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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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靺鞨; 중국어: 靺鞨, 병음: Mòhé)은 《북제서》 무성제기(武成帝紀) 하청(河淸) 2년조(563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실위, 고막해, 거란 등과 함께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해 왔다는 것이다. 북제에 대한 말갈의 조공은 무평(武平) 6년(575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수서》 단계에 이르러서는 독립된 열전이 설정되었다.   말갈의 전사(前史), 즉 그 선대와의 계보 관계는 『구당서』 말갈전에 "말갈은 곧 숙신의 땅이다. 후위(後魏) 때에는 이를 물길이라 하였다."고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신당서》 흑수말갈전에는 "흑수말갈은 숙신 땅에 있는데, 또한 읍루라고도 하며 후위 때에는 물길로도 불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사서의 이러한 계보관은 후대 금나라의 선조 의식과 연결되어 고대의 숙신 → 동한의 읍루→ 원위의 물길→ 수당의 말갈─ 요금의 여진이란 중국 정사의 말갈 계보가 완성되었다.

말갈 유적에서는 도기를 비롯하여 청동 장식품, 철제 공구, 무기, 갑옷, 마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철제 무기류가 많은데 비해 농기구류는 수량과 종류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은 편이다. 이는 말갈이 전형적인 농경인이 아니라 반농반수렵민이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1]

어원[편집]

말갈 명칭의 출현과 처음 이 명칭을 쓴 대상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중국의 말갈사 연구 중 어원(語源)에 관한 것은 중요한 연구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물길과 말갈의 관계에 대해서는 동일한 대상의 전음 또는 이역(異譯)이었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어원과 관련해서 최근 논의되고 있는 것은 거주지역 또는 특정 물건이 종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종족 융합으로 새로운 명칭이 나왔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전의 주장들을 계승·발전시킨 것에 해당한다.

무커() 설[편집]

러시아의 학자 A. V. 그레벤쉬취코브(Grebenščikov)는 의하면 말갈이라는 명칭은 물(水)을 의미하는 만주어의 무커(만주어: ᠮᡠᡴᡝ Muke)에서 나오고, 읍루라는 명칭은 소굴(巢窟)·동혈(洞穴)을 뜻하는 만주어 예루(만주어: ᠶᡝᡵᡠ Yeru)에서 나왔다고 하였다.[2] 물길의 경우는 Wu-tsi라고 발음하는데, 여진어에서 삼림을 의미하는 Wei-ji·Veďi·Udi와 같은 말로 생각된다는 견해로 보면[3] 물길은 삼림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을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말갈은 물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물길과 말갈은 각각 삼림과 강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은 것이 되어 차이를 보이게 되지만, 크고 작은 산맥의 연속과 그 사이 곳곳에 강이 흐르는 만주의 지형을 보았을 때 과연 위와 같이 엄격하게 생활 터전을 구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4] 이에 대해서도 말갈을 물길의 고음을 ‘Muki’로 보아 말갈의 고음이라 추정되는 'Maxo'와 연결시킨 의견도 있다.[5]

물길 전음설[편집]

전음설을 살펴보면 대부분 물길과 말갈이 족칭이 바뀐 것이 아니라 동일한 단어가 시기적인 차이를 두고 다르게 번역된 것으로 본다. 물길과 말갈을 같은 음이라고 보는 가장 기본적인 근거는 《통지(通志)》로, ‘말갈(靺鞨)’ 이라는 단어의 주음에서 “물길, 말갈은 그 음이 서로 근접 한다(勿吉, 靺鞨其音相近)”라는 기록이다. 그런데 현대 중국어에서 물길(중국어 정체자: 勿吉, 병음: Wùjí)과 말갈(중국어 정체자: 靺鞨, 병음: Mòhé)은 음이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말갈은 대부분 말갈(靺鞨)로 표기되었지만, 이역(異譯)으로 말갈(중국어 정체자: 靺羯, 병음: Mò jié)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길과 말갈을 같은 말로 보는 입장에서는 수당대의 독음을 연구하여 당시에는 비슷한 음이었음 밝히고 있다.

우선 鞨(he)과 羯(jie), 吉(ji)의 발음에 대한 것이다. 웨이궈중은 당대의 ‘말갈(靺鞨)’ 은 ‘말갈(靺羯)’ , 즉 말걸(중국어 정체자: 末杰, 병음: Mòjié)로만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6]

다음으로 靺(mo)과 勿(wu)의 발음에 관한 것이다. 쑨위량, 자오밍치는 말갈이 처음 출현했을 때 ‘靺鞨’ 이 아닌 ‘ 羯’ 로 썼고 'weijie'로 읽었다고 한다. 즉 ‘ ‘靺羯’이 물길의 음전이라는 것이다. ‘靺羯’ 이 말갈(靺鞨)로 개작(改作)된 것은 모양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독음상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이것이 현대에 와서 중화서국(中華書局) 교점본(校點本) 『24사(二十四史)』가 간행되면서 ‘ ’ 을 전부 ‘靺’ 로 고치고, ‘ 羯’ 대신 철저하게 ‘靺鞨’ 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다.[7][8]

자오잔은 한자의 옛 음에 따르면 말 물(勿)자는 막발절(莫勃切)로서, 그 음은 몰(沒, mo)이요, 길할 길(吉)자는 격질절(激質切)로서, 그 음은 길(拮, jie)이고, 《북제서(北齊書)》에 제일 먼저 물길(勿吉)을 말갈(靺鞨)[9] 어음상으로 보면 물길(勿吉)은 말갈(靺羯)과 독음이 매우 비슷하여 대체할 수 있음은 물론이며, 그러나 羯자에는 양 양(羊)자의 변이 있어 종족의 명칭로서는 아마 점찮지 않은 말로 여겨져서 또 羯자를 鞨자로 고치게 되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또한 鞨자에는 여러 가지 음이 있는데, 하갈절(何葛切)은 그 음은 갈(曷, he)으로, 현재 말갈(靺鞨)의 갈(鞨)은 일반적으로 모두 갈(曷, he)의 독음을 취한다고 주장했다.[10]

거주지역에서의 유래설[편집]

말갈의 어원과 관련해서는 먼저 거주지역의 특징에서 나왔다는 견해를 살펴보겠다. 장보촨은 물길, 말갈, 발해의 명칭 모두 하나의 음이 변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11] 퉁구스족의 독음에서 m과 b, p, f는 서로 통하고, j, g는 서로 통하기 때문에 물길, 말갈(靺羯), 말갈(靺鞨)은 같은 음이었고 역시 발해로 변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물길, 말갈, 발해는 만주어의 워지(窩集, 만주어: ᠸᡝᡷᡳ Weji)로 그 뜻은 ‘산림’ 을 가리킨다. 물길 또는 말갈은 산과 물을 따라 거주했는데(居山水), 이들을 남북조 시기의 선비족이 물길이라고 불렀던 것이 중원에 전달된 것이라고 보았다. 우선 勿은 沒, 靺처럼 읽히고, 末의 소리에서부터 渤이 전음되었다는 것이다. 선비어에서 沒, 沒里라고 부른 것은 동호족의 물(水)을 가리키는 말인 木, 沐, 혹은 沐漣, 木倫과 같다고 한다. 吉, 羯, 鞨의 경우 하나의 음이 변한 것으로, j, g가 서로 변하고 k, h로 전독(轉讀)되었는데 그 뜻은 사람이다. 즉 물길·말갈계는 수변에 거주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강인(江人)·강민(江民)을 북위가 물길로 불렀던 것이 말갈로 전음되었다는 것이다.[12]

일본의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강의를 통해 말갈이 동북지방의 여진족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물길·말갈의 어원을 흑룡강을 뜻하는 ‘Magu’에서 유래하였다고 하였다.[13]

특정 물건에서의 유래설[편집]

판언스는 말갈이라는 명칭 자체는 한반도에서 사용되었으며, 이것이 중국에 전해진 것은 고구려에 복속된 백산말갈이 중원과 접촉하게 되면서라고 보았다.[14] 그리고 말갈이라는 단어 자체는 숙신계의 석노(石砮)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말갈(靺羯{鞨})’ 단어의 독음을 살펴보면, 먼저 (靺)은 mo, wa 두 개의 음이 있었다. 이중 비교적 일찍 나타난 것이 wa음이다. 중고한어의 a음류는 대부분 ə로 발전했고, 남북조 말기 이후에 말(靺)도 wə로 바뀌어 읽혔다. 말(靺)자가 mə로 읽히게 된 것은, 중고음 중에 w, m 두 개의 성모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아 m으로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갈(羯)자는 고대에 경전을 번역할 때 ka]음에 많이 이용되어 羯麻(karma), 羯那陀(kanada), 羯陵伽(kalinga)처럼 음역했다. 갈(羯)이 jie로 읽히면서 갈족(羯族)을 가리키게 된 것은 비교적 뒤늦게 나타난 현상으로 말갈(靺羯)의 갈(羯)은 ka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k, h는 동일하게 설근음(舌根音)으로 중고에서는 통음(通音)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갈(鞨)자로 바꿔 사용한 이후, 통전되어 갈(羯)자는 he로도 읽혔다. 말갈(靺羯)의 음은 현대 만주어의 석두(石頭, 만주어: ᡡᡝᡥᡝ Ūehe)와 여진어의 석두(여진어: wəhə)의 음과 같다. 판언스는 백제·신라 사람이 석촉을 사용하던 숙신인의 종족적 특징 때문에 이들을 처음으로 말갈(靺羯, Wehe)라고 불렀던 것에서 말갈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러 입공물(入貢物)인 석촉이 일종의 홍색 보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중원인이 이 보석을 말갈(靺羯)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봤다. 수당 이후에 와서는 성모학(聲母學)이 정식으로 생겨서 갈(羯)자의 독음이 ‘거알절(居謁切)’ 로 고정되었고 ‘갈(鞨)’ 자가 새롭게 만들어져 he음을 대체함으로써 ‘말갈(靺羯)’ 서술에서 점차 말갈(靺鞨)로 전변되었다고 보았다.[15]

새로운 족명설[편집]

리더산은 물길은 숙신과 예맥족이 융합되어 형성된 새로운 명칭으로 원래 ‘맥신(貊愼)' 인데, 북위가 독음할 때 ‘물길’ 로 발음하면서 전음된 것으로 보았다.[16] 리더산은 280년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숙신인 600여 가가 고구려에 의해 사민당하고, 6~7개 부락이 항복했던 사례와 매번 고구려를 노략했다는 기사, 북위 시기 부여가 물길에게 쫓겨난 기록, 고구려의 10부락을 공파한 사건 등을 들어 이 과정에서 예맥계와 숙신계가 상호 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고구려가 북위 등 선비계에 의해 압박을 받던 시기에, 새롭게 숙신계가 대거 남 하하여 종족 융합이 이뤄졌다고 보았다. 이때 송화강 중하류 유역으로 진입한 숙신계의 일부가 부여인을 역속시키고, 옥저 지역으로 남하한 일부는 이들 지역을 장악한 후 각각 그 지역의 예맥계와 그 이전 시기에 남하했던 숙신인들과 융합하면서 숙신인이 주체가 된 새로운 민족을 탄생시키는데, 물길이라는 명칭은 이 때문에 생겼다고 보았다.[17]

말갈의 7부의 위치[편집]

중국의 고구려 영역도

현재 중국 학계에서는 말갈 제부의 실제 규모와 상관없이 이들의 활동 지역을 곧 광역의 말갈 영역으로 인식함으로써 위 지도에서 보이듯 고구려의 동북 영역을 크게 축소시켜 놓았다. 위 지도는 최대판도 를 그렸는데 특정 시기에는 적어도 속말부와 백산부의 영역이 고구려 영역에 포함되었고, 백돌ㆍ안거골ㆍ불열ㆍ호실부 역시 간접 통치의 범위에 속한다고 보는 한국 측의 인식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말갈 유적이 발견되는 지역을 곧 말갈의 정치적 영역으로 보는 것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고구려는 지방을 지배할 때 일부지역 집단에는 간접 지배의 방식을 취하면서 고구려 문화를 강제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말갈에 대해 직접지배 방식이나 고구려 문화를 강제하지 않은 것은 고구려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방통치의 효용성에 따른 것이다.그리고 말갈 제부 중 속말과 백산은 일찍이 직접지배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속말말갈 지역인 길림시 일대에는 용담산성, 동단산성, 삼도령산성 등 고구려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고, 백산말갈 지역에는 살기성을 중심으로 훈춘시 경내와 성자산산성 및 용정시와 연길시 경내 등에도 고구려 산성이 분포했다. 산성은 4세기 이후 고구려의 지방 지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산성의 존재는 고구려의 지방관이 산성을 거점으로 지방 통치를 수행했던 증거라고 한다.   수, 당과의 전쟁시 고구려의 말갈병 동원상황을 통해서 볼 때 고구려의 말갈 지배가 원활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 후기에 이들 지역의 말갈족은 고구려민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백돌ㆍ안거골ㆍ불열ㆍ호실부의 경우 간접 지배를 받았지만 그들도 고구려민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뒤 대부분 자신의 단위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분산미약(奔散微弱)'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유물이나 유적을 정치적 영역이나 세력권을 파악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은 고구려에 적용하기 힘들며, 역으로 말갈 유적 분포 현황을 가지고 곧바로 말갈의 영역이나 세력권으로 보는 것도 실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18]

속말부(粟末部)[편집]

《수서》에는 속말부가 "고구려와 인접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속말말갈은 흑수말갈과 함께 말갈 7부 가운데 위치 비정상 논란이 가장 적은 집단이다. 속말말갈과 흑수말갈은 모두 거주지 인근의 강 이름에 따라 부명(部名)이 일컬어졌다. 즉 속말말갈은 속말수, 지금의 송화강가에 사는 말갈이라고 보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속말말갈의 유적지는 제2 송화강 유역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길림 영길(永吉) 양둔(楊屯) 대해맹(大海猛) 유적의 상층 문화층과 유수(楡樹) 노하심(老河深) 유적의 3기층, 그리고 영길 사리파(査理巴) 고분군 등이 있다. 이외에 길림시 북쪽 구태현(九台縣)의 송화강 서쪽 연안 상류 지역에서 발견된 산채(山寨) 7좌 유적이 있으며, 화전현(樺甸縣)과 덕혜현(德惠縣) 등 길림 인근 지역에서도 속말말갈의 주거지와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양둔 대해맹 유적은 남북 길이 약 450m, 동서 너비 150m, 높이 약 10m 되는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남으로 30km를 가면 길림시가 있고, 서로 2km를 가면 제2 송화강이 나온다. 서북으로 500m 거리에는 영길현의 오라가진 양둔이 있으며, 북쪽은 대해소택에 임해 있다. 1971년 여름에 농부가 발견하여 그해 8월과 10월에 조사를 시작했고, 길림성 문물공작대, 길림시 박물과, 영길현 문화국의 고고학자들이 1979년 8월과 1980년 6~9월에 계속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발굴 결과 세 층의 문화 유적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유적의 하층은 서단산 문화 만기(晩期), 중층은 한대 문화, 상층은 말갈-발해 초기 문화에 해당된다. 목탄 연대 측정을 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1535±85년 전에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즉 수말당초인 6~7세기경 유적으로 볼 수 있다.  양둔 대해맹의 상층 문화층에서는 모두 92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석광묘가 2기이고, 90기가 수혈토광묘였다. 토광묘의 형태는 장방형이 다수였고, 소수의 무덤은 정방형이거나 타원형인 것도 있었으며 일부는 불규칙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고분들 대부분은 천장이 파괴되어 있었고, 몇몇 무덤에서는 목관 흔적을 발견하였으나 다수의 무덤에는 장구(葬具)가 없었다. 매장 형식으로 보면 1차장을 한 것과 2차장을 한 것, 그리고 1·2차장을 합장한 것 등이 있었다. 한 무덤 안에 매장한 사람 수로 보면 1인장, 2인장, 다인장 등으로 다양했다.  출토 유물로는 여러 가지 도기와 옥벽(玉璧), 청동띠 장식품, 패식(牌飾), 철공구, 병기, 마구, 갑편 등 각종 생활 용구와 생산 공구, 그리고 무기와 장식품 등 다양한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부장품의 수량은 적게 묻은 곳에는 몇 점, 많이 묻은 곳에는 몇십 점으로 차이가 있었다. 부장품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도기였는데, 특히 단지가 많았고 대부분 피장자의 머리 위에 놓여 있었지만 일부 무덤에서는 발 쪽에 놓여 있기도 했다. 그 밖의 장식품과 의복 등은 피장자가 생전에 사용하던 위치에 놓여 있었다. 이 유적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유물로 개원통보(開元通寶)도 1점 나왔는데, 17호 무덤 피장자의 발 아래쪽에서 발견되었다.

무덤에서 출토된 통형관(筒形罐)은 모두 다 진흙에 모래를 섞어 손으로 만든 전형적인 말갈관이었다. 그릇 표면은 마연했거나 혹은 돌림판에 돌리면서 다듬었다. 도기의 구연부와 경부에는 한 갈래 톱날 모양의 덧띠문으로 장식했다. 전형적인 말갈 도기인 중순관(重脣罐)도 있었다. 그릇의 복부는 각획문(刻劃紋), 압인파랑(壓印波浪), 둥근 점, 사선문, 비점(箆点)으로 구성된 사선, 능형문(菱形紋)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석광묘에서는 장년 남자의 인골과 단지, 철갑편, 철창끝, 활촉 및 나무와 방직품 천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다음으로 유수 노하심 유적은 제2 송화강 북안 송눈평원(松嫩平原)의 대파향(大坡鄕) 후강촌(後崗村) 남쪽에 있다. 유적은 북으로 유수현성과 30km 떨어져 있으며, 노하심촌의 남쪽 500 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유적 규모는 동서 길이 약 1000m, 남북 너비 약 150m 정도이다.   노하심유지는 1980년 7월 농민이 발견했다. 이해 9월과 다음해 5~7월까지 연속적으로 발굴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시대가 다른 세 개 문화층이 확인되었는데, 양둔 대해맹 유적과 동일하게 하층에는 서단산 문화, 중층에는 한대 문화, 상층에는 말갈-발해 문화가 분포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말갈-발해 문화 유적은 모두 37기의 고분으로, 그 중 7기는 석관묘, 6기는 토광수혈목관묘, 24기는 토광묘였다. 고분의 방향은 대다수가 동서 방향이었으며, 소수는 동남 혹은 서북 방향이었다. 1인장이 비교적 많고 2인장, 3인장이 비교적 적었다. 이 가운데 화장한 무덤도 6기가 있었다. 7기의 돌무덤 중 1기가 2인장이었고, 기타 무덤은 모두 다 1인장이었다. 어떤 무덤은 토광묘 무덤 앞머리나 뒷부분에 막돌을 쌓아 놓은 것도 있었다. 타원형 석관묘도 한 기 있었는데, 이것은 타원형 토광묘 안에 돌을 쌓아 만든 것이었다. 무덤 천장과 바닥에는 돌이 없었다.   30기의 토광묘 무덤 중 23기에는 아무런 장구가 없었다. 그 중 2인장, 3인 합장, 화장 무덤이 각각 한 기이고, 그 외는 모두 다 1인장이었다. 목관이 들어 있는 6기의 토광묘 무덤은 모두 다 1인장이었다. 그 중 5기가 화장 무덤이었다. 지금까지 목탄 흔적이 남아 있고, 관의 안팎에 불에 탄 붉은 흙과 타지 않은 인골이 남아 있었다. 무덤 형태를 보면 대부분 덮개와 바닥이 없었다. 어떤 무덤 바닥에는 자작나무 껍질을 깔아 놓았다. 부장품 중에서 도기의 대부분은 묘실의 머리맡 혹은 아래 부분에 놓여 있었으며, 쇠활촉, 띠고리 등 철기들은 대부분 묘실의 가운데 아래쪽에 있었다. 무덤 중의 인골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2차장인 것 같다.  이 무덤들에서는 대부분 생활 용구와 무기가 출토되었다. 부장품은 약간 어설픈 수준이며, 종류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54점의 도기 그릇에서 52점이 도기 단지였다. 도기 질은 모두 다 모래를 진흙에 섞어서 손으로 빚어 만든 것인데, 그릇 모양이 좋지 않았다. 또 색깔은 주로 갈색과, 부연 빛이 나는 갈색, 혹은 붉은 갈색이었다. 그 외 부장품으로는 철기·동기·은·석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주로 활촉·띠고리·치레거리 등이었다.  노하심유적이 있는 유수는 제2 송화강과 가까운 곳으로 속말말갈 중심지와 매우 가깝다. 따라서 이 유적도 역시 속말말갈의 유적으로 보는 데 이견이 없다. 그런데 노하심유적에서는 다른 곳과 달리 석관묘가 확인되었다. 석관묘는 부여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사실 M24 석관묘는 M23 목관묘 아래에 있었으므로 시간상으로 보아 목관묘보다 빠를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일단 상층 문화층에서 확인된 것은 분명하므로 이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유수나 양둔은 모두 부여 지역에 속했는데, 양둔 쪽에서는 석관묘가 발견되지 않았다. 곧 유수 대파 지역이 같은 속말말갈의 권역이었지만 영길에 비해 고구려의 문화적·정치적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길 사리파 고분군은 1987년부터 1988년까지 길림성 문물 고고학자들이 발굴했다. 사리파촌도 역시 제2 송화강 연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100리 가량 나가면 길림시이다. 무덤은 영길현 우라가린 사리파촌 남쪽으로 약 1km 되는 곳의 낮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언덕 아래에는 수포와 송화강이 서로 통한다.  1986년 10월 이 지역 농민이 땅을 가는 과정에서 1기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이에 따라 문물 고고부에서 발굴을 진행했다. 1987년에서 1988년까지 모두 45기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이중 3기는 석광묘였고 나머지는 모두 토광묘였다. 무덤에서 대량의 도기와 금속기 부장품 등 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배대갑문(背帶甲紋)의 개원통보 동전도 하나 출토되었다. 묘장 중의 목탄 측정에 의하면 그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1545±95년 떨어져 있으며 수륜교정 1480±105년이라고 한다.   무덤은 주로 언덕 서쪽에서 남북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무덤의 방향은 동서 방향이 많았지만, 일부는 남북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인골의 머리 방향은 서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대부분이었고, 일부는 서남쪽으로 향한 것도 있었다. 이 가운데 석광묘는 크고 작은 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무덤 바닥에 백회를 바른 것도 있고, 자갈돌을 한 층 펴 놓은 것도 있다. 천장 부분은 흙으로 봉했다. 규모가 큰 무덤은 길이가 3m의 장방형에 가까운 것도 있다. 석광묘 가운데 한 기에는 목관이 매장되어 있었다.  다수를 점하는 토광묘는 거의 수혈식 장방형 무덤이다. 묘실에는 대부분 목관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많은 경우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관은 대체로 약간 가공을 거친 원목 혹은 판재였던 것 같다. 관 두께는 5~10cm 가량 되었고, 관 못을 사용하였다. 장구의 방향은 장방형으로 관 뚜껑과 바닥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관이라기보다는 곽으로 보는 것이 좀 더 합당한 것 같다고 한다. 곽의 결구를 볼 때, 단곽(單槨) 또는 변상(邊箱)이 있는 목곽분이었다. 다수를 점하는 단곽 무덤은 장방형 모양으로 네 벽은 판 널로 만들었는데, 변상이 있는 목곽은 단곽묘 앞 뒤에 상자를 덧붙여 부장품을 놓는 곳으로 하였다. 1인장, 2인장, 다인 합장 무덤이 있으며, 앙신직지장(仰身直肢葬)이 위주였고, 2차장도 적지 않았다. 화장한 무덤도 많았다.   대다수 무덤에 부장품이 들어 있었다. 출토 유물은 주로 도기, 동기, 철기, 옥기 등이었는데, 이 중에서도 장식품과 병기, 마구 등이 많았다. 부장품의 수와 양의 차이가 매우 큰 것이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많은 경우에는 백여 점 정도가 들어 있었지만, 어떤 무덤에는 부장품이 한 점도 없었다. 도기 숫자는 좀 적은 편이었다. 도기는 모두 진흙에 모래를 섞어 손으로 빚어 만들었는데, 주로 발굴된 기종은 통형관, 고복관(鼓腹罐), 장경호, 반구병(盤口甁), 염구모(斂口鉾) 등이다. 동기로는 대식(帶飾), 장식품 등이 있었고, 철기에는 칼·창·활촉·띠돈·말자갈·말등자 등이 있었다. 이외에 은기, 석기, 옥벽, 마노구슬, 유리구슬, 뼈비녀와 뼈구슬 등도 출토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세 고분군은 모두 제2 송화강 연안 나지막한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출토된 유물의 성격이나 장제(葬制) 등에서 유사한 면이 많다. 모두 토광묘와 석관, 또는 석광묘가 함께 있었는데 그 가운데 토광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 그리고 출토 유물의 종류나 도기의 기형도 비슷하다. 따라서 같은 6~7세기 속말말갈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  이 밖에 속말말갈 유적에서 발견되는 눈에 띄는 공통점은 군사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것이다. 양둔 대해맹을 비롯한 속말말갈 유적에서도 농기구류보다 무기류가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되었다. 예를 들어 도, 검, 비수, 창, 화살과 갑옷, 마구 등이 나와 이미 비교적 완벽하게 무기 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 공구는 도끼·자귀·낫 등이 있었지만 그 양이 무기류에 비해 적었고,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다.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세력 집단이었다는 것이 유물을 통해서도 입증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속말말갈은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면은 고고학적인 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속말말갈의 유적에서 출토된 손잡이가 달린 단지(雙耳罐)는 고구려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 고분군에 존재하는 석광묘와 함께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잘 보여 주는 유물인 것이다.  

백돌부(伯咄部)[편집]

백돌부는 속말부 북쪽에 있으며 정병(精兵)이 7천이라고 한다. 백돌말갈에 대해서는 명칭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백도눌 지방으로 보는 설이 가장 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유수도 백돌말갈의 거주지에 포함된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늘어났다. 특히 이곳에 있는 노하심 유적을 백돌말갈의 유적지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한 연구 성과도 나왔다.

그러나 이곳은 길림 지역과 권역이 확연하게 나뉘어지지 않는다. 노하심 유적이 있는 대파 지역은 유수 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대해맹 유적은 양둔 북쪽에 있어 두 유적 간의 거리가 멀지 않은 편이다. 제2 송화강 유역을 따라 세 유적이 모두 가까운 거리, 비슷한 지역에 위치하므로 강을 통한 세력 집단간의 교류도 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말갈의 부와 부 사이 거리가 먼 것은 3~4백 리이고 가까운 것은 2백 리라고 하므로, 유수와 양둔이 각각 다른 부 소속 유적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속말말갈의 정병이 수천 명이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길림 지역으로만 한정하면 그 범위가 너무 좁은 감이 있다. 따라서 노하심 유적은 백돌말갈 유적이 아닌 속말말갈 유적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이런 여러 가지 점들을 고려할 때, 부여(백도눌)와 납림하 유역 쌍성(雙城)을 포함한 주변 일대가 백돌말갈의 근거지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하지만 이 일대에서는 아직까지 말갈 관련 유적 보고는 현재까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안차골부(安車骨部)[편집]

안차골부는 백돌부의 동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 아십하(阿什河)를 만주어로 알추카(阿勒楚客, 만주어: ᠠᠯᠴᡠᡴ᠋ᠠ)라 했고, 금대 여진어로는 안춘(按出虎, 여진어: Antʃu-un)라고 했다.[9] 이는 안차골과 발음이 아주 흡사하다. 이런 점에서 안차골을 아십하 유역에 있던 말갈이라 보는 데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아십하 하류의 황가외자(黃家崴子), 황산(黃山) 남북산성자, 묵리가(墨里家)와 고태자(高台子) 등지에서 발견된 문물들이 곧 안차골부의 문화 유존이라고 보고 있다.

이 유적들은 러시아인 러리에즈니에커부가 1937~1947년에 조사했다. 그 가운데 황가외자는 흑룡강성 하얼빈시의 동쪽으로 10~11km 거리의 아십하 우안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군이다. 황가외자둔에서 서남쪽으로 1km 떨어져 있다.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도기는 몸체 장식과 가장자리 테두리로 보아 황산고성 유지와 고태자 흙구릉상에서 발견된 도기와 유사하다고 한다. 흑회색·흑갈색·회갈색·황갈색의 도관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모래가 섞여 있으며 물레를 사용하여 만들거나 물레에서 다듬은 것이었다. 도기들에는 구연부나 경부에 화문 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구운 것이다.   이외에 귀걸이와 철촉 등도 출토되었고 인골과 말, 돼지, 개, 그리고 쥐의 뼈들도 발견되었다. 이 중 말뼈가 가장 많았으며, 그 중에서도 대부분 턱뼈와 치아가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죽은 자를 묻을 적에는 관곽이 없었으며, 그가 타던 말을 잡아 제사한다."고 한 『신당서』의 구절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아마도 장례가 끝난 후 말을 순장하는 의례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발굴자는 이를 읍루족의 후예인 말갈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위치로 보아 안차골 말갈의 유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불녈부(拂涅部)[편집]

불녈부는 위치 비정상 차이가 많은 부의 하나인데, 그 중에서도 흥개호 일대로 보는 설과 목단강 유역의 영안 지역으로 보는 설이 가장 많다. 영안에서는 말갈로부터 발해 시기로 이어지는 고분군이 대규모 발견되었는데, 다른 말갈 고분과 성격 차가 현저해서 주목 대상이 되고 있다. 영안시 발해진(渤海鎭)의 서석강고분군(西石崗古墳群), 즉 홍준어장고분군(虹鱒魚場古墳群)이 그것이다.

서석강 유적은 1990년에 성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는데, 양어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더 많은 무덤이 발견되어 뒤에 조사 지역을 넓히게 되었다. 그리고 유적 이름도 홍준어장묘지(虹鱒魚場墓地)로 칭하게 되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다시 발굴을 진행하여 323기의 고분과 제단 7기 및 거주지 1기를 조사했다. 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2000여 건으로 최대 규모이다.

그러나 이 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발굴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유적 내의 고분과 제단의 조성 시기가 모두 동일 시기인지, 시기 차가 있는지 등 구체적인 면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필자로서는 접할 수 있는 정보 가운데 이 글과 관련된 부분만을 참고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도기의 일부는 양둔 대해맹 고분군의 도기보다 좀 더 이른 시기 것이라고 한다. 서석강 무덤과 홍준양어장의 일부에서 출토된 도기는 절대 다수가 진흙에 모래를 섞어서 손으로 빚어 만든 그릇이다. 그릇 표면 색깔은 누런 색깔, 붉은 색깔, 흑갈색 등 색깔이 고르지도 않은 편이다. 절대 다수 도기의 구연부에 거치상부가퇴문(鋸齒狀附加堆紋)으로 장식을 했으며, 말갈 도기의 전형적인 예인 심복관(深腹罐)과 장경고복관(長頸鼓腹罐)이 많다. 따라서 이 유적이 말갈 유적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고분군에서는 석광묘, 장방형의 석실 봉토분, 전실묘(磚室墓) 등만 확인되었으며 토광묘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말갈과 발해의 문화 발전 단계를 논할 때, 토광묘가 석광묘나 석실분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이라고 보는 일반론과 큰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이런 일반론과 달리 토광묘와 석광묘에는 일정한 지방 차별이 있을 뿐이라는 견해도 나오게 되었다.   이해에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안 지역은 중국에 사신을 보내 그 존재를 알리기도 했던 숙신(肅愼)의 고지로서 이곳에 '숙신고성(肅愼古城)'이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오랜 뒤에까지 전해졌다. 또 이곳의 정치 세력은 광개토왕대에 이미 고구려와 조공논사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고구려에 조공을 하고 내부의 일을 논의하는 관계였다. 이처럼 일찍부터 외부 세력과 교류를 경험해왔으므로 말갈 단계에 이르러서도 다른 말갈 지역과 달리 고구려 묘제를 거부감 없이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떤 세력의 범위를 보여 주는 표지적인 유적과 유물로 묘제와 토기를 들 수 있다. 다른 유적과 유물에 비해 보수성이 강하기 때문에 어떤 집단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묘제는 토기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보수성이 강하기 때문에 잘 변화되지 않는다고 본다. 하지만 달리 보면 묘제는 정치적인 영향에 따라 급변하는 경우도 있다. 신라 적석목곽분과 전축분이 백제 무령왕릉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영안 지역 묘제가 다른 말갈 지역의 그것과 현저히 다른 이유도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요컨대 서석강-홍준어장 유적에서도 역시 말갈관(靺鞨罐)으로 불리는 중순심복관(重脣深腹罐)을 비롯한 말갈도기들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 도기는 속말말갈인 양둔 대해맹 3기층에서 나온 도기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유적도 말갈 7부 가운데 한 부로 볼 수 있는데, 사료 A에 나오는 위치 설명으로 보아 이 유적은 불녈말갈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호실부(號室部)[편집]

호실부의 위치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나누어져 있다. 사료에는 "불녈의 동쪽에 있다."고만 되어 있어 다른 정보가 없다. 불녈부의 위치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기 때문에 자연 호실부의 위치도 정설이 없는 것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말갈 유적의 분포를 고려하여 추정해 보건대 이곳은 수분하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에 비정할 수 있다. 중국 학계에서 조사한 유적 중에서는 수분하 유역 동쪽 동녕전창(東寧磚厂) 유적 등이 호실말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호실은 옥저와 동음이라고 하면서 이 일대를 동옥저의 분포 지역이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하지만 옥저의 범위는 수분하 유역까지 미치지 않았다. 옥저는 남옥저, 북옥저 모두 4세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서 지방관을 파견해 직접 통치를 시행했던 지역이다. 4세기 중반경에 조성된 연변 지역의 고구려 장성도 그것을 입증한다. 춘화-책성-연길-용정-화룡을 잇는 선까지 조성된 고구려 동북장성은 읍루와 숙신 등 반농반수렵민의 침략으로부터 고구려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 따라서 옥저의 범위는 그 이하 선으로 보아야 한다.

연해주에 있는 말갈의 주거 유적과 고분 유적은 러시아에서 조사했다. 1980년대 이래 발굴 조사한 유적만 봐도 주거 유적으로 미하일로브까 유적, 아브라모브까 유적, 라꼬브까 유적 등이 있고, 매장 유적으로 까므이쇼브까 유적과 루자노브까 유적이 있다. 모두 5~8세기경에 조성된 말갈 유적으로 보고 있다.

이 가운데 관심을 끄는 유적이 미하일로브까 유적인데, 1984년에 극동대학 고고학연구소의 유.붸.크리불랴가 발견하여 1985년, 86년도와 1990년도에 조사를 했다. 모두 35기의 집자리가 확인되었고, 1990년도에 5기가 조사되었다. 철제 칼과 창, 교구와 도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 조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도끼날 철촉이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도끼날 철촉은 고구려의 특징적인 철촉으로 이후 발해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발해 시기의 유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보인다.  

흑수부(黑水部)[편집]

흑수말갈의 거주지는 흑룡강 주변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흑수말갈 유적은 대단히 많이 조사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러시아 원동(遠東) 지구인 흑룡강 중하류 지역에 있는 나이펠트(乃伊費尒德) 고분군, 수빈(綏繽) 동인유적(同仁遺蹟), 몽북(夢北) 단결묘장(団結墓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나이펠트 고분군은 1960년부터 1961년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토광수혈봉토묘가 모두 40기였다. 이 유적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측에서 조사한 대표적인 흑수말갈 관련 유적인 동인유적은 흑룡강성 수빈현에 있는데 1972년에 발굴했다. 이 문화는 두 개의 분기로 나뉘어진다. 동인 1기는 남북조에서 당초, 동인 2기는 오대에서 요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한다. 유물로는 도기, 칼, 낫, 자귀, 화살촉 등의 철기가 있다. 그러나 석기가 더 많고 철기는 보편적이지 않다. 거주지는 반지하식이다. 문은 동으로 향해 있고, 화덕은 중간부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 있었다.

몽북 단결묘장은 1982년 8월에 가목사시(佳木斯市) 문물관리참에서 조사를 진행했다. 무덤 가운데 3기를 시굴해서 도기와 철기 등 표본 20여 개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83년 가을에 흑룡강성 문물고고공작대에서 이 묘지를 정식 발굴했다. 10기의 무덤을 발굴, 조사했는데 모두 장방형 수혈토갱묘였다.

남아 있는 인골을 관찰한 결과 1인장도 있고, 2인장도 있으며, 1차장인 무덤과 2차장이 이루어진 무덤이 있었다. 또 반수 정도의 무덤에는 목탄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이는 화장으로 인한 결과물인 것으로 보고 있다. 확인된 무덤 가운데 반 정도에서는 묘실의 한 면 혹은 다리 부분에 있는 생토대 위에 대형 토기가 놓여 있었다. 이 유적에서는 도기, 철기 등 백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토기는 모두 손으로 빚어 만든 것으로 태토는 모래가 섞인 진흙이었으며, 황갈색 혹은 회갈색을 띠고 있었다.

이 유적의 문화 특징을 보여 주는 가장 대표적인 토기는 반구세경심복대관(盤口細頸深腹大罐)이다. 이는 1973년 흑룡강성 수빈 동인유지 하층에서 발굴, 출토된 것과 그 풍격이 거의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동인유적 하층과 몽북 단결묘장은 같은 고고 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전자는 취락 유적이고 후자는 고분 유적임을 알 수 있다. 유적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으로, 즉 남북조와 수·당 사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성격의 유적은 러시아 경내 흑룡강 중하류 연안에서 많이 발견된다.

흑수말갈로 소급되는 나이펠트 그룹은 7세기 말에는 제야–부레야 저지대에 출연했던 흔적이 발견된다.[19]  

백산부(白山部)[편집]

끝으로 백산말갈에 대해서는 백두산 주변과 연변 지역 일대로 보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최근 함경도 쪽으로 내려 보거나 연변 지역과 한반도 동북부 지역을 모두 포괄한 것으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정병이 수천, 또는 7천이라고 나오는 속말말갈, 백돌말갈과 달리 백산말갈은 3천이라고 나온다. 따라서 거주지가 다른 말갈 집단보다 넓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돈화와 백두산 일대 지역이 백산말갈의 중심지였고, 그 외 연길·용정·훈춘과 경성 주변 일대를 포함한 지역으로 한정될 것으로 본다.

구당서》에 "백산부는 본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평양이 수복된 후에 부중(部衆)이 많이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구절이 나오듯이, 백산말갈은 고구려 지배 아래 일찍부터 편입되었고 오랫동안 그 지배 아래 있었다. 따라서 백산말갈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고구려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발해 건국지가 돈화였던 것도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백산말갈의 거주지인 돈화·용정·화룡 등에서 발해 시기 백산말갈의 6기의 주거 유적인 영안(永安) 유적은 확인되었지만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고구려 시기에 조성된 말갈 고분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말갈 지역과 달리 백산부에서 고유 유적이 확인되지 않는 것은 원래 정병이 3천밖에 되지 않았는데, 전쟁에 자주 동원되었고 또 고구려 멸망 후 상당수가 중국으로 갔기 때문에 이곳에 무덤을 조성할 인원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20]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김현숙,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출판, 2005
  2. A. V.Grebenščikov,『Contuibution to the Problem of the History of the Amurland』
  3. 國史編纂委員會,『中國正史朝鮮傳 譯註一』(1987), 570쪽
  4. 김락기, 《5~7世紀 高句麗의 東北方 境域과 勿吉․靺鞨》 仁荷大學校 大學院 史學科 韓國史專攻, 2007
  5. 國史編纂委員會,『中國正史朝鮮傳 譯註一』(1987), 572쪽
  6. 魏國忠, 「關於勿吉族的幾介問題」, 『東北民族史硏究(二)』, 中州古籍出版社, 1994
  7. 張博泉(1998), 『東北古代民族·考古與彊域』, 吉林大學出版社.
  8. 정병준; 권은주; 이효형; 바이건싱; 윤영인; 김위현; 왕위랑.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31~32쪽. ISBN 9788961870566. 
  9. 갈자는 기사절(居謁切)로 음은 '訐', jie)이다.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주"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10. 趙展, 「滿族歷史與宗敎硏究」, 『對皇太極所謂諸申的辨正』
  11. 孫玉良・趙鳴岐(1998), 『中國東北史』 제2권, 吉林文史出版社.
  12. 정병준; 권은주; 이효형; 바이건싱; 윤영인; 김위현; 왕위랑.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31쪽. ISBN 9788961870566. 
  13. 鳥山喜一(1915), 『渤海史考』, 奉公叢書 第3篇, 船木勝馬 校訂·解題(1977), 原書房
  14. 範恩實, 「靺鞨族屬及渤海建國前的靺鞨與周邊關係」, 王小甫 主編, 『盛唐時代與東北亞政局』, 北京大學盛唐硏究叢書, 上海辭書出版社, 2003
  15. 정병준; 권은주; 이효형; 바이건싱; 윤영인; 김위현; 왕위랑.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31~34쪽. ISBN 9788961870566. 
  16. 李德山, 「六至九世紀東北邊疆民族與中央王朝關系史硏究」, 2006
  17. 정병준; 권은주; 이효형; 바이건싱; 윤영인; 김위현; 왕위랑.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34쪽. ISBN 9788961870566. 
  18. 정병준; 권은주; 이효형; 바이건싱; 윤영인; 김위현; 왕위랑.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50~56쪽. ISBN 9788961870566. 
  19. 홍형우, 《서(西) 아무르 지역 말갈(靺鞨) 토기의 특성과 그 전개 : -최근 발굴 유적을 중심으로》, 한국상고사학회
  20. 김현숙,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말갈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 방식』, 모시는사람들, 2005, 438~4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