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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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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
셀레우코스 제국바실레우스
재위 기원전 94년 - 기원전 93년
전임 셀레우코스 6세, 데메트리오스 3세, 안티오코스 10세
후임 안티오코스 10세, 필리포스 1세, 데메트리오스 3세
신상정보
출생일 기원전 124년에서 기원전 109년 사이
사망일 기원전 93년
사망지 안티오키아
가문 셀레우코스 왕조
부친 안티오코스 8세
모친 트리파이나

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 필라델포스(Ἀντίοχος Ἐπιφανής Φιλάδελφος, 기원전 93년 사망)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바실레우스로, 후기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94년과 93년 사이 시리아의 왕으로 재위하였다.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이던 그는 형인 셀레우코스 6세가 친척인 안티오코스 10세에 의해 기원전 94년에 쫓겨나 죽음을 맞이하며 왕위에 올랐다. 안티오코스 11세는 쌍둥이 형제 필리포스 1세와 함께 공동으로 스스로 왕이라 선포하였다. 방대한 고대 기록들은 고고학적 증거물과 모순되기는 하지만, 안티오코스 11세의 첫 행동은 셀레우코스 6세의 죽음에 책임이 있던 킬리키아몹수에스티아를 파괴하며 형제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이었다. 기원전 93년에 안티오코스 11세는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를 차지하였는데, 이 사건은 고대 역사가들은 언급하지 않으나 화폐 증거물을 통해 확인된다. 안티오코스 11세는 형제들 가운데 높은 지위의 왕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는 단독 군주로서 주화를 발행하고 수도에서 홀로 통치한 반면, 필리포스 1세는 킬리키아에 머물면서도 왕호는 계속 유지하였다. 안티오코스 11세는 하르비예아폴론아르테미스 사원을 복원한 것으로 보이며, 그럼에도 그의 재위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같은 해 가을, 안티오코스 10세는 재정비를 하여 반격을 가하였고, 안티오코스 11세는 패배하며 달아나던 중 오론테스강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이름, 가문, 초기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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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in struck by Antiochus VIII of Syria (reigned 125–96 BC). Portrait of Antiochus VIII on the obverse; depiction of Zeus holding a star and staff on the reverse.
데메트리오스 3세의 아버지인 안티오코스 8세의 주화

안티오코스라는 명칭은 그리스어이며 "맞서 싸우는 자"를 의미한다.[1]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는 도시를 건설한 셀레우코스 1세(재위 기원전 305년~281년);의 아버지 안티오코스의 이름을 따 명명됐으며,[2] 셀헤우코스라는 이름은 왕조의 이름이자 셀레우코스 제국 국왕의 이름이 되었다.[3][4] 기원전 124년경 안티오코스 8세는 기원전 109년에 사망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출신 공주 트리파이나와 혼인했다.[5][6] 이 둘 사이에 자식 여럿이 태어났으며, 장자인 셀레우코스 6세,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7] 이들의 동생인 데메트리오스 3세,[8] 막내 아들 안티오코스 12세 등이 있었다.[9] 필리포스 1세의 어머니는 4세기 역사가 에우세비우스에게 트리파이나라고 분명히 언급되며, 에우세비우스는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가 쌍둥이(didymoi)라고 언급한 바 있다.[10] 안티오코스 11세의 출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나, 그가 즉위했을 무렵에는 적어도 20대에 접어들어 있었다.[11]

기원전 113년에, 안티오코스 9세는 스스로 왕이라 선포하고 배다른 형제 안티오코스 8세에 대한 내전을 벌였다. 이 형제들 간의 내전은 15년간 이어졌고[12] 이 분쟁은 트리파이나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기원전 96년 안티오코스 8세가 대신 베로이아의 헤라클레온에게 암살되면서 막을 내렸다.[13] 안티오코스 8세의 죽음 이후, 안티오코스 9세는 수도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안티오코스 8세의 둘째 부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혼인했다.[13]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들은 이에 반응하였고, 데메트리오스 3세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다스리는 한편,[14] 셀레우코스 6세는 기원전 95년에 안티오코스 9세를 살해하고 안티오키아를 점령했다.[15] 새롭게 즉위한 셀레우코스 6세는 안티오코스 9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10세 (재위 : 기원전 95년~92/88년)에게 패퇴하고, 수도를 점령당한다.[16] 셀레우코스 6세는 킬리키아몹수에스티아로 달아났으며 그곳에서 그는 기원전 94년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한다.[17]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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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 depicting the kingdom of Syria in the year 95 BC when it was divided between Seleucus VI in the north with his capital at Antioch; Demetrius III in the south with his capital at Damascus; and Antiochus X in the west with his base at Arwad
기원전 95년의 시리아
수염이 있는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의 병렬 주화. 안티오코스 11세는 구레나룻이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후기 셀레우코스 왕들의 재위는 고대 문헌에서 단편적인 기록과 요약을 통해서만 전해지며, 그 내용에는 서로 다른 사건의 혼동과 모순이 빈번하게 나타나는데,[18] 이에 따라 조폐 자료가 후대 셀레우코스 군주들의 재위를 재건할 때 주요 자료이다.[19] 셀레우코스 6세의 재위 기간, 안티오코스 11세와 그의 쌍둥이 형제는 아마 킬리키아에 거주했을 것이다.[20] 셀레우코스 6세의 죽음의 여파 속에,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 등은 기원전 94년에 스스로 왕이라 선포하였고, 역사가 앨프레드 벨링어는 이들의 근거가 안티오키아 북쪽의 해안 도시라고 제시하였고,[21] 아서 허튼은 베로이아의 지배자들이 필리포스 1세의 동맹이었기 때문에 근거지가 베로이아라고 여겼다.[22][23]

타르수스가 주요 활동 거점이었을 가능성도 높은데[24]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의 초상 등은 그들이 발행한 병렬 주화의 앞면에 함께 새겨졌으며,[7] 이러한 주화는 모두 킬리키아에서 주조되었다. 병렬 주화 3 종류가 알려져 있으며, 2008년 기준으로 그 중에 한 종류는 현재까지 6점의 표본이 확인되었고,[24] 두 왕 모두 수염이 달린 초상으로 표현되어 있다.[25] 현존 표본 6점으로 이루어진 이 계열 주화에 새겨진 초상의 뛰어난 조형 수준은, 그 주화를 주조한 조폐소가 문화의 중심지에 위치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타르수스가 그 조폐소의 소재지였을 가능성이 크며, 나아가 이들의 활동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4]

나머지 두 종류의 주화는 남아 있는 표본이 적고 구레나룻이 있는 안티오코스 11세를 묘사하고 있다.[25] 이 주화들은 타르수스에서 주조된 것이 아니고, 구레나룻은 이 동전들이 주요 거점의 서쪽에 위치한 도시들에서 제작되었음을 시사하는데, 왕이 타르수스로 향하는 도중에 이들 도시를 지나면서 주화가 주조되었으며, 안티오코스 11세가 자신의 본거지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그의 초상이 이미 풍성한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모든 병렬 주화들에서, 안티오코스 11세는 필리포스 1세 앞에 묘사되고, 그의 이름이 앞에 나타나며[24] 그가 우위에 있는 군주임을 보여준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안티오코스 11세는 필리포스보다 먼저 왕이 되었으나, 화폐학적 증거는 이와는 다른 사실을 시사하며 가장 초기의 주화에서부터 두 형제가 공동 통치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26]

별칭과 왕가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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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 군주들은 세(世)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유사한 이름을 지닌 다른 군주들과 구분하기 위해 별칭을 썼으며, 왕에게 숫자를 매기는 것은 현대적인 관습이다.[27][3] 안티오코스 11세는 본인의 주화에 에피파네스(신의 현현)와 필라델포스(형제를 사랑하는 자)라는 별칭과 같이 표현되었다.[28][29] 에피파네스는 동일한 칭호를 지녔던 안티오코스 8세와의 아들이라는 점, 즉 안티오코스 11세가 그의 적통 후계자임을 강조하였고,[30] 필라델포스는 셀레우코스 1세와 필리포스 1세에 대한 존중의 표시일 것이다.[note 1][34] 안티오코스 11세가 타르수스의 주화에서 보였던 수염은 셀레우코스 6세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복수에 대한 의도의 표시일 것이다.[35][36] 안티오키아에서 마지막으로 발행된 안티오코스 11세의 주화는 수염 없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고, 복수가 이뤄졌음을 강조한다.[37]

트리페 전통을 잘 나타낸 안티오코스 11세의 초상

아버지에게서 적통성을 가져온 안티오코스 11세는 안티오코스 8세처럼 과장된 매부리코의 모습으로 주화에 묘사된다.[38] 안티오코스 11세의 초상의 도상은 안티오코스 8세가 많이 사용한 '트리페'적인 왕의 전통의 일부를 담고 있다.[note 2] 지배자의 초상은 트리페(풍요와 장엄함)를 표현하고 있으며, 그의 투박한 외모와 살집 있는 체형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note 3] 트리페 형상의 전통은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이후 시리아에서도 수용됐다. 로마인들은 트리페적 초상을 헬레니즘 군주들의 타락과 퇴폐의 증거로 여겼으며, 초상에서 묘사된 부드러운 인상은 헬레니즘 군주들의 무능함을 보여 주는 징표로 여겨졌으며, 헬레니즘 왕조들이 쇠퇴한 이유를 설명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관점은 사실이 아니며, 이런 형상은 내전으로 황폐화된 왕국에서 의도적인 정책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의 후대 셀레우코스 군주들은 안티오코스 11세를 포함해, 재위 대부분을 싸우는 데 보내며, 자신들의 땅에 큰 피해를 야기하였다. 예를 들어 헬레니즘 시대 박트리아 왕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주화에 전사 군주의 모습을 새겼다면, 이미 전쟁의 결과로 빈곤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반감을 샀을 것이다. 시리아의 사람들은 평화와 풍족함이 필요했고, 트리페 초상은 왕과 그의 백성들이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트리페 형상을 사용함으로써, 안티오코스 11세는 자신이 아버지처럼 성공적이고 인기 있는 왕이 될 것이라는 점을 나타낸 것이었다.[note 4][44]

셀레우코스 6세에 대한 보복과 수도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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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세비우스에 의하면, 안티오코스와 형제들은 셀레우코스 6세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몹수에스티아를 약탈하고 파괴하였다.[10] 에우세비우스의 언급은 기원전 56년에 로마가 몹수에스티아에서 숭배되던 이시스와 사라피스 신앙에 불가침권을 부여한 점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있으며, 불가침에 대해서는 몹수에스티아에서 나온 비문을 통해 확인되었다.[45] 몹수에스티아 다음에, 안티오코스 11세는 킬리키아에 필리포스 1세를 두고 안티오키아로 진격하여, 기원전 93년 도시에서 안티오코스 10세를 몰아냈다.[note 5][24] 고대 역사가들은 안티오키아에서 안티오코스 11세에서 통치한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가 안티오코스 10세에 맞서 싸우다가 패배한 것을 기록한다.[28] 6세기의 비잔티움 수도사이자 역사가 요안니스 말랄라스의 경우 그의 저서는 학자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신뢰받지 못한다고 여겨지지만,[46] 안티오키아의 로마 시대를 다루면서 안티오코스 11세의 재위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47] 안티오코스 11세가 수도 안티오키아를 장악했음을 보여 주는 물질적 증거는 1912년에 처음 제시되는데, 당시 안티오키아에서 그가 주조한 동전에 관한 연구가 발표되었다.[28]

안티오키아에서 발행된 안티오코스 11세의 테트라드라크마

필리포스 1세는 수도에 거주하지 않았고 안티오코스 11세는 단독 국왕으로서의 주화를 발행했다.[note 6][49] 필리포스 1세는 셀레우코스 6세의 복수를 준비하는 동안 자신의 근거지에 머물면서도 왕의 칭호를 계속 유지하였다.[50] 화폐학자 에드워드 시어도어 뉴웰은 안티오코스 11세가 수도에서 불과 몇 주 동안만 통치한 것으로 보았으나, 화폐학자 올리버 후버(Oliver Hoover)에 의하면, 왕의 연평균 금형 사용률을 추정한 결과에 따르면, 그의 재위 기간은 수 주가 아니라 수개월이었을 가능성이 크다.[note 7][48] 말랄라스에 의하면, 국왕 안티오코스 필라델포스 즉 안티오코스 11세는,[note 8] 다프네아폴론아르테미스 신전을 지었고, 두 신을 나타낸 황금상을 세우는 한편, 신전에 피신하는 모든 사람에게 비호권을 인정하였다.[56] 이러한 진술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데 신전이 안티오코스 3세(재위: 기원전 222년~187년) 시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이 사료를 통해 확인되기 때문이다.[57] 역사가 글랜빌 다우니(Glanville Downey)는 말라라스의 그리스어 서술 방식을 관찰하였고, 말라라스의 "건설했다(built)"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개축하거나 복원했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으며, 이를 다우니는 안티오코스 11세 이전의 어느 통치자가 그 신전을 훼손하고, 그 안에 있던 황금 신상들을 녹여 없앴을 수 있다고 보았다.[note 9][56]

말년과 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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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93년 가을경, 안티오코스 10세는 반격을 가하여 안티오코스 11세에 승리를 거두었고,[7] 안티오코스 11세는 달아나려 하다가 오론테스강에서 익사하였다.[59] 이 마지막 전투를 다루는 고대 기록들은 상기한데 1세기 역사가 요세포스에 의하면 안티오코스 11세가 홀로 싸웠다고 하는 한편, 에우세비우스는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가 같이 싸웠다고 했다. 에우세비우스는 안티오코스 11세의 안티오키아에서 재위 시절을 언급하지 않고, 몹수에스티아 파괴 이후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며, 이 언급은 화폐적 증거와 대조된다. 벨린저의 관점에서, 안티오코스 형제의 연합군이 동원되어야 했었지만, 안티오코스 11세만이 사망했기에, 필리포스 1세는 수도에서 머무는 한편으로 안티오코스 11세가 이끄는 군대가 야전에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26]

안티오코스 11세의 혼인이나 자녀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다.[60] 1세기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기원전 1세기 로마 장군 루쿨루스는 기원전 83년에 시리아를 정복한 아르메니아의 국왕 티그라네스 1세가 "셀레우코스의 후계자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라고 전하였다. 후기 셀레우코스 시기에 관한 고대 사료들은 파편적이며 많은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루쿨루스의 언급은 안티오코스 11세의 아내 혹은 딸들이 존재했을 가능성과 그들이 아르메니아 왕에게 끌려갔음을 시사한다.[61] 안티오코스 10세는 승리 이후에 수도를 탈환하였고 죽을 때까지 다스렸다.[62]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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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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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사가 알프레트 폰 구치미트는 헬레니즘 시대 왕들이 칭호 필라델포스를 사용하는 것은 이미 재위 중이던 형제의 요청을 받아 공동으로 왕위를 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31]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의 경우, 모두 필라델포스를 사용하였기에, 폰 구치미트는 이를 그 일반적인 원칙의 예외적인 사례로 보았다. 그는 이 형제들이 전임 국왕인 셀레우코스 1세와의 우애를 강조함으로써, 안티오코스 9세 계통과 다투던 왕위에 대한 권리를 정당화 하기 위해 사용하였다고 주장했다. 폰 구치미트의 주장은 여러 학자들의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필라델포스를 셀레우코스 6세에 대한 경의이자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 사이의 형제간 화합에 대한 표명으로 여기던 에바리스토 브레시아로부터 비판받았다.[32][33]
  2. 보스턴 미술관에는 음각 세공물(인탈리오) 하나가 소장되어 있으며 이 소장품의 수납 번호는 13.244이다. 보석의 양식은 안티오코스 11세의 초상에 사용된 양식과 유사하며, 따라서 그 인장석은 안티오코스 11세 또는 그의 형제 데메트리오스 3세를 묘사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39] 인탈리오에서 이런 초상 형태는 주화의 초상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기능을 수행하였다. 두 종류의 초상 모두 자신들이 묘사한 군주의 성격과 특성을 강조하면서도,[40] 주화의 초상은 화폐의 가치와 진위를 보증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표준 양식을 따랐으며, 이러한 초상은 왕조의 계승성과 군주로서의 역량을 나타내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고, 인탈리오의 초상은 주화 제작의 표준을 따르지 않았으며,[41] 보다 사적인 목적에 사용되었고, 군주를 한층 더 섬세하고 개성적으로 표현하였다.[40] 왕의 초상이 새겨져 왕실의 직접적인 감독 아래 제작된 인탈리오는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였고, 이러한 인장석은 왕이 측근이나 외국 사절에게 내리는 하사품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이를 소지한 사람들은 인장으로 사용함으로써 왕이나 그의 사후에도 그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냈다.[42]
  3. 폭식과 비만은 헬레니즘 예술에서 군주의 부의 상징이다. 많은 왕들이 이중턱 및 살찐 얼굴로 묘사된다.[43]
  4. 트리페(tryphé) 초상의 의미에 대한 로마인들의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 가운데 하나는, 안티오코스 8세 재위기에 셀레우키아 피에리아티케(수호신)가 지닌 도상이다. 이 여신의 특징은 왕과도 유사하다. 트리페가 퇴폐나 타락의 상징이었다면, 그러한 양식이 신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을 리 없다.[44]
  5. 에우세비우스는 두 형제가 함께 안티오키아를 향해 진군했다고 서술하였으나,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는 안티오코스 11세만을 언급하였다. 후자의 기록이 보다 정확한 것으로 평가되며, 화폐학적 증거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24]
  6. 화폐학자 아서 허프턴(Arthur Houghton)은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의 병렬 주화를 안티오키아에서 주조된 것으로 보았으나, 이후에는 그 견해를 철회하고 킬리키아의 조폐소에서 주조된 것으로 수정하였다.[48]
  7. 이 추정은 수학자 워런 W. 에스티(Warren W. Esty)가 개발한 에스티(Esty) 공식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이 공식은 특정 화폐 시리즈를 제작하는 데 사용된 앞면 주형(obverse dies)의 상대적인 개수를 계산할 수 있는 수학적 공식이다. 이 계산을 통해 특정 군주의 화폐 발행 규모를 추정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의 재위 기간도 추정할 수 있다.[51]
  8. 이 칭호는 마지막 셀레우코스 국왕인 안티오코스 13세 (재위: 기원전 82년~64년)도 사용하였으며,[52] 그가 죽은 뒤 로마는 시리아를 합병했다.[53] 말랄라스는 안티오코스 11세를 나타낼 때 '디오니소스'라는 칭호를 사용했고,[54] 이는 실제로는 안티오키아를 통치한 바가 없던 안티오코스 12세의 칭호였다.[55] 역사가 글랜빌 다우니(Glanville Downey)에 따르면, 이 비잔티움 역사가는 안티오코스 11세와 안티오코스 12세를 혼동하였고,[53] '필라델포스'라는 칭호를 안티오코스 11세를 가리킬 때 사용했다고 한다.[47]
  9. 2세기 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활동: 서기 200년)는 안티오코스 9세가 제우스 조각상을 녹였다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황금 신상들 역시 녹여 없앤 군주였을 가능성이 있는 후보로 여겨진다.[56] 한편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기원전 1세기 역사가들인 디오도로스 시켈로스트로구스의 기록들을 오독했을 수 있는데, 이 두 명 모두 제우스 조각상에 대한 신성 모독을 알렉산드로스 2세가 한 것이라고 하였다.[58]

각주

[편집]

인용

[편집]
  1. Ross 1968, 47쪽.
  2. Downey 2015, 68쪽.
  3. 1 2 Hallo 1996, 142쪽.
  4. Taylor 2013, 163쪽.
  5. Otto & Bengtson 1938, 103, 104쪽.
  6. Wright 2012, 11쪽.
  7. 1 2 3 Houghton 1987, 79쪽.
  8. Houghton 1987, 81쪽.
  9. Lorber & Iossif 2009, 103쪽.
  10. 1 2 Eusebius 1875, 261쪽.
  11. Sievers 1986, 134쪽.
  12. Kosmin 2014, 23쪽.
  13. 1 2 Dumitru 2016, 260, 261쪽.
  14. Houghton & Müseler 1990, 61쪽.
  15. Hoover 2007, 285쪽.
  16. Dumitru 2016, 263쪽.
  17. Houghton 1998, 66쪽.
  18. Hoover 2007, 280쪽.
  19. Hoover 2007, 281쪽.
  20. Bevan 1902, 260쪽.
  21. Bellinger 1949, 93쪽.
  22. Houghton 1987, 82쪽.
  23. Houghton 1998, 67쪽.
  24. 1 2 3 4 5 6 Houghton, Lorber & Hoover 2008, 573쪽.
  25. 1 2 Houghton, Lorber & Hoover 2008, 573, 575, 576쪽.
  26. 1 2 Bellinger 1949, 74쪽.
  27. McGing 2010, 247쪽.
  28. 1 2 3 Newell 1917, 115쪽.
  29. Dąbrowa 2011, 225쪽.
  30. Houghton, Lorber & Hoover 2008, 574쪽.
  31. Muccioli 1994, 402쪽.
  32. Muccioli 1994, 403쪽.
  33. Muccioli 1994, 415쪽.
  34. Coloru 2015, 177쪽.
  35. Houghton, Lorber & Hoover 2008, 575쪽.
  36. Hoover, Houghton & Veselý 2008, 207쪽.
  37. Houghton, Lorber & Hoover 2008, 578쪽.
  38. Wright 2011, 45, 46쪽.
  39. Plantzos 1999, 55, 116쪽.
  40. 1 2 Plantzos 1999, 62쪽.
  41. Plantzos 1999, 42쪽.
  42. Plantzos 1999, 111쪽.
  43. Bradley 2011, 23쪽.
  44. 1 2 Fleischer 1996, 36쪽.
  45. Rigsby 1996, 466쪽.
  46. Scott 2017, 76쪽.
  47. 1 2 Downey 1938, 113쪽.
  48. 1 2 Hoover 2007, 289쪽.
  49. Bellinger 1949, 74, 93쪽.
  50. Bellinger 1949, 75, 93쪽.
  51. Hoover 2007, 282–284쪽.
  52. Dumitru 2016, 267쪽.
  53. 1 2 Downey 1951, 161쪽.
  54. Clinton 1851, 349쪽.
  55. Downey 2015, 132쪽.
  56. 1 2 3 Downey 2015, 131쪽.
  57. Den Boeft 외. 1995, 229쪽.
  58. Taylor 2014, 237쪽.
  59. Ehling 2008, 239쪽.
  60. Ogden 1999, 158쪽.
  61. Dumitru 2016, 269–270쪽.
  62. Dumitru 2016, 264쪽.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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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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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
출생: 미상 사망: 기원전 93년
이전
셀레우코스 6세
데메트리오스 3세
안티오코스 10세
시리아의 왕
기원전 94년~93년
with 데메트리오스 3세 (기원전 94년~93년)
안티오코스 10세 (기원전 94년~93년)
필리포스 1세 (기원전 94년~93년)
이후
데메트리오스 3세
안티오코스 10세
필리포스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