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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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南北國
국가 발해 신라
수도 상경성 금성
군주
 -성립군주
 -멸망군주
15 국왕
고왕
대인선
56 국왕
혁거세 거서간
경순왕
성립 698년
(동모산 궐기)
기원전 57년
(거서간 추대)
멸망 926년
(대인선 요나라 항복)
935년
(경순왕 고려 투항)
History of Korea-Inter-country Age-830 CE.gif
830년, 남북국 강역도.

남북국 시대(南北國時代)는 698년는 1784년에 유득공에 의해 창조된 북부의 만주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발해의 건국 이후 남부의 한반도에 있는 신라와 공존하던 시대를 일컫는 역사 용어이다. 900년에 남국인 신라가 분열(후삼국)되면서 남북국 형태는 깨어지기 시작하였고, 926년에 북국인 발해가 요나라에게 망하면서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일각에서 통일신라 시대(統一新羅時代)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라는 국가가 성립된 이래로 역사적 동질성을 부여할 수 있는 주변 국가나 영역을 단 한번도 통일한 적이 없다. 이는 당시 신라인들의 인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사관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 사이에 민족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전쟁 이후, 삼한일통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우면서 부터이기 때문에, 당대 신라인, 백제와 고구려 유민에게는 삼한일통이 적합하다.

남북국 시대가 오기까지[편집]

일반적인 발해가 건국된 지역과 그 나라를 구성하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다들 별 문제가 없지만 발해에 대한 정통성이나 문화성 그리고 그 역사관이 어느 나라의 뿌리에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사료[편집]

구당서》는 발해말갈의 대조영을 고려 별종이라 기록했다.

신당서》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며 고려에 부속된 자들로 성은 대씨라고 기록했다.

무경총요》는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다. 본래 부여의 땅이라고 기록했다.

신오대사》는 발해는 본래 말갈인데, 고려의 별종이라고 기록했다.

금사》는 당 초엽에 말갈에 속말(粟末)과 흑수(黑水) 두 부(部)가 있었다. 모두 고려에 신속(臣屬)하였는데, 당이 고려를 멸망시키자 속말은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점점 강대해져서 발해라고 불렀는데, 성은 대씨이고 문물과 예악이 있었으며, 당 말엽에 이르러 점점 쇠퇴하여져서 이후로는 다시 들리는 바가 없었다. 금이 요를 정벌하자 발해가 귀부해왔는데, 대개 속말말갈의 후예라고 기록했다.

속일본기》는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 ,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책부원구》는 말갈의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하는데, 대조영은 성력(聖曆) 연간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으로 등극하였다. 영주에서 동으로 2000리나 되고 군사가 수만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발해에 대한 여러 사서의 기록들을 인용하고 결론을 도출했는데, 다음과 같다.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인데, 그 우두머리인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해가 뜨는 곳(震旦)이라고 불렀다.", "《삼국사(三國史)》에서는,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서기 678)에 고구려의 잔당이 무리를 모아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옛 장수 조영(祚榮)의 성은 대씨(大氏)인데, 남은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곧 말갈의별종으로, 다만 분리되고 통합됨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指掌圖)』를 살펴보면, “발해는 만리장성 동북쪽 밖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발해를 말갈의 발해, 발해말갈 등으로 칭함으로써 발해의 주체를 말갈로 기록했다.

최치원은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발해는 본래 보잘 것 없는 말갈의 부락에서 속말이라는 소번의 이름을 가지고있었다고 서술하면서도 "총장 원년(668) 영공 서적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쳐부숴 안동도독부를 설치하고, 의봉 3년(678)에 이르러 그 백성들을 하남과 농우로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잔당들이 무리를 모아가지고 북쪽의 태백산 밑을 근거지로 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삼국사기』" 라고 하거나 , "옛날 당나라의 고종 황제가 고구려를 쳐 없앴는데 그 고구려는 지금 발해가 되었다『동문선』" 이라고 하기도 했다.

제왕운기 下》는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성에 의거하여 측천무후 갑신년(684년)에 나라를 열었는데 발해라 이름하였다 라고 기록했다.

협계태씨족보 권1》는 사성 13년(696년)에 중상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태백산 동쪽에 나라를 세우고 진국震國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했다.

학계의 견해[편집]

발해가 스스로 남긴 문헌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에 그들의 민족성이나 문화에 대해서 알아 보기 위해서는 그들이 남긴 유적을 통해서 찾아 볼 수 있다.

발해의 생활방식은 온돌, 성곽들을 보면, 고구려의 문화를 많이 계승했고,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천손사상을 계승하여, 발해왕이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이은 천손임을 자처했음을 알 수 있다.

허나, 발해의 상경을 비롯한 궁궐이라던지 정치행정 형태가 당나라의 문화와 유사한 점, 상경성 일대의 물질문화 양상과 육정산 고분군에서 피장자가 고구려와 당나라의 선진문화를 수용한 속말말갈로 볼 수 있는 고분들이 있다는 연구성과로 각국 학계에서는 발해사의 주체를 두고 논쟁 중이다.

중국러시아 학계와 대부분의 일본 학계는 발해건국의 주체가 퉁구스족 속말말갈이라 주장하고 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와 일부 소수의 남한 학계에서는 발해건국의 주체가 고구려족이라 주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남한 학계와 서방의 학계 그리고 일부 일본 학자들은 발해 건국의 주체는 고구려유민과 말갈이며 발해를 다민족연합국가로 보고 있다.

발해의 피지배층으로는 말갈 제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이외에 위구르, 실위, 해, 예맥, 거란, 소그드인 등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발해를 주목하게 된 것은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를 통해 관심을 받게 되면서 뒤를 이어 대조영이라는 드라마 등을 통해서 한국인들의 인식에 들어오게 되면서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기[편집]

신라는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이 끝나자 내실을 기하기 위해 국가제도를 개혁하였고, 강화된 왕권으로 귀족들을 억눌렀다. 또한 인구 증가와 생산력 향상에 따라 조세가 늘어나자 수도를 정비하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다. 그 무렵 만주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698년, 대조영이 대사리 걸걸중상걸사비우가 각각 이끌던 고구려의 유민들과 말갈인들을 규합하여,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한 뒤 진국을 건국하고, 곧 발해로 국호를 바쑤어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의 남북국사관에서 북국 발해와 남국 신라라는 남북국 시대가 시작됐다.

서기 900년, 신라는 견훤이 서남부에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궁예가 신라의 북부에서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삼국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남부의 신라가 분열되어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어 남북국 시대의 양상과 사실상 병존하였다. 918년태봉왕건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고려로 국호를 환원하고, 926년에 북국인 발해가 멸망하자 남국의 고려에서는 934년,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인도주의적으로 수용하기도 하면서 국내에서 삼한을 일통한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명칭[편집]

한국의 역사
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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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는 일부 비주류 역사관을 제외하면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신라만이 '삼한일통'의 정통 왕조라는 《삼국사기》의 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서는, 발해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러다가 조선 초기에도 세조 시기에 발해의 역사를 조선사로 편입시키고 발해의 역대 왕들을 제사지내자는 상소문이 올라왔지만 조선 세조는 본래 발해는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에 속했다가 떨어져 나간 국가로 일축했다. 유희령의 16세기 초반 저작인 《표제음주동국사략》에서 발해사를 조선사의 일부로 편입했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국제하천인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발해사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등장하였다. 북학파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구려가 망하며 삼국 시대가 종결된 후 남부 신라가 있었고 북부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현재주의 관점인 '남북국사관'을 창조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도 대한민국에서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라고 부르며 발해에 관해 어두웠으나, 1980년대부터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90년대 들어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학자들 사이에 발해사는 중국사의 일부로, 한국사에 포함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으나,[1] 한국 사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중국 사학계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라는 용어는 발해를 배제하고 신라만을 정통 역사로 인정,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통합하다"(統一)라는 뜻이므로 발해가 제외되어 있다. 때문에 한국의 사학계에서 스스로 발해를 외면했다는 이유로 중국 일부 사학계의 동북공정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중국학계에서는 현재 "통일된 신라"(统一的新罗)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때문에 한국학계 일부에서는 최초의 역사적 통일은 신라가 아닌 고려가 이루었다고 보는 반성도 있다. 비록 인도주의적인 형태였지만, 고려 태조 왕건은 926년 발해가 멸망하자, 934년,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수용하였고,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주어 왕족에 버금가는 반열에 들게 하였다.

통일신라[편집]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관계[편집]

통일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대체로 대립적이었다. 733년,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두 국가의 관계가 항상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발해 남경 남해부에서 신라 금성에 이르는 신라도는 발해와 신라가 서로 교류를 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이러한 교역로는 발해의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과 남경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신라에 이르던 교통로였다. 신라도는 8세기 전반에 개설되었으리라 여겨지며, 자주 이용된 시기는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전반까지이다.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박기성 특파원 (2006년 9월 5일). “중국, 발해사 포함 고대사 송두리째 왜곡”. 한겨레신문. 2009년 11월 10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 남북국시대, 《한국민족문화대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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