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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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클레오파트라로 추측되는 베를린 구 박물관의 두상
클레오파트라로 추측되는 베를린 구 박물관의 두상
지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파라오
재위 기원전 51년 - 기원전 30년 8월 12일
전임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
후임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리온
공동재위자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테르
프톨레마이오스 14세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리온
이름
클레오파트라
별호 필로파토르
신상정보
출생일 기원전 69년
출생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알렉산드리아
사망일 기원전 30년 8월 12일 (39세)
사망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가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부친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
모친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 (짐작)
배우자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테르
프톨레마이오스 14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자녀 카이사리온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마우레타니아 왕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프톨레마이오스 16세 필라델포스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그리스어: Κλεοπάτρα Φιλοπάτωρ[1], 영어: Cleopatra VII Philopator, 기원전 69년 - 기원전 30년 8월 10일)는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이다.

어원[편집]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κλέος (클레오스, "영광")와 πᾰτήρ (파테르, "아버지")[2]가 합해진 '아버지의 영광' (Κλεοπάτρα)을 의미한다.[3]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의 남성형 형태는 클레오파트로스(Κλεόπᾰτρος)나 파트로클로스(Πᾰ́τροκλος)가 될 수 있다.[2]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와 더불어 그리스 신화에서 멜레아그로스의 아내인 클레오파트라 알키오네이름이기도 하다[4]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클레오파트라 1세 시라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주) 간의 결혼을 통해,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도 들어서게 되었다.[5][6] 클레오파트라가 채택한 칭호인 테아 필로파토라(Θεᾱ́ Φιλοπάτωρα)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여신"이라는 의미이다.[7][8][주해 1]

생애[편집]

유년 시절[편집]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으나[9][10][주해 2] 클레오파트라의 언니인 베레니케 4세 에피파네이아의 생모이자[11][12][13][주해 3]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부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로 여겨진다.[14][15][주해 4][주해 5] 실제로 클레오파트라 5세는 클레오파트라 7세가 태어난 후 수 개월이 지나고부터는 더이상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16][17] 클레오파트라의 동생으로는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테르, 프톨레마이오스 14세 필로파토르가 있다.[12][11][13] 클레오파트라는 어린 시절 필로스트라토스로부터 그리스의 철학웅변술을 배웠다.[18] 무세이온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당시 무세이온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아직 건재했으므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도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19][20]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통치와 추방[편집]

기원전 65년에 로마 공화국감찰관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공화국의 원로원 앞에 나아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를 합병시켜야 한다고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나 거절되고, 기원전 63년에는 트리부누스였던 세르빌리우스 룰루스가 유사한 청원을 올렸으나 마찬가지로 거절된다.[21][22]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러한 합병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로마의 유력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바치는데, 이중에는 미트리다테스 6세 메가스를 정벌중인 폼페이우스가 있었으며, 기원전 59년에는 집정관에 오른 카이사르에게도 뇌물을 바친다.[23][24][25][주해 6]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낭비벽으로 인해 결국 파산에 이르고, 결국 로마의 은행가 가이우스 라비리우스 포스투무스에게 빚을 지게 되고야 만다.[26][27][28]

붉은 머리, 다이아뎀과 진주 귀고리를 착용한 클레오파트라의 초상. 헤르쿨라네움, 기원후 1세기.[29][30]

기원전 58년에 로마는 키프로스를 합병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형제였던 키프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는 해적질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파포스로 추방되는 대신 자살을 선택한다.[31][32][28]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형제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으로 어떠한 성명도 내지 않는데, 비록 로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결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정은 그의 경제 정책에 이미 분노해있던 백성들의 심기를 더더욱 건드리는 꼴이 된다.[31][33][34]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후 이집트에서 강제로 추방당해 처음에는 로도스섬으로, 그다음엔 아테네로, 종국에는 이탈리아 프라에네스테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빌라에서 살게 된다.[31][32][35] 클레오파트라 역시 표면상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함께 로마 변두리의 빌라에서 같이 생활한다.[31][35][주해 7] 대신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 클레오파트라의 언니 베레니케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복귀하지 않고 자신이 계속 통치하도록 해달라는 취지의 사절을 로마에 보내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의 고위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절단의 주요 인물들을 암살한다.[36][27][37]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원로원에게 자신이 이집트로 돌아갈 때 무장한 호위병력들을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나 거부되자, 기원전 57년 말에 이집트 대신 에페소스아르테미스 신전으로 가 거기 머무른다.[38][39][40]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재정을 관리하던 로마인들은 그를 복권시키는데 힘을 보태기로 결정한다.[41] 폼페이우스는 시리아 총독이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로 하여금 이집트를 공격하여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권시키자고 설득하고, 1만 달란트를 원조한다.[41][42][43] 결국 기원전 55년 가비니우스는 원로원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로 군하스모니안 왕국을 경유해 이집트를 침공하는데, 당시 하스모니안 왕국을 다스리던 힐카누스 2세이두매인 안티파테르는 로마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보급했다.[41][44] 당시 젊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가비니우스의 지휘 하에 기병대 장교로 복무중이었는데, 펠루시움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려던 것을 막고 베레니케 4세의 남편인 아르켈라오스의 시신을 명예롭게 매장될 수 있게 해준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45][46] 당시 14살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로마의 원정군들과 함께 움직였는데 후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사랑에 빠진 것이 이 때였노라고 말한다.[45][47]

로마 공화국(녹색)과 프톨레마이오스 왕국(노란색), 기원전 40년

가비니우스는 이후 로마에 불려가 재판을 받는데 권력 남용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뇌물 수수에 대해서는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당하지만, 그로부터 7년 후 기원전 48년에 카이사르에 의해 복직한다.[48][49]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베레니케 4세와 그녀의 지원자들을 처형하고 가산을 몰수한다.[50][51][52]게르만족, 갈리아인들로 구성된 가바니우스 휘하의 로마군 주둔지를 설치하고, 오랜 기간동안 재정을 관리해온 라비리우스를 수석 재무 당당관으로 임명한다.[50][53][54] 여기서 라비리우스는 보호및 감시의 대상이 되나 이집트의 자원을 로마로 보내는 것에 의해 생명이 위협받자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라비리우스를 로마로 돌려보낸다.[55][56][52] 비록 이런 문제들이 있긴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자신의 권력을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이양할 뜻을 밝히고, 에드푸 신전, 덴데라 신전 등의 공공건설사업 등을 펼치며 경제를 안정화시킨다.[57][56][58] 기원전 52년 5월 31일,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59][60][61]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라비리우스에게 진 빚은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넘어갔다.[55][49]

권력을 잡다[편집]

왼쪽: 파라오 복장을 한 클레오파트라가 이시스 여왕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다. 오노프리스Onnophris라는 이름의 남성이 기원전 51년에 봉헌한 석판, 루브르 박물관 소유.
오른쪽: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카르투슈.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죽고, 기원전 51년 3월 22일 클레오파트라는 테베 근처 헤르몬티스에 몬수 황소신상을 설치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으로 여왕의 직무를 시작한다.[1][62][63] 그러나 왕권을 잡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일강의 수위가 낮아져 흉년이 들고, 가비니우스가 설치한 로마군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한다.[64][65]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1,750만 드라크마에 달하는 빚을 로마 공화국에 남기고 갔다.[66]

기원전 50년 시리아 속주의 프로콘술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가비니우스가 남기고 간 로마군들을 로마-파르티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장남과 차남을 이집트로 보낸다.[67] 그러나 비불루스의 두 아들은 그들이 동원하려 했던 로마군들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한다.[67][68] 클레오파트라는 두 아들을 살해한 범인을 비불루스가 직접 처분할 수 있도록 호송해 보내지만, 비불루스는 재판권은 로마 원로원에게만 있다며 클레오파트라를 문책하고 두 범인을 돌려보낸다.[69][68] 비불루스는 이후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었지만 카이사르가 그리스에 함대를 상륙시키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뒤쫓아 이집트에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꼴이 되었다.[69] 기원전 51년 8월 29일부터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단독 군주로 등장하는데, 이는 오빠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밀려 공동 통치자가 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66][68][70] 클레오파트라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했다고 추측하긴 하나[71] 이를 확실히 입증해줄만한 기록은 없다.[1] 남매간의 결혼은 당대 그리스인들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었지만,[72][73][74][주해 8]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이후로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자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72][73][74]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밀려나긴 했지만 그의 가정교사이자 섭정이요 재산 관리인이었던 내시 포테이노스를 비롯해 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75][65][76] 클레오파트라에 반대하는 사람들로는 또다른 가정교사 테오도투스와 장군 아킬라스가 있었다.[75][77]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잠깐 동안 동맹을 형성했지만 기원전 50년 가을이 되자 클레오파트라의 이름 앞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먼저 서명하는 등 클레오파트라를 밀어내는데 성공하고, 기원전 49년부터 비로소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기준으로 한 기년법이 부여된다.[1][78][79]

폼페이우스의암살[편집]

기원전 70~60년의 원본에 대한 모작으로 인정받는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기원후 14년) 때 제작된 폼페이우스의 석고상. 이탈리아 베니스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기원전 49년 여름, 폼페이우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아버지의 명을 받고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러 도착했을 때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맞선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78]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와 기원전 49년 1월 루비콘강을 건넌 후 추격을 피해 그리스로 도망친 상황이었다.[80][81]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마지못해 공동성명으로 이를 재가하며 60척의 배와 가비니우스가 두고 간 로마군들을 포함해 500명의 병력을 보냈는데, 이로써 로마에 진 빚의 일부를 변제할 수 있었다.[80][82] 오빠와의 싸움에서 진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도망쳐 테베 지역으로 철수해야 했다.[83][84][85] 기원전 48년 봄이 되기 전,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와 함께 이집트로 향할 침략군을 모으기 위해 시리아 속주로 향한다.[86][79][87] 그녀는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왔지만, 로마 주둔군까지 동원한 오빠의 군대에 의해 진격하지 못하고 나일강 삼각주 동부에 있는 펠루시움 외곽에 주둔한다.[88][79][89]

한편 기원전 48년 8월 9일 그리스에서는 카이사르가 파르살루스에서의 전투 끝에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섬멸하고 폼페이우스는 레바논티레로 후퇴한다.[88][90][91] 폼페이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우호적 관계에 기대 이집트로 피난해 병력을 정비하자는 결정을 내린다.[92][91][89]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고문들은 이집트가 로마 내전의 각축장으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한다.[92][93][94] 결국 테오도투스의 계략에 의해 폼페이우스는 자신을 초청하는 편지를 받고 펠루시움 근처에 배를 타고 도착한 기원전 48년 9월 28일, 매복해있던 암살자에 의해 칼에 찔려 죽었다.[92][90][95]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자신이 내전을 종식시켰다고 생각하여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방부처리한 뒤 10월 초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 왕궁에 거주하던 카이사르에게 보낸다.[96][97][98] 그러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에 슬퍼하며 분노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에게 서로 화해하고 군대를 해산할 것을 요구한다.[96][99][98]

카이사르와의 관계[편집]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1866, 장레옹 제롬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군대를 해산하고 들어오라는 카이사르의 요구를 보란듯이 무시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한다.[100][101] 클레오파트라는 처음에는 카이사르와 사절단으로 소통하다가 카이사르가 왕족 여성들과 불륜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직접 보기 위해 카이사르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진다.[100][102][101] 역사학자 디오 카시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남동생에게 전혀 알리지 않은 채 홀로 매력적인 옷차림을 하고 들어가서 재치있게 시저를 매혹시켰다고 기록한다.[100][103][104] 플루타르코스는 클레오파트라가 궁전으로 은밀하게 들어가기 위해 침대 자루 안에 묶여 있었다고 기록한다.[100][105][106]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여동생이 카이사르와 함께 궁전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알렉산드리아의 군중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키려 했지만, 카이사르가 웅변으로 군중을 진정시킨 뒤 카이사르에게 체포되었다.[107][108][109]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알렉산드리아의 시민 회의 앞에 데리고 온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폼페이우스에게 맡긴 서면 유언장의 내용을 공개하는데, 이 유언장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둘이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110][108][102] 그리고 카이사르는 나머지 남매 아르시오네 4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로 하여금 키프로스를 공동 통치하도록 하여, 기원전 58년 로마에게 키프로스를 빼앗긴 이집트를 달랜다.[111][108][112]

그러나 이러한 결정이 프톨레마이오스 13세보다 클레오파트라에 편향된 것이라고 판단한 포테이노스는 아킬라스로 하여금 2만의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하게 한다. 이는 당시 카이사르가 4천명의 병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에 기인한다.[111][108][113] 그러나 포테이노스는 카이사르에 의해 처형당하고, 아르시노에 4세는 아킬라스의 군대에 합류해 스스로 여왕에 오른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킬라스는 아르시노에의 개인교사였던 환관 가니메데스에 의해 살해당하고 총지휘관의 자리를 빼앗긴다.[114][115][116] 가니메데스는 카이사르를 속여 억류되어있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과 직접 협상하고 싶다고 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빼내 군대에 합류시키는데 성공한다.[114][117][118] 결국 알렉산드리아에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만이 남게 되고, 이렇게 시작된 알렉산드리아 공성전은 기원전 47년까지 계속되었다.[119][99][120]

투스쿨룸에서 발굴된 카이사르의 흉상. 카이사르 생전에 제작된 현존하는 유일한 흉상으로, 토리노 고고학 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

기원전 47년 1월과 3월 사이, 페르가몬의 미트리다테스와 이두매인 안티파테르가 이끄는 병력을 포함한 카이사르의 지원군이 도착했다.[114][99][121][주해 9]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아르시노에 4세는 군대를 나일강까지 철수시키나 거기서 카이사르에게 공격을 당해 섬멸당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도망치던 중에 배가 뒤집혀 익사한다.[122][99][123] 가니메데스는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테오도투스는 몇 년 후 아시아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붙잡혀 처형당한다. 아르시노에 4세는 로마에서 열린 카이사르의 승전 기념식에 강제로 끌려간 뒤 에페소스아르테미스 신전으로 추방당한다.[124][125][126] 클레오파트라가 이 일련의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왕궁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한데, 48년 9월부터 카이사르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127][128][129]

집정관으로서 카이사르의 임기는 기원전 48년 말에 종료된다.[124] 이 때 카이사르는 휘하 장교 안토니우스의 도움으로 독재관에 오르는데, 이로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분쟁을 해결할 법적 권한을 갖게 된다.[124] 과거 클레오파트라의 언니 베레니케 4세가 단독 여성 군주로 부임했던 것을 실수였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당시 22살의 클레오파트라와 12살 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한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는 동거관계를 계속 이어나갔다.[130][99][121][주해 10] 키프로스도 기원전 42년 이전에 클레오파트라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131][121]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경에 이집트를 떠나 아나톨리아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폰토스 왕국파르나케스 2세와 대치했다고 전해진다.[132] 카이사르는 본처 칼푸르니아가 아직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가 아들을 낳았을 때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한다.[132][133] 카이사르는 나중에 노예출신인 루피오의 휘하에 4개 군단을 맡긴 뒤 이집트에 주둔시키는데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입지를 굳힘과 동시에 그녀의 활동을 감시 및 억압하기 위한 용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132][134][135]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7년 6월 23일에 카이사리온을 낳고, "카이사르 파라오"라는 칭호를 부여한다.[136][99][137] 카이사르는 본처인 칼푸르니아와의 사이에 아직 자녀가 없음을 생각하고 카이사리온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138][주해 11] 반면에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의 아버지가 카이사르라고 여러 번 공식적으로 선언한다.[138][139][140]

기원전 51~30년 경에 제작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 흉상. 클레오파트라의 것으로 추정된다. 브루클린 미술관 소장.[141]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명목상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기원전 46년 말 로마를 방문하는데, 카이사리온은 동행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카이사르는 티베레강 건너 자신의 정원 내에 있는 별장을 숙소로 제공한다.[142][137][143] 카이사르는 그들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마찬가지로,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 모두에게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라틴어: socius et amicus populi Romani)"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했는데, 로마에 충성을 맹세한 종속국의 군주에게 부여하는 호칭이었다.[144][145][146]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의 별장에 머물 때 그녀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원로 키케로도 있었는데, 그는 후에 클레오파트라가 거만했다고 말한다.[147][148] 클레오파트라의 신하인 알렉산드리아의 소시게네스는 카이사르를 도와 기원전 45년 1월 1일 시행될 새로운 율리우스력을 제작했다.[149][150][151] 기원전 46년 9월 25일 카이사르의 포럼에 세워진 비너스 신전에는 3세기까지 클레오파트라의 황금 조각상이 있었는데, 로마인의 어머니인 비너스 여신과 카이사르의 아이의 어머니로 비정되는 클레오파트라를 동일시하는 효과가 있었다.[152][150][153] 이 금상은 이집트 여신 이시스를 로마 종교와 교묘하게 연결시키는 기능도 했다.[147]

클레오파트라의 로마 방문은 카이사르가 암살되기 한달 전 루페르칼리아 축제에서의 사건들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154][155] 이 축제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 했지만, 카이사르는 대중의 반발감을 감지하고는 이를 거절한다.[154][155] 마찬가지로 여기 참석한 키케로는 마치 조롱하듯 왕관을 어디서 났는지 물었는데, 이것은 그가 싫어하던 클레오파트라를 암시하는 것으로 분석된다.[154][155] 카이사르는 3월 15일에 암살되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헛된 희망으로 4월 중순까지 로마에 머물렀다.[156][157][158] 하지만, 카이사르는 유언장으로 누나의 손자 옥타비아누스를 1차 상속인으로 지명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이집트로 떠나기로 결심한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에 도착한다.[156][157][159] 몇 달 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독살함으로써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그녀의 공동 통치자로 격상시켰다.[160][161][140]

리베라토레스의 내전[편집]

기원전 41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만난 클레오파트라의 문. 터키 타르수스.[162]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기원전 43년에 카이사르의 암살에 정의의 심판을 내리라는 명목으로 선출되어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다.[163][164] 클레오파트라는 리베라토레스측에서는 카이사르의 암살자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로부터, 삼두정 측에서는 시리아의 프로콘술이자 카이사르의 충신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로부터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받는다.[163] 그녀는 카시우스에게는 이집트가 내외로 많은 문제에 직면해있다고 답장하지만, 돌라벨라에게는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남긴 4개 군단을 파견한다.[163][165] 그러나 이 군대는 돌라벨라에게 도착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에 있던 카시우스에게 사로잡힌다.[163][165] 클레오파트라가 키프로스의 총독으로 임명한 세라피온이 카시우스에게 망명하여 선박을 제공하는 동안,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선단을 그리스로 데려간다. 그러나 그녀의 선단은 지중해에서 폭풍의 피해를 입고 도착이 너무 지연된 탓에 전투에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163][166] 기원전 42년 가을, 필리피 전투에서 카시우스와 브루투스가 자살하여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에게 승리를 거둔다.[163][167]

기원전 42년 말까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공화정의 서쪽 절반을, 안토니우스는 동쪽 절반을 장악했고, 레피두스는 세력을 떨치지 못한다.[168] 기원전 41년 여름, 안토니우스는 아나톨리아의 타르수스에 사령부를 설립하고 클레오파트라를 초청하는 서신을 여러 편 보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안토니우스의 사절 퀸투스 델리우스의 언변에 넘어가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간다.[169][170] 클레오파트라는 내전 동안 카시우스를 지원했다는 오해를 풀고 레반트의 영토 교환을 목적으로 회담에 참석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사랑에 빠져 개인적인 교제를 목적으로 클레오파트라에게 접근한다.[171][170]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타고 온 탈라메고스호에 안토니우스와 그 부하들을 태우고 이틀동안 키드노스 강을 거슬러 타르수스로 가는 길에 호화로운 연회를 베풀었다.[172][173][주해 12] 클레오파트라는 카시우스가 아닌 돌라벨라를 도우려 노력했다고 결백을 호소했고, 자신의 추방된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를 에페소스에서 처형해달라고 안토니우스를 설득했다.[174][175] 클레오파트라에게 반기를 든 키프로스의 전 총독 역시 처형을 위해 그녀에게 넘겨졌다.[174][176]

안토니우스와의 관계[편집]

클레오파트라는 타르수스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토니우스를 이집트로 초대했고,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1년 11월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한다.[174][177] 알렉산드리의 민중은 안토니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권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준 영웅적인 행동과 더불어, 카이사르와 다르게 군대를 데리고 오지 않은 점에 대해 호감을 가진다.[178][179] 이집트에 도착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배에서 볼 수 있었던 호화로운 왕실 생활을 즐기기 시작한다.[180][176] 그는 또한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와 같은 부하들로 하여금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에서 파르티아인들을 몰아내도록 지시하였다.[179][181][182]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카이사르의 사후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까닭에, 후계자를 낳을 자신의 남편감으로 선택했다.[183] 안토니우스는 삼두중 하나로서 현재 로마의 손에 있는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다시 돌려줄 수 있는 권한 역시 가지고 있었다.[184][185] 기원전 38년 11월 19일에 킬리키아와 키프로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영토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와 함께 지내던 기원전 41-40년 겨울에 양도된 것으로 본다.[184]

기원전 40년 봄, 파르티아 제국에서 망명한 로마 장교 퀸투스 라비에누스가 시리아를 공격해 총독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가 전사하고 군대가 사로잡히는 사건이 발생한다.[186] 안토니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집트를 떠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회복한 영토에 대한 보답의 뜻으로 안토니우스에게 200척의 선박을 지원한다.[186] 이 둘은 기원전 37년이 되어서야 재회하지만, 서신으로 연락은 계속 이어갔으며 안토니우스의 군에 스파이를 심어두었다는 증거도 있다.[186] 기원전 40년 말, 클레오파트라는 쌍둥이를 낳는다. 이 때 태어난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모두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친자로 인정한다.[187][188] 태양을 의미하는 헬리오스와 달을 의미하는 셀레네는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를 정복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위업을 재현할 것이라는 클레오파트라의 기대 뿐만 아니라[179] 새 기운이 흐르는 사회의 상징이었다.[189]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 1885년, 로런스 알마타데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정벌은 안토니우스의 본처 풀비아가 마르쿠스의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페루시아 전쟁을 일으킴으로서 중단된다.[189] 풀비아가 안토니우스를 클레오파트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견해도 있으나, 타르수스에서 그 둘이 첫 만남을 가지기 전부터 갈등의 전조는 있었다.[190] 풀비아와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결국 페루시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포위되었고,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한다. 풀비아는 안토니우스에게로 가다가 그리스의 시키온에서 죽었다.[191]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기원전 40년 9월 이탈리아 브룬디시움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평화협정으로 이어졌다.[191][179] 이 협정에서 로마 공화정의 동쪽 이오니아해에 대한 안토니우스의 지배력이 공고히 승인되었지만, 동시에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갈리아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지배를 인정하고 그의 여동생과 결혼함으로서 클레오파트라에게 경쟁자가 생긴다.[192][193]

기원전 40년 12월 클레오파트라는 예상치 못한 손님인 헤로데를 맞이한다.[194] 당시 유대 지방은 파르티아의 힘을 얻어 등극한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와 안토니우스에 의해 지원을 받은 헤로데와 그 형 파사엘이 서로 대립하고 있떤 상황이었다.[194] 안티고노스 2세는 헤로데의 형 파사엘을 감금했는데, 파사엘은 헤로데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오파트라에게 도망치는 동안 처형되었다.[194] 클레오파트라는 그에게 군사력을 제공하려 했지만, 헤로데는 이를 거절하고 로마로 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로부터 유다의 왕으로 임명받는다.[195][196] 이로 인해 헤로데는 헤로데 왕국의 주인이 되었는데 그 영토가 과거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토와 겹치는 탓에 클레오파트라와 헤로데 사이에 갈등의 씨앗이 심어진다.[195]

클레오파트라[197][198] 혹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를[199]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상.

안토니우스는 정실 옥타비아와 기원전 39년에 큰딸 대 안토니아와 기원전 36년에 작은딸 소 안토니아를 낳은데 이어, 사령부를 아테네로 옮기는데 이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계기가 된다.[200] 클레오파트라의 정적이었던 헤로데는 로마의 강력한 군사 지원 끝에 유대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200]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삼두정이 기원전 37년 1월 1일에 만료되었기 때문에 옥타비아는 타렌툼에서 만남을 주선했고, 회의 끝에 삼두정은 기원전 33년으로 연장되었다.[201] 옥타비아누스가 부여한 두 개의 군단과 옥타비아가 빌려준 천 명의 병사들과 함께 안토니우스는 안티오키아로 가서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준비한다.[202]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안티오키아로 불러 헤로데 왕국과 파르티아 정벌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같은 시급한 문제들을 논의한다.[202][203]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세 살 된 쌍둥이를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는데, 헬리오스와 셀레네라는 이름은 이 때 안토니우스가 지어준 것으로 본다.[204][205] 이는 단순히 동쪽을 안정시키는 것을 넘어, 클레오파트라의 왕국과 함께 여러 속국들을 아래에 둔 새로운 제국의 설립이라는 야심을 공유한 것에 대한 증거로 본다.[206][185][주해 13]

이 회담에서 클레오파트라는 티레시돈을 제외한 레반트 지역에 있던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영토를 거의 다 복구한다.[207][185][203]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 의해 건립된 도시인 아코 역시 할양받는다.[207] 게다가 셀레우코스와 같은 조상을 가진다는 점에 근거하여 오론테스강 상류의 코엘레 시리아 역시 양도받는다.[208][203] 심지어 팔레스타인의 예리코를 둘러싼 지역도 일부 할양받았지만, 이 영토는 임대의 형식으로 헤로데에게 다시 돌려준다.[209][196] 클레오파트라는 또한 아일라나를 포함한 홍해아카바만 주변에서 나바테아 왕국의 일부를 할양받는데, 나바테아 왕 말리쿠스 1세는 이에 앙심을 품는다.[210][196] 서쪽에서는 크레타의 이타노스와 올루스와 더불어 리비아 해안을 따라 키레네를 넘겨받았다.[211][203] 비록 여전히 로마 관리들이 통치하기는 했지만, 이 지역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 번영을 가져다준다.[212][213]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왼쪽)와 옥타비아누스(오른쪽)이 양각된 아우레우스. 기원전 43년에 선포된 제2차 삼두정치를 기념하기 위해 기원전 41년에 발행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직접 지배 영토를 내어주면서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확장시킨 점을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공격한다.[214]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아내 옥타비아를 등한시한다는 이야기에 바람을 불어넣었으며, 옥타비아와 자신의 아내 리비아 둘 다에게 신성불가침의 특권을 부여한다.[214] 50여년 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코넬리아 아프리카나가 로마인 여성 최초로 자신의 동상을 세운 것 처럼,[212] 옥타비아와 리비아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들의 동상은 옥타비아와 리비아의 동상은 카이사르의 포럼에 세워진 클레오파트라의 동상 곁에 세워졌다.[212]

기원전 36년,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제국 정벌에 유프라테스강까지 동행한다.[215]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거기서 돌아오는데, 임신이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216] 기원전 36년 여름, 안토니우스와의 둘째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가 태어난다.[216][203]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정벌은 동맹군이었던 대아르메니아 왕국의 아르타바스데스 2세의 배신으로 완전히 실패한다.[217][185][218] 과거 로마의 수치스러운 패전인 카레 전투에서 잃은 병력보다 더 많은 병력을 잃은 안토니우스는 12월 경 현재의 베이루트 인근 류코코메에 도착해 폭음을 벌인다.[217][219] 그러던 중 클로에파트라는 물질적 지원을 위해 안토니우스를 방문하고, 안토니우스는 위험을 감내하면서 로마로 돌아가는 대신 자신의 아들을 보기 위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향한다.[217]

알렉산드리아 봉헌[편집]

안토니우스가 기원전 34년에 발행한 데나리우스 주화. 앞면에 안토니우스의 초상과 아르메니아를 정벌했다는 내용의 "ANTONIVS ARMENIA DEVICTA"가, 뒷면에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왕권을 나타내는 "CLEOPATR[AE] REGINAE REGVM FILIORVM REGVM"가 양각되어 있다.[220][221]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5년에 또 다른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는데, 이번에는 파르티아 제국의 아르메니아를 목표로 한다. 옥타비아는 2,000명의 병력을 데리고 아테네로 가는데, 안토니우스를 지원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저번 파르티아 정벌의 참패를 조롱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가 파견한 것으로 본다.[222][223][주해 14] 안토니우스는 이 병력을 받고 옥타비아에게 자신과 클레오파트라가 안티오키아로 갈테니 아테네에서 동쪽으로 오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갑작스럽게 원정을 포기하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간다. 이 회군의 이유는 아직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222][223] 옥타비아가 로마로 돌아왔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누이가 안토니우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분노하지만, 옥타비아는 안토니우스의 집을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무른다.[224][185]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시칠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반란을 일으킨 죄로 가택연금에 처해진 나머지 삼두 레피두스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등 서방의 경쟁자들을 물리쳐 자신의 군사력에 대해 강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224][185][219]

델리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아르메니아 왕의 딸의 정략 결혼을 위해 기원전 34년 아르타바스데스 2세에게 향한다.[225][226] 아르메니아가 이를 거절하자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가서 군대를 처부수고 아르메니아 왕족들을 사로잡는다.[225][227] 이후 안토니우스는 로마에서의 제전을 모방하여 은빛 데이지 위에 놓인 황금 왕좌에 앉아 있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사로잡은 아르메니아 왕족들을 선물하는 형식의 개선 행진에 디오니소스 복장을 하고 선두에 선다.[225][228] 이 개선 행진에 대한 소식은 로마에도 전해졌는데, 유서깊은 로마의 전통이 이집트 여왕에 의해 범해졌다며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225]

기원전 33년 세금을 공제하는 내용의 파피루스. 클레오파트라의 서명과 함께 "γινέσθωι"라는 문구가 들어있는데, "뜻대로 될 지어다"라는 의미로 여왕이 이를 승인했음을 의미한다.[229][230][231]

클레오파트라는 승리 직후 김나시온에서 열린 축제에서 이시스 복장을 하고 장남 카이사리온왕중왕으로, 자신을 왕중여왕으로 선포한다. 안토니우스에게서 낳은 자식들도 칭호를 받았는데, 차남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와 메디아파르티아의 왕으로, 2살 된 삼남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시리아와 킬리키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232][233][234] 안토니우스에게서 낳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크레타와 키레네의 왕으로 임명되었다.[235][236] 이 축제에서 안토니우스와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는 견해도 있다.[235][234][주해 15] 안토니우스는 이 축제에서 제안된 영토의 통치권에 대한 비준을 요청하는 보고서를 로마로 보냈다. 옥타비아누스는 선전을 위해 이것을 대중에게 공개하고자 했지만,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던 두 집정관에 의해 검열되었다.[237][236]

기원전 34년 후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향후 수년간 지속될 선전전을 시작한다.[238][236][140][주해 16]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를 불법으로 삼두에서 물러나게 하고 권리를 제한했다고 주장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왕을 불법 억류하고, 여동생 옥타비아와 부부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으며, 카이사르의 유언장과 달리 옥타비아누스 대신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후계자라 주장한 점을 비난했다.[238][236] 이 선전 전쟁에서 비롯된 내용들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문학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대중의 인식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239][240] 옥타비아누스의 선전물 속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세뇌시키는 마녀에서부터, 문명을 파괴하는 데 있어 호메로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트로이헬레네만큼이나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241] 대 플리니우스는 《박물지》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저녁 파티에서의 내기에서 이기려는 하찮은 이유로 식초에 진주 수천만알을 녹였다고 주장한다.[242][243]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다시 채우기 위해 페르가뭄 도서관에서 책을 훔쳤다는 비난은 나중에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244]

악티움 해전[편집]

기원전 30년경에 제작된 아우구스투스의 흉상 복원품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집정관 임기가 시작되는 날인 기원전 33년 1월 1일 원로원 연설에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노예로서 로마의 자유와 영토 보전을 전복하려 한다고 비난한다.[245]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이두정이 기원전 33년 12월 31일 만료되기 전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로 선언한다.[245]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 편의 인물인 가이우스 소시우스그나에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집정관에 오른다. 이들 중 소시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어떠한 공직도 없는 민간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비난조의 연설을 하고, 옥타비아누스를 억압할 수 있는 내용의 법률을 제안한다.[246][247] 다음 원로회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무장 경비원들과 함께 상원 의사당에 들어가 집정관들을 고발한다.[246][248] 이러한 행위에 두려움을 느낀 안토니우스파 집정관들과 200명 이상의 원로들은 다음날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에게로 간다.[246][248][249]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2년에 에페수스로 향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제공할 수 있는 800척의 함정 중 200척을 제공한다.[246] 옥타비아누스의 선전 내용을 의식한 아헤노바르부스는 안토니우스를 설득하여 옥타비아누스 정벌에 클레오파트라를 제외시키려 했다.[250][251] 그러나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전쟁에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군주로서의 능력도 뛰어나다며 아헤노바르부스의 의견에 반대한다.[250][251] 클레오파트라 역시 이집트를 방어하려면 그리스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막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하여 이집트로 돌아가라는 옥타비아누스의 요청을 거절한다.[250][251] 결국 클레오파트라의 이러한 판단으로 인해 아헤노바르부스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등 저명한 로마인들이 안토니우스의 진영에서 이탈한다.[250][248]

클레오파트라가 양각되어있는 4드라크마짜리 은화들. 왼쪽은 셀레우키아 근교에서, 오른쪽은 아슈켈론에서 발견된 것이다.

기원전 32년 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아테네로 향하는데, 여기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옥타비아에게 공식적인 이혼 선언서를 보내라고 설득한다.[250][248][234] 플란쿠스는 이제 옥타비아누스에게 베스타의 여사제들에게 맡겨진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확보해야한다고 간언한다.[250][248][236] 신성한 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감수하고서 옥타비아누스는 베스타 신전에서 강제로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확보하는데, 이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한 선전전에서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250][236]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에서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알렉산드리아 봉헌에서의 선언을 확증하고, 클레오파트라와 나란히 알렉산드리아에 묻히길 원하고, 로마 공화국의 새로운 수도로 알렉산드리아를 삼을 것이라는 내용을 발견해 선전에 활용한다.[252][248][236]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캄푸스 마르티우스자신의 영묘를 지을 것이라고 선언한다.[248] 또한 기원전 31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됨으로써 이전에 문제로 제기되었던 옥타비아누스의 법적 지위 역시 해결되었다.[248]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공론화함으로써 전쟁 명분을 확보한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안토니우스가 아닌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252][253][254] 전쟁에 대한 법적 명분은 클레오파트라의 영토 획득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데, 안토니우스의 삼두정치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민간인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255]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옥타비아누스보다 거대했지만, 병력들은 잘 훈련되지 않은데다가 일부는 상선의 선원들을 징발한 것이었다.[256][251] 안토니우스는 아드리아해를 건너 타렌툼이나 브룬디시움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봉쇄하고자 했지만,[257] 이집트를 방어가 주목적인 클레오파트라는 이탈리아를 직접 공격하자는 안토니우스의 결정을 무시한다.[258][251] 기원전 32년 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의 파트라이에 사령부를 세워 겨울을 보낸 뒤 이듬해 봄에 암브라키코스만 남쪽의 악티움으로 사령부를 옮긴다.[258][257]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동맹국을 여럿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클레오파트라와 갈등을 겪었던 헤로데는 유다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지원군을 물린다.[259] 나바테아의 말리쿠스 1세 또한 동맹군에서 탈퇴하는데, 이는 이후 전략적인 영향을 미쳤다.[260]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1년 여름 악티움 주변에서 옥타비아누스와의 교전에서 몇 차례 패배한데 이어 안토니우스의 오랜 동료 델리우스,[260] 갈라티아왕 아민타스, 파플라고니아의 데이오타로스 등이 옥타비아누스의 진영으로 망명한다.[260] 결국 안토니우스의 진영에서 해전을 포기하고 내륙으로 후퇴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지만,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이집트에서 멀리 떨어뜨리는게 목적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해전을 계속 이어간다.[261]

악티움 해전의 배치도

기원전 31년 9월 2일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이끄는 옥타비아누스 해군은 악티움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 대치한다.[261][257][253]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주력함인 안토니아스 호를 타고, 함대의 후방에 있는 암브라키코스만 입구에서 60척의 배를 지휘했는데, 안토니우스의 장교들이 전투에서 그녀를 소외시키기 위해 후방에 배치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261] 안토니우스는 추격이나 후퇴에서 추진력을 얻기 위해 배에 돛을 달라고 명령한 적이 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이 추진력을 이용해 펠로폰네소스반도로 재빨리 철수하곤 했다.[262][263][264] 로마의 작가들은 이를 두고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쳤다고 적지만, 클레오파트라 군이 후퇴한 것은 적군의 봉쇄를 깨트리고 함대를 최대한 인양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264]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그녀의 배에 옮겨탔는데, 안토니아스 호는 티리언 퍼플로 염색된 까닭에 쉽게 식별되어 두 사람은 전투를 피해 타이나론으로 후퇴한다.[262]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타이나론에 도착해 클레오파트라의 몸종들이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와 대화를 하라고 하기 전까지 클레오파트라와 대화하지 않았다고 한다.[265] 악티움 전투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없이 9월 3일 아침까지 계속되었고, 많은 수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망명하였다.[265][263][266]

죽음[편집]

서기 1세기 초 폼페이에 있는 주세페 2세 가문의 집에서 발견된 벽화로, 다이아뎀을 쓴 클레오파트라가 독약을 마시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아들 카이사리온 역시 다이아뎀을 쓰고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지키고 있다.[267][268]

옥타비아누스가 아테네를 점령하는 동안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파라이토니온에 상륙한다.[265][269] 그 후 안토니우스는 키레네로 가서 증원군을 모집한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가서 그리스에서의 마치 승리를 거둔 것 처럼 거짓말을 한다.[265] 악티움 전투의 결과가 알려지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270] 이 때 클레오파트라는 과거 아르메니아에서 사로잡아온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처형하고 그 목을 아트로파테네의 아르타바스데스 1세에게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271][272]

안토니우스에 의해 임명된 키레네 총독 루키우스 피나리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사절단이 총독부에 도착하기 전에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271] 사절단을 처형하여 옥타비아누스의 곁으로 망명하는데 안토니우스가 얻고자 했던 자신 휘하의 4개 군단을 모두 데리고 갔다.[271] 안토니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살하려하지만 참모들에 의해 저지당한다.[271]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있는 파로스섬에 인간혐오와 냉소주의 사상의 철학자 티몬의 이름을 따와 티모네이온이라는 오두막을 짓고 거기에 은거한다.[271] 악티움 전투 이후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를 배신해야 한다고 충고했던 헤로데는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기 위해 로도스로 갔고 안토니우스에게서 받은 왕위를 내려놓는다.[273]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헤로데의 말과 충성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유대에서 왕위를 계속 유지하도록 했다.[273]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1년 늦여름부터는 안토니우스를 카이사리온에 대한 방해물로 여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274] 클레오파트라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지중해에서 홍해로 선단을 데려간 다음, 인도에서 회복할 시간을 가질 계획이었다.[274][272] 하지만 말리쿠스 1세가 옥타비아누스 편인 시리아 총독인 퀸투스 디디우스의 조언대로 클레오파트라의 선단을 불태워 나바테아의 영토를 빼앗긴 것에 대한 해묵은 복수를 자행한 까닭에 클레오파트라는 떠나지 못한다.[274][272] 이제 옥타비아누스의 자비를 구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274] 옥타비아누스 측에서 퍼뜨린 소문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 시기에 클레오파트라는 죄수들과 하인들에게 다양한 독극물을 시험해보았다고 전해진다.[275]

하지만 전쟁은 실패하였고 자신을 용감한 토착 이집트 여인이 아닌 나약한 그리스 여인으로 취급하는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할 수 없음을 직감한 클레오파트라는 깊은 절망감에 시달려 39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에 물려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자살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죽여놓고 뱀에 물려 자살했다고 발표해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뱀에 의한 자살, 독가스에 의한 자살, 타살, 에이즈(AIDS) 감염에 의한 병사(病死) 등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평가[편집]

클레오파트라는 지식인인 블레즈 파스칼조차도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후대의 남성들에게 성적인 관점에서만 평가받았다. 그리고 생전에도 옥타비아누스로부터 로마를 짓밟는 성적인 그리스 여인 취급을 받은 일이 있다.

하지만 그 이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과는 다르게 클레오파트라가 강대국 로마 제국을 이용하여 나라를 보전하려는 시도가 많았고, 그녀의 진짜 모습은 남성들을 유혹하는 요녀가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 중 유일하게 고대 이집트어를 사용했고 고대 이집트 종교의 이름으로 궁전 밖의 세계를 다스려 다시 한번 이집트 황금기를 열고자 노력한 호걸이라는 평가가 있다.

가계[편집]

주해[편집]

  1. Tyldesley (2017)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여신 클레오파트라"라 해석한다.
  2. Grant (1972, 3쪽)는 클레오파트라가 기원전 70년 말이나 69년 초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3. Due to discrepancies in academic works, in which some consider Cleopatra VI to be either a daughter of Ptolemy XII or his wife, identical to that of Cleopatra V, Jones (2006, 28쪽) states that Ptolemy XII had six children, while Roller (2010, 16쪽) mentions only five.
  4. Schiff (2011, 28쪽)와 Kleiner (2005, 22쪽)도 참고하라. 이와 반대되는 가설에 대해선 Burstein (2004, 11쪽)과 Roller (2010, 15, 18, 166쪽)도 보라.
  5. Grant (1972, 3–4, 17쪽), Fletcher (2008, 69, 74, 76쪽), Jones (2006, xiii쪽), Preston (2009, 22쪽), Schiff (2011, 28쪽) and Burstein (2004, 11쪽) label the wife of Ptolemy XII Auletes as Cleopatra V Tryphaena, while Dodson & Hilton (2004, 268–269, 273쪽) and Roller (2010, 18쪽) call her Cleopatra VI Tryphaena, due to the confusion in primary sources conflating these two figures, who may have been one and the same. As explained by Whitehorne (1994, 182쪽), Cleopatra VI may have actually been a daughter of Ptolemy XII who appeared in 58 BC to rule jointly with her alleged sister Berenice IV (while Ptolemy XII was exiled and living in Rome), whereas Ptolemy XII's wife Cleopatra V perhaps died as early as the winter of 69–68 BC, when she disappears from historical records. Roller (2010, 18–19쪽) assumes that Ptolemy XII's wife, who he numbers as Cleopatra VI, was merely absent from the court for a decade after being expelled for an unknown reason, eventually ruling jointly with her daughter Berenice IV. Fletcher (2008, 76쪽) explains that the Alexandrians deposed Ptolemy XII and installed "his eldest daughter, Berenike IV, and as co-ruler recalled Cleopatra V Tryphaena from 10 years' exile from the court. Although later historians assumed she must have been another of Auletes' daughters and numbered her 'Cleopatra VI', it seems she was simply the fifth one returning to replace her brother and former husband Auletes."
  6. 더 자세한 정보를 얻고싶다면 Grant (1972, 12–13쪽)를 보라. 그랜트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로부터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이라는 칭호를 얻기 위해 6천 달란트를 뇌물로 주었다고 추산했는데, 1972년 기준으로 1,700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으로 당시 이집트의 1년 조세에 근접한다.
  7.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딸 한 명과 같이 갔다는 내용의 고대 그리스어 문헌에 근거한 것인데, Fletcher (2008, 76–77쪽)는 당시 아리소네는 갓난아기였고, 베레니케 4세는 이집트의 대리 통치자가 되었으므로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가장 사랑했던 딸인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갔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한다.
  8. Pfrommer & Towne-Markus (2001, 34쪽) writes the following about the sibling marriage of Ptolemy II and Arsinoe II: "Ptolemy Keraunos, who wanted to become king of Macedon ... killed Arsinoë's small children in front of her. Now queen without a kingdom, Arsinoë fled to Egypt, where she was welcomed by her full brother Ptolemy II. Not content, however, to spend the rest of her life as a guest at the Ptolemaic court, she had Ptolemy II's wife exiled to Upper Egypt and married him herself around 275 B.C. Though such an incestuous marriage was considered scandalous by the Greeks, it was allowed by Egyptian custom. For that reason, the marriage split public opinion into two factions. The loyal side celebrated the couple as a return of the divine marriage of Zeus and Hera, whereas the other side did not refrain from profuse and obscene criticism. One of the most sarcastic commentators, a poet with a very sharp pen, had to flee Alexandria. The unfortunate poet was caught off the shore of Crete by the Ptolemaic navy, put in an iron basket, and drowned. This and similar actions seemingly slowed down vicious criticism."
  9. Burstein (2004, 19쪽)는 1월에, Roller (2010, 63쪽)는 3월에 병력이 도착했다고 분석한다.
  10. 기원전 47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4세의 나이를 Roller (2010, 64–65쪽)는 12살로, Burstein (2004, 19쪽)는 10살로 분석한다.
  11. Roller (2010, 70쪽) writes the following about Caesar and his parentage of Caesarion: "The matter of parentage became so tangled in the propaganda war between Antonius and Octavian in the late 30s B.C.—it was essential for one side to prove and the other to reject Caesar's role—that it is impossible today to determine Caesar's actual response. The extant information is almost contradictory: it was said that Caesar denied parentage in his will but acknowledged it privately and allowed the use of the name Caesarion. Caesar's associate C. Oppius even wrote a pamphlet proving that Caesarion was not Caesar's child, and C. Helvius Cinna—the poet who was killed by rioters after Antonius' funeral oration—was prepared in 44 B.C. to introduce legislation to allow Caesar to marry as many wives as he wished for the purpose of having children. Although much of this talk was generated after Caesar's death, it seems that he wished to be as quiet as possible about the child but had to contend with Cleopatra's repeated assertions."
  12. As explained by Burstein (2004, 23쪽), Cleopatra, having read Antony's personality, boldly presented herself to him as the Egyptian goddess Isis (in the appearance of the Greek goddess Aphrodite) meeting her divine husband Osiris (in the form of the Greek god Dionysus), knowing that the priests of the Temple of Artemis at Ephesus had associated Antony with Dionysus shortly before this encounter. According to Brown (2011), a cult surrounding Isis had been spreading across the region for hundreds of years, and Cleopatra, like many of her predecessors, sought to identify herself with Isis and be venerated. In addition, some surviving coins of Cleopatra also depict her as Venus–Aphrodite, as explained by Fletcher (2008, 205쪽).
  13. Roller (2010, 91–92쪽)는 이 제국에 클레오파트라의 프톨레마이오스왕국 뿐 아니라 헤로데 왕국, 갈라티아, 폰토스, 카파도키아도 포함된 것으로 해석한다.
  14. Bringmann (2007, 301쪽)는 소 옥타비아가 2,000명이 아닌 1,200명의 군대를 끌고 갔다고 본다.
  15. Roller (2010, 100쪽)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공식적인 결혼식을 올린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말하지만, Burstein (2004, xxii, 29쪽) 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반발감으로 옥타비아와 기원전 32년에 이혼하기 이전에 결혼식을 올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차치하더라도, 주화의 양면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새겨진 것은 Roller (2010, 100쪽)의 말마따나 고대 헬레니즘 문화에서 왕과 왕비를 그려넣는 방식과 일치한다.
  16. Jones (2006, xiv쪽)는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가 여성이자 외국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프로파간다를 펼쳤다고 말한다.

각주[편집]

  1. Hölbl (2001), 231쪽.
  2. Muellner ().
  3. Royster (2003), 48쪽.
  4. Roller (2010), 15–16쪽.
  5. Roller (2010), 15–16, 39쪽.
  6. Fletcher (2008), 55–57쪽.
  7. Burstein (2004), 15쪽.
  8. Fletcher (2008), 84, 215쪽.
  9. Grant (1972), 3쪽.
  10. Roller (2010), 15쪽.
  11. Anderson (2003), 38쪽.
  12. Roller (2010), 16쪽.
  13. Fletcher (2008), 73쪽.
  14. Preston (2009), 22쪽.
  15. Jones (2006), xiii, 28쪽.
  16. Roller (2010), 18–19쪽.
  17. Fletcher (2008), 68–69쪽.
  18. Roller (2010), 45–46쪽.
  19. Roller (2010), 45쪽.
  20. Fletcher (2008), 81쪽.
  21. Roller (2010), 20쪽.
  22. Burstein (2004), xix, 12–13쪽.
  23. Roller (2010), 20–21쪽.
  24. Burstein (2004), xx, 12–13쪽.
  25. Fletcher (2008), 74–76쪽.
  26. Roller (2010), 21쪽.
  27. Burstein (2004), 13쪽.
  28. Fletcher (2008), 76쪽.
  29. Walker & Higgs (2001), 314–315쪽.
  30. Fletcher (2008), p. 87, image plates and captions between pp. 246–247.
  31. Roller (2010), 22쪽.
  32. Burstein (2004), xx, 13, 75쪽.
  33. Burstein (2004), 13, 75쪽.
  34. Grant (1972), 14–15쪽.
  35. Fletcher (2008), 76–77쪽.
  36. Roller (2010), 23쪽.
  37. Fletcher (2008), 77–78쪽.
  38. Roller (2010), 23–24쪽.
  39. Fletcher (2008), 78쪽.
  40. Grant (1972), 16쪽.
  41. Roller (2010), 24쪽.
  42. Burstein (2004), xx, 13쪽.
  43. Grant (1972), 16–17쪽.
  44. Burstein (2004), 13, 76쪽.
  45. Roller (2010), 24–25쪽.
  46. Burstein (2004), 76쪽.
  47. Burstein (2004), 23, 73쪽.
  48. Roller (2010), 25쪽.
  49. Grant (1972), 18쪽.
  50. Roller (2010), 25–26쪽.
  51. Burstein (2004), 13–14, 76쪽.
  52. Fletcher (2008), 11–12쪽.
  53. Burstein (2004), 13–14쪽.
  54. Fletcher (2008), 11–12, 80쪽.
  55. Roller (2010), 26쪽.
  56. Burstein (2004), 14쪽.
  57. Roller (2010), 26–27쪽.
  58. Fletcher (2008), 80, 85쪽.
  59. Roller (2010), 27쪽.
  60. Burstein (2004), xx, 14쪽.
  61. Fletcher (2008), 84–85쪽.
  62. Roller (2010), 53, 56쪽.
  63. Burstein (2004), xx, 15–16쪽.
  64. Roller (2010), 53–54쪽.
  65. Burstein (2004), 16–17쪽.
  66. Roller (2010), 53쪽.
  67. Roller (2010), 54–56쪽.
  68. Burstein (2004), 16쪽.
  69. Roller (2010), 56쪽.
  70. Fletcher (2008), 91–92쪽.
  71. Burstein (2004), xx쪽.
  72. Roller (2010), 36–37쪽.
  73. Burstein (2004), 5쪽.
  74. Grant (1972), 26–27쪽.
  75. Roller (2010), 56–57쪽.
  76. Fletcher (2008), 73, 92–93쪽.
  77. Fletcher (2008), 92–93쪽.
  78. Roller (2010), 57쪽.
  79. Burstein (2004), xx, 17쪽.
  80. Roller (2010), 58쪽.
  81. Fletcher (2008), 94–95쪽.
  82. Fletcher (2008), 95쪽.
  83. Roller (2010), 58–59쪽.
  84. Burstein (2004), 17쪽.
  85. Fletcher (2008), 95–96쪽.
  86. Roller (2010), 59쪽.
  87. Fletcher (2008), 96쪽.
  88. Roller (2010), 59–60쪽.
  89. Fletcher (2008), 97–98쪽.
  90. Bringmann (2007), 259쪽.
  91. Burstein (2004), xxi, 17쪽.
  92. Roller (2010), 60쪽.
  93. Fletcher (2008), 98쪽.
  94. Jones (2006), 39–43, 53쪽.
  95. Burstein (2004), xxi, 17–18쪽.
  96. Roller (2010), 60–61쪽.
  97. Bringmann (2007), 259–260쪽.
  98. Burstein (2004), xxi, 18쪽.
  99. Bringmann (2007), 260쪽.
  100. Roller (2010), 61쪽.
  101. Fletcher (2008), 100쪽.
  102. Burstein (2004), 18쪽.
  103. Hölbl (2001), 234–235쪽.
  104. Jones (2006), 56–57쪽.
  105. Hölbl (2001), 234쪽.
  106. Jones (2006), 57–58쪽.
  107. Roller (2010), 61–62쪽.
  108. Hölbl (2001), 235쪽.
  109. Fletcher (2008), 112–113쪽.
  110. Roller (2010), 26, 62쪽.
  111. Roller (2010), 62쪽.
  112. Burstein (2004), 18, 76쪽.
  113. Burstein (2004), 18–19쪽.
  114. Roller (2010), 63쪽.
  115. Hölbl (2001), 236쪽.
  116. Fletcher (2008), 118–119쪽.
  117. Burstein (2004), xxi, 76쪽.
  118. Fletcher (2008), 119쪽.
  119. Roller (2010), 62–63쪽.
  120. Hölbl (2001), 235–236쪽.
  121. Burstein (2004), 19쪽.
  122. Roller (2010), 63–64쪽.
  123. Burstein (2004), xxi, 19, 76쪽.
  124. Roller (2010), 64쪽.
  125. Burstein (2004), xxi, 19–21, 76쪽.
  126. Fletcher (2008), 172쪽.
  127. Roller (2010), 64, 69쪽.
  128. Burstein (2004), xxi, 19–20쪽.
  129. Fletcher (2008), 120쪽.
  130. Roller (2010), 64–65쪽.
  131. Roller (2010), 65쪽.
  132. Roller (2010), 67쪽.
  133. Burstein (2004), 19–20쪽.
  134. Burstein (2004), 20쪽.
  135. Fletcher (2008), 153쪽.
  136. Roller (2010), 69–70쪽.
  137. Burstein (2004), xxi, 20쪽.
  138. Roller (2010), 70쪽.
  139. Fletcher (2008), 162–163쪽.
  140. Jones (2006), xiv쪽.
  141. Ashton (2001b), 164쪽.
  142. Roller (2010), 71쪽.
  143. Fletcher (2008), 179–182쪽.
  144. Roller (2010), 21, 57, 72쪽.
  145. Burstein (2004), xxi, 20, 64쪽.
  146. Fletcher (2008), 181–182쪽.
  147. Roller (2010), 72쪽.
  148. Fletcher (2008), 194–195쪽.
  149. Roller (2010), 72, 126쪽.
  150. Burstein (2004), 21쪽.
  151. Fletcher (2008), 201–202쪽.
  152. Roller (2010), 72, 175쪽.
  153. Fletcher (2008), 195–196, 201쪽.
  154. Roller (2010), 72–74쪽.
  155. Fletcher (2008), 205–206쪽.
  156. Roller (2010), 74쪽.
  157. Burstein (2004), xxi, 21쪽.
  158. Fletcher (2008), 207–213쪽.
  159. Fletcher (2008), 213–214쪽.
  160. Roller (2010), 74–75쪽.
  161. Burstein (2004), xxi, 22쪽.
  162. Roller (2010), 77–79, Figure 6쪽.
  163. Roller (2010), 75쪽.
  164. Burstein (2004), xxi, 21–22쪽.
  165. Burstein (2004), 22쪽.
  166. Burstein (2004), 22–23쪽.
  167. Burstein (2004), xxi, 22–23쪽.
  168. Roller (2010), 76쪽.
  169. Roller (2010), 76–77쪽.
  170. Burstein (2004), xxi, 23쪽.
  171. Roller (2010), 77쪽.
  172. Roller (2010), 77–79쪽.
  173. Burstein (2004), 23쪽.
  174. Roller (2010), 79쪽.
  175. Burstein (2004), xxi, 24, 76쪽.
  176. Burstein (2004), 24쪽.
  177. Burstein (2004), xxii, 24쪽.
  178. Roller (2010), 79–80쪽.
  179. Burstein (2004), 25쪽.
  180. Roller (2010), 77–79, 82쪽.
  181. Bivar (1983), 58쪽.
  182. Brosius (2006), 96쪽.
  183. Roller (2010), 81–82쪽.
  184. Roller (2010), 82–83쪽.
  185. Bringmann (2007), 301쪽.
  186. Roller (2010), 83쪽.
  187. Roller (2010), 83–84쪽.
  188. Burstein (2004), xxii, 25쪽.
  189. Roller (2010), 84쪽.
  190. Roller (2010), 84–85쪽.
  191. Roller (2010), 85쪽.
  192. Roller (2010), 85–86쪽.
  193. Burstein (2004), xxii, 25, 73쪽.
  194. Roller (2010), 86쪽.
  195. Roller (2010), 86–87쪽.
  196. Burstein (2004), 26쪽.
  197. Fletcher (2008), image plates between pp. 246–247.
  198. Ferroukhi (2001b), 242쪽.
  199. Roller (2003), 139쪽.
  200. Roller (2010), 89쪽.
  201. Roller (2010), 89–90쪽.
  202. Roller (2010), 90쪽.
  203. Burstein (2004), xxii, 25–26쪽.
  204. Roller (2010), 90–91쪽.
  205. Burstein (2004), 77쪽.
  206. Roller (2010), 91–92쪽.
  207. Roller (2010), 92쪽.
  208. Roller (2010), 92–93쪽.
  209. Roller (2010), 93–94쪽.
  210. Roller (2010), 94, 142쪽.
  211. Roller (2010), 94쪽.
  212. Roller (2010), 95쪽.
  213. Burstein (2004), 26–27쪽.
  214. Roller (2010), 94–95쪽.
  215. Roller (2010), 95–96쪽.
  216. Roller (2010), 96쪽.
  217. Roller (2010), 97쪽.
  218. Burstein (2004), xxii, 27쪽.
  219. Burstein (2004), 27쪽.
  220. Crawford (1974), 102, 539쪽.
  221. Newman (1990), 50, 51 (note 29)쪽.
  222. Roller (2010), 97–98쪽.
  223. Burstein (2004), 27–28쪽.
  224. Roller (2010), 98쪽.
  225. Roller (2010), 99쪽.
  226. Burstein (2004), 28쪽.
  227. Burstein (2004), xxii, 28쪽.
  228. Burstein (2004), 28–29쪽.
  229. Roller (2010), 133–134쪽.
  230. Burstein (2004), 33쪽.
  231. Reece (2017), 201–202쪽.
  232. Roller (2010), 99–100쪽.
  233. Bringmann (2007), 301–302쪽.
  234. Burstein (2004), xxii, 29쪽.
  235. Roller (2010), 100쪽.
  236. Burstein (2004), 29쪽.
  237. Roller (2010), 100–101쪽.
  238. Roller (2010), 129–130쪽.
  239. Roller (2010), 130쪽.
  240. Burstein (2004), 65–66쪽.
  241. Roller (2010), 130–131쪽.
  242. Pliny the Elder, Natural History 9.58 Archived 20 June 2020 - 웨이백 머신.
  243. Roller (2010), 132쪽.
  244. Roller (2010), 133쪽.
  245. Bringmann (2007), 302쪽.
  246. Roller (2010), 134쪽.
  247. Bringmann (2007), 302–303쪽.
  248. Bringmann (2007), 303쪽.
  249. Burstein (2004), 29–30쪽.
  250. Roller (2010), 135쪽.
  251. Burstein (2004), 30쪽.
  252. Roller (2010), 136쪽.
  253. Burstein (2004), xxii, 30쪽.
  254. Jones (2006), 147쪽.
  255. Roller (2010), 136–137쪽.
  256. Roller (2010), 137, 139쪽.
  257. Bringmann (2007), 303–304쪽.
  258. Roller (2010), 137쪽.
  259. Roller (2010), 137–138쪽.
  260. Roller (2010), 138쪽.
  261. Roller (2010), 139쪽.
  262. Roller (2010), 139–140쪽.
  263. Bringmann (2007), 304쪽.
  264. Burstein (2004), 30–31쪽.
  265. Roller (2010), 140쪽.
  266. Burstein (2004), xxii–xxiii, 30–31쪽.
  267. Roller (2010), 178–179쪽.
  268. Elia (1956), 3–7쪽.
  269. Burstein (2004), xxii–xxiii쪽.
  270. Joachim Brambach: Kleopatra. Diederichs, Munich 1996, ISBN 3-424-01239-4., p. 312.
  271. Roller (2010), 141쪽.
  272. Burstein (2004), 31쪽.
  273. Roller (2010), 141–142쪽.
  274. Roller (2010), 142쪽.
  275. Roller (2010), 143쪽.
  276. 베르너 후스(Werner Huß) Ägypten in hellenistischer Zeit (Egypt in Hellenistic times). C. H. Beck, Munich 2001에 의하면, 어머니가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가 아닌 맴피스의 귀족 여성이라고 한다.
  277. 남편이기도 함
  278. Strabo, Geographica 17.1.11, p. 796.
  279. 정식 배우자는 아님

참고 문헌[편집]

온라인[편집]

출판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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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