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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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뒷방 서재에서.

정인보(鄭寅普, 1893년 6월 19일 ~ 1950년 9월 7일 전후)는 일제령 조선대한민국의 한학자·역사학자·언론인·정치인·작가이다.[1]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 무임소 장관실 초대 감찰위원장이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본관은 동래, 자는 경업(經業), 호는 위당(爲堂), 담원(薝園), 미소산인(薇蘇山人)이다.

생애[편집]

나서부터 중국 유학까지[편집]

1893년 음력 5월 초엿새 서울 북단재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정은조(鄭誾朝), 모친은 참판을 지낸 성건호의 딸 달성 서씨(達城 徐氏)였다.[2] 11세 때인 1904년 서울을 떠나 양근, 진천 등지를 전전하였다. 2년여 후 서울로 돌아와 13세 나이에 창령 성씨 댁 동갑내기 규숙과 결혼하였다. 규숙은 1913년 9월 6일 쌍둥이 딸을 낳고 9일만에 사망했다. 후둥이 역시 그를 따라 사망하였다.[3]

조부로부터 훈도를 많이 받았으며 집안 어른 중 정인표의 가르침이 컸다. 소년 정인보에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 중에는 양명학 강화학파의 경재 이건승과 난곡 이건방이 있다.[4]

1908년 16세 때 이민웅을 따라 상해로 가서 2년여 체류하였다. 이때를 시작으로 전후 다섯 차례 중국을 다녀왔으며 정확히는 1910년 18세에 상해에 다녀오고 1911년 벽초 홍명희와 생모 서씨와 동행, 1912년 겨울에 생모를 모시고 안동현을 다녀왔고 1913년에 다시 만주를 거쳐 상해로 갔다. 이때 6-7개월간 머무르다 부인 서씨의 부고를 듣고 귀국하여 이후로 계속 조선에 머물렀다.[5]

1912년 상하이에서 동제사 설립에 참여하였다.[6] 정인보가 중국에 머물던 시절 중국에서 배울만한 학자로 장병린을 꼽은 바 있다.[7]

귀국하여[편집]

중국에서 돌아온 정인보는 상복으로 또한 망국민의 표로서 검은 양복과 검은 모자 차림으로 일관하였으며 이 때문에 경찰에 불려다녔다. 귀국으로부터 6개월 무렵인 11월 24일 18세 조경희와 재혼하였다. 셋째딸 정양완의 증언에 따르면 어린 딸을 위한 부모님의 뜻이었다고 한다.[8] 1914년 솔가하여 충청도 진천으로 내려갔다. 서울 생활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생활비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후 4년여간 진천에서 살다가 1919년 충남 목천으로 솔가하여 이사하였다. 이 역시 생활방편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9]

1922년 4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다. 어떤 경로로 하여 초야의 촌부가 교수로 발탁되었는지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10] 당시 정인보의 나이는 고작 30세였으며 학교로서는 파격적 인사였다. 정인보는 한문과 조선문학을 강의하였고 각 학년의 담임도 여러차례 역임하였다.[11] 연희에서의 명강의로 유명세를 타 이화여자전문학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초빙되어 국학과 동양사를 강의하였다.[12]

1924년 《시대일보》에 이어 《동아일보》 논설위원에 위촉되었다. 정인보의 글은 매섭고 거침없기로 정평이 났으며 30대 초중반에는 한국의 대표급 문사로 알려졌다. 사회적으로 비중있는 일이 있으면 집필의뢰가 들어왔다.[13] 40대 중년기에 들어 정인보는 국학(본국학(계몽기)-조선학(일제하)-한국학(해방후))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연구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국학인물론〉에서 송강 정철과 다산 정약용, 단재 신채호에 관한 값있는 논저를 남겼으며 특히 〈다산 선생의 생애와 업적〉은 질량에 있어 괄목할만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필생의 역작 《양명학연론》 역시 이 시기의 노작이다.[14] 또한 적잖게 역사 관련 저술을 했으며 대표적인 것이 《조선사연구》이다.[15] 정인보는 시조작가라는 호칭에 걸맞게 많은 시조를 지어 남겼다. 정인보가 처음으로 발표한 시조는 1926년 12월 《계명》에 게재된 〈가신 어머님〉이다. 이후로 수백편의 시조를 지었으며 해방 후 1948년 12월 을유문화사에서 《담원시조집》을 간행, 총 292수가 수록되었다.[16] 정인보의 시조는 해방 후 한때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으며 특히 〈매화사 삼첩〉은 4회에 걸쳐 《고1 국어》의 교재로 쓰였다.[17] 정인보는 기행문 작가로서도 훌륭한 작품을 몇 편 남겼다. 대표적으로 금강산 지역을 여행한 《관동해산록》과 남도지방의 기행문 《남유기신》이 있다.[18]

독야청청[편집]

1937년 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하고 조선역사도 가르치지 못하게 하여 정인보는 홀연히 연희전문대학을 퇴임하였다.[19] 많은 벗들이 훼절하는 가운데 정인보는 외로움 속에서 1940년 가을 솔가하여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 733번지로 이사하였다.[20] 정인보는 창동의 누옥에서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시골의 한적한 마을에서 정인보는 외출을 삼가고 책을 읽고 글을 썼으며 특히 이 시기에 많은 시조를 지었다. 1945년 경기도 양주에서 다시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 윤석오의 집으로 옮겨갔다.[21]

광복 후[편집]

1946년 3월 순국3의사 유해봉환일 김구, 계초 방응모 등과 함께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선국선열추념문〉을 발표, 순국지사와 생존지사를 추념하였다.[22] 이어 임시정부요인들을 환영하는 〈본영사〉를 지었다.[23] 1946년 11월 국학전문학교에 초빙되어 열성을 다하여 경영과 강의에 임하였다.[24]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8월 28일 감찰위원장(현 감사원장)에 임명되었다. 이시영 부통령의 천거였다고 한다. 정인보는 어수선한 관기와 공직자의 청렴을 위한 감독을 게을리 하지 않고 1949년 2월 2일 임영신 상공부 장관의 비행을 국무회의에서 보고하였다. 임영신은 이승만의 총애를 받는 측근 중의 측근이었기에 이승만 정부와 길항관계가 되었다. 감찰위원장으로서 소임을 다하기 힘든 상황이 오자 정인보는 1949년 7월 23일 감찰위원장직을 사임하였다.[25] 감찰위원장을 내던진 이후 정인보는 초야에서 글을 쓰고 각종 비문을 지으며 유유자적히 생활하였다.[26]

광복 후 정인보가 지은 노랫말에는 〈3·1절 노래〉, 〈광복절 노래〉, 〈제헌절가〉, 〈개천절가〉의 4대 국경절 가사가 있으며 그 밖에 〈국학대학가〉, 〈고려대학교가〉, 〈동국대학교가〉, 〈덕성여자중학교가〉, 〈성신여자중학교가〉, 〈국립도서관제〉, 〈대한부인회가〉, 〈학도특별훈련소가〉, 〈공무원의 노래〉 등을 작사하였다.[27]

한국전쟁에 휘말리다[편집]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난 그해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하여 납북된 이후 사망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한동안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정권에 의해 '반동'으로 분류되어 국군 북진중 적유령 산맥에서 10월 23일에서 25일 사이 방치되었다가 그 후 병원으로 후송되어 결국 그해 11월 사망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북한에서는 공식 사망일은 9월 7일로, 북행 직후 황해도에서 폭격을 받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납북자들 죽음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기 위함이다.

그의 납북과 죽음에는 당시 북한 부수상이었던 홍명희의 차남으로 간첩으로 남파되었던 둘째사위인 홍기무(洪起武)가[28] 상당히 관련되었다는 것이 넷째 아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이다.[29][30]

홍명희는 월북할 때 둘째 아들 홍기무를 데리고 갔는데 그는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선생의 둘째 사위였습니다. 다음 위당 선생의 자제분인 정양모(鄭良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

“아버님과 벽초 선생이 절친해 벽초의 둘째 아들 홍기무와 둘째 누이의 혼사가 이루어졌다. 벽초가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가며 둘째 아들을 데리고 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둘째 매형(홍기무)이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 붙잡혔다. 당시 아버님은 감찰위원장이었다. 6·25가 나자 형무소를 탈출, 서울이 점령당하자 큰 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장인에게 큰 절을 하더니 ‘장인께서도 저와 같이 혁명 사업을 하시지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너는 유물론자고 나는 유심론자인데 어떻게 같이 혁명 사업을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다시 큰 절을 하더니 ‘장인이 절개를 지키는 건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민정부에 협력 안하시면 반동입니다’라고 하고 갔다. 그 며칠 후 보안서원 몇 명이 와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29][30]

6.25 당시 사돈 홍명희는 남침 주범 김일성의 장인이었고,[31] 사위 홍기무는 김일성의 처남이었다. 홍명희는 당시 북한 부수상이자, 전쟁의 최고 지도부였던 7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김일성의 남침 준비와 수행에 적극 협력하는 등 6.25 주요 전범 중 한명이었다.

사후[편집]

1983년 연세대학교출판부에서 유고 등을 모아 《담원 정인보 전집》 전6권을 묶어냈다.[32]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001년 연세대학교는 민족사관 정립과 국학 진흥에 헌신한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2인문관을 위당관(위당 정인보 선생 기념관)으로 지정하였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교육,학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33]

2005년 태학사에서 정인보의 딸 정양완의 번역과 주석으로 《담원문록》 상·중·하 3권이 발행되었다.[32]

사상[편집]

정인보의 가문이 조선후기 소론 학자 관료계로 분류되는바 또한 생모가 달성 서씨로서 소론 명문가의 훈손이었던바 그의 학문적 배경은 조선후기 소론계의 학풍이었다. 소론계 지식인들은 역사학을 중시함과 아울러 부국강병·군신지의 등을 강조하여 왔으므로 정인보가 한학자로서 근대기 조선학 연구를 선구했던 것은 이러한 소론학풍의 전통의 영향이었다고 생각된다.[34]

정인보의 학문·사상에서 가장 근간되는 것은 양명학이다. 정인보 스스로가 가장 큰 스승으로 여겼던 사람이 곧 이건방이었다. 1910년 곧 나라가 망하던 해 정인보는 이건방을 찾아가 사제지간을 맺었다고 한다. 이건방은 강화양명학 학자로서 당시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당학의 맥을 잇던 사람이었으며 이건방은 정인보에 대하여 자신을 유일하게 알아주는 이라는 한시까지 써 그를 총애하였다.[35]

망국을 맞은 정인보는 민족의 주체적 정신을 되살리는 것을 1차 과제로서 생각하였다. 그가 생각기에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남을 좇기만 하였던 것이 반성할 우리나라의 역사이자 망국을 맞은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는 바깥(남)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실심을 회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 실심을 찾기 위하여 정인보는 옛것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옛것을 돌아보아 우리의 병폐의 뿌리와 민족의 보배를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렇게 우리 것에서부터 나라 재생의 원동력을 찾음으로써 민족적 자부심·주체성을 되찾고자 하였다.[36]

정인보는 한문과 국문(한글)을 아울러 썼으며 동시대의 다른 문인과 비교되게 양문자를 상하관계에 있다거나 종속적 관계에 있다거나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한문과 국문이 대등한 가치가 있으며 상황·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보았다.[37]

평가[편집]

문장에 대해[편집]

황원구는 정인보의 문장을 평하되 "전형적인 선비다운 독특한 필체로 많은 문고를 집필했다. 더러는 벽자를 골라서 쓰기도 했고, 까다로운 문체를 구사하기도 했지만, 문자은 대체로 전통적인 팔가문의 세계를 터득한 것이었다. 아울러 한국의 옛 말을 골라서 유창한 글과 아름다운 시조를 짓는 데도 일품이었고, 한시의 경지도 탈속하면서 현실적인 경세의 호소력이 있었다."고 했다.[13] 다만 정인보의 글은 어렵다는 평을 받았으며 국문학자 천태산인 김태준은 "정인보의 글이 어려워 필자와 신문사 교정자와 총독부 검열자 세 사람만이 읽을 것"이라 혹평했다. 김태준은 또한 "문헌학적 공헌은 크다"고 인정하면서도 "논리의 비약은 그 공헌보다 더 크다."고 했다.[38] 백낙준은 《담원시조집》의 〈서언〉에서 "위당은 시조 작가로 자처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한 그러한 일컬음을 받기도 원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위당은 시조를 짓고 또한 훌륭히 짓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했다.[16]

가족[편집]

  • 증조부 : 정원용(鄭元容, 1783~1873)
    • 조부 : 정기년(鄭基年, 1816~1865)[39]
      • 아버지(생부) : 정은조(鄭誾朝, 1856∼1926)[40] - 정인보는 생부 정은조의 슬하 2남 3녀 중 장남.
      • 어머니(생모) : 대구 서씨(大丘 徐氏) 부인 : 진사(進士) 서상진(徐相眞)의 딸[40]
      • 양부(본래 백부) : 정묵조(鄭黙朝, 1847 ~ 1866)[41] - 정인보 생부 정은조의 친형. 정묵조는 정기년의 장남.
      • 양모(본래 큰어머니) : 경주 이씨[41] 부인
        • 부인 : 성계숙(成癸淑) : 사별 초배
          • 장녀 : 정정완(鄭貞婉, 1913~2007) :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針線匠)[42]
        • 부인 : 조경희 (趙慶姬, 1897 ~ 1979.10.13) : 재혼 계배
          • 차녀 : 정경완(鄭庚婉, 1920~ )[43] :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무와 결혼하여 월북.[44][45]
          • 장남 : 정연모(鄭淵謨, 1923~ ) : 교사 역임
          • 차남 : 정상모(鄭尙謨, 1926~ ) : 서울 서부경찰서장역임
          • 삼녀 : 정양완(鄭良婉, 1929~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역임[46] 후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남편은 강신항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 삼남 : 정흥모(鄭興謨, 1931~?) : 한국 전쟁시 제 5사단 일원으로 철원지구에서 전사
          • 사남 : 정양모(鄭良謨, 1934~ ) :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
          • 사녀 : 정평완(鄭平婉, 1935~ ) : 교사 역임, 남편은 문국진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단행본[편집]

속간이나 번역물은 따로 기입하지 아니한다.

  • 《조선사연구》(1946년, 서울신문사, 상·하, 《동아일보》에서 연재한 《五千年間 朝鮮의 얼》을 묶음)
  • 《담원시조집》(1948년, 을유문화사)
  • 《薝園國學散藁》(1955년, 文敎社)
  • 《薝園文錄》(1967년, 연세대학교 출판부)
  • 《薝園 鄭寅普全集》(1983년, 연세대학교 출판부, 1-4권은 한글로 쓴 글과 한시 수편, 5·6권은 한문으로 쓴 글)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한국력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2.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16쪽. 
  3.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18-19쪽. 
  4.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20-23쪽. 
  5.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28쪽. 
  6.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39쪽. 
  7.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43쪽. 
  8.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61쪽. 
  9.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63-64쪽. 
  10.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67쪽. 
  11.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68쪽. 
  12.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77쪽. 
  13.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72-74쪽. 
  14.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112쪽. 
  15.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173쪽. 
  16.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193-194쪽. 
  17.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206쪽. 
  18.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259쪽. 
  19.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287쪽. 
  20.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291쪽. 
  21.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294-297쪽. 
  22.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320쪽. 
  23.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326쪽. 
  24.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341쪽. 
  25.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352-356쪽. 
  26.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379쪽. 
  27.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8쪽. 
  28. 홍기무(洪起武) 등 기소 자유신문 1949년 12월 25일
    괴뢰(傀儡) 앞잡이 홍명희(洪命熹) 아들 등(等) 송청(送廳) 1949.12.25 경향신문 2면 : 이북 괴뢰집단 부수상 홍명희(洪命熹)의 둘째아들 대의사 홍기무(洪起武)와 번일병(憣一炳)외 3명
    민국(民國)의 기밀(機密)을 노리는 제오열(第五列)에 주의(注意)하자 1950.02.16 경향신문 2면
  29. D-story 44 : 조선의 3대 천재와 동아일보-홍명희 편(3) 2010.08.09 동네(동아미디어그룹 블로그) : 차남 홍기무(洪起武)는 위당 정인보의 사위인데,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6.25 때 장인 위당을 납북했다.
    D-storyⅡ 100 : 납북된 동아일보 인사들 동네(동아미디어그룹 블로그) 6월 - 19 - 2013
  30. 4남 정양모(鄭良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부친 납북 당시 일에 대한 증언 (동영상)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 게시일: 2013. 12. 11.
  31.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Archived 2017년 3월 18일 - 웨이백 머신 연합신문(聯合新聞) 1950.01.25
    김일성(金日成)이 재혼(再婚), 홍명희(洪命熹) 맏딸 영숙(永淑)과 자유신문 1950년 1월25일 2면 10단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Archived 2018년 3월 16일 - 웨이백 머신 한성일보(漢城日報) 1950.01.25
    깨여지는 괴뢰(傀儡)의 백일몽(白日夢) 치열화(熾烈化)한 반소반공운동(反蘇反共運動) 1950.01.25. 경향신문 2면
    김일성(金日成) 전속 간호부 조옥희(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3월 1일
  32.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9쪽. 
  33.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동아일보 2008년 8월 22일자
  34. 여희정 (2019년 9월 30일). “鄭寅普의 글쓰기와 民族文化의 기획”.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13-15. 
  35. 여희정 (2019년 9월 30일). “鄭寅普의 글쓰기와 民族文化의 기획”.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17. 
  36. 여희정 (2019년 9월 30일). “鄭寅普의 글쓰기와 民族文化의 기획”.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359-360. 
  37. 여희정 (2019년 9월 30일). “鄭寅普의 글쓰기와 民族文化의 기획”.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360-361. 
  38. 김삼웅. 《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221-222쪽. 
  39. 정기년(鄭基年, 1816~1865) 진사 방목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40. 정은조(鄭誾朝, 1856∼1926) 문과방목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41. 정묵조(鄭黙朝, 1847 ~ ?) 진사 방목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42. 정정완(鄭貞婉, 1913~2007)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43. 김일성-홍명희家에 얽힌 인연 조선닷컴 2004.02.10
    김일성, 벽초 홍명희에 특별예우 / 중책 주고 세간살이 보내줘 며느리, 北 통일신보에 소개 벽초, 本紙에 ‘임꺽정’ 연재 조선일보 2004.02.11 A26면
  44. 북한 부수상을 지낸 홍명희와 정인보는 사돈간이다.
  45. 신준영 (2002년 7월 1일). "누워서도 남쪽하늘만 보십니다" - 평양시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 민족21. 2014년 4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5월 15일에 확인함. 
  46. 인터뷰 "생전에「보상없는 애국」강조"— 위당(爲堂)의 셋째딸 정문연(精文研) 정량완(鄭良婉) 교수 1993.06.23 동아일보 9면

참고 자료[편집]


전임
(초대)
무임소 장관실 감찰위원회 초대 위원장
1948년 8월 28일 ~ 1949년 7월 21일
후임
노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