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레게네 카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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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레게네 카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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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몽골 대카툰
재위 ?–1246년
전임 보락친 카툰
후임 오굴 카미시 카툰
몽골의 섭정
재위 1241년–1246년
전임 오고타이 칸
후임 구유크 칸
이름
나이만 퇴레게네 (몽골어: ᠨᠠᠶᠢᠮ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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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한자乃马真 脱列哥那 내마진 탈열가내)
시호 소자황후 (昭慈皇后)
신상정보
출생일 1185년 혹은 1186년
출생지 몽골 나이만부
사망일 1246년 10월
사망지 오고타이 속령 에밀
왕조 몽골 제국
가문 나이만부
배우자 다이르우순우구데이 칸
자녀 귀위크 칸

퇴레게네 카툰(몽골어: ᠲᠥᠷᠡᠭᠡᠨ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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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öregene Khatun, 한국 한자脫列哥那可敦 탈열가내 가돈, 한국 한자朵列格捏可敦 단열각날 가돈, 몽골 키릴 문자:Дөргэнэ, 키랄 문자:Туракина, 1185년 혹은 1186년 ~ 1246년 10월)는 몽골 제국의 황후, 섭정(재위:1241년 12월 12일~1246년 10월)으로 나이만 부족 출신이였다. 우구데이 칸의 황후이자 귀위크 칸의 어머니였다. 우구데이 칸의 6황후였다가 1241년 그의 사후 1241년 그녀의 장남 귀위크 칸이 선출될 때까지 몽골 제국의 섭정이었다. 나이만족 출신이라 내마진후(乃馬真后)라 부르기도 한다.

오고타이칸이 후계자로 지정한 시레문 대신, 자신의 아들 구유크를 대칸 적임자로 추천한 뒤 여러 몽골 부족장들을 설득, 책략을 통해 구유크를 칸으로 옹립했다. 그는 몽골 제국을 통치한 최초의 여성이다. 시호소자황후(昭慈皇后)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몽골 나이만 부족 출신으로 퇴레게네의 정확한 생일과, 친정 가계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퇴레게네는 외모가 아름다웠다 한다. 그러나 후일 일 칸국의 페르시아 역사가 라시드 알딘에 의하면 퇴레게네는 아름다운 여성은 아니지만 영리한 여성이고, 지배욕이 있었다고 한다. 퇴레게네는 처음에는 칭기즈 칸의 두 번째 황후가 된 크란 하툰의 아버지 우하즈 메르키트족의 족장 다이루 우슨의 비였다가 칭기즈 칸의 메르키트 토벌시에 포로가 되어 오고타이 칸의 부인이 되었다.

일설에는 메르키트족의 족장 토크토아 베키의 아들 혹은 동생인 쿠투(1217년 사망)의 부인이었다고도 한다.[1][2] 라시드 알 딘은 퇴레게네의 첫 남편을 메르키트의 다이루 우슨이라 했다.[3] 토크토아 베키의 세 아들 중 한 사람의 아내 였다는 설이 있다. 토크토아 베키의 손녀라는 설도 있다. 1204년 칭기즈 칸메르키트족을 기습, 정벌할 때 토크토아 베키와 쿠투는 도주했고, 퇴레게네는 칭기즈 칸에게 붙잡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에게 주어졌다.

라시드 알 딘에 의하면 퇴레게네는 오고타이 칸의 아내들 중 중요한 4명의 아내의 한 사람이었다 한다. 라시드 알 딘의 집사에서는 퇴레게네는 두번째 부인이라는 설과, 제1부인이라는 설도 같이 기술하였다. 오고타이 칸의 두번째 혹은 6번째 부인이었지만 용감하고 지적이며, 유능하고 영리한 인물이라 오고타이의 다른 비빈들을 제치고 오고타이의 총애를 받아, 귀위크, 쿠투쿠, 호르차르, 카라카르 등 아들 다섯을 낳아 주었다. 라시드 알 딘은 이들이 퇴레게네의 소생이라 하며, 원사에는 구유크만이 그녀의 소생이라 한다.

일설에는 코단도 퇴레게네의 소생이라는 설이 있다. 오고타이가 칸이 된 뒤 정확한 책봉 시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보락친 카툰 대신 정궁 황후로 승격되었다. 퇴레게네는 오고타이의 정책에도 관여, 영향을 행사하려 했고 이슬람 상인 출신 압둘 라흐만을 추천하기도 했다. 오고타이 칸은 그녀의 건의를 받아들여, 압둘 라흐만을 만나 면담한 뒤 중국 북부지역의 세무 관리자로 임명하였다. 퇴레게네는 무슬림 상인들과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이들을 점령지의 세무 관리자, 총독 등으로 여러명 발탁, 임명하였다.

그는 영리하고 지능이 뛰어난 인물이라 오고타이 칸의 다른 비빈들을 제치고, 자신의 영향력을 빠르게 늘려나갔다. 오고타이의 치세 후반 오고타이는 갈색 포도주에 중독되면서, 퇴레게네는 몽골 제국의 정치사무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퇴레게네가 오고타이 치세 말년에는 국가원수 역할이었다고도 한다.

귀위크 추대 운동[편집]

오고타이 칸보라쿠친 카툰 소생 쿠추를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1234년 11월 쿠추남송 원정 중 덕안부에서 전사했다. 오고타이 칸은 쿠추의 아들 시레문을 후계자로 지정하였다. 오고타이는 시레문을 후계자로 정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또한 오고타이 칸은 툴루이 가문의 몽케를 잠재적 후계자로도 보았다. 퇴레게네는 이에 반발하여 자신의 아들 귀위크를 후계자로 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오고타이 칸은 거절하였다. 퇴레게네는 여러 번 오고타이 칸을 설득하였으나, 오고타이의 결정을 바꾸지 못했다.

만년의 오고타이는 로 인한 병석에 누웠고, 부분 회복되었다. 그러나 오고타이는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을 자주 마셨다. 퇴레게네 카툰은 오고타이 칸의 후계자를 누구로 정할 것인지 야율초재에게 문의하였다. 그러나 야율초재는 신하들이 감히 알 바가 아니며, 오고타이칸의 뜻을 따르고 행하는 것이 맞다며 퇴레게네의 후계자 지정 논의를 거절했다.

오고타이1241년 가을 사냥을 나갔다가, 그해 12월 11일 과도한 음주로 인한 알콜 중독성 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오고타이의 죽음을 암살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그녀는 제국내의 다양한 경쟁 권력의 균형을 맞추고, 5년 동안 전 몽골 제국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들 귀위크 칸이 즉위할 무대를 설정하였다.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죽자 우구데이의 숙부로 칭기즈 칸의 막내동생인 테무게 옷치긴이 대칸의 유궁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우구데이의 황후들이 거처하는 오르두(행궁)로 오자, "우리는 당신의 의붓딸이며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무장한 많은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왜 모든 백성과 군대를 불안하게 만드는가?"[4]라는 항의하며 거절하였다. 앞서 서방 원정을 나갔던 우구데이의 아들 구유크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듣고 테무게는 대칸의 자리를 포기, 퇴레게네 카툰에게 우구데이에 대한 조의를 전하고 철군하였다. 이러한 옷치긴의 거병은 앞서 우구데이가 옷치긴에 대해 시행했던 중앙집권정책에 수반한 강한 견제책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5] 퇴레게네는 아들 귀위크를 빨리 카라코룸으로 오게 했다. 테무게 옷치킨은 오고타이의 조문을 왔다는 핑계를 대고 만주로 되돌아갔다.

몽골 제국의 섭정[편집]

오고타이 칸 사망 직후[편집]

1241년 12월 11일 오고타이 칸이 사냥 도중 술병으로 갑자기 죽자 퇴레게네는 시레문이 아직 유년이라는 이유로, 그의 제위 계승을 반대하였다. 오고타이의 사후 섭정 자리는 모게 카툰(木哥)이 지명되었다. 그러나 차가타이 칸과 그의 아들들의 지원으로, 섭정 자리는 퇴레게네에게 오게 되었다.[6] 퇴레게네는 부유크 카툰(대 카툰, Büyük Hatun)이라는 호칭으로 섭정직을 수행했다.

퇴레게네는 바로 몽골 제국의 국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차기 칸이 옹립될 때가지 몽골의 통치자가 누가 되느냐가 곧 쟁점이 되었고, 차가타이는 퇴레게네를 지지했다. 퇴레게네는 차가타이의 지원과, 자신의 아들들의 지원으로 몽골 제국의 섭정이 되어 임조칭제 하였다. 오고타이의 일부 측근들은 퇴레게네에게 퇴레게네는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며, 시레문을 지지하고 추대할 것을 건의하였다. 퇴레게네는 시레문이 어리다는 이유로 이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차가타이는 퇴레게네의 섭정을 지지하였으나, 많은 오고타이 칸의 친척, 전직 관리 및 기타 칭기즈칸 왕조의 귀족들, 몽골 부족장들은 당황해하거나 분노하였다. 오고타이 칸으로부터 후계자로 지정된 시레문의 정당한 지위를, 퇴리게네가 임의로 결정, 처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영향력 있는 일부 몽골 부족장, 왕공족들은 차기 대칸을 추대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보고 퇴레게네에게 쿠릴타이를 소집하라고 요구했다.

퇴레게네는 아들 구유크를 칸의 적임자로 지적했다. 그러나 칭기즈 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 바투와, 툴루이의 아들들은 구유크의 즉위를 반대했고, 차가타이의 자손들만 구유크를 지지했다. 퇴레게네는 몽골 귀족과 부족장들, 정복지 지도자 등을 대상으로 귀위크가 정복 전쟁에 적극 참여한 것, 귀위크가 오고타이 칸의 장남이며 적임자라며 설득과 위협, 책략, 뇌물 등 다양한 작전을 펼쳤다.

오고타이 측근 제거[편집]

퇴레게네는 섭정으로서 완전한 권력을 쥐었으며, 야율초재, 친친카이, 마흐무드 아라와치 등의 재상들을 해고했으며, 오고타이가 임명한 관료들을 해고하고 그녀 자신의 인물로 대체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무슬림 출신 상인 압둘 라흐만, 타지크 또는 페르시아 여인으로 중동 원정에서 포로로 온 여성 시아파 무슬림 파티마였다. 야율초재압둘 라흐만이 옥새 찍힌 백지에 자신이 임의로 칙령을 날조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퇴레게네는 야율초재 등을 공경하면서도 꺼렸다. 퇴레게네는 자신의 측근 인물들을 통해 귀위크가 칸의 적임자라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몽골은 일부다처제를 시행하였는데 오고타이 칸이 선호했던 코추는 다른 아내를 통해 얻었다. 그는 코추의 아들 시레문으로 자신을 계승하게 지명하였다. 퇴레게네는 반대하고 귀위크를 선택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오고타이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책략으로 야망을 달성하였다.

해고된 오고타이의 측근들이 퇴레게네의 섭정에 반대하고, 시레문 대신 귀위크를 추대하려는 것에 반발하자 퇴레게네는 이들 중 일부를 체포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오고타이의 수석비서 친친카이, 트란스옥시아나 총독 마흐무드 아라와치를 체포하려 했고, 친친카이와 아라와치는 간수 성의 서량막부 코단에게로 도망쳤다. 코단은 이들을 넘겨달라는 퇴레게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동투르키스탄의 총독으로 있던 마우스드베그킵차크 한국바투에게로 도망치려고 러시아를 경유해 도주했다. 중국 북부의 행정 책임자 야율초재 역시 해임되었다. 퇴레게네는 오고타이의 측근으로, 한때 차가타이에게 저항했던 위구르 지역 다루가치인 코구스를 이란에서 체포, 차가타이의 과부들에게 넘겨주었다. 코구스는 차가타이 사후 그의 과부들을 무시했는데, 퇴레게네 카툰은 코구즈를 입에 돌이 물리게 하는 형벌을 가해 죽였다.

섭정 통치[편집]

오고타이 사후 그녀는 그녀의 세력이 확고해질 때까지 쿠릴타이를 여는 것을 미루었다. 퇴레게네는 오고타이가 지명한 후계자 시레문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후계자에서 배제하고, 자신의 아들 귀위크가 대칸 적임자로 정했다. 퇴레게네는 1242년 봄부터 쿠릴타이 소집을 지시했다. 킵차크 한국의 칸 바투귀위크의 즉위를 반대, 퇴레게네의 쿠릴타이 소집 명령에 응하지 않고 번번히 불참했다.

퇴레게네는 퇴레게네 대로 몽골의 왕공, 부족장들 대다수가 귀위크를 확실히 지지할 때까지, 쿠릴타이가 지연되도록 상황을 관리하였다.

당시 지방에 파견된 지방관들은 퇴레게네에게 다양한 선물을 보냈다. 퇴레게네는 중앙 조정의 재정적 약점을 보완하고자 조정과 각 다루가치들에게 임의로 파이지를 발행하게 하여 돈을 거둬들였다.

1244년 칭기즈칸과 오고타이의 책사였던 거란출신 야율초재화병으로 갑자기 죽자, 퇴레게네의 측근들은 야율초재의 비리를 언급하며 가산을 몰수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퇴레게네는 야율초재의 집안을 수색했지만 여러권의 책과 거문고, 지필묵들만이 존재했다.

생애 후반[편집]

1245년 퇴레게네는 몽골 장군 차칸, 금나라 출신 귀순장교 장유(張柔) 등에게 지시, 군사를 딸려보내 남송의 회서(淮西), 양주 등을 공략하게 했다.

1246년 8월 퇴레게네의 초청을 받고 블라디미르 대공국수즈달 공국의 대공 야로슬라프 2세 블라디미로비치가 몽골에 초대되었다. 야로슬라프 2세는 퇴레게네 카툰을 방문, 퇴레게네가 준 음식과 음료를 마시고 돌아가다가, 의문의 중독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야로슬라프 2세 블라디미로비치의 시신은 7일만에 온 몸이 기적적으로 파랗게 변했다 한다. 일설에는 퇴레게네가 야로슬라프를 독살했다는 설, 퇴레게네가 야로슬라프 2세 블라디미로비치주치의 아들 바투의 간첩으로 여기고, 부하들을 시켜 조용히 그를 제거하게 했다는 설, 아들 귀위크는 퇴레게네의 섭정 정치에 반발, 그녀의 요구를 수행하지 않아 아들을 괴롭힐 생각으로 야로슬라프 2세 블라디미로비치를 독살했다는 설 등이 전한다.

여러 번의 쿠릴타이 소집 끝에 1246년 여름 카라코룸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귀위크를 칸으로 정했다. 1246년 8월 24일 아들 귀위크를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옹립하였다. 이후 퇴레게네는 섭정 자격으로 다시 정치에 관여했다. 퇴레게네는 마우스트베그에게 트란스옥시아나의 다루가치에 임명해, 트란스옥시아나 내의 성지와 도시를 관리하게 했다. 또한 압둘 라흐만을 중국 화북지역의 대리인으로 임명하여 보냈다.

귀위크를 칸으로 추대했으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퇴레게네와 아들 귀위크 간의 관계는 무너졌다. 귀위크의 동생 코단파티마가 자신의 건강을 악화시키려고 주술을 사용한다고 비난했다. 귀위크는 퇴레게네에게 파티마의 사형 집행을 위해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고, 퇴레게네는 아들 귀위크의 요구를 거절, 자살하겠다고 위협하였다.

퇴레게네는 권력을 그녀의 아들 귀위크 칸에게 1246년 10월에 건네고, 남편 오고타이의 영지인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밀 지역으로 은퇴했으며, 얼마 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죽었다. 그의 귀위크 추대 운동은 황금 씨족 내부갈등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사후[편집]

퇴레게네의 측근이었던 파티마귀위크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귀위크의 측근들은 파티마의 입과 질, 신체의 구멍을 모두 바늘로 꿰메고 물에 던져버렸다 한다. 다른 설에는 파티마의 팔과 다리를 자른 다음에 강물에 던져서 익사시켰다 한다. 귀위크의 파티마 고문, 처형 사건은 몽골 부족장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다.

귀위크와 동유럽 원정에서 반목을 일으킨 바투, 그밖에 툴루이 가문의 몽케 등은 귀위크의 즉위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제국의 권력 투쟁은 증폭되어갔다. 후일 몽골 제국 분열의 한가지 요인이 되었다. 퇴레게네의 이름은 사후 금기시되다가, 쿠빌라이에 의해 시호를 받으면서 복권되었다. 후일 1266년 10월 쿠빌라이 칸이 태묘를 설치하고 추서한 중국식 시호는 소자황후(昭慈皇后)이고 오고타이의 사당에 모셔졌다.

가계[편집]

관련 항목[편집]

퇴레게네가 등장한 작품[편집]

각주[편집]

  1. C.P. Atwood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 p. 544
  2. Broadbridge, Anne F., 편집. (2018), “Töregene”, 《Women and the Making of the Mongol Empire》, Cambridge Studies in Islamic Civiliza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64–194쪽, doi:10.1017/9781108347990.007, ISBN 978-1-108-44100-1, 2021년 2월 1일에 확인함 
  3. Fazlullah, Rashiduddin (1998). Jami`u't-tawarikh: Compendium of Chronicles (A History of the Mongols). Harvard University. p. 53.
  4. Rashid al-Din, J. A. Boyle tr., The Sucessors of Genghis Khan,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1, 178쪽.
  5. 김호동 「구육과 그의 시대」 『근세 동아시아의 국가와 사회』 일조각, 1998, 123~124
  6. The Journey of William of Rubruck the Eastern parts of the World, 1253-55, p.62
전임
보락친 카툰
몽골 제국 황후
? ~ 1246년
후임
오굴 카미시 카툰
전임
남편 오고타이 칸
몽골 제국의 섭정
1241년 12월 14일 ~ 1246년 8월 23일
후임
아들 구육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