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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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발해
後渤海

926년~938(?)년
수도상경(上京)
정치
정치체제군주제
국왕대씨[1]
인문
공용어중세 한국어

후발해 (後渤海, (926년)? ~ ( 938(?)년)는 발해거란에 의해 멸망한 뒤 발해의 왕족인 대씨가 세운 나라다.[2]

역사[편집]

건국 배경[편집]

  • 926년 거란(契丹)이 발해(渤海)를 멸망시켰고, 발해왕 대인선(大諲譔)은 포로가 되었다. 거란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발해 영토에 동란국(東丹國)을 설치하여, 장자 야율배(耶律倍)를 동란왕으로 세우고 '인황왕(人皇王)'이라 했다. 다수 발해인은 상경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당나라풍 문화를 유지하게 되지만, 상당수 발해인들은 고려로 망명했다.
  • 거란은 대인선(大諲譔)을 통해 군사들을 인솔하여 요양으로 개선하였지만, 귀국 길에 태조 야율아보기가 죽었고, 인황왕 야율배는 야율아보기의 유해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이에 발해 부흥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은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의 동생(이름 미상)이었고, 옛 수도를 포함한 북방의 영토를 세력권으로 하였다.
  •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을 평정하지 못한 거란은 928년 사민(徙民)을 통해 동란국(東丹國)의 중심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천복성(天福城)에서 요양(遼陽)으로 옮겼다. 이에 따라 발해의 옛 지역은 발해의 태자인 대광현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3]

후발해 건국[편집]

  • 동단국이 요양으로 후퇴함에 따라 대인선의 동생(재위 : 928년? ~ ?)(성명 미상)이 홀한성(忽汗城), 즉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 들어와 대광현을 밀어내고 발해국의 부흥을 선언하며 후발해(後渤海)를 세우고 즉위하였다.[4][5]
  • 929년 후발해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고, 후당(後唐)에 고성사(高成詞)와 성문각(成文角)을 보냈다.[6]
  • 930년 동란왕 야율배(耶律倍)가 왕위 계승에 밀려 후당으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요나라는 동란국을 폐지하고 옛 발해 영토를 직접 통치하였다. 이 해 대광현은 압록부를 중심으로 독립해 남해부(南海府)를 회복했다.[7]
  • 931년 후발해가 후당으로 사신을 보냈다.[8]
  • 934년 후발해 왕(대인선의 동생)은 남해부(南海府) 열씨(烈氏, 옛 발해의 귀족)와의 협력으로 대광현을 쫓아버렸다. 기반이 와해된 대광현은 따르는 백성 수만을 인솔하여 고려로 망명했는데, 진림(陳林)등 160여명이 그 뒤를 따랐다.[9]
  • 935년 후발해가 후당에 사신을 보내었다.[10]
  • 936년 대광현을 몰아낸 열만화(烈万華)가 남해부에서 압록부(鴨緑府)로 이동해 938년정안국(定安國)을 건국하였다.
  • 954년경 발해의 호족 최오사(崔烏斯) 등 30명이 후주로 망명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후발해 건국자는 대인선의 동생으로 보인다.
  2. 건국 시기가 927년 ~ 929년 경이라고 추정하지만 후발해의 건국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문헌이 없어 분명하지 않다. 1990년대 이후에 야율우지(耶律羽之) 묘지 등의 석각 사료가 발견됨으로써 후발해가 건국되었다고 보는 연구자는 많지 않다.
  3. 이 때 거란군이 궤멸당했다고 하는데, 후발해 측이 먼저 공격했다고 보는 일설이 있다.
  4. 대광현이 926년에 고려에 귀부했다면 대광현축출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5. 후발해에 관한 연구는 동란국에 관한 발해인 사료나, 각지에 이주를 당한 발해인에 관한 사료, 각지에 반란이 발생한 사료, 송사(宋史)에 보이는 정안국에 관한 발해인 사료 등이 있는데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6. 발해 멸망 이후에도 발해의 사절이 중국에 파견되고 있었으므로 후발해와 같은 부흥국이 건국된 것이라 상정되어 왔지만, 야율우지의 묘지 등이 발견됨에 따라 이 사절은 동란국의 사자이며, 사절의 주체가 후발해라고 보는 추정은 성립되기 어렵다고 보는 설이 있다.
  7. 대광현이 926년에 고려에 귀부했다면 대광현독립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8. 동란국의 사절로 보기도 한다.
  9. 대광현 926년 고려 귀부설과 대립된다.
  10. 동란국의 사절로 보기도 한다.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