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방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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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방부인
(竹房夫人)
지위
태후
재위 927~ ?
전임자 ?
후임자 낙랑공주
이름
?
별호 ?
신상정보
출생일 ?
출생지 ?
사망일 ?
사망지 ?
왕조 신라
가문 신라 왕조
부친 ?
모친 ?
배우자 신라 경순왕 김부
자녀 마의태자, 김황(김굉,범공)
종교 불교

죽방부인(竹房夫人. 생몰년 미상)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의 왕후(王后)이다.

생애[편집]

죽방부인(竹房夫人)은 신라 제56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의 왕후(王后)로, 성(姓)과 이름은 역사에 전하지 않는다.

고려사》에 931년(태조 14) 고려 태조가 서라벌(徐羅伐. 경주)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신라왕과 그의 태후(太后) 죽방부인(竹房夫人)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물품을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1] 당시 신라 왕실의 관례에 따르면 그녀는 신라 왕족 출신이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2][3]

삼국사기》·《동국여지승람》등에 그녀는 신라왕 김부와 사이에 두 왕자를 두었는데, 이들 왕자들은 부왕이 나라를 고려에 양국(讓國)하려하자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경순왕의 막내아들은 나라가 망하자 화엄종(華嚴宗)에 귀의하여 승이 되어 법수사·해인사에 드나들며 망국(亡國)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이들 왕자들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으며, 단지 왕자라 할 뿐, 「장자(長子)」니 「태자(太子)」니 하는 말은 없다. 《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는 첫째 왕자를 태자, 둘째 왕자를 김황(김굉,범공)이라 한다.

가족관계[편집]

  • 시아버지 : 추존 신흥왕 김효종(金孝宗)
  • 시어머니 : 추존 계아태후(桂娥太后) - 헌강왕
    • 남편 : 신라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
      • 장자 : 역사에 실명(失名), 후대에 마의태자(麻衣太子)
      • 차자 : 역사에 실명(失名), 문헌에 김황(김굉,범공), 승명 범공(梵空)

첫째 왕자[편집]

사기(史記)에 첫째 왕자는 935년 10월 부왕 경순왕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 하려하자 불가함을 간(諫)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통곡을 하면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초식(草食)하다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으며, 후대에 마의(麻衣)를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른다.

둘째 왕자[편집]

둘째 왕자도 부왕 경순왕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형과 함께 극력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으매,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 태자와 함께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후 화엄종(華嚴宗)에 귀의하여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드나들며 도(道)를 닦으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으나, 문헌에 김황(김굉)이라 한다. 이들 후손들은 나주 김씨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삼국유사에 신라 경순왕의 막내아들 계자(季子)는 나라가 망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법수(法水)·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가 죽었다고 하였다.
  • 《동국여지승람》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또 다른 왕자(王子)가 있었는데, 그도 왕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매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 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 증보문헌비고》에 "경순왕이 고려(高麗)에 항복할 때에, 왕자가 힘써 간(諫)하여도 따르지 아니하니 왕자가 슬피 울며 왕에게 하직하고, 곧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몸을 마쳤다고 하는데, 사기(史記)에는 그 이름이 누락되었으니, 어찌 범공(梵空)이 아니겠습니까?"라며 개골산에 들어간 왕자(王子)와 범공이 동일인이라 한다.
  • 《해인사지》에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막내아들 김황(김굉,범공) 왕자가 승이 되어 한때 법수사(法水寺)에 들어와 생활하다 이곳 해인사(海印寺)에도 드나들면서 도(道)를 닦으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다고 한다.[4]

왕자 평가[편집]

신라가 망할 때 다른 귀족들은 너나없이 고려 왕건이 주는 벼슬과 녹봉을 받고 여전히 호사를 누렸는데, 이들 왕자들은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킨 인물들로 꼽힌다.

  • 오운(吳澐)은 《동사찬요(東史纂要)》에 왕자(王子)가 신라고려에 양국 하는 것에 반대하며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간 것에 대해 "왕자의 의열(義烈)은 중국 촉한 멸망시 북지왕(北地王) 유심(劉諶)과 더불어 일월(日月)의 빛을 다툴 만한데, 이름이 전하지 않으니, 동방(東邦) 문헌에 매몰(埋沒)된 것이 애석(哀惜)하다"고 하였다.
  •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에 "이들 왕자가 없었더라면 천년 군자의 나라가 마침내 남의 비웃음이 되었을 것이니, 그 간책(簡策)을 빛나게 한 것이, 어찌 한때 남면(南面)하여 임금 노릇한 영광과 비교되겠는가?" 라 하였다.

경순왕 아들 등장[편집]

보계 위조[편집]

고려·조선 왕조 대에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군역·부역 면제 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졌는데,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경순왕 후손으로서 특전을 누린 이들이 있었다. 이런 현상은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더욱 심해진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각 씨족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 족보를 발간하면서 자신들의 조상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근거 없이 시호나 군호를 붙여놓기도 하고 상계를 경순왕대까지 끌어 올리는 등 족보의 위·변조가 극에 달한다.

《김은열 묘지명》[편집]

1784년(정조 8)에 개성 어느 산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석」을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기사한 《김은열 묘지명》에 경순왕고려에 항복 후 8자를 더 두었는데, 이들의 이름이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이라 한다. 특히 2자 '굉'(鍠)과 4자 '은열'(殷說)을 국구(國舅. 고려 경종의 장인)의 아들로, 고려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하사해 주었다고 한다.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편집]

1785년 경주 김씨 김사목(金思穆)이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을 추기(追記)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4자 은열(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 작호(作號)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8자들은 『일(鎰)·황(湟)·명종(鳴鍾)·은열(殷說)·중석(重錫)·건(鍵)·선(鐥)·종(鐘)』이라 한다.[5][6]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경순왕 8자들의 이름 및 서차가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경순왕의 첫째 왕자인 태자의 이름을 '김일'(金鎰)이라 하고, 막내아들인 계자(季子)의 이름을 '김굉'(金鍠)이라 하더니, 또 '김황'(金湟)으로 개명하였다. 또 세째 왕자 김명종(金鳴鍾)을 두었다고 한다.

묘지명 진위 여부[편집]

《김은열 묘지명》의 형태는 배위(配位) 및 생애 등이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묘지명》에 나오는 아들들의 이름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이후 사서(史書)· 문헌(文獻) 및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후 고려 태조의 딸들을 맞아들여 낳았다는 8자들이 기록되어 있는 《김은열 묘지명》에 대해서는 나라의 역사 기록들과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의문을 갖게 된다.

《신라경순왕전비》[편집]

1814년(순조 14)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에 신라 경순왕은 그녀와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태자(太子)·차자(次子)·영분공자(永芬公子)이고, 딸은 고려 경종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또 후비 왕씨와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다고 한다.[7][8][9]

그러나 고려 경종에 출가한 헌숙왕후 김씨의 생졸에 대해서는 밝혀진바 없으며, 부군 고려 경종고려 태조 왕건의 손자로 955년 태어나 975년에 왕위 올랐는바, 배우자인 그녀도 955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할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어머니는 시대상으로 죽방부인 보다는 후비 낙랑공주 왕씨라 함이 타당하다 하겠다. 이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상고할 수 없다.[10]

최근 족보[편집]

또 최근 신라계 어느 김씨 문중에서는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자신들을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이라 하며, 그들의 족보에다 마의태자를 시조로 표기해 놓고 이름이 '김일'(金鎰)이라 한다. 그리고 '김일'(金鎰)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기(史記)에 신라가 망할 때 마의태자가 몇 살이었고, 부인과 자식이 누구인가 등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만약 그때 처자(妻子)를 죽이지 않았다면 부인과 어린 자식이 있었을 것이고,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가 망국의 한을 품고 고려를 등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 자식들은 자라서 후손을 두었을 것이고 그 후손들은 본관 제도가 등장하기 시작한 고려 중기 이후에 어느 김씨 성을 가진 시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내력의 기록은 그들 족보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11]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고려사(권2 태조14년) : 고려 태조가 신라왕과 그의 태후(太后) 죽방 부인(竹房 夫人)을 비롯하여 상국(相國) 유렴(裕廉), 잡간(匝干) 예문(禮文), 파진찬(波珍粲)인 책궁(策宮)과 윤유(尹儒) 그리고 한찬(韓粲) 책직(策直), 흔직(昕直), 의경(義卿), 양여(讓餘), 관봉(寬封), 함의(含宜), 희길(熙吉) 등에게 물품을 나누어 주었다.
  2. 일설에 죽산 박씨(竹山 朴氏) 예부시랑(禮部侍郞) 박광우(朴光佑)의 딸, 또는 신덕왕(神德王) 박경휘(朴景暉)의 딸이라 하나 이에 대한 출처가 없어 명확하지 않다.
  3. 출처 : 북한의 국보로 알려진 <고려성원록> [일명 <개성왕씨족보>]
  4. 매일신문(2008년 3월 3일) [相生의 땅 가야산] (34)-나라 잃은 왕족들의 원한[1]
  5. 월간조선 2015년 2월호 504페이지
  6. 인제문화원 '마의태자 유적지비'[[2]]
  7.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
  8.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9. 경주김씨세보(慶州金氏世譜)
  10.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헌숙왕후〉항목[[3]]
  11. 김정현(金丁鉉. 역사저술가):《신라삼성연원보》를 통해 보는 가짜 족보의 실상[[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