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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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太王)은 신왕(神王), 성상(聖上) 등과 함께 고구려의 군주를 일컫는 칭호이다. 신라에서도 이 칭호를 사용한 흔적이 있다.

고구려에서의 태왕[편집]

고구려인들은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였다. 고구려가 위와 같은 천하관을 가졌다는 근거는 각종 유적유물, 금석문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 모두루 묘지명 등에서는 제1대 동명성왕이 황천, 즉 하늘의 아들이자 일월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1].

고구려에서 사용된 태왕, 신왕, 성상 등의 칭호는 모두 ‘왕 중의 왕’이란 뜻으로 중원문명권의 황제, 유목문명권의 가한, 선우 등과 함께 고구려 문명권의 최고지배자를 뜻한다. 고려시대의 해동천자 세계관은 이미 고구려시대부터 있어왔다고 볼 수 있으며 고구려 문명권의 신라가 고구려와의 종속적 관계에서 벗어나 연호를 사용한 법흥왕대에 태왕 칭호를 사용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 태왕이란 칭호가 쓰인 시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문자명왕 때가 분명하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태왕이란 칭호가 처음 등장하는 때는 모두루 묘지명에 나온 고구려의 16대 군주인 고국원왕 때 부터이다.[2] 19대 군주인 광개토왕은 즉위할 때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에서는 군주를 태왕이라 칭하였다.

보통 이 태왕이라는 명칭을 대왕(大王)의 경우처럼 선대왕들에 대한 미칭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 광개토왕비에 의하면 청나라의 옹정제처럼 동아시아에서 생존 시의 황제나 국왕들이 자신들의 재위 당시의 연호를 따라 스스로를 일컬은 것처럼 광개토왕은 생존 시에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고 불렸으며 충주 고구려비에서는 장수왕을 일관되게 태왕으로만 칭하고 있으므로 이 태왕이라는 칭호가 단순한 미칭이 아니라 실제 제호(帝號-황제나 왕이 스스로를 일컫는 칭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광개토왕비에서는 광개토왕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태왕보다는 왕, 대왕 등이 더 많이 혼용되고 있고 5세기 중원 고구려비에서 장수왕을 일관되게 태왕으로만 호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고구려에서 태왕이라는 칭호가 실질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5세기 장수왕 이후로 보인다.

그리고 광개토왕비에서는 고구려 초기의 왕들이 태왕이라는 제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고구려에서 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를 3대 대주류왕(대무신왕) 이후 어느 시기라고 보고 있다. 보통 6대 태조왕(태조대왕) 이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미천왕(일명 호양왕) 시절 부터 호칭했을 것이라 추측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6세기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신라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재위 당시 세워진 북한산 순수비에서 고구려를 따라 스스로를 태왕, 신라 대왕이라 일컬었으며 마운령비에서는 짐이라고 칭했다.

이는 고구려의 태왕이 단순한 미칭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실제 고구려에서 제호로 사용되고 있던 태왕이라는 칭호를 신라의 진흥왕이 그대로 칭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에 문자명왕은 명치호왕, 안원왕은 안강상호왕, 안장왕은 양강상호왕, 평원왕은 평강상호왕으로도 일컫는다는 기록을 볼때 역시 태왕을 칭했음을 알 수 있다. ‘태왕’이라는 호칭에 ‘호(好)’라는 미칭을 붙은 ‘호태왕(好太王)’의 경칭에서 후대의 역사가들이 ‘태’ 자를 빼고 ‘호왕(好王)’이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 재위 당시에는 연수라는 고유 연호가 쓰였으므로 장수왕은 연수호태왕으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있다.

평원왕의 아들 영양왕때는 1차 고수전쟁에서 승리한 전성기인 만큼 태왕 칭호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후대의 영류, 보장왕대에도 사용했을 거라 보는 학자도 있다.

고고학, 문헌사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고구려 태왕 칭호의 존재는 16대 고국원왕부터 26대 영양왕까지이다.[출처 필요]

태왕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고구려 금석문은 다음과 같다:

  1. 광개토왕릉비 비문(414년) [3]
  2. 호우총 출토 호우명(415년)[4]
  3. 모두루 묘지명(5세기 초) [5]
  4. 충주 고구려비 비문(5세기) [6]
  5. 태왕릉 출토 벽돌명과 청동방울(4-5세기) [7]
  6. 연수원년명합우(451년) [8]

신라에서의 태왕[편집]

신라는 4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 고구려의 영향하에 있었다. 이 때문에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때, 당시 통치자였던 법흥왕이 스스로를 태왕이라 칭하게 되었다.[9] 진흥왕도 태왕 칭호를 사용하였는데[10] 그 이후로도 태왕 칭호를 사용했는지 여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독자적인 연호인 건원를 사용한 법흥왕 23년 (536년)부터 진덕여왕 3년(649년)까지는 태왕 칭호와의 상관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이 읽기[편집]

각주[편집]

  1. 노태돈(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pp.358~359.
  2.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한국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3. 還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그로부터 17세손을 지나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에 이르렀다.
    -太王 恩澤洽于皇天
    태왕의 은택은 하늘에 두루 미쳤으며
    • 원문 출처
      • 탁본
        1. 酒 影信本, 1881∼1883.
        2. 水谷悌二郞本, 1887∼1889.
        3. 林基中本.
      • 석문
        1. 水谷悌二郞. 《書品》.  .
        2. 王健群. 《好太王碑硏究》.  .
        3. 武田幸男. 《廣開土王陵碑原石拓本集成》.  .
        4. 林基中. 《廣開土王碑原石初期拓本集成》.  .
    • 번역: 사단법인 고구려발해학회
  4. 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5.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한국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國岡上聖太王 (국강상성태왕), 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 
  6. 高麗太王 (고려태왕), 太王國土 (태왕국토)
  7.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 辛卯年好太王 (신묘년호태왕)( ()) ()( ())九十六 (구십육)
  8. 延壽元年太歲在辛卯三月中 太王敎造合杅 用三斤六兩 (바닥)
    延壽元年太歲在辛卯三月國太王造合杅 三斤

    고려대학교 박물관, <<한국 고대의 Global Pride, 고구려>>, 고려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박물관 특별전, 2005.

  9. 울주 천전리각성 추명의 기록(539년) : 무즉지태왕(?卽知太王).
  10.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 眞興王巡狩碑興太王及衆臣等巡狩管境之時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