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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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열조 명황제 조예(曹魏 烈祖 明皇帝 曹叡, 205년 ~ 239년 음력 1월 1일)는 위나라(魏)의 초대 황제인 세조 문황제(世祖 文皇帝) 조비(曹丕)의 장남이며, 위나라의 제2대 황제이다. 는 원중(元仲). 어머니는 원희(袁熙)의 처였던 문소황후 견씨(甄氏)이며 중국의 역대 황제 중 나라를 세우지 않고 조(祖) 자의 묘호를 얻은 최초의 황제이다.

생애[편집]

어렸을 때 총명함으로 조부 조조(曹操)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정작 아버지 조비에게는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유년 시절에 모후 견부인이 조비에게 사사당하는 일을 겪었고, 조비는 더더욱 조예를 피하게 되었다. 어느 날, 두 부자가 우연히 사냥을 하였는데 조비가 어미 사슴을 쏘아죽인 뒤 아들에게 새끼 사슴을 죽이라 시키자 조예가 울며 말했다. "폐하는 이미 그 어미를 죽였으나 신은 도저히 어린 사슴을 죽일 수 없습니다." 조비는 그 말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 활을 버렸고 이 일로 황태자로 낙점되었다고 한다.[1] 226년, 부친 조비의 고명에 따라 조진(曹眞), 조휴(曹休), 사마의(司馬懿), 진군(陳群) 등의 보좌를 받아 즉위하였다. 조예는 태자로 있을 때부터 조정대신과 교류하거나 정사를 묻는 일 없이 오로지 책만 읽었다.[1] 즉위 초에는 학문에 힘쓰며 직접 통치하지 않았으나, 곧 스스로 정치에 나섰다.

그는 우선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조부 조조와 아버지 조비와 같이 자신의 재산을 백성들에게 베품으로써 앞서 조비 시기 때 처럼, 위나라는 삼국 시대 중 가장 번영한 나라로 거듭난다. 그리고 촉한와 연합하여 위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사마의 등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친히 전투에 참가하는 등 위나라를 존망 위기에서 구해내어 명군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궁을 새로 짓고 사치로운 생활을 하는 등 민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많이 하였는데 235년 허도에 큰 공사를 일으켜 궁전을 짓고 낙양에도 조양전과 태극전을 짓고 총장관을 쌓았는데 그 높이가 10길에 달했고 숭화전과 청소각, 봉황루 등을 세우고 구룡지를 만들어 박사 마균에게 총감독을 맡겼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궁전의 대들보와 기둥을 화려하게 조각하고 푸른 기와와 금빛 벽돌을 사용하며 이름난 명장 3만 명이 동원되고 백성 30만 명이 부역으로 끌려와 일했다. 이에 사도 동심이 표문을 올리지만 거절당하고 곧 태자사인 장무가 표문을 올리지만 조예의 분노로 처형당하며 소부 양부의 표문도 거절당한다.

한편으로는 어머니 견부인을 문소황후(文昭皇后)로 추존하고 그녀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문덕황후를 사사한 후 목을 베어 효수하기도 하였다. 239년에 조예는 35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그의 사후, 어린 양자인 제왕(齊王) 조방(曹芳)이 황위를 계승하였고, 이때 조씨 일파가 사마씨에게 패하고 말았다. 실권은 사마씨가 장악하게 되고, 서진(晉)왕조의 성립을 초래하게 된다.

주석[편집]

  1. 사마광, 《자치통감 삼국지》, 신동준 역, 살림출판사, 2004
전 임
아버지 위 세조 문제 조비
제2대 중국 황제
226년 - 239년
후 임
양자 위 애제 조방
전 임
아버지 위 세조 문제 조비
중국 황제
(촉한-유선)
(-손권)
226년 - 239년
후 임
양자 위 애제 조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