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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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 ~ 219년 12월
GuanYu-ZhouCang.jpg
태어난 곳 하동군 해현
죽은 곳 맥성, 임저현
별명 미염공
최종 계급 전장군 가절월 한 수정후
주요 참전 황건적의 난
원술 토벌전
여포 토벌전
서주 전투
관도 대전
박망파 전투
적벽 대전
남군 전투
청니 대치
익양 대치
번성 전투
형주 공방전
기타 이력 관성제군

관우(중국어 정체: 關羽, 병음: Guān Yǔ 관 위[*], ? ~ 219년 음력 12월)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운장(雲長)이며 사례(司隷)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사람이다. 의제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蜀漢)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히며, 한대(漢代) 이후로 남송(南宋)의 악비(岳飛)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각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후세사람들은 '용맹한 자' 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관우(關羽), 장비(張飛)의 경우를 들어 말하였다고 한다.[1]

의리(義理)의 화신(化身)으로 중국의 민담(民譚)이나 민간전승(民間傳承), 민간전설(民間傳說)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화(神格化)되어 관제묘(關帝墓)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관우는 중국인들이 숭배(崇拜)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관우가 탁군으로 이주하고 있을 때, 유비가 도당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장비(張飛)와 함께 찾아가, 그의 호위를 맡았다. 유비는 관우가 현상수배당하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관우를 보호하기로 결심하고 끝까지 책임지여 언제나 관우와 장비와 함께 한 방에서 같이 지냈으며, 그 정이 형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공적인 장소에서 관우는 장비와 같이 하루 종일 유비 곁에서 호위를 맡고, 유비를 따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실제로 관우 자전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간결하다. 유비공손찬(公孫瓚) 밑에서 평원의 상(相)이 되었을 때,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로 임명되어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는 기록 뿐, 그 후 이야기는 200년까지 건너뛰고 만다. 유비서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하비 태수의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백마 전투[편집]

200년 유비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했다. 그러나 유비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袁紹)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에 임명하지만, 관우는 조조 밑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조조장료(張遼)를 파견해 그의 의중을 떠보았을 때도, 관우는 “조조의 뜻은 알겠지만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터이지만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 라고 대답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과 재량권을 줘서는 안된다.” 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를 딸려,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劉延)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조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릴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2].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황제)에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떠날 때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향했고, 조조의 측근이 추적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뒤쫓지 말거라” 라고 타이르며 그(관우)를 조용히 보내주었다[2].

관우가 조조를 떠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조 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2]

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안량을 토벌하고 유비의 편지를 받자, 조조 밑을 떠나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적벽 대전 이후[편집]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유비가 강남의 여러 군을 지배하자, 관우는 양양태수와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도중에 유비의 군사 방통(龐統)이 전사하고, 익주에서 유비가 궁지에 빠지자 제갈량도 익주로 구원하러 나가 관우 혼자 형주에 남게 된다. 익주 평정 후 관우는 형주 군사총독에 임명되고, 3만의 군사로만 형주를 지키겠다고 하였다.

215년 손권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하는데, 관우가 이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손권여몽(呂蒙)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고,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한다. 이 때 감녕이 단 1,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을 사이로 관우와 대치, 이에 관우는 진영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 한다.[3] 얼마 지나지 않아 관우와 노숙(魯肅)에 의한 담판이 이루어지고, 결국 유비조조의 공격에 대비해 3군을 반환했다.

노숙이 장수들과 상의할 때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저에게 5백 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 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며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 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갔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고 부른다. 손권은 감녕의 공로를 칭찬하고 서릉태수로 제수했으며, 양신(陽新)ㆍ하이(下雉) 두 현을 통솔하도록 했다.

《삼국지》, 〈오서 감녕전〉

서량마초(馬超)가 유비에게 항복했을 때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美髥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줬다.

또한 삼국지에는 이 시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신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를 깎아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고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했다고 한다.

말년[편집]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于禁)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 그 사이 손권형주를 손에 넣을 기회로 보고 조조에게 관우를 치겠다는 사자를 보내고,[4] 여몽이 병에 걸렸다며 형주로부터 소환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전쟁 준비를 하였다. 관우는 여기에 속아서 전군을 번성으로 동원하고 상관(湘關)의 군량을 털었다. 마침내 손권이 여몽을 선봉으로 삼아 관우의 배후를 쳤다.[5]

손권은 당시 관우의 수하로 강릉을 지키고 있던 미방등을 회유하고 관우를 기습하여 남군을 점령하였다. 이 때 관우는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에게 패배하고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이때 남군이 손권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손권과 싸웠으나, 여몽(呂蒙)의 계략으로 병사들이 전의를 잃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맥성으로 달아났다. 포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권에게 거짓 항복도 시도해 보았으나 간파당했고, 몰래 달아나려 했으나 주연 · 반장 등의 포위에 걸려 그의 아들 관평(關平), 사마 조루과 함께 반장의 부장 마충에게 사로잡혀서 거의 즉시 참수당했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 전투를 야기시켰으며, 유비장비의 죽음에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비는 관우를 장무후(張繆候)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關興)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劉禪)이 등애(鄧艾)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이(關彛) 등 관흥의 후손들은 이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鍾會)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龐會)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인 관중진(關忠金, 관충금)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관중진은 한국 전쟁에서 인민군의 편이 되어 참전했다. 사실 관평의 후손들이 관우와 관평이 포로로 잡힌 후 참수된 이후에도 형주지역에서 계속 살아있었고 그들의 후손이 관중진이였던 것이다.[6]

삼국지연의에서의 관우[편집]

나관중 저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162년에 태어났다고 설정되어 있으며, 유비, 관우, 장비 3인이 도원결의로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묘사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는 태사자가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자 유비와 같이 태사자의 요청에 따라 공융을 구출하러 가서 관해와 90여합의 일기토 끝에 관해를 사살하고 공융을 구출한다고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유비가 직접 출동한 것은 아니고 유비가 태사자에게 정병 3천명을 빌려줘서 보내자 이 소식을 들은 관해가 포위를 풀고 도망친 것이다.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관우는 공손찬 휘하의 병졸로 참전해 조조(曹操)의 허락을 받아 술이 식기전에 화웅(華雄)을 죽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고, 실제로 화웅은 전력을 추스리고 양인으로 출진한 손견(孫堅)에게 죽임을 당했다.

또한 관도 대전에서 관우는 안량과 함께 원소군의 맹장으로 유명한 문추(文醜)도 죽였다고 하나, 실제로 관우는 안량만 주살했을 뿐 문추의 경우 치중대를 미끼로 한 순유(荀攸)의 책략에 빠진 문추서황(徐晃) 등이 습격하여 없앤 것으로 나와있다. 이 공로로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하고 많은 상을 내렸지만, 결국 관우는 유비에게로 돌아갔다고 쓰여 있다.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할 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 대로 다시 떠난다’는 3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이 항복을 권유하는 사람으로 나선 자가 장료인데, 여포(呂布)를 처형할 때 그 부하였던 그를 구해준 것도 관우였다. 그는 삼국지에서도 관우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깊은 유대가 있는 듯이 묘사되고 있다.

관우는 조조의 밑에서 유비에게로 떠나는 도중 도중에 5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참살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설화가 전해지며, 이것은 나중에 적벽에서 패주한 조조를 놔주는 이유가 된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 유비를 찾아간 것은 사실이나, 오관참육장의 설화는 허구이다.

삼국지연의에서 관우는 적벽 대전에서 대패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조조를 정에 얽매여 그냥 놓아주고 만다. 제갈량(諸葛亮)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지만 “조조의 운명이 아직 다하지 않으므로 관우에게 의리를 갚게 해도 좋다”라고 말하여 관우를 출진하도록 한다. 그리고 관우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귀환하자 규율상 제갈량은 “서약에 따라 목을 치겠다.”라고 명령하는데, 유비가 이를 가로막았다. 이후 자존심이 센 관우는 제갈량에게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다고 하나, 정사엔 화용도에 관한 내용이 없다.

연의에서의 제갈량이 취한 강릉과 양양을 공격할 때 사용한 '공성의 계'는 허구로써, 주유가 차지한 강릉을 유비가 임대받은 것과 같다.

관우는 방덕과의 대결에서 팔을 크게 다쳐 부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뼈를 긁어내며 치료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먹으며 바둑을 두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것을 각색한 내용이 나온다. 관우가 방덕(龐德)과의 싸움에서 이 상처를 입었는데, 명의 화타(華陀)가 그의 상처를 살핀다. 그리고 수술 중에는 마량(馬良)과 바둑을 계속 두면서 먹고 마셔 화타를 감탄하게 만든다. 관우가 실제로 이런 치료를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 것은 사실이지만 연의에서는 그 의원을 화타로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화타가 아닌 다른 의원이 치료를 해준 것이다.

반면 우금 문칙 등을 포로로 잡아놓고 있으면서 군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자 관우는 손권의 군량고를 급습, 약탈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사실을 누락했다. 관우를 존경하는 나관중은 자신이 존경하는 관우의 잘못을 기록한 사실을 임의로 삼국지연의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관우를 의리의 화신으로 포장해야 하는데 노략질과 의리는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이다. 맥성으로 후퇴한 관우는 요화를 보내 상용의 유봉맹달에 원군을 요청하지만,거절당한다. 그 후,제갈근이 찾아오고 항복을 권유하나 관우는 이를 뿌리친다. 이후 서천으로 탈출하기 위해 병마를 이끌고 치고 나가지만 조루는 죽고 결국 관우는 손권에게 생포된다. 손권이 함께 일하자고 하지만 관우는 "옥은 깰수 있으나 그 흰빛을 바꿀 수 없고,대나무는 태울 수 있으나 그 곧음을 꺾을 수 없소이다"라며 죽기를 원하였고 결국 참수된다. 관우 사망 후 손권의 축하를 받던 여몽에게 관우의 혼이 씌어 여몽이 몸의 일곱 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하나, 여몽은 본래 병으로 사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몽은 자신이 전반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자신의 임무 중에 일부를 육손과 공동으로 수행했다. 이 무렵 여몽 뿐만 아니라 장흠감녕 역시 여몽과 비슷한 이유로 사망했다. 또한 손권이 이를 보고 관우를 벤 것에 대한 후환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었다. 연의에서 조조는 관우의 머리를 보며 인사를 하다, 갑작스레 눈을 뜬 관우를 보고 크게 놀란다. 이에 조조는 나무를 깎아 관우의 머리를 정성스레 붙여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청룡언월도와 적토마[편집]

키가 9척(약 2m7cm[7]), 수염 길이가 2자[8](약 46cm)이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풍모로 묘사된다. 여기에 대장간에서 특수 제작한 무게 82근(한나라 때 1근 = 223g, 82근 = 18kg 286g)이 나가는 청룡언월도가 추가되어, 오늘날의 관우상이 완성된다.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이 관우의 무기로서 꾸며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정사 삼국지와 중국 남북조 양나라 때 쓰여진 고금도검록이라는 서적 등을 참고하자면 관우의 무기는 언월도가 아닌 그냥 일반 칼, 대도, 삭, 모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우는 유비에게 총애(寵愛)[9]를 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몸소 도산(陶山, 오나라 회계군 지역의 명산)의 철(鐵)을 캐서 칼 두 자루(쌍도)를 만들고 (거기에) '만인적 (萬人敵)' 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자 그는 칼을 아끼는 마음에 물 속에 던졌다.

도홍경(陶弘景), 고금도검록(古今刀劍錄)

삼국지연의에는 조조여포로부터 몰수한 적토마를 관우에게 주었으며, 관우가 패하여 생포당하자 적토마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관우와 같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사료에는 적토마의 행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실제로 조조가 관우에게 주었다고 해도 말의 수명을 고려했을 때 오래 살았다고 보기 힘들다.

평가[편집]

삼국지정사 저자 진수 평은 다음과 같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었다. "관우는 조공(曹公)에게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하고 장비는 의(義)로써 엄안(嚴顔)을 놓아주었으니 "아울러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강이자긍(剛而自矜-굳세고 자부심이 강함)하고 장비는 폭이무은(暴而無恩-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음)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수(理數-도리,이치)의 상례로다."

  • 정욱 은 관우를 "만인지적" 이다 라하였다.
  • 주유 는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 라하였다.
  • 유엽촉나라에 관우,장비만 있을 뿐이라 말하며 "그들이 유비를 도우니 무엇을 못이루겠습니까?" 라 평한다.
  • 곽가 또한 관우를 만명을 당해낼수있는 자다 라며 평을 한다.
  • 마초유비의 휘하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관우는 제갈량에게 마초에 대해 물었다. 이에 제갈량은 마초에 대해 평하기를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천하의 재원이지만 관공보다는 못한 장수"라 답장을 보냈다. 이에 관우는 제갈량의 답장을 빈객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 여몽 은 관우가 힘을 존숭하며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으므로 죽일 수 있을 때 무조건 죽여야 한다고 평했다.

숭배의 대상이 된 관우[편집]

Taiwan 2009 JinGuaShi Historic Gold Mine Valley View Left Page FRD 8822 Giant Statue of GuanYu.jpg

도교에서는 관우를 신격화하여 전쟁의 신인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부른다.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듯이, 관우의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여 관우는 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다. 관우가 황제(관성대제)를 넘어서 신으로 추대된 이후에 중국 후대 왕조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관우와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피휘(避諱)를 하였다. 중국인들이 관우를 차라리 운장이라고 부르거나 굳이 굳이 관공(關公)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관제묘가 사당 형식으로 처음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4년 으로, 명나라가 자신들의 임진왜란 출정 때 이긴것을 관장군의 덕이라고 여겨서 세워져 중국 대륙 각지, 나아가 대만, 홍콩, 한국,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는 관왕묘나 혹은 관제묘라고 하며 주로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 몇몇 있다. 서울시 종로구에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가 바로 이 관왕묘 중 하나이다. 이 관왕묘에는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와 육손의 성과 같은 육(陸)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없이 죽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역대 시호와 봉호[편집]

한편, 중국의 역대 황제에게는 충의의 화신인 관우는 무조건적 충성의 좋은 본보기였기에 관우를 우대하고 여러 시호를 봉했다. 그 종류는 아래와 같다.

나라 황제 연대 봉호
후한 후한 헌제 199년(건안 4년) 한수정후(漢壽亭侯)
촉한 촉한 소열제 221년(장무 원년) 탕구장군(蕩寇將軍), 전장군(前將軍)
촉한 후주 258년(경요 원년) 장무후(壯繆侯)
263년(염흥 원년) 의용장무후(義勇壯繆侯)
수 문제 581년(개황 원년) 충혜공(忠惠公)
북송 북송 휘종 1104년(숭녕 3년) 숭녕지도진군(崇寧至道眞君)
1107년(대관 2년) 무안왕(武安王)
소열무안왕(昭烈武安王)
1123년(선화 5년)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남송 남송 고종 1128년(건염 2년) 장무의용무안왕
(壯繆義勇武安王)
남송 효종 1187년(순희 14년) 장무의용무안영제왕
(壯繆義勇武安英濟王)
원 문종 1328년(천력 원년) 현령의용무안영제왕
(顯靈義勇武安英濟王)
1331년(지순 2년) 제천호국대장군, 검교상서, 수관회남절도사
(齊天護國大將軍 檢校尙書 守管淮南節度使),
겸산동하북사문관초토사, 겸제조제궁신, 무분지처검교관
(兼山東河北四門關招討使 兼提調諸宮神 無分之處檢校官),
중서문하평장정사, 개부의동삼사, 가전도통군
(中書門下平章政事 開府儀同三司 駕前都統軍)
무녕후, 장목의용무안영제왕, 호국숭녕진군
(無佞侯 壯穆義勇武安英濟王 護國崇寧眞君)
명 태조 1394년(홍무 27년) 전장군수정후(前將軍壽亭侯)로 강봉.
명 신종 1578년(만력 6년) 협천호국충의대제
(協天護國忠義大帝)
1613년(만력 42년)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
(三界伏魔大帝神威遠鎭天尊關聖帝君)
명 의종 1630년(숭정 3년) 진원현응소명익한천존
(眞元顯應昭明翼漢天尊)
청 세조 1652년(순치 9년)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
청 세종 1725년(옹정 3년) 증조부는 광소공(光昭公)으로, 조부는 유창공(裕昌公)으로,
부친은 성충공(成忠公)으로 추존.
전국 각지에 관묘를 세울 것을 지시.
공자의 제사와 같이 봄, 가을에 성대히 문무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제사를 행함.
관우를 주신으로 국가적인 제사가 행해지기 시작.
청 고종 1736년(건륭 원년) 산서관부자(山西關夫子)
1767년(건륭 31년) 존호 영우(靈佑) 추가
청 인종 1813년(가경 18년) 존호 인용(仁勇) 추가
청 선종 1828년(도광 8년)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
(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關聖大帝)
청 문종 1855년(함풍 5년)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관성대제
(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關聖大帝)
증조부는 광소왕(光昭王)으로, 조부는 유창왕(裕昌王)으로,
부친은 성충왕(成忠王)으로 다시 추존.
청 덕종 1879년(광서 5년)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
(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大帝)

관우의 친족관계[편집]

기타[편집]

  • 대한민국의 보물 제 142호인 동묘(東廟)는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묘로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라 하며 선조 34년인 1601년에 건립돼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이전에는 조선에서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관우 숭배 사상은 임진왜란때 조선에 출병 온 명나라 군사들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10]

  • 관우(關羽)가 (神)으로 추대(推戴)된 이후, 중국 후대 왕조의 황제(皇帝)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관우와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피휘(避諱)를 하였다.[11]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입(이십)이사차기(廿二史箚記) 관장지용(關張之勇) 漢以後稱勇者必推關張
  2. 삼국지 촉서 관우전
  3. 출처:정사 오서 감녕전
  4. 《삼국지》47권 오서 제2 오주 손권
  5. 《삼국지》54권 오서 제9 여몽
  6. 『NOW』관우 67대손 찾았다, 동아일보, 2001-02-26.
  7. 한나라때 1척은 약 23cm였다. 자(두산백과)
  8. 자와 척(尺)은 같은 단위이다.
  9. 남달리 귀여워하고 사랑함
  10. 가스통ㆍ쓰레기에 둘러싸인 보물 142호 `동묘', 연합뉴스, 2008-02-17.
  11. http://www.hkwmrc.com/communication01.php?cid=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