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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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제
天命帝
清 佚名 《清太祖天命皇帝朝服像》.jpg
지위
Crown-of-Manchu-Han.png
후금국 천명한
재위 1618년 4월-1626년 9월 30일
전임자 본인
후임자 천총한
건주여진 추장
재위 1583년-1616년
전임자
이름
누르하치(만주어: ᠨᡠᡵᡥᠠᠴᡳ Nurhaci)
한국 한자努爾哈赤
한국 한자弩兒哈奇
한국 한자弩爾哈齊
한국 한자奴兒哈赤
누르가치(만주어: ᠨᡠᡵᡤᠠᠴᡳ Nurgaci)
한국 한자老乙可赤
한국 한자老乙加赤
한국 한자老可赤
한국 한자奴可赤
별호 노추(奴酋)
만주(滿住)
연호 천명(天命, 만주어: ᠠᠪᡴᠠᡳ
ᡶᡠᠯᡳᠩᡤᠠ
Abka-i Fulingga)
묘호 태조(太祖, 만주어: ᡨᠠᡳ᠌ᡯᡠ Taidzu)
칸호 암바 겅옌 한(大英明汗, 만주어: ᠠᠮᠪᠠ
ᡤᡝᠩᡤᡳᠶᡝᠨ
ᡥᠠᠨ
Amba Genggiyen Han)
수러 겅옌 한(聰英明汗, 만주어: ᠰᡠᡵᡝ
ᡤᡝᠩᡤᡳᠶᡝᠨ
ᡥᠠᠨ
Sure Genggiyen Han)
압카이 푸링가 아이신 구룬 한(天命金国汗, 만주어: ᠠᠪᡴᠠᡳ
ᡶᡠᠯᡳᠩᡤᠠ
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
ᡥᠠᠨ
Abkai Fulingga Aisin Gurun Han)
시호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립극인효무황제
(太祖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武皇帝)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립극인효예무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弘文定業高皇帝)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립극인효예무단의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弘文定業高皇帝)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신상정보
출생일 1559년 02월 21일(1559-02-21)
출생지 건주여진 오도리부
사망일 1626년 09월 30일 (67세)
사망지 후금 묵던
왕조 후금
가문 아이신 교로 할아
부친 아이신 교로 탘시
모친 히타라 푸진
배우자
자녀 본문 참조
기타 친인척 아이신 교로 슈르가치
아이신 교로 야르가치
아이신 교로 무르가치
아이신 교로 바야라
종교 샤머니즘

천명제(天命帝, 1559년 2월 21일 ~ 1626년 9월 30일)는 건주여진의 출신으로 건주여진을 통합한 뒤 1616년에 자신을 여진의 으로 선언하고, 1618년에는 자신의 국가명을 이라고 발표했으며, 1621년까지 명나라의 요동 지역 대부분을 석권했다.[1] 후대에 청 제국의 태조로써 초대 황제로 여겨졌다. 휘는 아이신 교로 누르가치(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ᠨᡠᡵᡤᠠᠴᡳ
Aisin Gioro Nurgaci, 한국 한자愛新覺羅 老乙可赤 애신교라 노을가적)[2][3], 묘호는 태조(太祖, 만주어: ᡨᠠᡳᡯᡠ Taidzu)이고, 연호는 천명(天命, 만주어: ᠠᠪᡴᠠᡳ
ᡶᡠᠯᡳᠩᡤᠠ
Abkai Fulingga, 몽골어: ᠲᠡᠭᠷᠢ ᠶᠢᠨ
ᠪᠣᠰᠣᠭᠲᠣ
Tengriyin Süldetü)이라고 부른다. 시호는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줄여서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만주어: ᡨᠠᡳ᠌ᡯᡠ
ᡩᡝᡵᡤᡳ
ᡥᡡᠸᠠᠩᡩᡳ
Taidzu Dergi Hūwangdi)이다. 별호로는 태조한조종(太祖汗祖宗, 만주어: ᡨᠠᡳ‍‍‍ᡳᡯᡠ
ᡥᠠᠨ
ᠮᠠᡶᠠ
Taiidzu Han Mafa)이 있다.[4]이 있다. 생전 도장에 새겨진 칭호는 압카이 푸링가 아이신 구룬 한(만주어: ᠠᠪᡴᠠᡳ
ᡶᡠᠯᡳᠩᡤᠠ
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
ᡥᠠᠨ
Abkai Fulingga Aisin Gurun Han)[5][6][7]

이름[편집]

누르가치(奴兒哈赤, 만주어: ᠨᡠᡵᡤᠠᠴᡳ Nurgaci)의 이름은 지금까지 누루하치·누루카치누하치 등의 독법이 있지만, 누르가치가 올바른 명칭이다.[8] 또한 그의 이름 누르가치는 만주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을 가진 누허치(奴可齊, 만주어: ᠨᡠᡥᡝᠴᡳ Nuheci)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9]

생애[편집]

누르가치는 1559년 2월 21일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 탁시에게는 최소한 세 명의 처첩이 있었다. 사료로 고증할 수 있는 본처는 아구(阿古, 만주어: ᠠᡤᡠ Agu) 도독의 딸이다. 성은 히타라(喜塔腊, 만주어: ᡭᡳᡨᠠᡵᠠ Hitara)[10], 이름은 어머치(額穆齊, 만주어: ᡝᠮᡝᠴᡳ Emeci)인 그녀는 탁시와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다. 첫째가 누르가치, 셋째 아들이 슈르가치, 넷째 아들이 야르가치(雅爾哈齊, 만주어: ᠶᠠᡵᡤᠠᠴᡳ Yargaci)다. 딸은 정확한 이름이 남아있지 않다.[11] 누르가치의 집안은 건주여진의 숙수후부(蘇克素滸部, 만주어: ᠰᡠᡴᠰᡠᡥᡠ
ᠠᡳᠮᠠᠨ
Suksuhu Aiman)에 속했었다.[12]

누르가치는 요동에서 개원 동부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해서여진인들을 통합하여 하다국을 설립하고, 여진몽골의 지도자들은 물론 명나라요동총병 이성량과도 밀접한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맺었던[13] 완 한(만주어: ᠸᠠᠨ
ᡥᠠᠨ
Wan Han)의 족녀[14] 하다나라 컨저(哈達那拉 懇哲, 만주어: ᡥᠠᡩᠠ
ᠨᠠᡵᠠ
ᡴᡝᠨᠵᡝ
Hada Nara Kenje)의 학대를 받아 18세의 나이에 퉁갸씨와의 결혼과 동시에 동생 슈르가치 등과 함께 분가했다. 탁시는 분가하는 누르가치에게 노비 남성 6명, 여성 5명, 마 2기, 소 4마리를 지급했다. 누르가치는 처가인 퉁갸 가문으로 가서 직접 인삼을 채취하여 명나라 상인들에 파는 등 빈곤하게 살아간다. 6년 뒤, 조부 교창아와 부 탁시가 구러산성 공방전에서 명군의 오인으로 살해되자 본성 허투아라로 귀환했다.

여진 통일과 후금 건국[편집]

16세기 말기, 누르가치가 통일하기 직전의 여진족은 현재 중국의 동북지역과 러시아의 연해주를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에서, 초기적 형태의 국가들을 이루거나 부족 혹은 씨족 단위로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다. 명나라 여진의 지역에 일종의 행정구획인 위소(衛所)를 200여개 설치하고, 여진의 여러 부족장을 그 수장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제했다.

당시 명은 이들을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의 세 집단으로 구분하였다. 세 집단의 하부에는 아이만(部, 만주어: ᠠᡳᠮᠠᠨ Aiman)이나 구룬(國, 만주어: ᡤᡠᡵᡠᠨ Gurun)으로 불린 여러 정치적 독립집단이 존재했고, 때로는 이 하부 집단도 통일되지 못한 채 내부적으로 여러 씨족과 부족이 권력을 다투고 있었다.

건주여진은 압록강의 북쪽으로 혼하(渾河) 상류부터 동가강(佟家江)에 걸쳐 거주했으며, 숙수후(蘇克素滸, 만주어: ᠰᡠᡴᠰᡠᡥᡠ Suksuhu· 후너허(渾河, 만주어: ᡥᡠᠨᡝᡥᡝ Hunehe왕야·동오· 저천(哲陳, 만주어: ᠵᡝᠴᡝᠨ Jecen)의 5개 아이만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외에 백두산 일대의 너옌(訥殷, 만주어: ᠩᡝᠶᡝᠨ Neyen)· 주셔리(朱舍里, 만주어: ᡷᡠᡧᡝᡵᡳ Jušeri야루 걍(鴨綠江, 만주어: ᠶᠠᠯᡠ
ᡤᡳᠶᠠᠩ
Yalu Giyang)의 3개 아이만도 때로 건주여진의 일부로 분류되었다. 건주여진에 속한 여러 부는 정치적 독립체였고, 수장 가문 사이의 혈연적 친연관계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 시기에 건주여진은 씨족을 단위로 하는 사회에서 벗어나, 여러 씨족이 하나의 마을에 거주하거나 하나의 씨족이 분화하여 여러 마을에서 분산 거주하는 지연적 형태의 거주로 발전해 있었다. 또한 생산의 면에서 수렵이나 목축, 그리고 채집경제가 여전히 중요했지만 농업과 교역이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농업과 교역이 증가할수록 사회적 계층의 분화가 촉진되어 갔고, 각 부 사이에 명나라와의 교역권을 둘러싸고 갈등과 마찰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해서여진은 후룬 4부라고도 불렸는데, 우라·하다(哈達, 만주어: ᡥᠠᡩᠠ Hada예허·호이파(輝發, 만주어: ᡥᠣᡳᡶᠠ Hoifa)의 4개의 구룬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송화강 하류지역에서 거주했으며, 사회와 생산의 발전 수준은 건주여진과 유사했지만 세력은 건주여진보다 더 강력했다.

건주여진의 여러 부의 수장 가문 사이에 공통의 혈연적 기원이 보이지 않는 반면, 해서여진 4개 부의 수장 가문은 ‘나라 하라'를 공유했다. 그러나 성을 공유했다고 해서 이들이 하나의 씨족에서 파생된 것은 아니었다. 기원의 측면에서 해서여진의 종주격인 우라는 본래 명칭이 ‘후룬’이었고, 수장 일족의 성은 ‘나라’였다. 하다부는 우라부의 수장 일족의 일원이 독립하여 설립한 부였다. 호이파부의 시조인 앙구리(만주어: ᠠᠩᡤᡡᠯᡳ Anggūli)·싱구리(만주어: ᠰᡳᠩᡤᡡᠯᡳ Singgūli)는 본래 흑룡강 유역에서 거주하던 니마차부(만주어: ᠨᡳᠮᡳᠴᠠ
ᠠᡳᠮᠠᠨ
Nimica Aiman)의 일원으로 익더리(만주어: ᡳᡴᡩᡝᡵᡳ ikderi)라는 성을 사용했으나, 송화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나라’로 성을 바꾸고 부를 설립했다. 예허부는 해서여진 4개 부 가운데 특히 이질적이었다. 예허는 몽골인인 싱건 다르한(만주어: ᠰᡳᠩᡤᡝᠨ
ᡩᠠᡵᡥᠠᠨ
Singgen Darhan이 예허 강변으로 이주하여 성을 ‘나라’로 바꾼 후 세운 부였고, 이 때문에 종족과 언어면에서 몽골과 여진이 섞인 독특함을 띠고 있었다. 후룬 구룬의 수장 가문들은 ‘나라’ 성을 공유했고 상호 연맹을 형성했지만, 각 부는 정치적으로 독립체였다.

야인여진무단강 일대와 그 동쪽의 오늘날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서 거주했다. 명나라가 야인여진이라고 부른 집단을 훗날 청대에 만주족은 동해지역(東海, 만주어: ᡩᡝᡵᡤᡳ
ᠮᡝᡩᡝᡵᡳ
ᡤᠣᠯᠣ
Dergi Mederi Golo)이라고 불렀다. 야인여진은 후르하(虎爾哈, 만주어: ᡥᡡᡵᡥᠠ Hūrha)·워지(窩集, 만주어: ᠸᡝᠵᡳ Weji)·와르카(瓦爾喀, 만주어: ᠸᠠᡵᡴᠠ Warka) 등의 부로 나뉘어 있었고, 이 외에 허저(赫哲, 만주어: ᡥᡝᠵᡝ Heje)·퍄카(費雅喀, 만주어: ᡶᡳᠶᠠᡴᠠ Fiyaka오로촌·캬카라(哈克拉, 만주어: ᡴᡳᠶᠠᡴᠠᡵᠠ Kiyakara) 등의 부족까지 포함되었다. 건주와 해서가 어느정도 기원의 단일성이나 지리적 근린성을 고려한 구분이었음에 반해, 야인여진은 건주와 해서여진을 제외하고 명나라로부터 원거리에 위치한 다양한 집단을 통괄하여 하나의 범주에 넣은 무원칙한 구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인여진의 공통적인 사회상을 찾아보면, 이들은 주로 수렵과 어로를 영위했고, 건주나 해서와 달리 씨족이 유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야인여진에 포괄된 여러 부는 정치적 단일체라기보다 씨족들의 연맹체적 성격이 강했다.[15]

누르가치의 조부와 부친이 명군에게 오인 살해 당한 뒤 이성량은 그를 위무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우선 그 에게 칙서를 수여하고 말을 하사했다. 그에게 지휘 직위를 주도록 명나라 조정에 건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성량과는 달리 요동 관원들은 니칸 와이란에게 더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이런 행동은 누르가치의 불만을 샀다.

당시 건주여진에는 여러 막강한 세력이 있었다. 숙수후부, 후너허부, 왕야부, 동오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부족은 명나라 조정에서 니칸 와이란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누르가치를 멀리했다. 심지어 같은 일가인 교창아의 여러 형제들 세력조차 니칸 와이란에게 귀순해 의지했다.

누르가치 역시 명 조정에 드러내놓고 강하게 나갈 수는 없었다. 그는 도리 없이 몰래 니칸 와이란에게 불만이 있거나 원한이 있는 건주의 작은 부족의 수령들과 긴밀한 연계를 취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갸무후성주 가하샨(噶哈善, 만주어: ᡤᠠᡥᠠᡧᠠᠨ Gahašan, 사르후성주 구와라(卦喇, 만주어: ᡤᡡᠸᠠᡵᠠ Gūwara)와 그 형제 노미나(諾密納, 만주어: ᠨᠣᠮᡳᠨᠠ Nomina) 등이었다.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힘을 모아 니칸 와이란을 타도하는 대열이 동참하기로 하늘에 맹세했다.

다른 한편, 누르가치는 명나라 조정에 "내 조부와 부친의 죽음은 사실 니칸 와이란의 사주에 의한 것아다. 그를 사로잡아 나에게 넘겨줘야 비로소 마음이 편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명 조정에서는 당연히 그에게 회답하지 않았고, 누르가치는 이를 복수를 위한 군대를 일으키는 빌미로 삼아 얼마 후 니칸 와이란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누르가치의 세력은 크지 않았는데 건주의 각 부족에서 그를 지지한 사람은 100명에 불과했다. 그의 부친도 그이기 고작 갑옷 13벌의 미미한 유산만 물려줬다. 그러나 누르가치는 이런 열악한 상황이고 불구하고 1583년 5월에 니칸 와이란이 성주인 투런(圖倫, 만주어: ᡨᡠᡵᡝᠨ Turen)성으로 진공을 개시했다. 출병 당시에 노미나가 니칸 와이란과 내통해 출정 시기를 누설했다. 이로 인해 니칸 와이란은 누르가치의 예봉을 피해 피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투런성은 누르가치에게 점령당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25세의 누르가치가 감히 명나라 군다에 지원하는 건주의 주인 니칸 외이란을 패퇴시킨 것은 대사건이었다. 그의 지위는 급작스럽게 부상하게 됐다.

누르가치는 꾀를 부려 노미나의 세력을 제거한 다음 노미나가 공격할 것을 제의한 바르다이(巴爾達, 만주어: ᠪᠠᡵᡩᠠᡳ Bardai)성까지 함락했다.

누르가치가 투런성과 사르후성을 얻은 뒤로 숙수후부의 사람은 대부분 누르가치의 부족으로 편입됐다. 그는 시로 복속시킨 이들을 아주 잘 대해주었으며 그들이 편안하게 살면서 평소에는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게 했다. 그러나 누르가치의 일족은 이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그의 1대조, 2대조, 3대조, 6대조의 자손들이 종묘사직에서 맹세한 다음 누르가치를 모살하려고 했다. 누르가치의 시위와 매부 가하샨이 이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그는 가하샨의 복수를 위해 마르둔(玛尔墩, 만주어: ᠮᠠᡵᡩᡠᠨ Mardun) 성채에서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이듬해 동오부를 겸병하는 데 성공했다.[16]

1585년 2월, 누르가치는 또다시 건주의 작은 부족인 저천부의 자이퍈(界凡, 만주어: ᠵᠠᡳᡦᡳᠶᠠᠨ Jaipiyan)성을 목표로 출병에 나섰다가 철군하는 과정에서 태란강에 이르렀을 때 자이퍈과 바르다이 등의 성주가 규합한 400여 명의 병력을 격파하여 자이퍈성주 너신(內申, 만주어: ᠨᡝᠰᡳᠨ Nesin)과 또 다른 수령 바무니(把木尼, 만주어: ᠪᠠᠮᡠᠨᡳ Bamuni)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누르가치는 돌아와서 병마를 정돈하고 군비의 확충이 적극 나선 뒤 4월 저천부를 재정벌한다. 저천부는 이에 누르가치를 습격하기로 했다. 토모호(托木河, 만주어: ᡨᠣᠮᠣᡥᠣ Tomoho), 장갸(張佳, 만주어: ᠵᠠᠩᡤᡳᠶᠠ Janggiya), 바르다이, 철아호(撤兒湖), 자이퍈의 성주가 800여 명의 병사를 규합해 총공격을 감행했지만 누르가치는 어린 동생 무르가치와 부하를 이끌고 그들을 패퇴시켰다. 1년 후 토모호성을 함락했고, 1587년에는 용맹한 장수 어이두로 하여금 바르다이성을 공격해 저천부를 소멸시켰다.[17]

숙수후부와 동오부를 겸병하고 저천부를 소멸한 누르가치는 1586년 7월, 니칸 와이란이 은거한 오르혼(俄尔浑, 만주어: ᠣᡵᡥᠣᠨ Orhon)성을 공격했다. 이때 니칸 와이란은 도주하고 니칸 와이란의 향병 40인이 누르가치에게 30여 군데 창상을 입히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누르가치는 40기를 보내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로 도주하던 니칸 와이란을 추격하도록 했고, 니칸 와이란은 명나라의 변경수비대의 수수방관으로 자이사에게 참수당한 채로 누르가치에게 받쳐졌다. 누르가치는 이로써 자신의 미래 사업을 위한 공고한 기초를 닦았다. 명나라 군대가 누르가치로 하여금 니칸 와이란을 죽이도록 방치한건 누르가치라는 존재를 인정한 까닭이었다. 이에 건주여진의 대부분의 부족이 앞을 다퉈 그에게 귀순하기 시작했다. 수완(蘇完, 만주어: ᠰᡠᠸᠠᠨ Suwan) 부족장 솔고(索爾果, 만주어: ᠰᠣᠯᡤᠣ Solgo), 동오 부족장의 손자 호호리(何和禮, 만주어: ᡥᠣᡥᠣᡵᡳ Hohori), 야르구(雅爾古, 만주어: ᠶᠠᡵᡤᡡ Yargū) 촌장 후르한(扈爾漢, 만주어: ᡥᡡᡵᡥᠠᠨ Hūrhan) 등이 모두 1588년에 무리를 이끌고 귀순한 인물이다. 같은 해 9월 누르가치는 군대를 이끌고 왕야부를 소멸했다. 건주여진에 대한 누르가치의 통일 사업은 이로써 완전히 끝나게 됐다.[18]

1593년(만력 21년) 누르가치의 건주여진은 몽골의 코르친과 해서여진을 중심으로 한 아홉 부족 연합군과 격돌하여 완승을 거뒀다. 이 전투는 구러 전투라 불린다. 이때부터 여진의 여러 부족이 건주여진에 내부하게 되고, 명나라는 누르하치에게 엄호장군이라는 관직을 하사했다. 또한 이성량은 2년 전에 부패로 인해 탄핵되어 경질당했다. 이 시기는 명나라가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에 군사력을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명나라의 관심을 덜 끌 수 있었다. 1599년 어르더니(額爾德尼, Erdeni) 박시와 까까이(噶盖, G'ag'ai) 자르구치에게 명하여 몽골 문자를 개량한 여진 문자(無圏點点字)를 창제하게 했고, 같은 해 9월 7일에는, 자신을 배신한 해서여진의 하다(哈達, Hada)부를 복속했다. 또한 12월에는 몽골 칼카 바요트부의 엉거더르 타이지와 그가 인솔한 5위의 사신이 누르가치를 쿤두런 한(만주어: ᡴᡠᠨᡩᡠᠯᡝᠨ
ᡥᠠᠨ
Kundulen Han, 몽골어: ᠭᠦ‍ᠠᠳᠡᠯᠠᠨ
ᠬᠠᠠᠠᠨᠨ
Kündelen Khaan)에 추대됐다.

1607년 9월에, 호이파(輝發, Hoifa)부, 1613년에는, 우라부를 복속했다. 1616년 2월 17일, 누르가치는 허투아라에서 팔기 버이러와 여덟 암반(만주어: ᠠᠮᠪᠠᠨ Amban)의 추대를 받아 단순히 건주의 지도자인 총명한 존경받는 한(聰睿恭敬汗, 만주어: ᠰᡠᡵᡝ
ᡴᡠᠨᡩᡠᠯᡝᠨ
ᡥᠠᠨ
Sure Kundulen Han) 에서 가난하여 고통받을 여진 열국들을 돌보라는 천명을 받았다는 명분으로 겅옌 한(英明汗, 만주어: ᡤᡝᠩᡤᡳᠶᡝᠨ
ᡥᠠᠨ
Genggiyen Han)으로 즉위했다. 그 사이에 삼대정은 거의 해결되었고, 명나라는 누르가치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해서여진의 강력한 예허부를 지지함으로써 누르가치의 대항마로 삼으려 했다.

1618년(만력 46년) 4월, 여진국(만주어: ᠵᡠᡧᡝᠨ
ᡤᡠᡵᡠᠨ
Jušen Gurun)의 겅옌 한(英明汗, 만주어: ᡤᡝᠩᡤᡳᠶᡝᠨ
ᡥᠠᠨ
Genggiyen Han) 누르가치는 "일곱가지 큰 원한"(七大恨)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문서에는 명나라가 예허에 가담하여 여진국을 공격한 것, 조부 교창아와 아버지 탁시가 명군에게 사살당한 것 등이 적혀 있다.

이 무렵, 누르가치는 본거지인 허투아라에서 국호를 대금(大金, 만주어: ᠠᡳ᠌ᠰᡳᠨ Aisin), 연호를 천명(天命, 만주어: ᠠᠪᡴᠠᡳ
ᡶᡠᠯᡳᠩᡤᠠ
Abkai Fulingga이라 선포한 것으로 보인다.

사르후 전투[편집]

1619년 3월 명나라는 예허부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여 47만에 이르는 여진 토벌군을 결성하고 이듬해 무순에서 가까운 사르훠(薩爾滸, Sarhū)에서 10만여 명이라 칭하는 만주의 군대과 격돌했다.[19] 수적으로 불리한 여진이었지만, 공을 탐한 명나라 장군 두송이 후속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공격을 했기 때문에 각개 격파할 수 있었다. 사르후 전투 강홍립이 있끄는 조선군도 부차 전투에서 포위되어 김응하가 전사하고, 곧 항복하게 된다. 사르훠에서 명군에 큰 타격을 준 누르하치는 후원자를 잃은 예허부를 습격하여, 복속함으로써 흑룡강 일대의 야인여진들을 제외한 여진족을 통일했다.

영원성 전투[편집]

1621년(천명 4년), 기세가 오른 누르가치는 심양, 요양을 잇따라 함락시켰고, 요양 옆의 심양으로 천도했다. 이 때 금의 세력권은 요동 전역에 미쳤다. 1626년(천명 9년), 연전연승하던 누르가치는 명나라의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산해관을 함락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영원성[20] 에서 장군 원숭환이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홍이포를 대량으로 거취하고 금군을 맞이했다. 홍이포의 위력에 금군은 패배하고, 퇴각했다. 영원성 전투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사망[편집]

영원성 전투 이후 누르가치는 몽골의 칼카 부족을 정벌했다. 또 코르친 부족과 동맹을 맺었다. 그렇기에 근대의 역사학자들도 누르가치가 영원성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주장을 하나같이 믿지 못할 견해로 본다. 그가 영원성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사료 부족으로 확실치 않다. 원숭환은 "누르가치가 영원의 패전을 수치로 여겨 이로 인한 화로 종기가 생겼다"고 말한 바 있다. 팽손이 또한 《산중문견록》에 "건주국한의 등에 종기가 생겼다"라고 기록했다. 따라서 누르가치의 사망은 종기가 돋는 피부별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청하에서 온천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기가 돋은 원인이 영원성 전투에서의 포격에 의해 다친 옛 상처가 재발한 것일 가능성은 있다.[21] 누르가치는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고 팔기버이러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국가를 통치하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망했다. 누르가치의 8남 홍 타이지는 자신과 함께 후금의 최고 권력자였던 다이샨, 아민, 망굴타이의 양해를 받아 의 지위를 계승했다.[22] 누르가치는 복릉(福陵, 만주어: ᡥᡡᡨᡠᡵᡳᠩᡤᠠ
ᠮᡠᠩᡤᠠᠨ
Hūturingga Munggan)에 안장됐다.

요동 정벌은 청 제국의 건설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는 종종 그것을 '탄생'이 암시하는 무한한 에너지, 희망, 야망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누르가치에게는 그런 것들이 다소 다르게 보였음이 틀리없다. 1621년에 요동 대부분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을 때 누르가치는 거의 62세였다. 그는 다년을 제외한 인생 3분의 2가량을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 보냈고, 때로는 자신의 가족구성원들과도 전투를 벌였다. 자신의 통치를 소규모 촌락 집단에서 명조의 변경인 광활한 요동 지역을 포함한, 만주 전역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그의 군사작전의 형태가 의미하는 것이든, 그가 선포한 전쟁의 이유에 나타난 요지이든, 그의 종족이 몇 세대에 걸쳐 키워온 부의 경제족 기초를 보호히고 향상하게 하려는 한결같은 목적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누르가치의 국가는 독점적인 경제권의 집행과 그 때문에 생겨나는 부의 통제를 기반으로 설립된 지역 정권이었다. 이러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누르가치는 요동을 방악하고,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자신의 지역적 패권에 대한 인정을 어떻게든 받아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했지만, 더 많은 일을 하려고 계획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23]

가족[편집]

후비[편집]

봉호 시호 이름(성씨) 생몰년도 별칭 비고
정실
적복진

(嫡福晉)

효원고황후

(孝元高皇后)

동가 합합납찰청

(佟佳 哈哈納扎靑)

1560년 ~ 1592년 원비(元妃) 천명제의 첫 정실부인으로 천명제가 나라를

세우는 데 보좌를 하여 공이 큼

계복진

(繼福晉)

효선고황후

(孝宣高皇后)

부찰 곤대

(富察 袞代)

? ~ 1620년 계비(繼妃) 천명 5년(1620년) 죄로 사형됨.
황후
계복진

(繼福晋)

효열무황후
(孝烈武皇后)
오랍나랍 아파해
(烏喇那拉 阿巴亥)
1590년 ~ 1626년 대비(大妃) 예충친왕 도르곤의 생모이나 천명제 사후 순장을 강요당하여 순장됨.
측복진

(側福晋)

효자고황후
(孝慈高皇后)
엽혁나랍 맹고저저

(葉赫那拉 孟固姐姐)

1575년 ~ 1603년 숭덕제의 생모, 사후 추존됨
후궁
측복진

(側福晋)

수강태비
(壽康太妃)
박이제길특씨

(博尔濟吉特氏)

? ~ 1655년 강희제에 의해 추존.
측비(側妃) 합달납라 아민저저

(哈達納喇 阿敏姐姐)

이이근각라씨

(伊爾根覺羅氏)

아민격격(阿敏格格)​
엽혁나랍씨

(葉赫納喇氏)

효자고황후의 동생.
박이제길특씨

(博爾濟吉特氏)

? ~ 1643년
서복진

(庶福晋)

서비(庶妃) 조가씨

(兆佳氏)

뉴호록씨

(紐祜祿氏)

1566년~?
가목호각라 진가

(嘉穆瑚覺羅 眞哥)

서림각라씨

(西林覺羅氏)

?~1646년
이이근각라씨

(伊爾根覺羅氏)

아제근

(阿濟根)

? ~ 1626년 천명제 사후 순장됨.
낙비(樂妃) 이혜하

(李惠霞)

회족 출신
소복진(小福晋) 덕인택

(德因泽)

? ~ 1626년 천명제 사후 순장됨.

황자[편집]

- 봉호(시호) 별칭 이름 생몰년도 생모 비고
1 광략패륵(廣略貝勒) 화석패륵(和碩貝勒) 저영(褚英) 1580년 ~ 1615년 원비 동가 씨 초봉은 태자이고, 후에 패륵으로 강등.
2 예열친왕(禮烈親王)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1583년 ~ 1648년
3 진국근민공(鎭國勤敏公) 진국공(鎭國公) 아배(阿拜) 1585년 ~ 1648년 서비 조가씨
4 진국극결장군(鎭國克潔將軍) 탕고대(湯古代) 1585년 ~ 1640년 서비 뉴호록씨 역모 죄를 지어 종실에 축출당함
5 다라패륵(多羅貝勒) 다라패륵(多羅貝勒) 망고이태(莽古爾泰) 1587년 ~ 1633년 계비 부찰씨 후에 봉호 추탈.
6 보국각후공(輔國愨厚公) 보국공(輔國公) 탑배(塔拜) 1589년 ~ 1639년 서비 뉴호록씨
7 요여민군왕(饒餘敏郡王) 다라요여군왕(多羅饒餘郡王) 아파태(阿巴泰) 1589년 ~ 1646년 측비 이이근각라씨
8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 홍타이지 1592년 ~ 1643년 효자고황후 엽혁나랍씨
9 진국각희공(鎭國恪僖公) 진국공(鎭國公) 파포태(巴布泰) 1592년 ~ 1655년 서비 가목호각라씨
10 이혁패륵(已革貝勒) 다라패륵(多羅貝勒) 덕격류(德格類) 1592년 ~ 1635년 계비 부찰씨 후의 봉호 추탈.
11 이혁진국장군(已革鎭國將軍) 진국장군(鎭國將軍) 파포해(巴布海) 1596년 ~ 1643년 서비 가목호각라 씨
12 이혁영친왕(已革英親王) 화석영친왕(和碩英親王) 아제격(阿濟格) 1605년 ~ 1651년 효열무황후 오랍나랍씨
13 보국개직공(輔國介直公) 보국공(輔國公) 뇌모포(賴慕布) 1611년 ~ 1646년 서비 서림각라씨
14 예충친왕(睿忠親王) 화석예친왕(和碩睿親王) 도르곤(多尔衮) 1612년 ~ 1650년 효열무황후 오랍나랍씨 순치제의 섭정왕
15 예통친왕(豫通親王) 화석덕예친왕(和碩德豫親王) 도도(多鐸) 1614년 ~ 1649년
16 비양과(費揚果) 1620년 ~ 1640년 계비 부찰씨

황녀[편집]

- 봉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별칭 비고
1 고륜단장공주(固倫端莊公主) 눈저(嫩姐) / 눈철(嫩哲) 1578년 ~ 1652년 원비 동가씨 동아공주(東果公主)
동아격격(東果格格)
2 화석첨하공주(和碩沾河公主) 눈저(嫩姐) / 눈철(嫩哲) / 안철(顔哲) / 언철(鄢哲) 1587년 ~ 1646년 측비 이이근각라씨 눈철격격(嫩哲格格)
첨하공주(沾河公主)
3 화석합달공주(和碩哈達公主) 망고제(莽古濟) 1590년 ~ 1635년 계비 부찰씨 합달공주(哈達公主)
합달격격(哈達格格)
4 화석공주(和碩公主) 목고십(穆庫什) 1595년 ~ ? 서비 가목호각라씨 화석격격(和碩格格)
5 (5황녀) 1597년 ~ 1613년
6 공주(公主) (6황녀) 1600년 ~ 1646년
7 고륜공주(固倫公主) 1604년 ~ 1685년 서비 이이근각라씨 향군품급(鄕君品級)
8 화석공주(和碩公主) 총고도(聰古圖) 1612년 ~ 1646년 측비 엽혁나랍씨 총고륜격격(聰古倫格格)
9 1590년 ~ 1649년 4복진 과이가씨(瓜爾佳氏) 파약특격격(巴約特格格)

손대격격(蓀岱格格)

화석장친왕 서이합제(천명제의 동생)의 딸
10 1612년 ~ 1648년 순철격격(肫哲格格)​ 화석장친왕 서이합제의 4남의 딸이자 천명제의 조카

※수강태비를 제외한 비(妃)는 실제로 봉작된 위호가 아닌 사칭(史稱)으로, 후금(後金)의 명부(命夫) 위호인 복진(계복진·측복진·서복진)을 청(淸) 개국 후 정비된 후비(后妃) 제도에 맞춘 것이다.[24] 원비는 원배(元配·初配)임을 강조하기 위한 사칭(史稱)으로, 숭덕제의 원배 뉴호록 씨 역시 마찬가지다.

천명제가 등장한 작품[편집]

출처[편집]

  1. Crossley, Pemela Kyle. 《만주족의 역사》. 돌베게. 338~339쪽. ISBN 9788971995310. 
  2. 吴晗. 《朝鲜李朝实录中的中国史料》. 中华书局. 2272쪽. 
  3. 김득황, 《만주족의 언어》, 대지문화사, 1995
  4. 《han i araha jakūn gūsai manjusai mūkun hala be uheri ejehe bithe sioi》 mini taidzu han mafa taiidzung han mafa abkai hese   be ambarme alifi, dergi oci.
  5. 李學智(1973)、42 頁には、「這裏所説的篆文番字印之後金天命皇帝印、事實上或由于當時朝鮮的通事原系蒙〔古〕學通事、因此其所解釋的後金天命皇帝七個字似乎頗有問題。由於近數年來在本所内閣大庫殘䈕中曾得見淸太祖、太宗時的舊䈕上、尚存有此壹早期的滿文印璽、其滿文是 abkai fulingga aisin gurun han i doron 七字、而其字義應爲天命金國汗之印、竝不是後金天命皇帝七個字之篆文番字印也。而此一老滿文印、或許是淸人最早的壹顆印璽」との指摘がある。
  6. 『淸史圖典』第一册、太祖・太宗、99
  7. 광해군일기》 11년 1619년 4월 19일 기사에서는 누르가치[奴酋]의 칭호를 후금천명황제(後金天命皇帝)로 번역했다.
  8. 김득황, 《만주족의 언어》, 대지문화사, 1995
  9. 阎崇年 (2006). 《努尔哈赤传·正说清朝第一帝》. 北京出版社. 2권 머릿말쪽. ISBN 9787200016598. 
  10. 키타라(만주어: ᠺᡳᡨᠠᡵᠠ Kitara)라고도 한다. 《taidzu dergi hvwangdi i ben gi bithe》, hafumbuha hūwangheo kitara hala.
  11. 천제셴 (2015). 《누르하치》. 돌베게. 46쪽. ISBN 9788971996461. 
  12.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9~30쪽. ISBN 9788994606514. 
  13. Crossley, Pamela Kyle (2002), 《A Transluce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39–40쪽, ISBN 0-520-23424-3 
  14. 《만주실록》, jai fujin i hala nara. gebu kenje. hadai gurun i wan han i gaifi ujihe uksun i sargan jui.
  15.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ISBN 9788994606514. 
  16. 천제셴 (2015). 《누르하치》. 돌베게. 59~62쪽. ISBN 9788971996461. 
  17. 천제셴 (2015). 《누르하치》. 돌베게. 63~64쪽. ISBN 9788971996461. 
  18. 천제셴 (2015). 《누르하치》. 돌베게. 64~65쪽. ISBN 9788971996461. 
  19. 10만여 명이라고 했지만, 실제 수는 그 절반이었다고 한다.
  20. 현재의 흥행성 현성
  21. 천제셴 (2015). 《누르하치》. 돌베게. 330쪽. ISBN 9788971996461. 
  22.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67쪽. ISBN 9788994606514. 
  23. Crossley, Pemela Kyle. 《만주족의 역사》. 돌베게. 140쪽. ISBN 9788971995310. 
  24. 《清史稿.后妃傳序》:“太祖初起,草創闊略,宫闈未有位號,但循國俗稱‘福晋’。福晋盖‘可敦’之轉音,史述后妃,后(後)人緣飾名之,非當時本稱也。”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