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조명하

조명하(趙明河, 1905년 5월 11일 ~ 1928년 10월 10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황해도 황주군 군서기관 직책을 지낸 조성기(趙成基)는 조명하 그의 숙부이다.

생애[편집]

1905년 황해도 송화군에서 조용우의 차남으로 태어나, 풍천마을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심신을 단련하며 성장했다.

1926년 신천군청의 신천읍 읍서기(행정공무원)으로 잠시 근무하였으며, 학문을 익히려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 하던 중 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타이완을 거쳐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황해도 출신의 독립 운동가들인 안중근, 김구, 노백린과, 송학선금호문 사건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1926년 9월 일본오사카로 건너가 야간학교를 다니며 고학을 했다. 그해 말에는 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도 일어났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기로 마음먹고 1927년 11월 중간 기착지로 타이완에 들렀다. 타이완 타이중의 상점에서 일하다가 히로히토 천황의 장인인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王)가 검열사로 타이완에 온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척살하기로 결심했다.

1928년 5월 14일 조명하는 타이완을 방문 중이던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왕에게 독을 묻힌 단검을 집어던져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쳤고 운전사의 등에 맞았다(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야마나시 한조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사임되었고, 구니히코 왕은 이듬해 1월 단검의 독이 온몸에 퍼져 사망하였다). 조명하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7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은 뒤 24세의 나이로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사형(총살형)이 집행되면서 순국하였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조명하는 "나는 그저 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내 남은 독립운동을 저 세상에 가서라도 계속하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거사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타이중시청 앞 사거리에 설치되었으며, 그의 동상도 타이중에 설치되었다. 일본과 정서적으로 친한 대만에서 일본천황 장인을 척살한 그를 기념하는건 유례없는 일이다. 만22세에 조국에 외동아들을 남겨놓고 편안한 공무원의 삶도 마다하고 떠난 조국에 그는 다시 돌아올수 없었다. 최연소 당시 단독 거사 성공을 한 그는 임시정부 외교부장이자, 임시정부 최고의 브레인인 조소앙 선생과 같은 함안 조씨이고 조소앙선생이 그의 아저씨벌이다. 함안 조씨 조소앙선생의 집안은 한국에서 두번째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애국지사의 집안으로 유명하다.

학력[편집]

사후[편집]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았다. 1978년 대만 타이베이 시 한인학교(대만한교)에 동상을 건립하였고, 1988년 5월 14일 의거 60주년 기념으로 서울대공원에 동상을 건립되었다.

함께 보기[편집]

  • 대만한교 - 학교 옆에 그의 동상이 위치하고 있음

참고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