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지금의 장도 전경

청해진(淸海鎭)은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張保皐)의 청에 따라 지금의 전라남도(全羅南道) 완도군(莞島郡) 장도에 설치하였던 진(鎭)이다. 초기에는 해적을 방비하기 위한 군사거점으로서 설치되었으며 이후 해상무역의 주요 거점으로서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렸다.

개요[편집]

장보고는 원래 신라의 해안 지역 출신으로 일찍이 친구 정년과 함께 당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을 지냈으며, 신라로 돌아와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 주민을 잡아다 노비(奴婢)로 팔고 있는 실상을 보고하면서 해적을 소탕하기 위한 군사거점으로서 청해진을 설치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왕에게 청했다. 왕은 이를 수락하여 흥덕왕 3년(828년) 4월 장보고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장보고가 세운 청해진이 신라 바닷길의 요충지로 다른 이름은 조음도(助音島)이며, 《삼국사기》가 편찬될 당시에 이미 지금의 이름과 같은 완도(莞島)라 불리던 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완도는 조선 시대(朝鮮時代)에는 전라도(全羅道) 해남현(海南縣)과 강진현(康津縣)에 나누어 속했다.

청해진을 거점으로 장보고는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안에 출몰하던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중국 · 일본 간의 해상무역에도 개입해 부를 쌓았다. 이로써 청해진은 해상무역의 거점 항구로서 성장하여 바닷길의 요충이 되었으며, 재력에 겸해 무력까지 갖추고 신라 정계의 왕위 다툼에도 개입해 무력으로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을 옹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次妃)로 들이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에게 살해되었고, 문성왕 13년(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폐지하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벽골군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권제32 잡지(雜志)제1 제사조에는 신라에서 중사(中祀)로서 제사지내던 곳의 하나로서 청해진이 언급되어 있다.

규모 · 위치[편집]

장보고 기념관에 전시된 청해진 전체 복원 모형

한국의 해양사를 연구한 동국대학교 윤명철 교수는 고대 신라와 당을 오가는 항로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루트를 지적하였는데,

  1. . 황해중부 횡단항로 - 산동 반도의 등주 · 적산 및 밀주 등지에서 출발하여 150여 km를 횡단해 한반도의 백령도 · 덕적도 등 경기도 연안에 도착,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영산강 하구권의 고이도나 무주 같은 항구나 주변 해역 등을 거치는 루트.
  2. . 황해남부 사단항로 - 지금의 전라남도 등지의 해안에서 출발해 사선으로 비껴서 항해하여 양쯔 강 하구의 장쑤 성(江蘇省) · 저장 성(折江省) 항저우 및 밍저우(닝보)와 그 외곽의 저우산 군도(舟山群島) 등의 중국 강남 지역 항구로 도달하는 루트(역루트도 가능하다).
  3. . 동중국해 사단항로 - 절강 이남 지역을 출발하여 지금의 동중국해제주도 해역, 흑산도, 황해 남부를 거쳐 신라로 도달하는 루트.

등이 있다.[1] 이들 항로에서 중국측 선착지인 산동 반도의 등주 · 밀주, 양자강 하구의 쑤저우양저우, 항저우와 밍저우 등지에는 당에 체류하는 신라인들이 모여사는 신라방(일종의 「신라인 자치주」)이 존재했으며, 당시의 항해 기술의 한계 때문에서라도 가능한 육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연근해 항로를 이용해야 했던 실정상 당 - 신라뿐 아니라 당 - 일본의 항로 또한 한반도 남부 해안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2] 이 과정에서 서해에서 남해로 돌아가는 지점에 청해진이 있었다.

청해진이 위치한 완도 일대는 남북 연근해항로가 통과하는 곳으로 한반도에서는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지점이자, 중국 강남 지역에서 한반도로 북상하는 항로가 만나는 곳이기도 했다. 한반도 서남해의 리아스식 해안과 밀접한 섬임에도 불구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은 데다 일단 섬 내부로 들어오면 파도도 일지 않고, 부두에 가까운 곳에 산이 이어져 있어 방어거점으로서도 유리했으며, 강진, 해남 등의 배후도시가 존재했다.

관련 사진[편집]

주석[편집]

  1. 다만 황해중부 횡단항로는 1. 다시 경기만에서 출발해 산동반도의 동단 혹은 북단에 도착하는 직선거리 약 250km의 항로와 2. 경기만 하단의 남양만이나 금강 하구에서 직접 황해를 가로질러 덩저우나 청두의 여러 항구에 도착하는, 두 가지 항로로 세분화할 수 있다.
  2. 이러한 신라 해안을 경유하는 연안항해를 통해 당으로 갔던 초기 견당사들과는 달리 후기 견당사들은 신라를 경유하지 않고, 규슈 남부에서 오키나와를 지나 당의 남부 해역으로 진입하는 남도로(南島路)와 규슈 북서부에서 아예 동중국해를 직항하는 남로(南路)의 두 항로를 사용했으나 위험부담이 너무 컸으며, 실제로 남로를 택했던 견당사 가운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13차 견당사 때 단 한 번에 불과했다. 때문에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쓴 엔닌이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는 과정에서는 신라방이 있던 초주에서 신라선과 신라 수부(水夫)를 빌려, 한반도 남부를 경유하는 황해남부사단항로를 따라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함께 보기[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