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석굴암과 불국사
World Heritage Logo global.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World Heritage Logo global.svg
Front view of Seokguram from front chamber.jpg
석굴암 전실에서 본 석굴암 내부 전경
영어명*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프랑스어명*Grotte de Seokguram
et temple Bulguksa
등록 구분문화유산
기준Ⅰ, Ⅳ
지정번호736
지역**아시아·태평양
지정 역사
1995년  (19차 정부간위원회)
* 세계유산목록에 따른 정식명칭.
** 유네스코에 의해 구분된 지역.
경주 석굴암 석굴
(慶州 石窟庵 石窟)
(Seokguram Grotto, Gyeongju)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국보
Seokguram Buddha.JPG
종목국보 제24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수량1기
시대통일신라시대
소유석굴암
관리석굴암
참고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873-243
(진현동 999)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석굴암(石窟庵)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있는 석굴(石窟)로서 국보 24호로 지정되어 있다.[1]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석불사'라는 현판도 발견되었다 석굴암에 있는 모든 것 중 하나 빼고 다 대칭이다. 뒤에 위치한 광배이다. 이 광배가 비대칭인 이유는 아래에서 바라볼 때 원이 대칭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광배는 160cm 높이에서 바라보면 정확한 원으로 보이는데, 이를 바탕으로 신라인들의 키는 일반적으로 160cm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세계에서 유일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화강암 석굴이며,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수차례 해체·조립·수리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현재는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서[2] 불국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점을 참작하여 석불사가 현재의 석굴암으로 여겨지고 있다. 석불사에는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를 각각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한다.

그 뒤로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 중수하거나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고, 정선은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설화[편집]

석불(石佛)을 장차 조각하고자 큰 돌을 다듬어 감개(龕蓋)를 만들 때 갑자기 돌이 세 조각으로 갈라져서 분통이 터져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천신(天神)이 내려와 만들어놓고 갔다는 전설이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이며, 실제로 원형 연화 광배는 세 부분으로 갈라져있다.

보수공사[편집]

일제강점기 때의 보수공사[편집]

우편배달부에 의해 발견된 1907년 당시의 석굴암

석불사는 한참동안 잊혔다가 1907년에 토함산을 지나던 한 일본인 우편배달부의 의해 발견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1912년부터 1915년까지 3년간 걸쳐 일제에 의한 대규모 보수공사가 있었다. 첫 번째 수복때 석굴암은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 천장이 새서 불상이 직접 비를 맞고, 주변의 불상의 배치도 불분명했으며 전체의 반이상이 돌과 흙에 파묻혀 있었고 그 틈새마다 잡초와 넝쿨, 이끼가 덮여 있었다.

최초의 보수 후에 비가 새는 것이 발견됐고, 그 후의 보수에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복원공사는 석굴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건축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전실과 주실 전체를 시멘트로 1미터 이상 덮어버린다. 다음은 비도의 윗부분에도 시멘트를 이용해 석축옹벽을 쌓고, 진입로 역시 이전에 있던 좌우 돌담을 기준으로 시멘트 석축옹벽으로 개조한다.[3] 때문에 외면상 수리는 되었지만, 석굴암을 복원불가능한 형태로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본존불 아래, 석굴내 지하수가 모여 밖으로 배출되는 수로장치는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장치로, 일본인들이 이것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지하수로 차가워진 돌에 수분이 맺히는 현상이 발생했다.

해방 이후 보수공사[편집]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방치되어 오다가 석굴암은 말라붙은 새똥과 이끼, 곰팡이가 피고 말았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2년간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일제가 바른 시멘트로 인해 습도와 온도 유지가 어려워지고, 내부에 맺힌 물이 시멘트를 녹여 결과적으로 화강암으로 된 조각상들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의 시멘트 구조물 위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그 위에 돔을 덮었다.

그리고 이때 외부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 유리로 봉인하고, 습기제거장치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렇게 밀폐된 공간 속에 관람객들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와 이물질이 갇혀 화강암을 손상시키는 점이 지적되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목조에 기와를 덮은 전실전각이 설치되었다. 그때부터 짐승과 조류, 벌레 등의 침입을 막게 되었고, 악천후가 차단되어 연중 예불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것이 석굴암의 통풍을 막는 요소라고 지적되고 있다. 그래도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자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는 석굴암 우측에 환풍기를 설치했다.

1970년부터 또 다시 앞지붕을 짓고 입구에 유리로 설치해 실내의 습도가 항상 조절되고 있지만, 일반인은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매년 석가탄신일에만 석굴암 내부까지 공개된다.

구조[편집]

방형 전실(前室)을 지나 통로를 지나면 원형 굴이 나타난다. 천장은 돔형으로 밖에서 보면 그 위에 흙을 덮은 모양이다. 너비는 좌우 약 6.7미터, 전후 약 6.6미터, 입구의 넓이 3.35미터로, 치밀한 건축적 계산 하에 설계되어 만들어졌다.

본존불[편집]

석굴암 본존불을 정면에서 본 모습. 문화재청 촬영.

석굴암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흰 화강석에 조각한 것으로, 높이 약 3.4미터의 거대한 불상이다. 석굴 중앙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부좌(趺坐)하였고,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莊重雄麗)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을 하였고,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 이라고 한다. 실제로 본존불의 눈과 눈 사이에 무언가 박혀 있었는데 그것이 유실되어 현재는 수정을 박아 놓았다고 한다.

본존불은 정확히 동짓날 태양이 뜨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십일면관음보살상[편집]

십일면관음보살상

본존불 바로 뒤의 벽 한가운데에 반육각(半六刻)한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이 있다.

이 상은 다른 조각품보다 유난히 입체감이 강조되어 있다. 약간 웃음을 띤 표정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천의, 섬세한 손가락과 발가락, 우아하게 높이 설치된 연화좌가 특징이다.


팔부신장[편집]

전실을 들어서면 양쪽 벽에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있으나 내부의 것에 비해 그 수법의 정교함이 덜하다.

인왕상[편집]

통로 입구 양 옆에는 인왕(仁王) 혹은 금강역사 한 쌍이 석굴 입구를 지키고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하여 금강역사라 칭했다.

사천왕상[편집]

입구 통로, 즉 비도(扉道)의 좌우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각 2개씩 반육각되어있다.

천부상[편집]

통로 입구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 있다.

보살상[편집]

천부상 옆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있다.

10대제자상[편집]

석굴 벽면에 십나한(十羅漢)상이 있다.

감실상[편집]

10대제자상 위로 벽의 윗부분에는 10개의 불감(佛龕)을 만들어 그 속에 작은 부조상을 하나씩 안치하였다. 그 중에는 1체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과 7체의 보살상이 있다. 두 개는 대한제국 때 일본인이 반출해서 지금은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천장 및 기타[편집]

천장은 돔형으로 되었고 중심에는 연판(蓮瓣)을 새긴 둥글고 깨진 돌로 눌러놓았는데, 그 교묘한 구조와 우아한 조각은 놀랄 만하다. 그리고 이 석굴암 옆에 보면 굴이 있는데, 이 굴에서 문무왕릉과 연결되는 길이 있다.

내부에서는 보존을 위해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보문사에도 경주의 석굴암과 비슷한 석굴암이 있다. 서울의 석굴암은 1970년부터 1972년까지 2년간 만들었으며 경주의 석굴암보다 약간 작다. 경주의 석굴암은 문이 1개인데 서울의 석굴암은 문이 3개이며 팔부신장(八部神將)은 생략되었다고 한다.

평가[편집]

석굴암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인도 간다라 미술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굴암은 그 구조가 기묘할 뿐만 아니라 본존 및 벽면 조상의 비범한 기술로 보아 신라 시대 예술을 대표할 만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산을 파내어 만든 석굴은 있으나 석굴암과 같은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서울대학교 이주형 교수는 석굴암이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바미얀 석굴과 석굴암은 공통적으로 원형평면 위에 배치가 되어있고 형 천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네모반듯한 전실과, 안쪽 벽에 부조로 새겨진 상, 그리고 위쪽으로 감실이 있고 그 안에 보살상이 있는 점 등이 똑같다.

그리고 이 교수는 바미얀 석불의 원류가 돔 형태의 로마 판테온이라고 주장했다.[4]

논란[편집]

문화재로서의 원형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 본래의 모습에 대한 논란이 있다.[5]

  • 광창 - 석굴암 본존불 앞쪽 천장에 조명을 위한 구멍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 비어 있는 감실 - 비어 있는 2개의 감실에도 불상이 있었는데 반출되었다는 주장이다.
  • 목조건물 - 석굴암 굴 앞에 목조건물이 세워져 있었다는 주장이다.
  • 채색 - 석불에 채색을 했었다는 주장이다.

본존불의 존명에 대한 논의들이 있다.[6]

  • 석가모니불
  • 아미타불
  • 약사여래불
  • 비로자나불
  • 노사나불
  • 연등불
  • 미륵불

갤러리[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문교부장관 (1962년 12월 20일). “문교부고시제一六九호、”. (1962년 12월 20일 관보호외 1쪽(一三二九), 2쪽(一三三○). 2016년 11월 2일에 확인함. 문화재보호법 부칙 제三조의 규정에 의하여 국보로 재 지정된것을 다음과 같이 고시한다 
  2. 일연, 〈大城孝二世父母神文王代〉, 《삼국유사》 권5.
  3. 성, 낙주 (2014). 《석굴암, 법정에 서다》. 불광출판사. 126쪽. 
  4. 이주형, 중앙아시아연구 11호 "인도·중앙아시아의 원형당과 석굴암"
  5. 배경수, 《吐含山 石窟庵에 對한 小考》, 동아대학교, 1977
  6. 김리나, <석굴암 불상군의 명칭과 양식에 관하여>, 《한국고대불교조각사연구》,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