은 그 계획을 실현해 나간다. 대략 916년경 부터 시작하여 1년 3개월에 걸쳐 서방 투르크세력의 화골/사타, 티베트세력인 트혼 그리고 북방의 몽골세력인 오고등이 거란의 세력권으로 들어오게 된 서북원정을 마무리지은 후 다음 목표인 중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데 여기에는 항상 발해가 근심거리였기에 먼저 발해를 정복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925년 12월 마침 발해 정복에 나서게되고 발해15대왕 228년만에 발해는 멸망하게 된다.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가 거란족의 침입으로 인해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채 순식간에 무녀저 버리게 된 것이다.[61]

흑수말갈/돌궐과의 관계[편집]

흑수말갈은 헤이릉강 중하류 일대에 분포되어 거주하다 당나라 때 이르기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한때 발해에 귀속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독립을 추구하였다. 발해와 흑수말갈의 관계는 발해의 발전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발해 건국 초기에는 우호적인 관계였다가 후에는 발해에 귀속되었으며 발해 멸망 후에는 여진족으로 발전하게 된다,
돌궐은 6세기 중엽부터 약2백년 동안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활약한 민족인데 이들은 후에 동과 서로 나뉘게 되고 고구려 및 발해와 관계한 민족은 주로 동돌궐이었다. 발해의 고왕은 건국 초 당에게 위협을 받는 상태에서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를 이용해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고왕이 건국 전/후로 하여금 돌궐에 사신을 파견한것은 돌궐과의 관계는 매우 의미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발해 제2대 무왕 시기 발해가 당의 등주등을 공격하면서 발해와 돌궐사이가 가까워졌지만 당과 발해 사이가 호전되고 당이 돌궐을 공격하면서 발해와의 관계도 단절되었다.[62]

교통[편집]

발해의 5도[편집]

  • 조공도(대 당 교역로. 압록강을 이용한 수로.)[63]
  • 일본도(대 일본 교역로. 동경용원부에서 동해를 거친다.)
  • 영주도(대 당 교역로. 상경에서 장령부를 거쳐 당의 영주도독부에 이르는길.)
  • 거란도(대 거란 교역로)
  • 신라도(대 신라 교역로. 용원부와 남해부의 동해안을 따라 내려간다.)

역대 국왕과 연호[편집]

걸걸중상
乞乞仲象
1
고왕 대조영
高王 大祚榮
698-719
대야발
大野勃
2
무왕 대무예
武王 大武藝
719-737
??
3
문왕 대흠무
文王 大欽茂
737-793
4
대원의
大元義
793
?
대굉림
大宏臨
6
강왕 대숭린
康王 大嵩璘
794-809
10
선왕 대인수
宣王 大仁秀
818-830
5
성왕 대화여
成王 大華璵
793-794
7
정왕 대원유
定王 大元瑜
809-812
8
희왕 대언의
僖王 大言義
812-817
9
간왕 대명충
簡王 大明忠
817-818
대신덕
大新德
11
대이진
大彝震
830-857
12
대건황
大虔晃
857-871
?
15?
대인선
大諲譔
906?-926
14?
대위해
大瑋瑎
894?-906?
13
대현석
大玄錫
871-894?
  • 대현석까지의 가계는 확실하나 그 이후 왕들의 가계는 불분명하다.
  • 대현석 사후 멸망까지 기록되지 않았거나, 혹은 기록의 분실로 인해 알려지지 않은 왕들이 더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수 시호 이름 연호 재위기간
- 걸걸중상(乞乞仲象) -
1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698년 ~ 719년
2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 인안(仁安) 719년 ~ 737년
3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 대흥(大興)
보력(寶曆)
737년 ~ 793년
4 대원의(大元義) 793년
5 성왕(成王) 대화여(大華璵) 중흥(中興) 793년 ~ 794년
6 강왕(康王) 대숭린(大崇隣) 정력(正歷) 794년 ~ 809년
7 정왕(定王) 대원유(大元瑜) 영덕(永德) 809년 ~ 812년
8 희왕(僖王) 대언의(大言義) 주작(朱雀) 812년 ~ 817년
9 간왕(簡王) 대명충(大明忠) 태시(太始) 817년 ~ 818년
10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건흥(建興) 818년 ~ 830년
11 대이진(大彝震) 함화(咸和) 831년 ~ 857년
12 대건황(大虔晃) 857년 ~ 871년
13 대현석(大玄錫) 872년 ~ 894년?
14? 대위해(大瑋瑎) 894년? ~ 906년?
15? 대인선(大諲譔) 906년? ~ 926년
  • 13대 왕인 대현석을 경왕 · 마지막 왕 대인선을 애왕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과거 일본인이 신라의 경애왕과 혼동하여 잘못 만들어낸 오류이다.[64]
  • 발해에는 현재까지 모두 15명의 국왕이 있었다고 추정되지만 13대왕 대현석과 14대왕으로 추정되는 대위해 사이 그리고 대위해와 마지막왕 대인선 사이에 단명한 왕들이 더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65]
  • 환단고기에서는 11대 왕인 대이진이 장왕 또는 화왕으로 기록되어있다.

발해와 역사서[편집]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에 의하면, 18세기의 규장각에서도 발해의 정식 역사서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진위 논란이 있는 자료 중에는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지 않으나 발해 때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서들이 있다.

  • 규원사화》의 토대가 된 《진역유기(震域遺記)》는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귀화할 때 가지고 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조대기》를 근거로 쓰였다고 한다.
  • 단기고사》는 그 서문에서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편찬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발해가 아닌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들은 그 내용이 시대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아 한국 사학계에서는 위서로 판단한다.

발해에 대한 역사 인식[편집]

발해 스스로의 인식

무왕문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 고 하였으며 759년 일본에 조문사를 보내 스스로를 고려국왕이라 칭하였다.

신라[편집]

신라시대의 학자 최치원이 신라 국왕의 청원서의 형식을 빌어 당나라 황제에게 바친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 발해의 원류를 말갈이라 칭하였다.[66] 서술자가 발해가 존재했던 동시대의 신라인이라는 점에서 당시 발해의 근원에 대한 신라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편집]

태조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멸시하고 배척하였으며 발해의 유이민을 대거 수용하였다. 또한 거란의 사신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개경 만부교에 묶어 굶겨 죽였다.

현존하는 역사서 중 발해를 최초로 언급한 우리 나라의 역사서는 김부식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는 발해를 말갈의 발해, 발해말갈 그리고 북국(北國) 혹은 북쪽 이민족이라는 뜻의 북적(北狄)으로 표현하여, 본기에 고조선과 발해를 누락시켜 우리역사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후 충렬왕 때의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대조영을 고구려의 구장 및 속말말갈의 추장이라 칭하면서 말갈과 발해조에 소속시켜 우리 역사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승휴제왕운기는 발해를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건국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조선전기[편집]

이후 조선전기의 학자들은 발해를 정통 우리 역사로 인식하지 않고 말갈 역사의 일부로 취급하거나 신라의 이웃나라 정도로만 언급하거나 혹은 성리학적 사관에 입각하여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등 역사서에서 그 비중을 축소시켰다. 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사절요는 발해를 속말말갈의 일부로, 대조영을 고구려계 유이민으로 서술하였다. 이후에 편찬되는 서거정동국통감, 박상의 동국사략, 오운의 동사찬요, 조정의 동사보유 등이 비슷한 사관을 취하고 있다.

조선후기[편집]

조선 중기와 후기 학자들은 발해를 조선사의 일부로 인식하는 역사책과 지리지 등이 집필했다. 한백겸동국지리지는 발해를 신라의 부속된 역사가 아니라 고구려에 부속된 역사로 인식하여 고구려 역사 뒤에 덧붙여 서술하였다. 이익안정복은 각각의 성호사설동사강목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나라로 서술하면서도 발해를 '외기'로 처리하여 본국사에서 제외하였다. 기전체의 서술방식으로 쓰여진 이종휘동사(東史)는 발해를 세가에 서술하였고, 고구려 유민에 의해 성립된 국가로 인식하여 고구려의 전통을 강조하였고, 유득공은 저서 발해고(渤海考)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후계임을 분명히 하고 발해의 영토를 잃어버린 우리의 고토로 인식하였으며 신라의 삼국 통일의 불완전함을 서술하고 발해와 신라가 공존하였던 시기를 '남북국(南北國)'으로 칭하는 사관을 창조하였다. 한치윤의 해동역사는 발해를 고구려의 속국이 아닌 속말말갈의 독립된 나라로 인식하였다. 정약용아방강역고는 국경과 영토의 변천과정을 고증한 역사지리지이다. 문헌 고증을 통해 기자조선과 마한의 연결성을 부정하고 발해에 대한 고증을 통해 발해를 조선사로 인식하였다.

일제강점기, 70년대 이후[편집]

일제강점 독립운동기가 되어서는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발해사를 한국사로 정립하기 시작한다. 민족주의 사학자인 신채호(1880 ~ 1936)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신라와 발해를 독사신론에서 양국된 시대로 보았는가 하면, 장도빈(1888~1963)이 국사에서 양국을 남북국이라 하였고, 권덕규(1890~1950)와 황의돈(1890~1964) 도 조선유기에서 양국을 남북조라 하여 한국사에서 발해를 신라와 대등하게 다루었으며, 단군을 강조하는 대종교 계통에서도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의 일반적인 서술은 실증사학적 삼한정통론에 입각해 통일신라론이 중심이 되었다. 한국사에서 해방후의 발해사는 북한이 주도했다. 북한은 1960년대에 이미 만주지역을 중국과 공동으로 발굴해나가면서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상당한 성과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신라와 발해를 조선사의 양국시대로 적극이해했다. 그러나 연구사적으로 보았을때 ,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70년대에 침체기를 겪게된다. 대한민국에서 발해사는 1980년대 부터 수용하기 시작한다. 1980년 부터 발해사 연구가 심도있게 진행되면서 한국사에서 18세기 말, 유득공에 의해 탄생한 남북국시대론도 자리잡게 된다. 내부적으로는 고조된 정치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분단 시대론도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외부적으로는 고구려와 발해가 당나라 지방정권이었다는 즉 고구려가 발해사 중국사의 일부라는 이른바 동북공정이 확산되면서 다시한번 주목을 받게 되었다. 주민구성에 있어서 남북한은 80년대 말까지 공통적으로 일본의 영향을 받아 발해의 주민구성에 대해 지배계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계층은 말갈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고고학과 별개로 말갈이란 고구려의 변방유민을 멸시하여 부른 것이었기에 발해는 근본적으로 지배계층이나 피지배계층 모두를 고구려유민으로 볼수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발해사의 한국사적 의미를 더욱 굳혔고, 북한도 1990년대 부터는 발해 피지배층이 말갈이란것에 대해 번복하였고 옛 고구려땅에 있던 사람들은 지배계층이나 피지배계층 모두를 고구려유민이라고 주장했다. 남한은 문헌 중심의 정치,종족, 문화적 연구를 하였고 북한 고고학 측면에서 고구려의 계승성에 대해 집중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 사학계에서는 북한과 남한 사학계가 발해가 한국사인 것에만 집중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발해 이후의 세력[편집]

발해 멸망에 관련된 사료는 매우 적다. 멸망 전 후의 발해인에 관련된 사료는 《요사》나 《고려사》및 《고려사절요 등이 있는데, 이들 사료에서 발해인들에 대한 기록은 대체적으로 멸망 전에 벌어졌던 정권 다툼에 패한 왕족이나 귀족들이 고려로 망명해 오는 등 거란의 발해 멸망 이후 유민의 고려유입은 대체적으로 10~20만여 명의 발해인들이 고려에 망명했다고 보고,[67][68], 20만여 명을 초과한다고 보기에는 의문점이 많다.[69]

발해가 멸망한 후에 1116년까지 발해의 터에 유민이 여러 나라를 재건하였으나 곧 멸망하였다. 그리고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세운 괴뢰 국가도 존재했다. 이들 중 다음과 같은 세력들이 알려져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上田雄 (2001년 12월). 《『渤海使の研究』 明石書店》. ISBN 4750315079. 
  2. 劉毅 (1997년 7월). 《渤海国の族源について-中国・日本・朝鮮関連史料の考察-》. 国学院雑誌. 國學院大學. 60쪽. 
  3. 송기호(1988), 「발해에 대한 신라의 양면적 인식과 그 배경」, 『한국사학』 19 발해말갈(渤海靺鞨)을 하나로 볼지 발해(渤海)와 말갈(靺鞨)로 구분하여 볼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발해를 말한다고 본다.
  4. 일설에는 대사리 걸걸중상과 대조영을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5. 육정산(六頂山)
  6. 金香(1989) , 「關于渤海國的若干民族問題」, 『社會科學戰線 』 1期(『高句麗渤海硏究集. 成』), 渤海 권1 27쪽
  7. 구당서》권199하, 「열전」149하 북적 발해말갈 祚榮驍勇善用兵, 靺鞨之眾及高麗餘燼, 稍稍歸之. 聖曆中, 自立為振國王, 遣使通於突厥.
  8. 구당서》 212권 북적 발해말갈 中宗即位, 遣侍御史張行岌往招慰之. 祚榮遣子入侍, 將加冊立, 會契丹與突厥連歲寇邊, 使命不達.
  9. А.Л. Ивлиев(2005), Российский Дальний Восток в древности и средневековье: открытия, проблемы, гипотезы, 453쪽 홀한주는 당의 문서에만 언급되는 명목상 주임이 틀림없는데, 발해의 수도를 지나 흐르는 목단강의 옛 명칭 후르하(Hurha)와 상응한다.
  10. 구당서》 212권 북적 발해말갈 睿宗先天二年, 遣郎將崔昕往冊拜祚榮為左驍衛員外大將軍、渤海郡王, 仍以其所統為忽汗州, 加授忽汗州都督, 自是每歲遣使朝貢.
  11. 책부원귀》봉책 선천 2년 3월 玄宗先天二年(713) 二月 拜高麗大首領高定傅爲特進 是月 封靺鞨大祚榮爲渤海郡王(大祚榮, 聖曆千自立爲振國王在營州東二千里. 兵數萬人, 至是, 遣郞將崔訢往冊命祚榮左驍衛員外大將軍渤海郡王. 仍以其所統爲汗州都督, 自是每歲遣使朝貢.
  12. А.Л. Ивлиев(2005), Российский Дальний Восток в древности и средневековье: открытия, проблемы, гипотезы, 453~454쪽
  13. 산동성 봉래
  14. 정당성·중대성·선조성(正堂省·中臺省·宣詔省)
  15. 충·인·의·예·지·신부(忠·仁·義·禮·智·信部)
  16. 흑룡강성 휘춘현 팔련성
  17. <요사(遼史)>권2 태조본기 己巳, 諲譔請降
  18. 金香(1989) , 「關于渤海國的若干民族問題」, 『社會科學戰線 』 1期(『高句麗渤海硏究集. 成』), 渤海 권1 27쪽
  19. А.Л. Ивлиев(2005), Российский Дальний Восток в древности и средневековье: открытия, проблемы, гипотезы, 453쪽~454쪽
  20. 송기호, 1995, 『渤海政治史硏究』, 일조각
  21. 김종복(2005), 「渤海 國號의 성립 배경과 의미」 『韓國史硏究』128쪽
  22. 장국종(1997), 『발해사연구』, 사회과학출판사
  23. 장국종(2001), 『발해국과 말갈족』, 사회과학원
  24. 金毓黻(2007), 『김육불의 東北通史 下』 권5, 동북아역사재단, 573~574쪽
  25. 趙評春( 1987), 「'渤海國'名源考辨」, 『學習與探索』 5期(『 高句麗渤海硏究集成』 渤海. 卷1, 哈爾濱出版社, 39쪽~41쪽
  26.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동경성
  27. 중국 길림성 화룡시 서고성
  28. 중국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
  2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신창군 토성리 청해토성
  30. 중국 길림성 임강시
  31. 김종복(2010), 《발해의 서남쪽 경계에 대한 재고찰》, 한국고대사학회
  32. 나성
  33. 황성
  34.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64쪽.
  35. 연해주 중북부지역 ‘발해의 땅’ 증거나와
  36. 이종욱(2005), 《고구려의 역사: 왜곡되고 과장된 고대사의 진실을 복원한다》, 김영사
  37. 동북아역사재단(2007), 《발해의 역사와 문화》
  38. 李成市(1988),「渤海史硏究における國家と民族-「南北國時代」論の檢討を中心に->≪朝鮮史硏究會論文集≫ 25쪽
  39. 송기호(1991), 「大祚榮의 出自와 발해의 건국과정」『아시아문화』7, 한림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
  40. 이종욱(2005), 《고구려의 역사: 왜곡되고 과장된 고대사의 진실을 복원한다》,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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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王承禮·宋基豪(1987),『발해의 역사』, 춘천, 한림대학출판부, 126~127쪽
  44. 나영남(2017), 「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 『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 12』 , 신서원, 118~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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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발해 석축묘의 기원 문제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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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이이화 1999, 143-149,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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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동북아역사재단 2007, 171 ~ 172쪽.
  63. 사료상 조공도라 되어 있으나,발해의 입장에서 등주도, 압록도라 부를 수 있다고 함
  64. 김육불, 《김육불의 동북통사, 하》,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09, 2007, 577~578쪽.
  65. 송기호, 《발해를 다시본다, 개정증보판》, 주류성출판사, 2008, 64~65쪽.
  66. 臣謹按渤海之源流也。句驪未滅之時。本爲疣贅部落。靺羯之屬。
  67. 나영남(2017), 「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 『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 12』 , 신서원
  68. 발해 유민(遺民)과 꼬마 난민(難民) ‘쿠르디’
  69. 김위현, 渤海遺民의 再建運動 : 後渤海와 大渤海
  70. 포노리국, 몰점, 오리미국, 월리독국, 부아리국
  71.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설치한 괴뢰 국가

참고 자료[편집]

  • 일연, 《삼국유사
  • 유득공, 《발해고》, 1784.
  • 진위푸, 《발해국지장편》
  • 《발해사연구》, 연변대학출판사.
  • 조이옥 영산대 교수 《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
  • 동북아역사재단 (2007). 《발해의 역사와 문화》. 동북아역사재단. ISBN 9788961870177.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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