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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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 ~ 219년 12월
GuanYu-ZhouCang.jpg
태어난 곳 하동군 해현
죽은 곳 맥성, 임저현
별명 미염공
최종 계급 전장군 가절월 한 수정후
주요 참전 황건적의 난
원술 토벌전
여포 토벌전
서주 전투
관도 대전
박망파 전투
적벽 대전
남군 전투
청니 대치
익양 대치
번성 전투
형주 공방전
기타 이력 관성제군

관우(중국어 간체: 关羽, 정체: 關羽, 병음: Guān Yǔ 관 위[*], ? ~ 219년 음력 12월)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운장(雲長)이며 사례(司隷)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사람이다. 의제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겼으나 서주를 조조에게 바치고 투항하였고 형주를 손권에게 상실하는 등 중대한 실책을 범하였다. 전투에서도 대부분 패배하였고 승리한 기록은 우금의 칠군수몰 정도인데 이는 천재지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히게 되었는데 이는 삼국지연의 등의 영향이 크다.

중국 지배칭에 의해 의리(義理)의 화신(化身)으로 날조되어 중국의 민담(民譚)이나 민간전승(民間傳承), 민간전설(民間傳說)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화(神格化)되어 관제묘(關帝墓)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관우는 중국인들이 숭배(崇拜)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젊었을적 죄를 지어 도망다니던 죄수 출신이다.

관우가 탁군으로 이주하고 있을 때, 유비가 도당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장비(張飛)와 함께 찾아가, 그의 호위를 맡았다.

유비가 도겸에게 서주를 물려받아 다스리게 된 이후 원술이나 여포군에게 여러차례 공격을 받아 패하였다. 원술과 전쟁이 벌어졌을때는 크게 패해 인육을 먹고 연명할 정도였다. 원술이 기령에게 3만군을 주어 공격하자 유비는 감히 상대하지 못하고 여포에게 구원을 청한 기록도 있다. 또한 여포가 보낸 고순에게 유비군은 번번히 패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관우전에 이 시기 기록이 적은 것은 대부분 패전이기 때문이다. 삼국지는 해당 인물의 기전에 불리한 기록을 기록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사람의 열전에 관우의 이름은 자주 등장하니 상대방 기록을 꼭 읽어보어야 관우의 기록을 잘 읽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백마 전투[편집]

유비는 여포가 보낸 고순에게 패해 근거지를 상실하고 조조에게 투항하게 된다. 그러나 유비조조를 배신하고,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고 관우에게 서주를 다스리며 하비성을 수비하게 한 후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예주 소패에 주둔하여 조조를 견제하였다. 조조가 공격하자 유비조조에게 패해 처자식을 버리고 하북의 원소(袁紹)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포위되자 서주를 바치고 투항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에 임명하였다. 원소와 연합한 유비 세력을 서주에서 몰아낸 조조는 곧바로 남하한 원소와 전쟁을 치르게 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과 재량권을 줘서는 안된다.” 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劉延)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조조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순유의 계책으로 안량을 물리쳤는데 이 전투에서 관우는 안량을 죽이는 공을 세워 조조에게 한수정후라는 작위를 받았다.

안량과 문추를 연이어 격파하였으나 조조는 전세가 불리하여 관도로 후퇴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조조를 버리고 원소와 내통하였는데 관우 역시 조조군을 탈영하여 원소군으로 달아난다.

이후 관우는 유비와 합류하여 조조군의 후방을 공격하게 되나 조인의 기병대에 참패하여 저지된다.

적벽 대전 이후[편집]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관우는 수군을 이끌고 양양을 공격하나 양양에 주둔 중이던 악진에게 패하고 곧바로 문빙에게 패하여 유비군의 수군은 전멸하게 된다. 강릉을 지키던 조인이 결국 주유의 공세를 이기지 못해 강릉을 버리고 달아나자 관우는 조인의 탈출로를 막는 임무를 맡았으나 이 역시 이통의 맹공으로 실패하고 만다.

유비가 강남의 여러 군을 지배하자, 관우는 양양태수와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215년 손권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하는데, 관우가 이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손권여몽(呂蒙)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게 한다. 전투 한번 없이 3군은 여몽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이에 놀란 유비가 5만군을 이끌고 형주로 내려오게 된다 유비는 관우를 파견, 삼군을 쟁취하게 하여 익양에서 노숙과 대치한다. 이 때 감녕이 단 1,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을 사이로 관우와 대치, 이에 관우는 진영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 한다.[1] 얼마 지나지 않아 관우와 노숙(魯肅)에 의한 담판이 이루어지고, 결국 유비조조의 공격에 대비해 3군을 반환했다.

노숙이 장수들과 상의할 때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저에게 5백 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 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며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 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갔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고 부른다. 손권은 감녕의 공로를 칭찬하고 서릉태수로 제수했으며, 양신(陽新)ㆍ하이(下雉) 두 현을 통솔하도록 했다.

《삼국지》, 〈오서 감녕전〉

서량마초(馬超)가 유비에게 항복했을 때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美髥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줬다.

또한 삼국지에는 이 시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신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를 깎아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고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했다고 한다.

말년[편집]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황충은 후장군에 임명되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관우는 굉장히 화를 내며 대장부는 노병과 같은 반열에 있지 않는다는 발언을 하였다. 당시 황충이 후장군에 임명되면 관우가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워할 것이라고 제갈량이 발언하였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였는데 방덕의 화살을 이마에 맞았다. 이후 관우군은 방덕의 백마만 봐도 두려워 하였다. 천재지변으로 한수가 범람하여 우금, 방덕군의 진영이 수몰되자 관우는 우금(于禁)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 그 사이 손권형주를 손에 넣을 기회로 보고 조조에게 관우를 치겠다는 사자를 보내고,[2] 여몽이 병에 걸렸다며 형주로부터 소환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전쟁 준비를 하였다. 관우는 여기에 속아서 전군을 번성으로 동원하고 상관(湘關)의 군량을 털었다. 마침내 손권이 여몽을 선봉으로 삼아 관우의 배후를 쳤다.[3]

손권은 당시 관우의 수하로 강릉을 지키고 있던 미방등을 회유하고 관우를 기습하여 남군을 점령하였다. 이 때 관우는 수몰된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에게 패배하고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이때 남군이 손권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손권과 싸웠으나, 여몽(呂蒙)의 계략으로 병사들이 전의를 잃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맥성으로 달아났다. 손권에게 투항하였으나 몰래 달아나려 하다가 이미 이를 예상한 손권이 보낸 주연 · 반장에 걸려 그의 아들 관평(關平), 사마 조루과 함께 반장의 부장 마충에게 사로잡혀서 손권 앞으로 끌려와 결국 최후를 맞이 하였다. 관우의 머리는 조조에게 보내졌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 전투를 야기시켰으며, 유비장비의 죽음에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선는 관우를 장무후라는 신호를 내렸는데 장은 들판에서 죽었다는 의미이고 무는 실상보다 명성이 과장되었다는 의미이다.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劉禪)이 등애(鄧艾)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이(關彛) 등 관흥의 후손들은 이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鍾會)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龐會)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의 관우[편집]

나관중 저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162년에 태어났다고 설정되어 있으며, 유비, 관우, 장비 3인이 도원결의로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묘사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는 태사자가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자 유비와 같이 태사자의 요청에 따라 공융을 구출하러 가서 관해와 90여합의 일기토 끝에 관해를 사살하고 공융을 구출한다고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유비가 직접 출동한 것은 아니고 유비가 태사자에게 정병 3천명을 빌려줘서 보내자 이 소식을 들은 관해가 포위를 풀고 도망친 것이다.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관우는 공손찬 휘하의 병졸로 참전해 조조(曹操)의 허락을 받아 화웅(華雄)을 죽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고, 실제로 화웅은 전력을 추스리고 양인으로 출진한 손견(孫堅)에게 죽임을 당했다.

또한 관도 대전에서 관우는 안량과 함께 원소군의 맹장으로 유명한 문추(文醜)도 죽였다고 하나, 실제로 관우는 안량만 주살했을 뿐 문추의 경우 치중대를 미끼로 한 순유(荀攸)의 책략에 빠진 문추서황(徐晃) 등이 습격하여 없앤 것으로 나와있다. 이 공로로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하고 많은 상을 내렸지만, 결국 관우는 유비에게로 돌아갔다고 쓰여 있다.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할 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 대로 다시 떠난다’는 3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이 항복을 권유하는 사람으로 나선 자가 장료인데, 여포(呂布)를 처형할 때 그 부하였던 그를 구해준 것도 관우였다. 그는 삼국지에서도 관우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깊은 유대가 있는 듯이 묘사되고 있다.

관우는 조조의 밑에서 유비에게로 떠나는 도중 도중에 5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참살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설화가 전해지며, 이것은 나중에 적벽에서 패주한 조조를 놔주는 이유가 된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 유비를 찾아간 것은 사실이나, 오관참육장의 설화는 허구이다.

삼국지연의에서 관우는 적벽 대전에서 대패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조조를 정에 얽매여 그냥 놓아주고 만다. 제갈량(諸葛亮)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지만 “조조의 운명이 아직 다하지 않으므로 관우에게 의리를 갚게 해도 좋다”라고 말하여 관우를 출진하도록 한다. 그리고 관우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귀환하자 규율상 제갈량은 “서약에 따라 목을 치겠다.”라고 명령하는데, 유비가 이를 가로막았다. 이후 자존심이 센 관우는 제갈량에게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다고 하나, 정사엔 화용도에 관한 내용이 없다.

연의에서의 제갈량이 취한 강릉과 양양을 공격할 때 사용한 '공성의 계'는 허구로써, 주유가 차지한 강릉을 유비가 임대받은 것과 같다.

관우는 방덕과의 대결에서 팔을 크게 다쳐 부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뼈를 긁어내며 치료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먹으며 바둑을 두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것을 각색한 내용이 나온다. 관우가 방덕(龐德)과의 싸움에서 이 상처를 입었는데, 명의 화타(華陀)가 그의 상처를 살핀다. 그리고 수술 중에는 마량(馬良)과 바둑을 계속 두면서 먹고 마셔 화타를 감탄하게 만든다. 관우가 실제로 이런 치료를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 것은 사실이지만 연의에서는 그 의원을 화타로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화타가 아닌 다른 의원이 치료를 해준 것이다.

반면 우금 문칙 등을 포로로 잡아놓고 있으면서 군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자 관우는 손권의 군량고를 급습, 약탈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사실을 누락했다. 관우를 존경하는 나관중은 자신이 존경하는 관우의 잘못을 기록한 사실을 임의로 삼국지연의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관우를 의리의 화신으로 포장해야 하는데 노략질과 의리는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이다.

관우 사망 후 손권의 축하를 받던 여몽에게 관우의 혼이 씌어 여몽이 몸의 일곱 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하나, 여몽은 본래 병으로 사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몽은 자신이 전반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자신의 임무 중에 일부를 육손과 공동으로 수행했다. 이 무렵 여몽 뿐만 아니라 장흠감녕 역시 여몽과 비슷한 이유로 사망했다. 또한 손권이 이를 보고 관우를 벤 것에 대한 후환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었다. 연의에서 조조는 관우의 머리를 보며 인사를 하다, 갑작스레 눈을 뜬 관우를 보고 크게 놀란다. 이에 조조는 나무를 깎아 관우의 머리를 정성스레 붙여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청룡언월도와 적토마[편집]

키가 9척(약 2m7cm[4]), 수염 길이가 2자[5](약 46cm)이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풍모로 묘사된다. 여기에 대장간에서 특수 제작한 무게 82근(한나라 때 1근 = 223g, 82근 = 18kg 286g)이 나가는 청룡언월도가 추가되어, 오늘날의 관우상이 완성된다.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이 관우의 무기로서 꾸며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정사 삼국지와 중국 남북조 양나라 때 쓰여진 고금도검록이라는 서적 등을 참고하자면 관우의 무기는 언월도가 아닌 그냥 일반 칼, 대도, 삭, 모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우는 유비에게 총애(寵愛)[6]를 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몸소 도산(陶山, 오나라 회계군 지역의 명산)의 철(鐵)을 캐서 칼 두 자루(쌍도)를 만들고 (거기에) '만인적 (萬人敵)' 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자 그는 칼을 아끼는 마음에 물 속에 던졌다.

도홍경(陶弘景), 고금도검록(古今刀劍錄)

삼국지연의에는 조조여포로부터 몰수한 적토마를 관우에게 주었으며, 관우가 패하여 생포당하자 적토마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관우와 같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사료에는 적토마의 행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실제로 조조가 관우에게 주었다고 해도 말의 수명을 고려했을 때 오래 살았다고 보기 힘들다.

평가[편집]

삼국지정사 저자 진수 평은 다음과 같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었다. "관우는 조공(曹公)에게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하고 장비는 의(義)로써 엄안(嚴顔)을 놓아주었으니 "아울러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강이자긍(剛而自矜-굳세고 자부심이 강함)하고 장비는 폭이무은(暴而無恩-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음)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수(理數-도리,이치)의 상례로다."

  • 정욱 은 관우를 "만인지적" 이다 라하였다.
  • 주유 는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 라하였다.
  • 곽가 또한 관우를 만명을 당해낼수있는 자다 라며 평을 한다.
  • 마초유비의 휘하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관우는 제갈량에게 마초에 대해 물었다. 이에 제갈량은 마초에 대해 평하기를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천하의 재원이지만 관공보다는 못한 장수"라 답장을 보냈다. 이에 관우는 제갈량의 답장을 빈객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숭배의 대상이 된 관우[편집]

Taiwan 2009 JinGuaShi Historic Gold Mine Valley View Left Page FRD 8822 Giant Statue of GuanYu.jpg

도교에서는 관우를 신격화하여 전쟁의 신인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부른다.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듯이, 관우의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여 관우는 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다. 관우가 황제(관성대제)를 넘어서 신으로 추대된 이후에 중국 후대 왕조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관우와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피휘(避諱)를 하였다. 중국인들이 관우를 차라리 운장이라고 부르거나 굳이 굳이 관공(關公)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관제묘가 사당 형식으로 처음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4년 으로, 명나라가 자신들의 임진왜란 출정 때 이긴것을 관장군의 덕이라고 여겨서 세워져 중국 대륙 각지, 나아가 대만, 홍콩, 한국,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는 관왕묘나 혹은 관제묘라고 하며 주로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 몇몇 있다. 서울시 종로구에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가 바로 이 관왕묘 중 하나이다. 이 관왕묘에는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와 육손의 성과 같은 육(陸)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없이 죽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역대 시호[편집]

한편, 중국의 역대 황제에게는 충의의 화신인 관우는 무조건적 충성의 좋은 본보기였기에 관우를 우대하고 여러 시호를 봉했다. 그 종류는 아래와 같다.

나라 황제 연대 봉호
북송 송 휘종 숭녕원년(1102년 충혜공(忠惠公)
북송 송 휘종 숭녕3년(1104년 숭녕진군(崇寧眞君)
북송 송 휘종 대관2년(1107년 무안왕(武安王)
북송 송 휘종 선화5년(1123년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남송 송 고종 건염2년 (1128년 장무의용무안왕(壯繆義勇武安王)
남송 송 효종 순희14년(1187년 장무의용무안영제왕(壯繆義勇武安英濟王)
원 태정제 천력8년(1335년 현령의용무안영제왕(顯靈義勇武安英濟王)
명 신종 만력42년(1613년 단도복마(單刀伏魔)、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神威遠鎭天尊關聖帝君)
명 의종 숭정3년(1630년 진원현응소명익한천존(眞元顯應昭明翼漢天尊)
청 세조 순치9년(1652년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
청 세종 옹정3년(1725년 삼대공작(三代公爵)、성증조(聖曾祖)、광소공(光昭公)、성조(聖祖)、유창공(裕昌公)、성고(聖考)、성충공(成忠公)
청 고종 건륭원년(1736년 산서관부자(山西關夫子)
청 고종 건륭31년(1767년 영우(靈佑) 二字 추가
청 인종 가경18년(1813년 인용(仁勇) 二字 추가
청 선종 도광8년(1828년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關聖大帝)

관우의 친족관계[편집]

기타[편집]

  • 대한민국의 보물 제 142호인 동묘(東廟)는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묘로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라 하며 선조 34년인 1601년에 건립돼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이전에는 조선에서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관우 숭배 사상은 임진왜란때 조선에 출병 온 명나라 군사들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7]

  • 관우(關羽)가 (神)으로 추대(推戴)된 이후, 중국 후대 왕조의 황제(皇帝)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관우와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피휘(避諱)를 하였다.[8]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출처:정사 오서 감녕전
  2. 《삼국지》47권 오서 제2 오주 손권
  3. 《삼국지》54권 오서 제9 여몽
  4. 한나라때 1척은 약 23cm였다. 자(두산백과)
  5. 자와 척(尺)은 같은 단위이다.
  6. 남달리 귀여워하고 사랑함
  7. 가스통ㆍ쓰레기에 둘러싸인 보물 142호 `동묘', 연합뉴스, 2008-02-17.
  8. http://www.hkwmrc.com/communication01.php?cid=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