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 (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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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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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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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개봉 | |||
정치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황제 | 석경당 (936 ~ 942) 석중귀 (942 ~ 946) | |||
역사 | ||||
• 성립 | 936년 | |||
• 멸망 | 942년 | |||
인문 | ||||
공용어 | 중국어 |
중국의 역사 中國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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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後晉, 936년~946년)은 오대십국 시대 중 오대의 3번째 왕조로써 돌궐인 석경당이 당나라 일부를 정복하고 세운 국가이다. 국호는 진이었으나, 춘추시대와 위진남북조 시대의 진(晉)과 구별하기 위해 후진, 또는 창업자 석경당의 성을 따 석진(石晉)이라고 불렀다. 수도는 개봉(開封)이고, 이전 국가였던 후당(後唐)과 마찬가지로 돌궐족의 왕조였다.
역사[편집]
후진의 건국자 석경당은 돌궐족 출신으로 후당의 개국공신이었다. 여러번의 위기에서 후당을 구원하였기에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이사원은 그를 아껴 자신의 딸을 바치기도 했다. 명종의 대에 석경당은 하동절도사가 되어 그 지역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석경당이 하동에서 쌓은 정치적 실적은 훌륭하였고, 청렴한 생활을 지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명종(明宗) 이사원이 죽자 말제(末帝) 이종가가 제위에 올랐으나, 돌궐인 석경당과 불화가 일어나 석경당은 자신이 주둔하던 진양에서 후당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종가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키자, 석경당은 힘을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북쪽의 거란(요나라)에 항복하는 대신 원군을 요청했다. 힘을 얻은 그는 936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후진을 건국하고, 같은해 요나라의 힘을 빌어 요나라군과 함께 후당의 수도 낙양(洛陽)을 유린한 후 후당을 멸망시켰다. 이후 요나라는 당나라 당 태종의 후예 일족들을 모두 잡아들여 삼경임황부로 끌고나 노비로 삼았다.
이때 석경당은 원군에 대한 대가로 요나라에 매년 비단 30만필을 조공으로 바칠것을 약속하였고, 국경지역 연(燕)일대 16주(州)을 넘겨주었다. 이 땅을 연운십육주라고 불리며, 이 땅의 탈환은 송나라의 오랜 비원이었으나, 송나라대에서도 탈환은 성공하지 못했다.
후진은 건국되었지만 내우외란으로 나라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942년 석경당이 죽자, 중신 경연광이 석경당의 조카 석중귀를 옹립하고 정권을 쥐고 흔들었다. 이 옹립사건은 요나라와 상의없이 진행되었기에 요나라의 분노를 사서 944년 요나라와 후진은 단주에서 교전을 벌였고, 945년 2번째 원정에서는 석중귀가 직접 출정하여 재차 교전을 벌였다. 947년 2대 황제 야율덕광이 직접 군을 이끌고 세 번째로 원정을 하자, 후진의 중신 두중위가 요나라에 항복하고 요양에서 후진의 주력은 격파되었다. 그대로 요나라군은 카이펑을 함락시키고 후진을 멸망시켰다. 그 후 후진의 절도사였던 유지원은 도망쳐 요나라가 북쪽으로 돌아간 사이 거란족에 의해 황폐화된 카이펑에 들어가 후한을 세웠다.
역대 황제[편집]
대수 | 묘호 | 시호 | 휘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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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 정조 (靖祖) |
효안황제 (孝安皇帝) |
석경(石璟) | - | - | 의릉(義陵) |
숙조 (肅祖) |
효간황제 (孝簡皇帝) |
석빈(石彬) | - | - | 혜릉(惠陵) | |
예조 (睿祖) |
효평황제 (孝平皇帝) |
석욱(石昱) | - | - | 강릉(康陵) | |
헌조 (憲祖) |
효원황제 (孝元皇帝) |
석소옹(石紹雍) | - | - | 창릉(昌陵) | |
1 | 고조 (高祖) |
성문장무명덕효황제 (聖文章武明德孝皇帝) |
석경당(石敬瑭) | 천복(天福) 936년 ~ 942년 | 936년 ~ 942년 | 현릉(顯陵) |
2 | - | 출황제 (出皇帝) (소황제<少皇帝>) |
석중귀(石重貴) | 천복(天福) 942년 ~ 944년 개운(開運) 944년 ~ 946년 |
942년 ~ 946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