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단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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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단 칸(중국어: 林丹汗, 영어: Ligdan Khan, Mongolian Cyrillic: Лигдэн Хутугт хаан 1592년 ~ 1634년, 재위: 1604년 ~ 1634년)은 북원의 대칸이었다. 강력한 통합 정책과 중앙집권화를 시도하여 동몽골 왕공들의 반발에 부닥쳤다.[1]

칭호[편집]

릭단 카안의 정식 칭호는 릭단 호톡토 소토 칭기스 다이밍 세첸 주구디 테인 부게드 일라국치 발라 차크라바르티 다이 타이숭 텡그리인 텡그리 델렉케이 다키니 호르모스타 알탄 쿠르두니 오르치굴룩치 노문 카간(영어: Lingdan Qutuγtu Sutu Činggis Dayiming Sečen Jügüd-i Teyin Büged Ilaγuγči Bala Cakravarti Dai Tayisung Tngri-yin Tngri Delekei Dakin-i Qurmusta Altan Kürdün-i Orčiγuluγči Nomun Qaγan)으로, 그 의미는 “릭단, 신성하고 훌륭한 칭기스, 다이밍, 현명하고 깨달음을 얻으신 강력한 차크라바르틴, 위대한 타이숭, 신중의 신, 전우주의 인드라, 전륜성왕”이다.[2]

생애[편집]

보얀 체첸 칸의 손자이다. 1603년, 보얀 세첸 칸의 맏아들 망고스 메르겐 타이지는 요절하여, 그의 두 아들, 릭단 바아토르와 상가르지 오드한 가운데 맏이인 릭단이 13살의 나이로 대칸이 되었다.[3] 이때 대칸이 지배하는 차하르 투멘은 시라무룬허 상류에 유목하고 있었다. 릭단은 우선 남부 할하의 왕공들과 동맹을 맺고 중국을 약탈하여, 1620년 명나라로부터 40,000냥을 받아냈다.[1]

그러나 릭단의 치세는 누르하치의 것과 거의 동시대였다. 1593년에 논 강 유역의 호르친 몽골 부락은 여허, 하다, 올라, 호이파와 연합하여 누르하치를 공격하였다 대패하였다. 1606년에 내몽골 할하의 수령 5명은 누르하치의 세력에 투항하며 그에게 쿤둘런 한이라는 칭호를 바친바 있었다. 누르하치는 4개의 여진 왕국을 차례로 정복해나갔고, 1619년, 마침내 최후의 여허가 정복 당하며 모든 여진인들이 누르하치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릭단 칸은 이를 계기로 누르하치와 접촉하게 되었다. 특히 1621년 누르하치의 군대가 선양과 요양 지역을 휩쓸자, 차하르 투멘은 누르하치의 세력과 완전히 접하게 되었다. 1622년 차하르 부락의 오로드 부족이 릭단을 버리고 누르하치에게 투항했다. 1623년에 누르하치는 내몽골 할하 투멘을 공격하여 자루드 부의 수령 앙가를 살해한다. 그러자 1624년, 자루드 부족의 수령 엥게데르는 누르하치에게 투항하며, 누르하치의 동생 슈르가치의 딸과 결혼했다. 또, 호르친의 수령 오바는 여진족과 동맹을 맺고 反차하르 동맹을 선언했다. 1625년 릭단은 즉각 군대를 이끌고 호르친을 침공한다. 오바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은 누르하치는 5천명의 여진 병사를 보냈다. 릭단 칸은 이미 호르친의 성채를 공성중이었으나, 누르하치의 군대가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장 퇴각한다. 1626년에 여진족 군대는 다시 할하의 바른 부족을 공격해 그 수령 가운데 하나인 낭눅을 살해하고, 시라무룬허까지 진군했다. 이때 오바는 다시 누르하치를 방문하여, 슈르가치의 딸과 결혼하며, 누르하치에게서 투시예투 칸 칭호를 받았다. 이 해에 누르하치가 죽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그 뒤를 이었다.[4]

홍타이지는 할하에 대한, 특히 자루드와 바린 부족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다. 이제 점점 더 많은 부족들이 릭단 칸을 버리고 홍타이지에게로 투항하는 중이었다.[5] 상황이 이렇게 되자, 릭단의 중앙집권화 시도에 반발한 모든 부락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우익 3투멘과 남 할하는 동맹을 맺고 릭단을 공격했다. 릭단은 이들을 격파했으나, 서천하여 재기를 노리기로 하였다.[1] 1627년, 차하르 대칸은 전군을 이끌고 대흥안령 산맥을 넘었다.[5] 그곳에서 릭단 칸은 투메드 부를 복속시키고 오르도스 지역을 장악한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하여 강력한 몽골 통합 정책과 대명경제의 확대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명 경제는 오히려 감소하였고 통합은 실패하였다. 게다가 명 변경 약탈도 내부 통합체제가 공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공을 거두기 힘들었다. 후금과 몽골의 연맹이 동부 지역을 위협하고 있었던 점도 릭단 칸의 상황을 불안정하게 했다.[6] 게다가 릭단이 이끌고 온 부락민들로 인해 초원의 지력이 쇠퇴하여 기아마저 돌고 있는 와중에 홍타이지, 할하, 호르친 동맹군이 릭단을 목표로 한 원정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리자[1] 릭단은 다시 칭하이 지역으로 이동하여 종교적 권위를 이용하여 통합체제를 유지하려 했다.[6]

릭단 칸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 차하르에 통합되어 있던 각 유목조직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행동했다. 일부는 릭단 칸을 따라 칭하이로 이동해 갔고, 일부는 따라가지 않았으며, 또 일부는 따라가다가 중간에 되돌아왔다. 그러나 릭단 칸이 오르도스를 떠나 다시 서천한 이후의 구체적인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명의 변경을 약탈하는 모습을 간간히 보였다.[7] 릭단은 지금의 간쑤 성에서 천연두로 사망했다. 1635년 6월 릭단의 가족들은 만주 군대에 항복했다.[1]

중앙집권화 개혁[편집]

릭단은 2명의 관리를 통해 좌익과 우익의 투멘들을 통치하려 시도했다. 최소 이 가운데 한명은 보르지긴 씨족이 아니였다. 또, 300명의 단위의 부대를 조직하고, 궁정 귀족도 구성하였다. 이를 위해 종교적 권위도 세우려 노력했는데, 북 할하의 촉토 타이지와 연대하여 쿠빌라이 시대의 사캬파 종단을 부활시키려 했다. 이 일환으로 사캬파 종단의 샤리바 호톡토를 초빙하여, 마하칼라의 화신으로 대우했다. 1628년부터 그 이듬해의 기간에는 몽골어로 번역된 간주얼을 하나로 엮었다. 개인적으로는 칭기스 칸, 신들 중의 신, 인드라의 화신을 자칭했다.[1]

각주[편집]

  1. Atwood, Christopher P. (2004). “Ligdan Khan”.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 (Facts On File): 334-335. 
  2. Okada, Hidehiro (1991). “Origin of the Čaqar Mongols”. 《Mongolian Studies》 14: 168. 
  3. Okada, Hidehiro (1991). “Origin of the Čaqar Mongols”. 《Mongolian Studies》 14: 166. 
  4. Okada, Hidehiro (1991). “Origin of the Čaqar Mongols”. 《Mongolian Studies》 14: 166-69. 
  5. Okada, Hidehiro (1991). “Origin of the Čaqar Mongols”. 《Mongolian Studies》 14: 169. 
  6. 노기식 (2001). “만주의 몽골 차하르부 병합과 그 의미”. 《중국학논총》 14: 65. 
  7. 노기식 (2001). “만주의 몽골 차하르부 병합과 그 의미”. 《중국학논총》 14: 66~68. 
전임
보얀 체첸 칸
제40대 몽골 제국 대칸
1604년 - 1634년
후임
에제이 칸
전임
보얀 체첸 칸
제24대 북원 황제
1604년 - 1634년
후임
에제이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