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화랑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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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연도[편집]

김대문 페이지에는 화랑세기가 1980년에 발견되었다고 나와있는데 어느 년도가 진짜인가요? --PuzzletChung

제가 가진 화랑세기 번역본의 해제에는 초략본이 1989년에, 모본이 1995년에 발견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용자:서상현

"1980년대"가 되어야 하는데. 오타인 모양입니다. -- Caffelice 2004년 9월 27일 (月) 22:32 (UTC)

POV, 출처[편집]

제가 보기에는 저 두 틀이 처음 달릴 때에 비해 출처도 상당부분 보강이 된듯하고, POV문제도 별 문제 없어보이는데, 다른 분들이 보시기엔 어떤지 궁금합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여기서 토론을 하면 좋을듯 합니다.--Scott Rhee (토론) 2009년 11월 9일 (월) 16:51 (KST)[답변]

2개월간의 시간이 흘렀고, 특별한 의견이 제시되지 않은 바, POV를 제거하였고, 출처 틀도 삭제하였습니다. 단, 위서론과 관련된 부분은 여전히 출처가 미흡하므로 해당 문단에 출처 요구 문단 틀을 붙였습니다. --Scott Rhee (토론) 2010년 1월 6일 (수) 16:43 (KST)[답변]

위서론에 대한 개인적 의견[편집]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공기라는 것은 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공기를 만질 수 없으므로 공기라는 것은 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서임을 증명하는 수백가지 증거들이 있는 것입니다.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증거인 것입니다.

수백년 후에 지어진 삼국유사, 삼국사기와의 비교를 거부합니다. 이들과 화랑세기와 서로 다른 기술이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 이들의 오류입니다.

화랑세기를 진본으로 인정하지 않는 역사가들은 자신의 완고함과 우물안 개구리식의 사고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중화사상에 젖어 스스로 교만함에 빠져, 서양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임에 있어 일본보다 수백년이나 늦었던 것입니다.

지식의 완고함과 교만함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Kimdm7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위키백과 문서의 토론란은 일반 게시판의 토론란과는 달리, 문서 작성을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jtm71 (토론) 2010년 9월 8일 (수) 07:26 (KST)[답변]

박창화의 화랑세기에 대한 언급[편집]

이 문서에는 박창화 자신조차 화랑세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제가 알고 있는 사실과 배치되는군요. 박창화는 많은 필사본을 남겼는데 그 중 화랑세기가 중요하단 말을 후손들에게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고구려인 (토론) 2011년 6월 10일 (금) 15:20 (KST)[답변]

@고구려인: 그와 관련한 출처를 병기하여 해당 단락에 서술해 주신다면 더 비판적인 문서가 완성될 수 있겠네요. --Realist (토론) 2015년 4월 25일 (토) 20:20 (KST)[답변]

외부 링크 수정됨 (2018년 11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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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InternetArchiveBot (버그를 제보하기) 2018년 11월 19일 (월) 23:55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