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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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統一新羅

 

 

 

668년935년
 

문장
문장
History of Korea-Inter-country Age-830 CE.gif
남북국 시대(기원후 830년경). 파란색이 신라
수도 금성
정치
공용어 신라어
대왕 문무왕
진성여왕
경순왕
입법 화백
역사
 • 고구려, 백제의 멸망 668년
 • 나당전쟁 675년
 • 원종·애노의 난 889년

기타
국교 불교, 유교, 무교

통일신라(統一新羅)란 백제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인 668년부터 후삼국 시대 직전의 신라이다.

명칭[편집]

한국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일반적으로 제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 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로 구분짓는다. 그러나 발해의 역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통일신라'라는 표현에 꾸준히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 발해가 세워진 698년부터를 남북국 시대라고 하며 '통일신라시대'를 역사에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발해한국의 역사로 취급하고, 신라의 삼국통일 또한 온전한 통일로 보기 어렵다는 관점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이를 '후신라' 혹은 '대신라' 등으로 대체하기도 한다.[1]

역사[편집]

한국의 역사
韓國史
Gyeongbokgung Palac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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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전쟁[편집]

신라는 진흥왕(재위 540년 ~ 576년) 때에 이르러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나제 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2]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때의 신라 국세는 이른바 진흥왕 4비(眞興王四碑)인 창녕비(昌寧碑:昌寧)·북한산비(北漢山碑:서울 北漢山碑峰)·황초령비(黃草嶺碑:함남 함흥)·마운령비(摩雲嶺碑:함남 이원) 등이 증명하는 바이다.[3]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신라의 팽창은 고구려·백제 양국의 반격을 초래하였다.[4] 진흥왕 이후에는 진흥왕 대에 복속했던 영토들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으며, 진덕여왕 (재위: 647년 ~ 654년)대에 와서는 백제가 신라의 턱밑인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까지 공격하여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고구려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김춘추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고구려백제에 대항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실패하였고, 신라는 당나라와 나·당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백제에 반격을 준비하였다.

나·당 동맹 이후,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다. 의자왕과 지배층의 향락 등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이 생겨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던 백제는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갈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에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일부와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676년). 하지만 옛 고구려의 영토인 대동강 이북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여,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뒤이어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들어서면서 남북국 시대가 형성되었다.

전성기[편집]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데 무열왕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신문왕 때에는 김흠돌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가하였다. 이 후,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회의를 주도하여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으며,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을 인정한 관료전(官僚田)이 지급하는 등 신문왕은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5묘제를 설치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하였다.[5] 이 후 685년에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에 지방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하였다.

호족 할거와 정치변동[편집]

8세기 후반 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진골 귀족들은 녹읍제를 다시 부활시키는 등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권력 투쟁을 벌였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또한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르면서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지게 되었다.

9세기 중엽의 문성왕(文聖王) 이후 중앙 귀족은 지방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 쟁탈을 위요(圍繞)한 정쟁(政爭)을 식히고 점차 타협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한편 골품제로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없었던 지방 세력은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海上貿易)에서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적인 조공(朝貢)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대외무역은 점차 민간무역에서 주도하였다. 이들은 당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그러나 당과의 무역이 가장 성하여서,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山東半島)나 장쑤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 기관이 설치되었다. 또 거기에는 신라원(新羅院)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文登縣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은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지방 세력가들의 민간 무역이 성행하고, 당의 지방통제권이 약화되면서 해적(海賊)의 출몰이 잦았다. 이는 성행하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는데, 이러한 배경 속에 해상의 군진(軍鎭)이 설치되었다. 신라는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에 설치하던 군진(軍鎭)을 해적들의 활동이 심한 해안의 요지에 설치하여 이를 방비하였다. 청해진(淸海鎭 : 완도)·당성진(唐城鎭 : 남양)·혈구진(穴口鎭 : 강화) 등이 그것이며, 그 중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고, 다시 중앙의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장보고의 경우와 유사하게 지방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이 시기에는 수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보통 성을 쌓고 스스로 성주(城主)라고 자처하였다.

9세기 이후에 나타난 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大商人)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되었다. 중앙 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또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村主)도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다. 한편 국가의 비호 밑에 발달한 사원도 면세(免稅)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兼倂), 농장을 확대해 갔다.

한편,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쇠퇴와 멸망[편집]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궁예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축소되면서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후고구려의 궁예를 실각시킨 고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아내어 신라를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경제[편집]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모든 지역의 크기와 인구, 가축의 수, 특산물 따위를 모두 조사하는 양전을 실시하여 민정문서를 작성했다.[6]

문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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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는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중국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많은 신라 승려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교를 배워 왔고, 혜초인도까지 가서 그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왕오천축국전).[7] 선종, 정토종 등의 불교 종파가 수입된 것도 이 때이다.[7]

682년에는 유교를 가르치는 국학을 설치했고 750년 태학감으로 개칭되기도 했다.[7] 국학의 교육 혜택은 귀족 엘리트들만 받을 수 있었다.

불교의 수트라 및 유교 경전을 찍어내기 위한 목판 인쇄도 발달했다. 석가탑 안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기원후 751년경의 물건이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목판인쇄물 중 세계 최고(古)의 것이다.[7]

각주[편집]

  1. 이종욱, 《신라의 역사》2, 김영사, 2002
  2. 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551년(진흥왕)에는 백제와 더불어 북진하여 한강 상류 지역을 점령하였다. 
  3. 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553년에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여 백제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때의 신라 국세는 이른바 진흥왕 4비(眞興王四碑)인 창녕비(昌寧碑:昌寧)·북한산비(北漢山碑:서울 北漢山碑峰)·황초령비(黃草嶺碑:함남 함흥)·마운령비(摩雲嶺碑:함남 이원) 등이 증명하는 바이다. 
  4. 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이와 같은 신라의 팽창은 여·제(麗濟) 양국의 반격을 초래하였다. 
  5. <한국의 전통예술> ( 한국문화재 보호재단 편집부 저 ) 304p
  6. Korean history for high school p.141, issued by The National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of the Republic of Korea.
  7. Stearns, Peter N., 편집. (2001). The Encyclopedia of World History: Ancient, Medieval, and Modern, Chronologically Arranged 6판. New York: Houghton Mifflin Company. 155–6쪽. ISBN 0-395-65237-5. 2010년 8월 22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