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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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rrrr
파일:Alexandre det01.jpg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마케도니아바실레우스
재위 기원전 336년 ~ 기원전 323년
전임자 필리포스 2세
후임자 알렉산드로스 4세
필리포스 3세
이집트파라오
재위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23년
전임자 다리우스 3세
후임자 알렉산드로스 4세
필리포스 3세
페르시아샤한샤
재위 기원전 330년 ~ 기원전 323년
전임자 다리우스 3세
후임자 알렉산드로스 4세
필리포스 3세
아시아의 주(主)
재위 기원전 331년 ~ 기원전 323년
전임자 -
후임자 알렉산드로스 4세
필리포스 3세
별명 메가스(대왕)
배우자 박트리아 사람 록사네
페르시아 사람 스타테이라
페르시아 사람 파리사티스
자녀 알렉산드로스 4세
왕조 아르게아다이 왕조
부친 필리포스 2세
모친 에피로스 사람 올림피아스
출생 기원전 356년 7월 20일 또는 21일
마케돈 왕국 펠라
사망 기원전 323년 6월 10일 또는 11일
바빌론
사인 말라리아 또는 장티푸스
종교 그리스 다신교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그리스어: Αλέξανδρος Γ' ο Μέγας 알렉산드로스 감마 호 메가스[*], 라틴어: Alexander III Magnus 알렉산데르 테르티우스 마그누스[*], 아랍어: الإسكندر الثالث الأكبر 알 이스칸다르 알 탈리트 알 아크바르[*] 기원전 356년 7월 20일 ~ 기원전 323년 6월 10일)는 고대 그리스 북부의 왕국 마케돈아르게아다이 왕조 제26대 군주이다.[1][2][3] 그리스 폴리스 제국(諸國)과 오리엔트 지방에 대한 공격적 팽창으로 패권을 잡아 마케돈의 바실레우스(군왕), 코린토스 동맹헤게몬(패자), 페르시아샤한샤(왕중왕), 이집트파라오를 겸임하고 스스로를 퀴리오스 티스 아시아스(아시아의 주主)라고 칭하였다.

기원전 356년 펠라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는 20세의 나이로 아버지 필리포스 2세를 계승해 바실레우스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치세 기간 대부분을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미증유의 군사 정복 활동으로 보냈고, 30세가 되었을 때 그리스를 시작으로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에 이르는, 그 이전까지 고대 서양에 전례가 없던 대제국을 건설했다.[4] 그는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고,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5]

유년기의 알렉산드로스는 16세가 될 때까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기원전 336년 부왕 필리포스가 암살된 뒤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가 개척한 부강한 왕국과 숙련된 군대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에 이어 코린토스 동맹의 패자로 추대된 알렉산드로스는 그 권위를 이용해 팽창 정책을 시작했다. 기원전 334년 그는 소아시아에서 군림하던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 제1제국)을 침공하여 10년에 걸친 원정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수스 전투가우가멜라 전투 등 몇 차례의 결정적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분쇄했고, 마침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페르시아 제1제국을 멸망시켰다. 이 시점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돈 제국의 강역은 아드리아 해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렀다.

"세계의 끝"을 보겠다는 열망으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6년 인도를 침공했으나 병사들의 반발로 회군하였다. 바빌론을 제국의 수도로 삼기 위한 개발을 계속하던 와중이었던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는 계획했던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시작하지 못한 채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그가 죽자마자 일련의 내전으로 산산이 조각났고, 조각난 각각의 지역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들과 참모들이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를 자칭하면서 각각 왕을 칭하고 할거하였다. 이들을 디아도코이라 한다.

BC356년 7월 20일경마케도니아의 수도 에서 태어났다고 추정되며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의 네 번 째 부인이며 에피러스의 왕 네오프톨레무스 1세의 딸인 올림피아스의 아들이었다 필리포스 2세는 일곱 또는 여덟 명의 아내가 있었으나 알렉산더를 낳음으로 인해 올림피아스가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아내였다

알렉산더의 탄생과 어린시절을 둘러싼 몇 가지 신화가 있다 고대 그리스 전기작가인 플루타크에 따르면 올림피아스는 필리포스2세와 결혼한 첫날밤 전날 저녁에 넓고 멀리 퍼지는 불꽃을 만드는 천둥이 그녀의 배를 관통하는 꿈을 꾸었다고 하며 필리포스 2세는 결혼식 며칠 뒤 배에 사자의 그림이 그려진 올림피아스를 구하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플루타크는 이 꿈들에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올림피아스가 결혼식 전에 임신했다는 것을 그녀의 배의 인장이 나타낸다거나 알렉산더의 아빠가 제우스라는 것이다. 고대의 시사가들은 알렉산더의 신성한 혈통을 널리 알린 올림피아스의 야심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알렉산더가 태어난 날 필리포스2세는 전쟁 준비를 하고있었다. 같은 날 왕은 파르메니온이 일리안과 파오에니안 연합군을 무찔럿단 소식을 들었고, 그의 말은 올림픽 게임에서 승리하였다. 또한 그날엔 에피수스에 위치한 아르테미스신전이 소실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이 사건에 대해 알렉산더의 출생을 목격하기 위한 아테네가 자리를 비워 신전에 불이 난 것이라고 설명된다. 이러한 전설은 알렉산더가 왕이 된 후에 나타났고 어쩌면 그가 초인이며 애처부터 위대한 성취를 달성할 운명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스스로 찾아낸 것 일 수도 있다

그는 생의 초기에 클레이투스의 여동생인 라니케에 의해서 양육되었고 시간이 지나 올림피아스의 친척인 엄격한 레오니다스에게 교육받았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귀족을 양육하는 방식으로 읽기, 악기, 놀기, 말타기, 사냥, 싸움 등을 교육받았다

알렉산더가 열 살이 되던 해 테실리아의 상인이 왕에게 13 탈렌트 짜리 말 한 마리를 가져왔다 말은 왕을 태우지 않으려 했기에 말을 치워버리라고 명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말이 자신의 그림자를 무서워하는 것을 감지했고 말을 길들이라는 명령을 받고 성공시켰다 플루타크는 왕이 이 용기있는 행동을 보고 그의 아들을 기쁘게 껴안으며 “아들아 너의 야망에 맞는 왕국을 만들어라 마케도니아는 너무 작다“ 라고 말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말을 알렉산더에게 주었다 알렉산더는 말을 황소머리라는 뜻의 부케팔라스라는 이름을 지었다 부케팔라스는 알렉산더를 인도까지 태웠다 그 말이 죽을때 알렉산더는 도시의 이름을 말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알렉산더가 열 세 살이 되었을 때 왕은 그를 위한 교사를 찾기 시작했고 이소크라테스나 세페우시푸스같은 학자를 눈여겨 보았고 결국에 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골랐고 신전을 교실로 제공했다 알렉산더를 가르친 대가로 왕은 본인이 파괴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했고 노예가 된 전 시민들을 다시 사들이거나 해방시키고 추방자들을 용서하여 도시에 다시 인구를 채워넣었다

미에자는 알렉산더와 동문수학한 친구들에게 기숙학교와 같았다. 이중 많은 학생들은 알렉산더의 친구 또는 미래의 장군이 되었고 차후에 the companions로 알려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와 친구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쳤고 그의 지도 아래에 알렉산더는 호머의 작품 특히 일리아드에 관심을 가지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에게 주석이 달린 복사본을 주었고 그는 전쟁까지 그 사본을 들고다녔다

정복의 시기[편집]

열여섯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받던 교육을 마치고 왕은 알렉산더를 섭정으로 남기고 비잔티온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왕의 부제기간 중 트라키아는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알렉산더는 빠르게 대응해 그들을 고향에서 쫒아냈다. 그리고 그리스와 함께 식민지화 시키고 알렉산드로폴리스라고 이름지었다.

왕은 돌아와서 알렉산더를 트라키아 남쪽의 반란을 누르기 위해 약간의 군대와 함께 파견했다 동안에 암피사에서는 델파이 옆에 아폴로 신전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신성모독은 필립에게 더 많은 그리스 내정 간섭을 용이하게 해 줄 것이었다. 테라키아 내전이 지속중인 상태에서 필립은 알렉산더에게 그리스전을 위한 병력을 모으라고 명한다. 그리스의 다른 주가 끼어들 것을 우려하여 알렉산더는 그 병력이 일리어라 지방을 공격하기 위한 것 처럼 눈속임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일리어라는 마케도니아를 침략했고 알렉산더에게 격파당했다.

BC338년에 왕은 그의 아들고 합류했고 테르모필레를 지나 남쪽으로 진격했고 테베 수비군의 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점령했다 아테네와 테베쪽으로 며칠간의 행군 뒤에 그들은 엘라테아 지방을 점거하기 원했다. 데모스테네스가 이끄는 아테네군은 마케도니아에 대항해 테베와의 동맹을 원했다 마케도니아와 아테네 양 쪽 다 테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외교사절단을 보냈고 결국 테베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다. 필립은 엠피사로 진격하여 데모스테네스가 보낸 용병들을 잡으며 도시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필립은 엘라테아로 돌아와 아테네와 테베에 마지막 평화제안을 보냈고 양쪽 모두 거절했다.

필립이 남쪽으로 진격하자 적들은 케에로니아, 보에오티아에서 그를 막아섰고 뒤이은 케에로니아 전투에서 필립은 우익 알렉산더는 좌익을 지휘하고 그의 믿을만한 장군들을 동행했다 고대 정보에 따르면 양쪽 모두 거칠게 싸웠다 필립은 아테네의 적군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좌익을 후퇴시키고 그리하여 그들의 대열을 부쉈다. 알렉산더가 처음으로 테베군의 대열을 부수고 좌익이 따라붙었다. 적군의 응집력에 피해를 입혔기에 필립은 전방으로 계속 압박하고 적군을 빠르게 둘러쌌다. 아테네의 패배로 인해 테베군은 항복했고 좌군은 계속 항전했으나 패배했다. 케에로니아전을 승리한 이후 왕과 아들은 저항없이 펠로폰네스로 진격해 모든 도시에 환영을 받았으나 스파르타에 도착한 후 스파르탄들은 저항했지만 전쟁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코린트에서 왕은 헬레닉 동맹을 창설했고 스파르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가 포함됐다 필립은 그당시 동맹 내에서 헤가몬(최고지휘자)라고 불렸고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할 계획을 발표했다.

필립이 마케도니아에 돌아와 그의 장군 아탈루스의 조카인 클레오파트라 유리다이스와 사랑에 빠져 결혼식을 올렸고 그 아들은 완벽한 마케도니아 혈통이기에 결혼은 알렉산더의 왕위계승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혼식 연회때 취한 아탈루스는 공석에서 신에게 이 결혼이 완벽한 혈통을 만들기를 신께 빌었다 삼촌 아탈루스는 취한채로 마케도니안은 신에게 그의 조카를 통한 왕국의 적법한 후계자를 간청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것은 알렉산더의 신경을 거슬러 알렉산더는 컵을 아탈루스의 머리에 던져버렸다. “나쁜 놈 내가 서자라는 것인가?” 라고 말했고 왕은 아탈루스의 편을 들어 일어나 알렉산더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요행인지, 성급한 분노인지, 와인에 취한 탓이지 그는 발을 헛딛어 바닥에 넘어져버렸다. 알렉산더는 눈을 흘기며 왕을 모욕했다 “이것 봐라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정복하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옆 자리로 가는 것도 못해서 넘어지다니“

알렉산더는 엄마와 마케도니아에서 도망쳤고 에피러스의 왕이며 엄마의 오빠인 알렉산더 1세에게 엄마를 위탁했다. 그는 일라이리아로 계속해서 갔고 몇 년 전에 전투에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님처럼 다뤄졌다. 그러나 필립은 정치, 군사적으로 교육받은 왕자를 버릴 생각은 없었고 그래서 두 그룹의 사이를 조정한 가족의 친구인 데마라투스의 노력으로 6개월 뒤에 마케도니아로 복귀하게 된다.

다음해 카리아의 페르시안 지도자인 픽소다루스는 그의 큰딸과 알렉산더의 이복형제인 아르히데우스의 결혼을 제안했다. 올림피아스와 몇몇 알렉산더의 친구는 왕이 아르히데우스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필립의 의도라고 생각했고. 알렉산더는 사절단을 보내 응답했다, 테살루스는 픽소다루스에게 적법한 후계자가 아닌 아들과의 결혼하면 안된다고 제안하며 알렉산더를 대신해서 추천하였다. 필립은 이 이야기를 듣고 협상을 멈추고 알렉산더가 더 좋은 아내를 구했으면 좋다는 이유와 함께 꾸짖었다. 그는 알렉산더의 친구 4명을 추방하고 테살루스를 속박하여 데려오라고 코린티아에게 명하였다.

BC336년의 여름 왕의 딸인 클레오파트라와 올림피아스의 오빠 알렉산더1세와의 결혼식이 열렸고 왕은 그의 경호대의 대장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한다 그는 도망치려했지만 덩굴에 걸려 넘어지고 알렉산더의 동행을 포함한 그의 추종자에게 죽임당한다. 그로인해 알렉산더는 귀족과 군대의 지지로 스무 살에 왕으로 추대된다.

알렉산더는 그의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그의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친족을 제거하고 또한 두명의 마케도니안 왕자도 죽엿지만 세 번째 왕자 알렉산더 린세스테스는 살려주었다. 올림피아스와 필리포스 2세 사이에서 낳은 클레오파트라 유리다이스와 유로파가 있었는데 산 채로 사형당다는 소식을 알렉산더가 듣고 격분했고 클레오파트라의 삼촌이자 소아시아 군의 선발대 사령관인 아탈루스를 죽이라 명했다.

아탈루스는 그 당시 아테네의 결함의 가능성에 대하여 데모스테네스와 연락하고 있었고 알렉산더를 심하게 모욕했고 클레오파트라를 죽여 그를 살려두기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아리히데우스는 정신적 불구가 되었기 때문에 살려두었고 아마도 올림피아스에 의한 독을 먹인 탓일 것이다

필립의 죽음은 아테네, 테베, 테살리 마케도니아 북부에 위치한 트라시아 등 여러 도시의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 소식이 알렉산더에게 닿았을 때 그는 빠르게 대응했다 정치적으로 대응하라는 조언을 듣고도 그는 3천의 본국 기병을 징집하여 테살리로 향했다. 그는 올림푸스산과 오사산 사이 길목에 위치한 테살리안 군을 찾아냈고 병력을 오사산으로 향했다 적군이 다음날 일어났을 때 그들은 알렉산더가 기병과 함께 뒤에서 바로 포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알렉산더아테네는 평화를 원했고 알렉산더는 반역자를 용서했다.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의 유명한 일화는 알렉산더가 코린트에 머물 때 일어났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에게 무슨 소원을 들어줄까 라고 물어보니 철학자는 귀찮다는듯이 알렉산더에가 햇빛을 가리고 있다고 옆으로 비켜달라고 했다. 알렉산더는 기뻐하며 참으로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저런 사람이 되고싶다고 말했다. 코린트에서 알렉산더는 헤게몬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페르시아를 향한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준비하는 동안 테라시안 폭동을 보고받았다.

아시아를 지나기 전에 알렉산더는 북쪽 경계를 안전하게 만들길 원했다 BC335년에 그는 몇몇 반란을 진압하려고 출정했다. 엠피폴리스에서 출발하며 그는 자유 테라시안의 국가가 있는 동쪽 해무스로 진군하며 트라키아 군을 물리치고 마케도니아군은 트리발리로 진군했고 리지누스강에서 적을 무찔렀다 알렉산더는 3일을 데누베로 진격하여 강 반대편에서 게테 부족을 마주쳤다. 그는 밤에 강을 건너 그들을 놀래키고 첫 소규모 기병충돌 이후 그들이 후퇴하도록 만들었다.

일리어라의 왕인 클레이투스가 알렉산더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출정한 알렉산더는 계속해서 승리했고 두 지도자를 도망치게 만들었다 이 승리와 함께 그는 북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알랙산더가 북쪽에서 전쟁중일때 테베와 아테네는 다시 반기를 들어 알렉산더는 즉시 남쪽으로 향했고 다른 도시는 다시 망설이는동안 테베는 싸우기로 했지만 저항은 무의미했고 알렉산더는 도시를 파괴하고 다른 보에티안 도시들 사이로 나눠버렸다 테베의 멸망은 아테네를 주늑들게 했고 테베를 파괴한 것은 전역을 평화롭게 만들었고 안티페이터를 대리인으로 세운 알렉산더는 아시아전쟁을 시작했다.

페르시아의 정복[편집]

알렉산더군은 BC334년 헬레스폰트를 6100명의 기병과 38000명의 선원을 태운 120척의 배를 포함한약 41800명의 병력과 함께 건넜고 마케도니아와 다양한 그리스 도시국가 용병과 봉건적으로 징집된 병사들로 구성되어있었다 (기록자마다 말이 다른 부분) 알렉산더는 창을 아시아 땅에 꽂으며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말하며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정복할 야망을 포였다. 이것은 또한 전쟁을 향한 열망과 아버지의 정치선호적인 부분과 반대된다.

초기의 페르시아군과 그라니쿠스전에서 승리한 후 BC334년 4월 8일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지방수도와 사르디스의 재무금고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그는 아오니아 해안선을 따라 계속 진격했고 도시들마다 자치권과 민주주의를 승인하였다 아르케메네스군이 지키는 밀레토스는 정교한 페르시아 해군을 상대로 정교한 공성전을 필요로 했다 더 남쪽 카리아의 할리카르나수스에선 알렉산더가 성공적으로 그의 첫 대규모 공성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적 로데스의 용병수장 멤논과 페르시아 카리아의 총독 오론토바트스를 바다로 철수시켰다 알렉산더는 카리아정부를 떠나 차후에 알렉산더에게 선택되는 아카톰니드 왕조의 일원인 아다로 향했다 할리카르네수스로부터 알렉산더는 리카아 산까지 진격했고 페르시안 해군기지를 저지하기위해 팜필리안평야에서 해안도시들을 공격했다 팜필리아로부터 해안가까지 주요한 항구가 없기에 알렉산더는 섬으로 향했다 테르메소스에서 알렉산더는 피디시안을 모욕했으나 난장판으로 만들진 않았다 고대의 고르디움의 수도에서 알렉산더는 아무도 풀지 못 한 고디안 매듭을 풀었고 알렉산더는 매듭을 어찌 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칼로 매듭을 베었다.

알렉산더는 시리아와 레벤트의 해안가를 정복하는 작업을 계속했고 332BC 그는 튀루스를 공격했고 긴 공성전 끝에 점령한 후 성인 남성은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는 노예로 팔아버렸다. 알렉산더가 튀루스를 파괴했을때 이집트로 가는 길목의 대부분의 마을은 빠르게 항복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해를 입히지 않고 남쪽 이집트로 향했다 그러나 가자의 저항을 직면한 알렉산더는 강하게 무장된 언덕에 위치한 공성전을 요하는 기지를 마주했다. 알렉산더의 공학자는 높은 위치를 근거로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으나 이것은 알렉산더의 의욕을 높일 뿐이었다. 3번의 성공적인 공성전 이후에 기지는 함락되었다 알렉산더가 심각한 어께부상을 당하기 전이었고. 튀루스 지방에서 성인 남성은 사형당하고 여자와 아이는 노예가 되었다.

알렉산더는 332BC년 후반기에도 계속해서 이집트로 진격했고 그는 해방자로 여겨졌다. 그는 리비안 사막에 있는 시와 오아시스의 예언에 나와있는 아몬의 아들이라고 칭송되었고 그러므로 알렉산더는 자주 제우스 아몬이 그의 진정한 아버지로 여겨졌으며 그가 죽은 이후 그의 신성함의 상징으로 양의 뿔이 동전에 묘사되어있다 그가 이집트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이집트에 지었고 그의 죽음 이후 프톨레미오스 왕조의 번영하는 수도로 사용되었다. BC311년 알렉산더는 이집트를 떠나며 동쪽 메소포타미아로 향하며 가우가멜라전투에서 다리우스를 다시 물리쳤다 다리우스는 한번 더 도망쳤지만 알렉산더는 아벨라까지 쫒아갔다. 가우가멜라전은 양쪽의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충돌이었고 다리우스가 산을 넘어간 동안 알렉산더는 바빌론을 점령했다. 바빌론으로부터 알렉산더는 아케메니드왕조의 수도인 수사까지 도달했고 재무관을 생포했다 그는 병력의 대부분을 왕의길을 따라 페르시아의 의식용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로 보냈다. 알렉산더는 스스로 도시로 직행하는 군에 자원했다 그리고 그간 아리오바르자네스군에게 계속해서 막혀온 페르시안 게이트의 관문을 기습했고 그리고 수비군이 재무관을 털기 전에 빠르게 진행했다.

페르세폴리스로 들어가는 중에 알렉산더는 부하들이 도시를 며칠간 약탈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알렉산더는 수도에 5달간 머물렀다. 그가 머무는 동안 불이 적시스의 동쪽 입구에서 번져나와 도시로 퍼졌다, 음주사고이나 적시스의 두 번째 페르시안 전쟁 기간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운 것에 대한 고의적인 복수의 가능성을 수반했다 1년 뒤 그가 태운 도시를 다시 방문하며 알렉산더는 불태운 것을 후회했고 플루타크는 알렉산더가 멈추고 적시스에게 살아있는 사람인 것 처럼 말을 걸었던 얘기를 기록했다. “그리스 침략으로 인해 누워있는 당신을 두고 지나가야 하나 아니면 당신의 위대함이나 다른 면의 미덕 때문에 다시 한 번 기념비를 세워줘야 하나?”

알렉산더는 곧 다리우스를 추격했고 처음으로 미디아와 파르티아로 진격했다 페르시아 왕은 더 이상 자신의 왕조를 지킬 능력이 없었고 그의 그리스인 총독이자 친척인 베수스에게 잡혔다 알렉산더가 도착하자 베수스는 중앙 아시아 깊이 후퇴해 게릴라전을 진행하려는 다리우스를 죽이고 스스로 다리우스의 후계자라고 칭했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시체를 화장해 그의 아케메네스 왕조 전임자의 법적인 묘지에 묻었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가 죽어가며 자신을 다음 왕위계승자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아케메네드 왕조는 다리우스와 함께 멸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알렉산더는 베수스를 왕위 강탈자로 여기고 그를 무찔렀다 이 전쟁은 중앙 아시아쪽을 목표로 한 거대전쟁으로 변했다. 알렉산더는 여러 도시들을 더 찾아냈고 전부 알렉산드리아로 명했다. 이 전쟁동안 알렉산더는 메디아, 파르티아, 아리아, 드란지아나, 아라코시아, 박트리아, 스키타이를 점령했다.

스피타메네스, 소그디아나에서 명확한 편을 밝히지 않았던 그는 329BC 베수스를 배신하고 알렉산더의 믿음을 받던 프톨레미에게 붙었고 베수스는 처형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 알렉산더는 아크사르에서 유목민족의 기습을 다루고 있었는데 스피타메네스는 소그디아나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더는 스키타인 군대를 개인적으로 아크사르 강에서 물리치고 스피타메네스를 향해 출발했고 가바이전투에서 그를 무찔렀고 후에 스피타메네스는 평화를 원한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인도 공략[편집]

스피타메네스의 죽음 이후 그와 록사나의 결혼은 총독부와의 관계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알렉산더는 인도원정에 나섰다. 그는 현재 파키스탄부의 전 족장을 초대해 그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할 의도였는데. 인더스부터 하이다스페스까지 이르는 영역을 가지고 있는 왕 옴피스는 알렉산더에게 순응했지만 산악지역의 족장들은 복종을 거부했다.

327~326BC의 겨울 알렉산더는 여러 부족들을 상대로 직접 전쟁을 지휘했다 치열한 경쟁에 알렉산더의 어깨부상이 뒤따랐지만 결과적으로 승리한 알렉산더는 적장을 마주했다. 마사가 요새는 알렉산더에게 발목부상을 입었지만 며칠의 전투 끝에 몰락했다 커르티우스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마사가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했다 비슷한 학살이 오르아에도 자행됐고 그 여파로 많은 부족민들이 아르노스 요새로 도망쳤고 며칠간의 전쟁 끝에 바로 뒤따르던 알렉산더군은 언덕 요새를 점령했다.

아르노스 이후 알렉산더는 인더스를 건너며 포루스를 상대하며 그의 용맹함에 감명받은 알렉산더는 그를 동맹으로 만들고 총독으로 삼았다 그리고 원래 영역 이상의 땅을 더해주었다 그리고 그리스인 중 포루스의 통치를 도울 사람을 뽑았다. 알렉산더는 하이다스페스강 반대편에 두 도시를 찾아 그의 말의 이름을 따 부카펠라스라는 이름을 짓고 다른 도시는 니케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갠지스 강 옆 동포루스 왕국은 난다제국이었고 더 동쪽으론 강가리다이제국이었다. 계속된 전쟁으로 다른 거대한 군과 충돌하는 것을 두려워한 알렉산더군은 하이페시스강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동쪽으로 넘어가길 거부했다. 그러므로 이 강은 알렉산더의 제국의 가장 동쪽이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안들은 포루스와의 결투가 이들의 용기를 흐리고 인도로 더 진출하지 못하고 머물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2만의 보병과 2천의 기마만 모아온 적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알렉산더의 의견을 강하게 반박했으나 강의 깊이와 폭은 너무 넓었고 상류의 둑엔 무장된 병사와 말, 코끼리로 가득했다. 적국은 8천의 기병, 2만의 보병 , 8천의 전차와 6천의 전투코끼리를 준비시켜 놨다는 말이 퍼져왔다.

알렉산더는 더욱 진격하자고 설득했지만 크라테루스가 병사들은 가족과 고향을 보길 원한다고 알렉산더를 설득해 마침내 동의하고 남쪽으로 말머릴 돌려 인더스강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말리와 다른 부족을 정복하고 공성기간의 부상을 회복했다.

죽음[편집]

BC323 알렉산더는 32세에 바빌론에서 사망하였다. 알렉산더의 사망엔 두가지 다른 이야기가 있고 서로 세부적인 내용이 다르다. 플루타크는 알렉산더의 사망 14일 전에 해군 제독과 밤을 세워 놀았고 다음날 라라시아의 메디우스와 또 술을 마셨고 다음날 고열이 발생했는데 소리조차 내지 못 할 정도였다. 그의 사망을 걱정한 일반 병사들은 조용히 그들을 향하여 손을 흔드는 알렉산더의 옆을 지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다른 이야기들은 디오도루스는 알렉산더가 헤라클레스를 기리는 섞이지 않은 큰 와인잔을 다 비운 후에 11일간을 앓아 눕고 고통스러워 했다. 열병까지 발전되진 않았지만 그는 괴로워하며 죽었다. 아리안 또한 이렇게 주장하였지만 플루타크는 강하게 부인하였다.

마케도니안 귀족을 암살하는 경향을 가정하면 살해당한 것 같은 특징이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디오도루스, 플루타크, 아리안 그리고 저스틴은 알렉산더가 독살됐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저스틴은 알렉산더가 독살음모의 피해자라고 말한다 플루타크는 다리우스와 아리안은 둘 다 그들이 일부분 만을 이야기할 뿐이라고 이것을 날조된 정보라고 반박한다. 그 설명은 최근에 마케도니안 총독에 의해 제거된 안티페이터를 전혀 공정하게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한다. 안티페이터는 알려진대로라면 그의 아들에게 알렉산더가 독살되도록 준비했고 아리스토텔레스마저 관여되어 있을 수 있다.

독살설의 가장 강한 논쟁은 그가 아프기 12일 전과 그의 죽음 사이의 기간이다 그만큼 장기간 효과가 지속되는 약은 당시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2003년 BBC 다큐멘터리에서 알렉산더의 죽음을 조사하며 뉴질랜드 국가 독극물센터의 레오는 하얀 헬레보레가 고대에도 사용되었기에 그것으로 독살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2014년 clinical toxicology schep 원고에서 알렉산더의 와인이 베라트럼 앨범이 들어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알렉산더의 로멘스를 설명하는 사건의 과정과 중독증상이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베라트럼 앨범 독살은 장기적인 과정이 될 수 있고 이것을 알렉산더의 사인을 잘 설명하기에 가장 적당한 이유를 제공한다. 다른 독살 설명은은 2010도로 앞당겨 그의 죽음이 위험한 박테리아로 오염된 스틱스강물을 마신 것 이라고 주장한다

몇 가지 자연질병같은 이유가 제시되었고 뉴잉글랜드의 의학저널은 그의 죽음을 장기 천공에 의한 장티부스 감염으으로 인한 마비증세라고 서술했다. 최근의 다른 분석은 화농성 척추염이나 뇌수막염이라고 한다 사망원인과 비슷한 다른 병은 나일강 서부 바이러스와 급성 췌장염을 의심중이다. 자연적 원인 이론은 또한 알렉산더의 건강이 과도한 음주와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몇 년에 걸쳐 악화된 점을 강조한다. 헤파이스티온의 죽음 이후 알렉산더가 느낀 고통 역시 그의 건강 악화에 일조했을 것이다.

알렉산더의 시체는 사람과 비슷한 석관에 꿀을 가득 채워둔 상태로 매장되었고 오스트리아의 골든 켓스켓에 위치해있다. 아엘리안에 따르면 아리스텐더라는 예언가는 알렉산더가 잠든 곳은 행복하고 절대 점령당하지 않을 곳 이라고 예연했다 아마도 십중팔구 후계자는 시체를 적법성의 상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전 왕의 무덤은 국왕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장례 행렬은 마케도니아로 향했지만 프톨레미는 멤피스로 행했다 프톨레미의 마지막 계승자 중 하나인 프톨레미 9세는 알렉산더의 석관을 유리로 바꿔 안에 있던 동전을 바꿀 수 있게 만들었다. 최근 북부 그리스에서 발견되는 많은 수의 무덤이 알렉산더의 생몰년도와 비슷해 그것의 원래 목표는 알렉산더를 묻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사고 있다. 이것은 알렉산더의 장례 행렬의 목표지와 일치했을 것이다.

폼페이와 시저 아우구스트스 모두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무덤을 방문했고 칼리굴라는 알렉산더의 흉갑을 사용하려 무덤에서 꺼내갔다고 한다. 기원후200년경 셉티무스 황제는 알렉산더의 무덤 공개를 금지했다 그의 후계자는 재임기간 무덤을 방문했지만 그 후 무덤의 운명은 모호해졌다.

시돈 근처에서 발견된 지금은 이스탄불 유적 박물관에 있는 알렉산더의 석관이라 불리는 것은 알렉산더의 유해를 가지고 있기에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니라 얕은 양각으로 알렉산더와 동료들이 페르시안군과 싸우고 사냥하는 것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래 이수스 전투 이후 알렉산더에 의해 즉시 임명된 왕인 압달로니무스의 석관으로 여겨졌으나 최근 그것은 압달로니무스의 죽음보다 먼저 만들어 진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알렉산더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워 그의 사망소식이 그리스에 닿았을때 아무도 즉각 믿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적법한 후계자가 없었다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 4세는 그의 사후 이후에 록시나가 낳은 아들이었다.

제국의 통치[편집]

알렉산드로스 제국(마케도니아 제국)의 영토

알렉산드로스는 동서 융합책을 꾀했다. 우선 다수의 그리스 사람을 소아시아(현재의 터키)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그리스 사람과 피정복 지역의 주민들을 결혼시켰고 페르시아인 관리들을 등용했다. 그 자신도 페르시아의 군주이자 적이었던 다리우스 3세의 딸과 결혼했으며, 페르시아 여성과 자신의 그리스 군인들간의 사실혼을 정식 결혼으로 인정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동서 융합 정책은 동방과 서방문화를 융합시켜 불교 미술에도 영향을 끼쳤고, 이로 인해 간다라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 양식이 만들어졌다.

그는 정복지의 여러 곳에 알렉산드리아란 이름을 붙인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는 헬레니즘 문화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도시들 중 이집트알렉산드리아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대제국의 왕이면서도 호사를 멀리하고 절도의 덕을 간직한 인물이었다.

제국의 분열[편집]

다이오도루스에 따르면 알렉산더의 장군들은 그에게 사후에 왕국을 물려주고 임종을 지켜볼 자가 누군지 물어보았는데 가장 강한 자라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리안과 플루타크는 알렉산더가 그 시점에서 말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그것은 출처가 불분명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디오도루tm, 커르티우스 그리고 저스틴은 알렉산더가 자신의 인형이 박힌 반지를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컴퍼니온 기병의 리더인 페르디카스에게 주었고 이것은 그를 후계자로 임명했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페르디카스는 즉시 그런 주장을 펴지 않았고 록시나의 아이가 아들이라면 왕이 돼야 한다고 그라테루스, 레오나투스, 안티페이터와 함께 후견인으로서 말했다. 그러나 멜레아거의 명 아래의 어린아이는 이 조약이 본인 없이 체결 된 것이라며 거절했고 알렉산더의 이복동생인 필립 아리히데우스를 추천했다. 결국 양쪽은 타협에 이르렀고 알렉산더 4세의 출생 이후 필립 3세는 이룸뿐이지만 왕이 되었다.

바빌론부는 점차 권력의 중앙이 되었고 각각의 장군이 권력을 낙찰하곤 했다. 페르디카스 암살후 마케도니안군은 붕괴했고 40여년간의 계승전쟁이 헬레니즘 세계가 안정된 구역으로 공고해지기 전에 발생했다. 프톨레믹 이집트, 셀레우시드 메소포타미아와 중앙 아시아, 아틀리드 아나토니아, 안티고니드 마케도니아, 그리고 진행과정중 알렉산더4세와 필립3세가 모두 살해당했다.

디오도루스는 알렉산더가 크라테루스에 자세한 지침을 사망 전에 전달했다고 한다 크라테루스는 알렉산더의 명을 이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계승자들은 더 이상 시행하기 않기로 하고 그것들은 터무니없고 말도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더가 가진 군에 대한 의지를 읽어냈다.

헬레니즘 문화[편집]

알렉산더의 유산은 그의 군사적인 정복을 넘어섰다. 그의 전쟁은 동 서양간의 접촉과 거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고 동부의 많은 지역이 그리스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세운 일부 도시들은 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대다수가 21세기에도 존재한다. 그의 서기관이 기록한 그가 정복한 곳 까지의 영토기록은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지중해 넘어서의 세계에 속해 있다고 믿었다는 가치있는 기록이다.

알렉산더의 가장 직접적인 유산은 거대한 아시아 땅에 마케도니아 문화의 적용이었다 그가 사망한 시점에서 제국은 5200000 km^2(2000000 sq mi)였고 그 시대의 가장 큰 제국이었다 200-300년이 지나서까지 대부분의 지역은 마케도니안의 손아귀에 있었고 후계자들은 적어도 초기엔 거대한 힘이었고 이 300년간은 헬레니즘 기간이라고 자주 언급된다 라고 말했다.

그의 제국의 동쪽은 생전에도 붕괴가 진행됐다 그러나 그가 북서부 인도대륙에 남긴 힘의 부재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인도왕조의 탄생을 만들었다. 이런 이점을 이용해 찬드라굽타 마우리 왕조는 다시 번잡의 통제권을 되찾았고 난다 제국을 정복한 힘을 기본으로 삼았다.

정복 이상으로 알렉산더는 그의 이름을 딴 도시를 스무 개 만들었고 대부분은 티그리스 강 동쪽이다 처음이자 가장 커더란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에 있고 지중해 도시중 가장 번성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 도시의 위차는 수비와 무역로를 동시에 고려해서 자리잡았다. 알렉산더의 사후 이집트의 많은 그리스인은 그리스로 돌아가려 시도했고 정교한 공공건물과 본질적인 인구수는 지역민과 그리스인 양쪽을 포함했다.

헬레니즘화란 단어는 독일 역사가 조안 구스타브 드로이센이 그리스 언어 문화 인구가 알렉산더의 정복 이후 예전 페르시아 제국에 어떤 식으로 퍼졌는지를 표시하기 위해 만들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지고 오늘날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셀레루시아같은 곳에서 보여진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문화를 페르시아에 주입시키기 원했고 두 문화의 융합을 시도했다. 이것은 알렉산더가 동서양을 평준화하려는 열망으로 끝이났다. 그러나 그의 계승자들은 분명히 이런 정책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헬레니즘은 전역에 걸쳐 나타났고 계승자의 국가엔 동양화가 나타났다.

헬레니즘 문화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아테네 것이었다 그리스인과 그리스 넘어 마케도니아군의 밀접한 관계는 아테네 기반 방언에 의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 그리스어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퍼져나갔고 현대 그리스의 선조와 헬레니즘 문화권의 국제어가 되었다. 게다가 헬레니즘 시대의 도시계획, 교육, 지방정부와 문화는 고전적 그리스적 생각에 기반을 두었고 헬레니즘 그룹으로 여겨지는 것과 다르게 진화했다.

알렉산더와 그의 업적은 많은 로마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특히 장군들은 그들을 알렉산더의 업적과 비교하길 좋아했다. 폴리비우스는 그의 역사를 로마인들이 알렉산더의 업적을 자신의 것과 비교하게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고 폼페이우스는 매그너스란 칭호와 알렉산더의 머리모양을 따라했고 당시에 위대함의 상징으로 여겨진 260여년 된 알렉산더의 망토를 찾기 위해 정복한 영토의 동쪽을 수색했다. 카이사르는 린시페안의 승마상의 알렉산더의 머리를 자신의 것과 바꾸었으며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무덤을 방문했고 일시적으로 그의 문장을 스핑크스에서 알렉산더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트로이의 황제 역시 알렉산더를 존경했고 네로와 카라칼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크리누스로부터 제국의 왕좌까지 간단히 올라가보면 마크리아니도 보석 또는 옷에 수를 넣어 알렉산더의 모습을 그들의 사람에 세겨넣었다.

반면 어떤 로마 작가들은 특히 공화당 사람들은 알렉산더를 독재적인 경향이 공화정의 가치를 얼마나 잘 지킬수 있는 지에 대한 경각심을 줄 이야기로 사용했다 알렉산더는 또한 우정과 관용에 대한 군주의 가치에 대한 본보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또한 분노와 영광을 향한 과도한 집착의 예였다.

개인사[편집]

알렉산더의 용모는 리시푸스가 만든 조각상에서 가장 잘 들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조각가가 혼자 조각했지만 알렉산더는 그것을 보고 마치 자신을 보고 만든 것 같다고 표현했다. 이런 특이성으로 그의 많은 후계자들과 친구들이 나중에 모방하려 노력했고 다시말해 왼쪽으로 살짝 굽은 목의 균형과 그의 애간장을 녹이는 눈빛을 조각가는 정확하게 관찰했다. 그러나 아펠레스는 그의 인상을 정확하게 잡아내지 못하고 더 어둡고 거무스름하게 나타냈다 그는 상당한 색채의 물감이 있었으나 그의 가슴과 얼굴을 불그스름하게 나타냈다. 더욱이 그의 피부가 뿜어내는 기분조은 냄새와 입과 전신에서 나오는 향기 있어 그의 의류는 항상 그 냄새가 베어 있었고 이것은 아리스토제누스의 기억에서 우린 읽어볼 수 있다.

용모가 보기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마케도니안 기준에서도 그는 다부지고 용맹했지만 키가 작았다. 그의 턱수염은 드문드문 나 있어서 마케도니아의 털 많은 귀족들이 면도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목은 좀 뒤틀려있어서 그는 약간 위쪽을 향해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오드아이는 여성처럼 반짝거렸고 좋지못한 고음의 거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의 작가들은 알렉산더가 리시포스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정말 기뻐하며 그의 모습을 담은 다른 작품들을 금지시켜버렸다. 리시포스는 자주 알렉산더와 다른 인사들의 조각상 계획을 위해 불려갔고 자연적인 묘사로 유명했으며 그의 정적인 자세의 작품은 가장 믿을만한 묘사로 여겨진다.

그의 가장 강한 개성은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의 엄마는 커다란 야망이 있었고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라 교육시켰다. 엄마의 교육은 그에게 운명이라는 느낌을 주입했고 플루타크는 그의 야망은 그의 정신을 인생 초기부터 진지하고 숭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직접적이고 영향이 큰 모범이었던 필립 2세는 어린 알렉산더에게 항상 심각한 부상도 무시하며 계속해서 이겨나가는 전쟁을 어린 시절부터 참관하게 만들었다 알렉산더와 아빠의 관계는 그의 성격이 경쟁적이게 만들었다. 그는 아버지보다 잘 해야 했으며 전쟁중의 무모한 행동에서 그런 성향이 잘 나타난다. 알렉산더는 아빠가 세상에 보여줄 아무런 위대한 성과도 그에게 남겨주지 못할까 걱정했고 또한 아빠의 업적을 그의 동료들의 업적보다 낮게 생각했다.

플루타크에 따르면 알렉산더의 성격은 매우 급하고 충동적이며 사납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업적에 영향을 미쳤다. 알렉산더가 고집이 세고 아버지의 명령도 잘 듣지 않았지만 그는 자주 토론에서 이성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차분한 관점에서 볼 수 있고 논리적이며 계산적이다. 그는 지식에 대한 커다란 열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철학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했다. 이것은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일 것이다 알렉산더는 지적이었고 빨리 지식을 흡수했다. 그의 지적이고 이성적인 면은 그의 장군으로서의 성공과 그의 능력이 충분히 증명한다. 그는 육체의 만족을 잘 절제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음주는 절제하지 못했다.

알렉산더는 예술과 과학 모두에 학식있고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운동과 올림픽에 아버지완 다르게 별 관심이 없어 오로지 커다란 이상의 명예와 영광을 추구 할 뿐이었다. 그는 대단한 카리스마와 힘있는 성격을 가졌고 그것들이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었다. 그의 독특한 특징은 다른 어떤 장군도 마케도니아와 나머지 제국을 그가 죽은 다음 통합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오로지 알렉산더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말년에 특히 헤파이스티온의 죽음 이후 알렉산더는 과대망상과 편집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스스로의 형언할 수 없는 운명과 친구들의 아첨과 엮인 그의 위대한 업적은 아마도 이런 증상을 나타내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의 엄청난 망상은 그의 유언장과 세상을 정복하려는 욕망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다. 다양한 작품에서 그의 끝없는 욕망을 묘사하는 한 그의 욕망과 관련된 별칭은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고정적으로 후세에 전달 될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신이라는 점을 믿었던 것 같으며 적어도 신이 되려고 했던 것 같다. 올림피아스는 항상 그가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고 시와에 아문에서 그에게 신탁을 내린 것으로 그 설명은 확인된 것 같다 그는 스스로 제우스-아문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궁정에서 페르시아 관습을 사용했지만 마케도니안들은 거부했고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런 행동은 궁정 내의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으나 알렉산더는 실용적이었기에 대부분의 왕국에서 왕이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문화적으로 거리가 있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과대망상보다 그의 행동은 단순히 그의 권력을 지키고 왕국을 계속 뭉쳐놓으려는 실용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세 번 결혼했다 박트리안 귀족 옥시라테스의 딸인 록시나와는 사랑해서, 페르시아 공주 스타테이라2세와 파리사티스2세 전자는 다리우스의 아들이며 후자는 아르타적시스3세의 딸이며 정치적인 이유로, 기는 정식으로 두 아들이 있는데 하나는 마케돈의 알렉산더4세 록시나의 아들이며 다른 하나는 마케도니아의 헤라클레스 그의 정부인 바사인과 낳은 아들이다 다른 아들은 록시나가 바빌론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다.

알렉산더는 또한 그의 친구, 장군들과 보디가드인 헤파이스티온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다들 마케도니아 귀족의 아들들이었다.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은 알렉산더를 망쳐놨다 그 사건은 알렉산더의 건강을 망치고 그의 사망 직전에 정신줄을 놔 버린 계기였다.

알렉산더의 성생활은 추측과 논쟁으로 주관적이다 고대의 어떤 기록도 알렉산더가 동성애자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알렉산더와 헤파이스티온의 관계가 성적이라는 증거도 없다. 아엘리안은 그러나 저작 [알렉산더의 두 번의 트로이 방문]에서 알렉산더가 아킬레스와 헤파이스티온의 무덤에 화관을 씌웠고 그가 알렉산더의 연인이었고 또한 파트로클루스는 아킬레스의 연인이었다는 수수깨끼같은 글이 있었다. 그리스어로 사랑을 뜻하는 에로메노스가 꼭 성적인 의미많은 아니나 알렉산더는 양성애자였을 수도 있고 그것은 당시엔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그린은 고대 문헌에 알렉산더가 여자에게 많은 성욕을 느꼈다는 약간의 문헌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말년까지 후계자를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을때 젊었고 오그던은 알렉산더 부부의 기록은 같은 나이의 필립2세의 기록보다 훨씬 인상적이라고 언급한다. 아내와 떨어져서 그는 더욱 많은 여성 동료가 있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왕의 방식으로 많은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사용을 절제하였다 육욕 절제의 절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플루타크는 알렉산더가 자발적으로 칭찬해주는 록시나에게 미쳐있었다고 한다 그린은 기간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슬픔에 죽은 다리우스의 어머니와 그를 입양한 카리아 같은 여성과 꽤나 깊은 우정관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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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Alexander the Great: "Youths of the Pellaians and of the Macedonians and of the Hellenic Amphictiony and of the Lakedaimonians and of the Corinthians… and of all the Hellenic peoples, join your fellow-soldiers and entrust yourselves to me, so that we can move against the barbarians and liberate ourselves from the Persian bondage, for as Greeks we should not be slaves to barbarians." Pseudo-Kallisthenes, Historia Alexandri Magni, 1.15.1-4
    – Alexander the Great: "Now you fear punishment and beg for your lives, so I will let you free, if not for any other reason so that you can see the difference between a Greek king and a barbarian tyrant, so do not expect to suffer any harm from me. A king does not kill messengers." Historia Alexandri Magni of Pseudo-Kallisthenes, 1.37.9-13
    – Alexander the Great addressing his troops prior to the Battle of Issus: "There are Greek troops, to be sure, in Persian service — but how different is their cause from ours! They will be fighting for pay – and not much of at that; we, on the contrary, shall fight for Greece, and our hearts will be in it." Anabasis Alexandri by Roman historian Arrian, Book II, 7
    – Alexander's letter to Persian king Darius in response to a truce plea: "Your ancestors came to Macedonia and the rest of Hellas (Greece) and did us great harm, though we had done them no prior injury. I have been appointed leader of the Greeks, and wanting to punish the Persians I have come to Asia, which I took from you." Anabasis Alexandri by Arrian; translated as Anabasis of Alexander by P. A. Brunt, for the "Loeb Edition" Book II 14, 4
    – Alexander the Great: "If it were not my purpose to combine barbarian things with things Hellenic (Greek), to traverse and civilize every continent, to search out the uttermost parts of land and sea, to push the bounds of Macedonia to the farthest Ocean, and to disseminate and shower the blessings of the Hellenic justice and peace over every nation, I should not be content to sit quietly in the luxury of idle power, but I should emulate the frugality of Diogenes. But as things are, forgive me Diogenes, that I imitate Herakles, and emulate Perseus, and follow in the footsteps of Dionysos, the divine author and progenitor of my family, and desire that victorious Hellenes should dance again in India and revive the memory of the Bacchic revels among the savage mountain tribes beyond the Kaukasos." On the Fortune of Alexander by Plutarch, 332 a-b
    – Alexander addressing the dead Hellenes (the Athenian and Thebean Greeks) of the Battle of Chaeronea: "Holy shadows of the dead, I'm not to blame for your cruel and bitter fate, but the accursed rivalry which brought sister nations and brother people, to fight one another. I do not feel happy for this victory of mine. On the contrary, I would be glad, brothers, if I had all of you standing here next to me, since we are united by the same language, the same blood and the same visions." Historiae Alexandri Magni by Quintus Curtius Rufus
    – Alexander I of Macedon, ancestor of Alexander the Great, member of the Argead dynasty: "Tell your king (Xerxes), who sent you, how his Greek viceroy of Macedonia has received you hospitably." Herodotus, Histories, 5.20.4, Loeb
    – Alexander I of Macedon, ancestor of Alexander the Great, member of the Argead dynasty, when he was admitted to the Olympic games: "Men of Athens... In truth I would not tell it to you if I did not care so much for all Hellas; I myself am by ancient descent a Greek, and I would not willingly see Hellas change her freedom for slavery. I tell you, then, that Mardonius and his army cannot get omens to his liking from the sacrifices. Otherwise you would have fought long before this. Now, however, it is his purpose to pay no heed to the sacrifices, and to attack at the first glimmer of dawn, for he fears, as I surmise, that your numbers will become still greater. Therefore, I urge you to prepare, and if (as may be) Mardonius should delay and not attack, wait patiently where you are; for he has but a few days' provisions left. If, however, this war ends as you wish, then must you take thought how to save me too from slavery, who have done so desperate a deed as this for the sake of Hellas in my desire to declare to you Mardonius' intent so that the barbarians may not attack you suddenly before you yet expect them. I who speak am Alexander the Macedonian." Herodotus, Histories, 9.45 (ed. A. D. Godley)
    – Ian Worthington, English historian and archaeologist: "Not much need to be said about the Greekness of ancient Macedonia: it is undeniable." Ian Worthington, Philip II of Macedonia, Yale University Press, 2008
    – Ulrich Wilcken: "When we take into account the political conditions, religion and morals of the Macedonians, our conviction is strengthened that they were a Greek race and akin to the Dorians. Having stayed behind in the extreme north, they were unable to participate in the progressive civilization of the tribes which went further south." Ulrich Wilcken, Alexander the Great, p. 22)
    – Strabo: "And Macedonia, of course, is a part of Greece." Strabo. VII, Frg. 9 (Loeb, H.L. Jones)
    – Herodotus: "Now that these descendants of Perdiccas (Perdiccas I of Macedon, King of Macedonia from about 700 BCE to about 678 BCE) are Greeks, as they themselves say, I myself chance to know and will prove it in the later part of my history." Herodotus, Book 5, Ch. 22, 1 (Loeb)
    – Josephus: "And when the book of Daniel was showed to Alexander the Great, where Daniel declared that one of the Greeks should destroy the empire of the Persians, he supposed that himself was the person intended; and as he was then glad, he dismissed the multitude for the present." Josephus 11.8.5
    – Arrian: "There a man appeared to them wearing a Greek cloak and dressed otherwise in the Greek fashion, and speaking Greek also. Those Macedonians who first sighted him said that they burst into teers, so strange did it seem after all these miseries to see a Greek, and to hear Greek spoken." Arrian: Anabasis Alexandri: Book VIII (Indica)
    – Titus Livius: "The Aitolians, the Akarnanians, the Macedonians, men of the same speech, are united or disunited by trivial causes that arise from time to time; with aliens, with barbarians, all Greeks wage and will wage eternal war; for they are enemies by the will of nature, which is eternal, and not from reasons that change from day to day." Titus Livius, Liber XXXI, 29, 15
    – David H. Levinson: "It should be noted that there is no connection between the Macedonians of the time of Alexander the Great who were related to other Hellenic tribes and the Macedonians of today, who are of Slavic Origin and related to the Bulgarians." Encyclopedia of World Cultures (1991), by David H. Levinson, page 239.
    – Nicholas Hammond: "Philip was born a Greek of the most aristocratic, indeed of divine, descent... Philip was both a Greek and a Macedonian, even as Demosthenes was a Greek and an Athenian... The Macedonians over whom Philip was to rule were an outlying family member of the Greek-speaking peoples." Nicholas Hummond, Philip of Macedon, Duckworth Publishing, 1998
    – Nicholas Hammond: "All in all, the language of the Macedones was a distinct and particular form of Greek, resistant to outside influnces and conservative in pronunciation. It remained so until the fourth century when it was almost totally submerged by the flood tide of standardized Greek." Nicholas Hummond, A History of Macedonia Vol ii, 550-336 BC
    – Nicholas Hammond: "As members of the Greek race and speakers of the Greek language, the Macedonians shared in the ability to initiate ideas and create political forms." Nicholas Hummond, The Miracle that was Macedonia, 1992, p. 206
    – M. Opperman, The Oxford Classical Dictionary 3rd ed. (1996) - Macedonia, Cults, page 905: "Nowadays historians generally agree that the Macedonian ethnos form part of the Greek ethnos; hence they also shared in the common religious and cultural features of the Hellenic world"
    – Robin Lane Fox: 1) "Alexander was still the Greek avenger of Persian sacrilege who told his troops, it was said 'that Persepolis was the most hateful city in the world'. On the road there, he met with the families of Greeks who had deported to Persia by previous kings, and true to his slogan, he honoured them conspicuously, giving them money, five changes of clothing, farm animals, corn, a free passage home, and exemption from taxes and bureaucratic harassments." p. 256,
    2) "To his ancestors (to a Persian's ancestors) Macedonians were only known as 'yona takabara', the 'Greeks who wear shields on their heads', an allusion to their broad-brimmed hats." p. 104,
    3) "Alexander was not the first Greek to be honoured as a god for political favour." p. 131,
    4) "In spirit, Alexander made a gesture to the Lydians' sensitivities, though his Greek crusade owed them nothing as they were not Greeks." p. 128.
    Robin Lane Fox, Alexander the Great, Penguin Books, UK, 1997
    – Katheryn A. Bard: "The Macedonians were originally one of several Greek tribes living on the northern frontier of the Hellenic world." Katheryn A. Bard, Encyclopaedia of the Archaeology of Ancient Egypt, Taylor & Francis, 1999, p. 460.
    – Benjamin Ide Wheeler: "That the Macedonians were Greek by race there can be no longer any doubt. They were the northernmost fragments of the race left stranded behind the barriers." Benjamin Ide Wheeler, Alexander the Great: The Merging of East and West in Universal History, Elibron Classics, 2011
  2. Zacharia 2008, Simon Hornblower, "Greek Identity in the Archaic and Classical Periods", pp. 55–58; Joint Association of Classical Teachers 1984, 50–51쪽; Errington 1990; Fine 1983, 607–608쪽; Hall 2000, 64쪽; Hammond 2001, 11쪽; Jones 2001, 21쪽; Osborne 2004, 127쪽; Hammond 1989, 12–13쪽; Hammond 1993, 97쪽; Starr 1991, 260, 367쪽; Toynbee 1981, 67쪽; Worthington 2008, 8, 219쪽; Chamoux 2002, 8쪽; Cawkwell 1978, 22쪽; Perlman 1973, 78쪽; Hamilton 1974, Chapter 2: The Macedonian Homeland, p. 23; Bryant 1996, 306쪽; O'Brien 1994, 25쪽.
  3. Simon Hornblower, "Greek Identity in the Archaic and Classical Periods" in Katerina Zacharia, Hellenisms, Ashgate Publishing, 2008, pp. 55–58.
  4. “Alexander the Great (356–323 BC)”. UK: BBC. 
  5. Yenne 2010, 159쪽.

참고 자료[편집]

바깥 고리[편집]

전 임
필리포스 2세
마케도니아 왕
기원전 336년 - 기원전 323년
후 임
필리포스 3세(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1세(이집트)
셀레우코스 1세(시리아)
뤼시마코스
전 임
필리포스
제2대 코린토스 동맹의 의장
기원전 336년 - 기원전 323년
후 임
(폐지)
전 임
다리우스 3세
페르시아의 샤한샤, 이집트의 파라오
기원전 330년 - 기원전 323년
후 임
알렉산드로스 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