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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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안 함보(完顏函普, ?~?)는 복간수 완안부의 1대 추장으로 금나라 황실의 시조이다. 1136년, 시조(始祖), 경원황제(景元皇帝)로 추존되었고, 1142년에, 함보의 묘를 광릉(光陵)이라 칭하였다. 이듬해인 1143년에, 시조(始祖)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로 증시되었다.

국가 서적명
완안 함보 원나라 금사
완안 긍포 남송 신록기
완안 합부 청나라 흠정만주원류고
완안 감포 청나라 삼조북맹회편
완안 감복 남송 송막기문
완안 감복 남송 금지
완안 감복 청나라 대금국지
김극수 조선 고려사
금극수 조선 고려사절요
금준 조선 고려사
완안 합부 청나라 어제개역금사
완얀 샨푸 청나라 아이신 구룬 이 수두리

생애[편집]

후삼국 때에 신라에서 고려로 교체되는 지역에 거주했고, 남송대 모요가 기록한 《신록기》에서는 함보가 신라에서 도망쳐 완안부로 왔다고 한다.[1]금사》에 따르면, 함보가 고려에서 나왔을 때 60세였다.[2]

함보의 형 아고내는 불교에 심취해 동행하기를 불긍하여, 고려에 남았고, 함보와 아우 보활리는 각각 복간수 완안부와 야라로 들어갔다.

보활리의 후손들은 야라로 완안부[3]의 추장을 세습하다 그 4세손 완안 직리해(直離海) 때 완안 오고내 의 복간수 완안부와 통문하여 완안 핵리발 때에는 직리해의 아들 완안 석토문(石土門)이 아우 아사만(阿斯懣)과 함께 부족을 들어 복간수 완안부에 귀부하였다.

《신록기》에 따르면, 함보는 벽목(劈木)하여 문서와 같이 계약을 이루워냈다. 부민들로 하여금 빚을 내게하고, 이자가 늘어나게하여, 근면하게 밭에 종자를 뿌려 마침내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만약 도적이 닭, 돼지, 개, 말을 훔치는 것을 본다면, 질곡(桎梏)으로써 형틀에 묶고,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하여 채찍질하였고, 그 외에는 7배로 배상하는 법령을 엄준하고 과단하여 사사롭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근방이 모두 복종하여 신명(神明)이라 칭하였다. 《금사》에 따르면, 함보가 완안부에 이르러 오래 거주하였는데, 그 부민들은 일찍부터 타족 사람들을 죽였고 이로 인해 양족은 원한으로 싸움이 그치질 않아 해결되지 않았다. 완안부민들이 함보에게 양족이 서로 죽이지 않게 해 준다면, 완안부에 나이 60세의 미혼녀가 있으니 서로 결혼시켜 주고 정식 완안부민으로 받아줄 것을 제안하자 함보는 승락했다. 함보는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주모자 1명만 처벌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물건으로 보상토록 하면 싸움도 그치고 이득도 될 것이라 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만일 살상할 경우, 살인자가 피살자 가족에게 자기가족 1명, 암말 10마리와 수말 10마리, 암소 10마리, 황금 6냥을 주면 즉시 양측은 화해하고 사적인 싸움을 하지 않기로 한다는 법을 규정했다. 완안부민들은 이 규정을 믿고 준수하였으며 이에 대한 사례로 함보에게 청우 1마리를 주고 60세 된 여자를 신부로 데려가는 것을 허용하였다.《신록기》에 따르면 그녀의 나이가 40세였고, 성은 결도고단(結徒姑丹)씨라고 한다. 함보는 마침내 청우를 이용하여, 결도고단씨 일가에 보낼 혼례 예물을 마련함과 동시에 그의 자산을 마련하였다. 결도고단씨는 우마로서 농작기구를 재물로 사용하여, 마침내 함보는 그녀와 혼인하였다.

장남 오로(烏魯), 차남 알로(斡魯), 장녀 주사판(注思板)을 출산하여, 마침내 완안부 사람이 되었고, 이후에 여진 추장 무리가 결맹하여 추대하여 함보를 수령으로 삼았다.《송막기문》에 따르면, 함보가 일을 잘 처리해 여진이 수령직 양보하여, 복종하였다고 한다.[4]

종족에 대한 논의[편집]

금 시조 함보가 신라 혹은 고려에서 간 사실은 분명하지만, 지내굉(池內宏)의 생여진 사회의 설화에 지나지 않으며 공상의 인물이라고 주장한 이래 오늘날 나이토우 코난, 이마이 히데 마코토 등 일본 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지내굉의 학설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으며, 이주전을 비롯한 학자들은 위의 함보 기사에 나오는 고려(高麗)는 고구려(高句麗)를 말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데, 왜냐하면 남송 서몽신(徐夢莘)의 《삼조북맹회편》에 의하면 여진족의 선조에 관하여 두 가지 설 중 하나가 원래 주몽의 후예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흑수말갈이면서 발해의 별류 그리고 삼한(三韓) 중의 진한(辰韓)의 한 갈레라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5] 김상기 서울대학교 교수는 그가 고려인이며, 지내굉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억측이라고 하였다.[6]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학자들은 함보가 고려 혹는 신라에서 온 사람일지는 모르나 결코 고려인이나 신라인이 아닌 여진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장박천, 손진기, 맹고탁력 등이 있다. 장박천은 고려와 여진 사이의 을리골령(乙離骨嶺)을 북한 함경산맥으로 비정하고, 생여진 30성의 하나인 복산부(僕山部)의 거주지로 보고, 을리골령 일대에 살았던 여진인 함보는 안출호수(按出虎水)가 있는 복간수 완안부에 정착하였고, 동생 보활리는 러시아 연해주 부근인 야라(耶懶) 지역에 정착하였고, 형 아고내는 오늘날의 요동반도에 있던 갈소관(曷蘇館) 여진에 정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7]


흑룡강성 역사연구소 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 맹고탁력(孟古托力)은《금사》의 편수자들이 함보가 고려에 부속했던 말갈인임을 지적했음을 분명히하고,[8] 숙여진 갈소관부(曷蘇館部) 수령 호십문(胡十門)이 말하기를, "우리의 원조(遠祖) 형제 세 사람은 모두 고려에서 왔다. 지금의 대성황제(大聖皇帝)(완안아골타 - 필자주)의 조부(함보 - 필자주)는 여직(女直)으로 들어 가셨고, 우리 조부(아고내 - 필자주)는 고려에 남아 있다가, 고려에서 요나라에 귀부하였다. 우리와 황제는 모두 세 조부의 자손들이다"라고 하였다는 점을 들어 호십문(胡十門)은 시조 함보의 형인 아고내(阿古乃)의 후예로서 비록 갈소관부(曷蘇館部)에 살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완안(完顔)을 성씨로 삼았다고 했으며, 금나라 건국 무렵의 중요한 장령인 석토문(石土門)은 야라로(耶懶路) 완안부 사람으로, 대대로 부장(部長)이었다. 그의 부친 직리해는 시조 보활리(保活里)의 4세손으로 역시 완안을 성씨로 삼은 점, 아고내(阿古乃)·함보(函普)와 보활리(保活里) 세 형제는 오랜 동안 헤어져서 서로 수십리씩 떨어져 있었으나 서로 통문을 하지 않은 정황하에서 어떻게 모두 여진족의 완안(完顔)을 성씨로 삼은 점, 보활리(保活里)는 《금사》에서 대표적인 발음은 bauqori인데 청대 만주어 구어의 발음으로 pɔxɔri("保浩哩")이며, 표준어로는 poxori("博活哩")요, bohori(만주어: 의 의미는 완두콩이다. 여진어 중에서 q와 만주말 중의 x는 서로 대응하고, 함보(函普) qanp'u는 만주어 중 이와 발음이 가까운 것은 xemp'e("狼坡" 혹은 "赫呣坡")인데, 만주문자로는 hempe(만주어: 요, 중국어의 뜻으로는 결파·해파이다. 수음절의 모음 ɑ→ə 은 모음고화의 결과요, 여진-만어의 역사 발전 중에 원음고화가 가끔 나타나는 어음현상으로, 모음 뒤에서 폐음절수성보음 n과 m의 대응은 구어 중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미음절모음는 u →ə 모음저하의 결과인데, 모음저하도 구어 중에서 가끔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고내(阿古乃) aqunai는 만주어에서 이 발음과 가까운 것은 aq'una(阿庫拉)인데, 만주문자로는 akuna(만주어: 이다. 중국어의 뜻으로는 저쪽 해안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만주말 구어와 표준말 가운데 자음 g - q' 어음 대응현상은 자주 눈에 띈다는 점을 들어 함보가 고려 경내 완안부 사람이라고 주장했다.[9]

가계[편집]

  • 형 : 아고내(阿古乃, ?~?)
  • 아우 : 완안 보활리(完顏 保活里, ?~?)
  • 황후 : 명의황후 결도고단씨(明懿皇后 結徒姑丹氏, ?~?)
    • 장남 : 금나라 추존 황제 덕황제 완안 오로(德帝 完顏 烏魯, ? ~ 962, 재위 960 ~ 962)
    • 차남 : 완안 알로(完顏 斡鲁, ?~?)
    • 장녀 : 완안 주사판(完顏 注思版, ?~?)


전 대
(초대)
제1대 생여진 복간수 완안부 추장
941년~960년
후 대
완안 오로

참조[편집]

  1. 金國主阿骨打殂於軍前。 神麓記曰: 女真始祖掯浦出自新羅奔至阿觸胡無所歸 遂依完顏因而氏焉 六十未娶是時酋豪以強陵弱無所制度 掯浦劈木為克如文契約 教人舉債生息勤於耕種子者遂致巨富。 若遇盜竊雞豚狗馬者以桎梏拘械用柳條笞撻外賠償七倍法令嚴峻果斷不私 由是達近皆伏號為神明 有鄰寨鼻察異酋長姓結徒姑丹小名聖貨者有室女年四十餘尚未婚 遂以牛馬財用農作之具嫁之於掯浦 後女真眾酋結盟推為首領 生訛辣魯繼其父業訛辣魯生佯海佯海生隨闊自幼習射 采生長而善騎射獵 ---삼조북맹회편 1123년 6월 9일 기사
  2.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余矣。兄阿古乃好佛,留高麗不肯從,曰:“後世子孙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独与弟保活里俱。始祖居完颜部仆干水之涯,保活里居耶懒。其后胡十门以曷苏馆归太祖,自言其祖兄弟三人相别而去,盖自谓阿古乃之后。石土门、迪古乃,保活里之裔也。及太祖败辽兵于境上,获耶律谢十,乃使梁福、斡答刺招谕渤海人曰:“女直、渤海本同一家。”盖其初皆勿吉之七部也。始祖至完颜部,居久之,其部人尝杀它族之人,由是两族交恶,哄斗不能解。完颜部人谓始祖曰:“若能为部人解此怨,使两族不相杀,部有贤女,年六十而未嫁,当以相配,仍为同部。”始祖曰:“诺。”乃自往谕之曰:“杀一人而斗不解,损伤益多。曷若止诛首乱者一人,部内以物纳偿汝,可以无斗,而且获利焉。”怨家从之。乃为约曰:“凡有杀伤人者,征其家人口一、马十偶、牸牛十、黄金六两,与所杀伤之家,即两解,不得私斗。”曰:“谨如约。”女直之俗,杀人偿马牛三十,自此始。既备偿如约,部众信服之,谢以青牛一,并许归六十之妇。始祖乃以青牛为聘礼而纳之,并得其赀产。后生二男,长曰乌鲁,次曰斡鲁,一女曰注思板,遂为完颜部人。天会十四年,追谥景元皇帝,庙号始祖。皇统四年,号其藏曰光陵。五年,增谥始祖懿宪景元皇帝。"--- 금사 권1  본기 권1: 世纪
  3. 금사》에 기록된 완안부는 총 4부로 태신특보수(泰神忒保水) 완안부, 신은수(神隱水) 완안부, 복간수 완안부, 야라로 완안부가 있다.
  4. 女真酋長乃新羅人,號完顏氏。 完顏猶漢言「王」也。 女真以其練事,後隨以首領讓之。 兄弟三人,一為熟女真酋長,號萬戶。 其一適他國。 完顏年六十餘,女真妻之以女亦六十餘。 生二子,其長即胡來也。 自此傳三人,至楊哥太師無子,以其侄阿骨打之弟謚曰文烈者為子。 其後楊哥生子闥辣,乃令文烈歸宗。---송막기문
  5. 李澍田, 《金史輯佚)》 부록 4 《〈三朝北盟會編〉 中有關金代零星史僚輯叢》 해설자료, 길림문사출판사, 335쪽
  6. 서영수, 《중국정사조선전》권3 역주편, 국사편찬위원회, 307쪽
  7. 서영수, 《중국정사조선전》권3 역주편, 국사편찬위원회, 308쪽
  8. 金人本出靺鞨之附於高麗者.---금사 135권 외국하 고려전
  9. 《滿語硏究》: 孟古托力,《女眞及其金朝與高麗關系中幾個問題考論》, 65쪽~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