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드라굽타 마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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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드라굽타 마우리아
चन्द्रगुप्त मौर्यः
Chandragupt maurya Birla mandir 6 dec 2009 (31) (cropped).JPG
지위
Ashoka Chakra.svg
마우리아 제국의 제1대 삼랏
재위 BC 322년 ~ BC 298년
전임 없음
후임 빈두사라
재상 차나키야
신상정보
국적 마우리아 제국
출생일 ?
사망일 기원전 293년
왕조 마우리아 왕조
자녀 빈두사라
종교 자이나교
군사 경력
참전 난다 왕조 정복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
참전기간 BC 322년
BC 305년 ~ BC 303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산스크리트어: चन्द्रगुप्त मौर्यः 찬드라굽타 마우리야)는 마우리아 제국의 제1대 삼랏으로, 마우리아 제국의 창건자이다. 찬드라굽타는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결과적으로 찬드라굽타는 인도 역사상 첫 번째 황제(재위: 기원전 322년 ~ 기원전 298년)로 군림하였다.

찬드라굽타는 인도 아대륙의 작은 지역 왕국들과 갠지스 평원마가다를 정복하였다.

찬드라굽타의 정복후에 마우리아 제국은 동쪽의 벵갈과 아셈에서 서부의 파키스탄발루치스탄으로 그리고 북서쪽으로는 카슈미르와 북동쪽으로는 네팔로 남쪽으로는 데칸 고원으로 확장하였다.

그의 업적은 마가다 난다 왕조의 정복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침공 격퇴와 남아시아의 전역에 중앙 집권의 달성 등이 있다. 약 2천년 후에 찬드라굽타와 아쇼카를 포함한 그의 계승자의 업적 남아시아 세계 역사의 연대기에 가장 큰 연구의 주제이다.

많은 인도 사학자들이 찬드라굽타가 마가다난다 왕조의 난다 왕자와 무라 사이에서 태어난 불법적인 아이였다는 견해를 지닌다. 다른 후대의 문학 구전에서는 찬드라굽타가 공작조련사 마우리야-포샤카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한다. 자이나교와 불교의 전통은 모리야(마우리야)와 모라 또는 마유라(공작)간의 주장되는 연결을 입증한다.

다른 문헌에 의하면 찬드라굽타는 고대의 피팔리바나 공화국의 크샤트리아 부족인 마우리아족에 속하며 그곳은 네팔우타르프라데시 사이에 위치한다.

생애[편집]

마우리아의 시조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본래 마가다 왕국 난다 왕조의 분가인 "마우리아"라는 크샤트리야 가문 출신으로, 탁샤실라 대학의 구루였던 차나키야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이즈음 인도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 알렉산드로스 3세의 공격으로 차례차례 점령당하고 있었는데, 서부 펀자브 지역의 탁샤실라 왕은 알렉산드로스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동부 펀자브 지역의 파우라바 왕국 왕인 포루스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저항을 시도했지만 기원전 326년에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펀자브 지역을 비롯한 북서부 인도가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정복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차나키야는 당시 북인도의 패권 국가 마가다 왕국을 다스리던 난다 왕조의 왕 다나 난다에게 마케도니아를 쳐부수자고 제의하였지만 모욕을 받음과 동시에 거절당했으며,[1] 이후 난다 왕조를 증오하게 된 카우틸랴는 제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난다 왕조부터 멸망시킨 후 인도를 이 위기로부터 구할 왕국을 세우자고 제안하였다. 이를 수락한 찬드라굽타가 펀자브 지역의 파우라바 왕국을 정복하여 펀자브를 거점으로 삼은 후 차나키야난다 왕조가 약해질 틈을 기다리는 동시에 탁실라의 장교, 그가 키운 제자들, 당시 난다 왕조의 장군인 바드라살라 등을 통섭하였고, 기원전 221년 난다 왕조의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점령함으로써 난다 왕조를 정복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초대 삼라트(황제)로 즉위해 마우리아 제국을 건국하였다.

동시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함으로써 헬레니즘 제국의 지방 권력이 와해되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이를 기회로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된 인도 지역인 니카노르, 에우다모스 등을 수복하기 시작하였는데,[2] 이러한 팽창 정책을 펼치던 마우리아 제국과 과거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싶었던 셀레우코스 제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서로 충돌하면서 기원전 305년에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이 발발하였지만,[3]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인더스 강을 뒤로 하여 전술적으로 불리한 지역에 위치하던 것을 파악한 마우리아 제국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고, 결국 기원전 303년에 셀레우코스 왕조와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은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이 지배하던 인더스 강 서쪽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을 얻게 되었으며,[4] 이 전쟁을 계기로 마우리아 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헬레니즘 문명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함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의 위상이 한층 격상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5]

그리스 세계와 마우리아 제국 간에 교류가 지속되면서 마우리아 제국에 수많은 그라스인 사절들이 파견되었는데, 이들 중 셀레우코스 제국의 외교관이자 당시 고대 인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인 메가스테네스가 저술한 역사서인 "인디카"에서는 마우리아 제국의 수도인 파탈리푸트라에 대해 "64개의 성문과 570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성으로 둘러싸인 곳이자 페르시아 제국의 궁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궁전을 지닌 도시"라고 기록된 내용이 존재한다.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 이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인도 아대륙 안쪽으로 관심을 돌려 북인도뿐만 아니라 중부 인도와 남인도 지역에도 확장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 마우리아 제국은 오디샤 지역의 칼링가타밀라캄 지역의 촐라, 판디아, 체라를 제외한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통일하였지만,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재위 말기인 기원전 298년에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에 발생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당시 그가 스승으로 모시던 자이나교 구루의 충고를 들은 후 정치에 손을 떼고 아들인 빈두사라에게 마우리아 제국의 황제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자이나교에 귀의하여 출가한 후 고행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각주[편집]

  1. Sugandhi, Namita Sanjay (2008). Between the Patterns of History: Rethinking Mauryan Imperial Interaction in the Southern Deccan. pp. 88–89. ISBN 9780549744412.
  2. 《From Polis to Empire, the Ancient World, C. 800 B.C.-A.D. 500》. Greenwood Publishing. 2002. ISBN 0313309426. 2019년 8월 16일에 확인함. 
  3. Kosmin 2014.
  4. https://books.google.co.kr/books?id=-5RHK4Ol15QC&pg=PA64&redir_esc=y#v=onepage&q&f=false
  5. s, deepak (2016년 10월 25일). 《Indian civilization》 (영어). deepak shinde. 
마우리아 제국의 제1대 삼랏
기원전 322년 ~ 기원전 298년
후 대
빈두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