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타이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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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타이 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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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anEmperorAlbumOgedeiPortrait.jpg
지위
몽골 제국의 제2대 대칸
재위 1229년 9월 13일 ~ 1241년 12월 11일
대관식 1229년 9월 13일
전임 칭기즈 칸
툴루이 칸 (감국)
후임 구육 칸
이름
보르지긴 오고타이
묘호 태종(太宗)
시호 영문황제(英文皇帝)
신상정보
출생일 1186년 음력 9월 15일(11월 7일), 일설에는 1185년생 설이 있다.
사망일 1241년 음력 11월 8일(12월 11일)
사망지 막북 고원 鈋鐵𨬟胡蘭山 행궁
능묘 원사에 의하면 기련곡
(실제 사망지는 미상)
매장지 원사에 의하면 기련곡
(실제 사망지는 미상)
가문 보르지긴
부친 테무친
모친 부르테 우진 카툰
배우자 보락친 카툰
투레게네 카툰
모게 카툰
알쿠이 카툰
키르기스타니 카툰
쿠줄데르 카툰
주아이 카툰
자친 카툰
아르가나 카툰
자녀 구육
코단
코추
코라차르
카시
카단
멜릭
종교 텡그리교, 샤머니즘

오고타이 카안(몽골어: ᠥᠭᠦᠳᠡ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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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구데이 카안, ᠥᠭᠡᠳᠡ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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Ögedei Qa'an, ᠥᠭᠥᠳ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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Öködee Qa'an, 페르시아어: اوگتاى قاآن Ūgtāy Qā'ān)[1], Өгөдэй хаан 1186년 / 1185년 음력 9월 15일(11월 7일) ~ 1241년 음력 11월 8일(12월 11일)) 일명 오고타이 칸(이탈리아어: Occodai Khan[2], 페르시아어: خان اوُكَدى Ūkaday Khān)은 몽골 제국의 제2대 군주이다. 원조비사에는 우게다이(斡歌歹), 화가다이(和歌台), 기타 문헌에는 우고다이(倭闊岱)로도 등장한다. 악각덕의(諤格德衣)로도 부른다. 묘호태종(太宗), 시호영문황제(英文皇帝), 칸호는 카안(몽골어: ᠬᠠᠭᠠᠨ Qa'an)이다. 본명은 오고타이(몽골어: ᠥᠭᠡᠳᠡᠢ 우구데이, 한국 한자窩闊台 와활태)로, 몽골제국의 칭기스 칸의 셋째 아들로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와 부족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칭기스 칸으로부터 나이만의 옛 땅에 우구데이 울루스를 분봉받았다. 1229년 몽골의 군주가 되어 개혁과 제도의 정비에 힘썼다.

거란족 출신 관료 야율초재를 중용하여 중국 화북 지방의 경영에 나섰고, 중국식 유교 제도를 받아들였으며, 중서성과 좌우승상직을 설치하여 행정제도를 개편하였다. 정복지에 총독격인 관료 다루가치를 직접 임명하여 파견하는 한편, 교통로를 건설하여 수도 카라코룸성과 연결하여 제국 내의 교통망, 통신망을 준비했다. 통상 1241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설에는 1244년 음력 5월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는 1224년 아버지 칭기즈 칸으로부터 신장 웨이우얼 자치주 일대와 몽골 서부에 자신의 몫으로 영지가 분봉받았으나, 실질적으로 우구데이 울루스를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다.

이름[편집]

오고타이의 이름의 정확한 어원은 아직 알려져있지 않다. 그러나 2010년/2011년, 벨러 켐프시는 오고타이의 이름이 위구르를 의미하는 *oygur에서 왔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오고타이의 이름은 *oygur-DAi → *oygudai → ögüdei → ögödei의 순서로 변화했다.[3] 이고르 드 라케빌츠는 13세기와 14세기 문헌들을 살펴볼때, 오고타이의 이름의 정확한 당대 표기는 ögödei 또는 öködei며, ögedei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4] 존호는 무이켄가한(木亦堅合罕)이다.

생애[편집]

초기 생애[편집]

1186년 / 1185년 음력 9월 15일(11월 7일) 카마크 몽골의 보르지긴 오복의 키야트부족장이던 칭기즈 칸과 그의 아내 보르테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형 주치, 차가타이와 동생 툴루이 및 여동생들이 있었다. 보르테가 메르키트부족에게 납치되었다가 풀려난지 9개월만에 태어난 형 주치에 대해, 둘째 형이자 칭기즈 칸의 친아들이 확실한 차가타이가 형으로 대접하지 않고 일찍부터 혈통 문제를 들어 공격, 갈등을 빚었다. 오고타이는 칭기즈 칸의 아들이 확실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오고타이는 차가타이와 주치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칭기즈 칸의 정복 전쟁 중 거의 대부분을 따라 돌아다녔다. 오고타이는 체력이 강하지는 않았으나, 온화하면서도 지적인, 현명한 인물로 여겨졌다. 아버지 징기스칸에 의해 잘라이르의 통치자인 일루구이는 오고타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

1206년 아버지 칭기즈 칸이 전 몽골 제국의 칸으로 선포된 후, 오고타이에게는 잘라이르, 베수드, 술두스 및 온가탄 부족이 그에게 주어졌다.

1202년 토그릴 칸케레이트족과의 전투에도 참가했다. 1211년 11월 오고타이는 형제들과 함께 금나라 원정을 시작했다. 오고타이는 허베이를 통해 남쪽으로 진격했고, 1213년에는 산시 성 일대를 점령했다. 또한 오르도스에서 금나라 군사를 몰아냈다. 오고타이는 타타르 족과도 수시로 교전, 타타르 족을 정벌, 복속시키는데 기여한다.

정복 활동[편집]

칭기즈 칸의 아들 중에서 가장 지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술을 좋아하였다. 우구데이는 거처를 카라코룸에 정하였고, 아버지 칭기즈 칸의 측근 중 거란족 출신 야율초재(耶律楚材), 위구르족 출신 친친카이(田鎭海)와 가깝게 지내다가 대칸이 된 후 이들을 등용하였다. 그가 가장 신임한 인물은 야율초재로 아버지 칭기즈 칸 때부터 통치의 조력자로 함께 해왔으며, 중국식 행정 조직을 구성하여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또한 정복 사업을 펴 페르시아와 남러시아를 정복하고 고려를 쳐 다루가치를 설치하는 등 영토를 넓혔다.

칭기즈 칸의 서아시아 원정 당시 오고타이는 군사를 이끌고 호라즘의 수도 우르겐치 성(城)을 공략하였다. 호라즘 정벌 당시 투항한

이슬람 상인 야라와치(牙刺洼赤)와 그의 아들 마수우드베이(馬思忽惕別乞占) 부자가 투항, 이들은 오고타이의 측근이 되었다. 몽골군이 퇴각하면서, 마수우드베이는 호라즘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주재시켰다. 마우수드베이는 후일 오고타이 즉위 후 투르키스탄의 다루가치로 임명하여 체류시켰다. 호라즘 샤의 정복 성공 후 그의 전공을 들어, 1224년 칭기즈칸은 오고타이에게 나이만 부 영지와 신장 웨이우얼 자치주 일대와 몽골 고원 서부를 영지로 주었다. 이 곳은 오고타이 울루스, 우구데이 울루스로서 후일의 오고타이 칸국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그는 나이만 지방에 가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오고타이 울루스의 통치자는 그의 손자 카이두였다.

칭기즈칸의 아들 중 차가타이주치의 혈통에 이의를 제기하여 서로 갈등하였다. 차가타이는 과격한 성격으로 주치의 출생에 계속 의문을 제기하여, 몽골의 부족장들로부터 후계자로 부적격자로 간주되었다. 칭기즈 칸은 불문율에 붙이게 했으나 둘은 계속 갈등했고, 칭기즈칸은 오고타이와 툴루이 중에서 후계자를 고민하다가 다소 온화하고 지적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내정했다. 주치, 차가타이는 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231년 동생 툴루이에게 군사를 보내 금나라를 원정하게 했다. 툴루이는 1232년 초, 몽골군을 이끌고 허난 성, 위저우의 삼봉산(三峰山)일대까지 차지하였다. 오고타이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 툴루이와 회견하였다. 1232년 음력 9월 오고타이에게 생긴 병환의 희생물이 필요하다는 제사장들의 점괘가 나왔다. 툴루이는 스스로 제물을 자처하여 독약이 든 배를 마시고 죽었다. 그러나 일설에는 퇴레게네 카툰과 일부 귀족들이 툴루이를 모살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고려 정벌[편집]

1225년 3월 2일 고려를 방문하다 돌아가던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고려-금나라 국경 압록강변에서 의문의 암살을 당했고, 때마침 고려 조정은 몽골에 보내는 공물을 중단했다. 오고타이는 고려 무신 정권이 의도적으로 저고여를 살해한 일로 규정했다. 1231년 오고타이 칸은 억울히 죽은 저고여의 복수를 선언하고, 장군 살리타이를 고려로 보냈다. 살리타이의 군대는 곧 개경에 당도했고. 고려 왕은 다시 공물을 보낸다고 약속한 후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이 퇴각하는 길에 살리타이는 고려 장군 김윤후의 기습공격을 받고 활에 맞아 전사했다.

1234년 오고타이는 쿠릴타이를 열어 남송 정벌, 킵차크 정벌과 함께 몽골 사절을 살해한 고려 정벌을 선언했다. 오고타이의 군대는 고려 북부 지방을 점령했고, 1238년 고려 조정에서 화의를 주장하자, 고려 왕이 직접 오라고 지시했다. 왕을 보낼수 없었던 고려는 왕족 1명과 10여 명의 귀족 자제를 몽골에 인질로 보냈고, 1241년 오고타이는 고려 침공 중단을 선언한다.

대칸 즉위[편집]

1227년 칭기즈 칸이 죽자 툴루이는 2년간 감국을 맡았다. 몽골 내부에서 막내 상속의 관습에 따라 오고타이 칸의 동생이자 칭기즈 칸의 막내 아들인 툴루이를 후계자로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것은 관습뿐만 아니라 툴루이 자신이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장이었던데다 주변에서 덕망도 두터웠던 것이다.

그러나 툴루이는 이를 고사하고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은 오고타이라는 뜻을 표명하고 1229년 9월 13일쿠릴타이 에서 오고타이 칸은 차가타이툴루이의 협력하에 대칸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 직후 오고타이는 칸이 아닌 카안(хаан)이라는 칭호를 썼는데, 일부 문헌에서는 합간황제(哈罕皇帝/合罕皇帝)로 기록된다.

그는 빠른 말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조반니 드 플라노 카르피니에 의하면 그는 아주 짧은 시간안에 장거리 연락을 주고받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며 감탄하였다. 조반니 드 플라노 카르피니에 의하면 오고타이는 15만 명 이상의 장정을 징발, 로마로 쳐들어올 준비를 했다 한다. 그러나 전염병에 자주 감염됐던 그는 수시로 질병에 시달렸다.

내치 정비[편집]

페르시아 사서 집사에 나온 오고타이칸 초상화

1229년 야율초재(耶律楚材)가 하북(河北)의 주민들은 호(戶) 수를 기준으로 조세를 받고, 서역 사람들에게는 정(丁)을 기준으로 세금을 걷도록 주청하여, 승인, 시행하였다. 1230년 음력 11월 야율초재(耶律楚材)가 황하 강 이북 화북지역 통치에 대한 진언을 올려, 허베이, 산시, 산둥성, 연경 등에 10개의 로를 정비하고 십로정수과세사(十路征收课税使)를 보내 세금을 거둘 것을 청하였다. 동시에 저명한 유사(儒士)를 조세관료로 채용할 것을 청하여 오고타이는 그대로 승인하였다. 또한 자신의 영지에서 주로 생활하던 형 차가타이는 몽골의 법령을 수호하는 인물로서 제국의 중,서부 지역에서의 법령 집행에 협조하였다.

1231년 ]음력 8월 오고타이는 운중(云中, 현, 산시성 다퉁 시)에 십로정수과세사를 보내 세금을 거두었다. 그해에 오고타이는 중서성을 설치하고 관원을 중용했으며, 야율초재를 중서령, 몽골인 충산(粘合重山)을 좌승상, 위구르족 출신 진해를 우승상으로 채용했다. 1233년부터 오고타이는 남송에 사절을 보내, 금나라를 같이 정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남송에서는 즉시 화답하지 않다가 곧 오고타이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1235년 봄에는 수도 카라코룸오르콘 강 주변에 카라코룸성곽을 건립하고, 궁궐 만안궁을 지었다. 1236년 1월에는 만안궁이 완공되자 거처를 옮겼다. 같은 달 지폐 교초를 발행하였다.

조지아, 아르메니아 원정[편집]

1232년 오고타이는 코카서스를 원정했다. 그러나 간자크 지역에 이르러 투석기 와 공성전으로 고전을 겪고, 오고타이는 결국 몽골군을 철수하였다. 오고타이는 귀유크 칸, 몽케 칸, 바투 등으로 서방 원정군을 편성하여 서방 경략에 파송하였다. 크로마칸은 후일 몽케 칸의 군사가 북부 코카서스에서 활동했던 1238년까지 기다렸다. 그 사이 크로마칸의 군대는 아르메니아를 점령하고, 티플리스를 함락시켰다. 전황은 실시간으로 오고타이에게 보고되었다. 1235년 이르빌은 카간의 조정에 매년 조공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1238년에 귀유크 칸을 보내 샤한 샤가 다스리는 로레를 점령했다. 샤한 샤는 몽골 인이 도착하기 전에 가족과 함께 도망쳤다. 호한베르드 공략에서 성공, 도시의 통치자 인 하산 자랄(Hasan Jalal)은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서방 원정군의 일부는 아바크 왕자가 통치하는 가이안을 상대로 진격했다. 몽골 사령관 톡타는 직접적인 공격을 배제하고 그의 부하들이 도시 주변에 벽을 건설하게 하고 장기간의 전투 끝에 아바크(Avak)는 곧 항복하였다. 1240년까지 크로마간은 트란사우시아(Transcaucasia)를 정복하고, 조지아 귀족들의 항복을 종용하였다.

금나라 원정 성공, 송나라 원정 준비[편집]

1233년 6월 남송에서 오고타이의 금나라 원정 제의에 동의하자, 같은 6월 오고타이는 몽골-남송 연합군을 꾸려 금나라의 서부를 공격했다. 송나라사미원(史弥遠)이 사망한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하자 1234년 2월 9일 금나라는 멸망했다. 채주성(蔡州城)에서 금나라의 잔존 군대를 격파해 1234년 봄 최종적으로 금나라 정복에 성공한다.

그 후 몽골은 일시 북쪽으로 물러나고, 그 뒤를 송나라군이 북상하여 낙양(洛陽)과 카이펑(개봉)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것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 되었기에 격노한 몽골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장으로 널리 알려진 맹홍의 앞에서 고전을 면치 못해,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금나라 정복에 성공하자 오고타이는 송나라 침공을 계획한다. 1235년 세가지 방법으로 송나라 침공을 시작한다. 서쪽은 오고타이의 셋째 아들 카탄과 타하이 장군이 이끌고 쓰촨 지방으로, 또다른 경로로는 오고타이의 넷째 아들 쿠추와 토무다이 장군이 후베이 성 한수이 강을 거쳐서, 동쪽으로는 벨구테이의 아들 부하군과 트간 노얀이 이끌도록 했다. 이들은 양쯔강 인근까지 다다랐으나 경험 부족으로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그의 아들 쿠추가 전사했다.

내정 활동[편집]

Ögedei Khan Statue.JPG

내정면에서는 아버지 칭기즈칸의 측근인 위구르인 상인 친카이와 마흐무드 아라와치, 거란족 출신 야율초재 들을 중용하였다. 정복지에 총독격인 관료 다루가치를 직접 임명하여 파견하는 한편, 교통로를 건설하여 수도 카라코룸성과 연결하여 제국 내의 교통망, 통신망을 준비했다.

전국에 역전제를 도입하고, 수시로 교통 요충지에 역참을 세워, 수시로 파발마, 교통이 가능하도록 하고, 영토가 확장된 제국의 접촉밀도를 높였다. 또한 오르 홍 강 기슭에 수도 카라코룸를 건설하고 농경지, 도시 지역의 관할을 위해 중서성을 강화했다.

1230년 야율초재의 건의를 받아들여 북중국 지역에 사는 한인(漢人)들의 호수(戶數)와 인구의 수를 조사하게 하고, 그에 맞는 법령을 제정하고 세금을 거두라고 지시하였다. 1231년 곧 한지세법(漢地稅法)을 반포하였다. 1234년에는 금나라를 정벌한 뒤 일시적으로 세금을 내려주기도 했다. 총 110만 호였는데, 오고타이는 조사한 인구와 호수를 보고도 북중국 대부분을 그대로 왕족과 부마, 공신들에게 봉토로 내려주었다. 야율초재는 놀라서 이를 반대하였으나 오고타이는 듣지 않았다. 막대한 세금과 재화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지만, 중간에서 왕족, 부마, 공신들이 차지했고 이는 몽골 중앙조정의 재정난으로 이어졌다.

1234년 1월에는 각지의 호적을 정리하여 등록하게 했다.

화폐 제도에서는 금나라의 제도를 계승하는 형태로 지폐 교초(交鈔)을 발행하여 구리, 금, 은의 부족에 대응했다. 그러나 잇따른 대외 전략 실패와 새로운 수도 건설로 인한 재정 악화, 심지어 급격히 확장된 영토 사이의 연락을 조밀하게 잡지 못한 점, 그밖에 장남 귀위크 칸과 바투의 대립으로 제국의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오고타이 칸은 일단 귀위크를 책망했지만, 귀위크는 내심 불복종하였다.

1233년 음력 6월에는 공자의 51세손 공원배(孔元措)를 찾아 연성공(衍聖公)에 봉했다. 1233년 겨울 오고타이는 연경에 공자묘를 짓고, 서역 천문학자들에게 명하여 혼천의를 세웠다.

1234년 오고타이는 금나라를 정벌한 직후, 중원 각지에서 인재 초빙을 선언했다. 1237년 중서령 야율초재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해 9월 15일 과거제도를 시행했다. 오고타이는 9월 15일 조령을 내려 단사관 수부타이, 산서동로과세소장 유중(劉中)에게 명하여 각 역로에서 과거 시험을 열어 주관하게 하고, 유사(儒士)들을 취하도록 하였다. 1235년 카라코룸을 정비하고 도시를 건설, 쿠릴타이를 수시로 개최하였다. ㅂ 또한 중서성의 기능을 강화해 각 부족장과 관리, 지방관, 만호(萬戶) 등을 통솔, 인사와 권한을 관할하게 했다. 1238년 중국 화북지방의 각 요충지에서 과거시험이 시행되었다.(→무술년의 선시) 1238년의 무술선시에서 양환(楊奐) 등 4030명이 입격, 선발되었다. 대규모의 인재 채용은 그 후 1313년 원 인종 때에 다시 시행된다.

송나라 원정 및 티베트 공략[편집]

1235년 2월 11일 남송 정벌을 선포하고, 총사령관으로 중앙 군을 삼남 쿠츄를 임명하여 산시 성을 통해 남하시키고, 다른 아들 코단이 이끄는 군대는 서쪽으로 보내 산시 성, 쓰촨 성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군마의 일부는 동북으로 보내 고려의 서북부 평안도 방면을 공략하고 돌아오게 했다. 1235년부터 남송 원정군을 보낸 이후 1245년까지 오고타이의 아들들이 이끄는 몽골군은 송나라 깊숙이 침투하여 칭다오, 샹양 및 양쯔강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후와 남송 군대의 수로 인해 정복을 완료하지 못했고, 남송 원정 중 오고타이의 아들 코추가 사망했다.

코추를 총애한 오고타이는 그를 후계자로 결정했지만, 코추의 이른 죽음으로 그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시레문을 황궁에서 직접 양육했다. 오고타이는 시레문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했지만, 퇴레게네 카툰구유크를 후계자로 지명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오고타이는 손자 시레문을 후계자로 정했고, 퇴레게네는 바로 후계자를 선포하지 않고 섭정으로 있으면서 교묘하게 정치 술수를 꾸며, 자신의 아들 구유크를 대칸에 오르게 한다.

1240년 오고타이는 아들 코단에게 군사를 딸려보내 티베트에 파견했다. 한편 오고타이는 남송에 셀무스 등 사절을 보냈지만, 남송 군인들은 셀무스와 외게데이의 사절을 살해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최후[편집]

1235년 오고타이는 카라코룸에 만안궁을 건립했다. 그해 조령을 내려 남송 정벌과 고려 정벌을 선언하였다. 1236년 1월 만안궁에 신료들을 불러모았고, 교초를 발행, 반포하였다.

만년에 일족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제국의 분열과 후계자 문제에 영향을 주었다. 차가타이의 후손들은 주치의 정통성에 계속 의문, 의혹을 제기했고 오고타이의 아들 규유크 역시 차가타이 일가에 동조하여 주치의 아들 바투를 인정하지 않고, 공격하면서 갈등이 심해졌다. 1236년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서방 원정군을 편성, 파견하여 러시아의 각 제후국들을 굴복시키고

1237년 겨울에는 리아잔 공략전에 참여했고, 1239년에는 귀위크몽케가 알라니족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239년 말/ 1240년 초에는 규유크가 툴루이의 장남인 몽케와 함께 아스인들의 거점인 메게스를 점령했다. 1240년 겨울에는 키예프 공성전에 성공, 러시아 일대를 점령하했다. 1241년 초 서방 원정군은 헝가리에 도착, 헝가리폴란드의 각지 및 신성 로마 제국의 동부 지방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차가타이의 아들 부리가 주치의 아들 바투를 주치의 혈통 문제를 언급하며 비난할 때, 규유크가 동조하면서 서방 원정군 내에 갈등이 벌어졌다. 분노한 오고타이는 규유크를 책망하여 사자를 파견, 소환했지만 규유크가 돌아오기 전에 죽게 된다.

생전 오고타이 칸은 시레문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정하였다. 또한, 조카에 해당되는 툴루이가문의 몽케 역시 잠재적 후계자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고타이 칸의 승하 후 황후 퇴레게네에 의한 교묘한 정치 공작으로 귀위크 칸이 다음 칸으로 선출되었다.

만년에 그는 비만으로 말을 타지 못했다. 1241년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보통 그는 술을 좋아하여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알콜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집사와 원사에 의하면 과도한 음주로 건강을 잃고 말았다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그가 중독되어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다른 설에는 퇴레게네 혹은 퇴레게네의 사주를 받은 페르시아 여성 파티마 및 그의 자매에게 암살당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오고타이 칸은 1241년 가을, 사냥을 나갔다가 압둘 라흐만(Abdur Rahman)이라는 아랍 상인과 술을 마신 후 얼마 뒤 사망하였다 한다. 압둘 라흐만은 퇴레게네의 정부였다 한다.

오고타이 치세 후반 퇴레게네가 국정에 적극 관여하면서 정치가 혼란스러워졌다. 중국의 사서는 야율초재퇴레게네 카툰의 영향력을 억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일설에는 1244년 음력 5월 오고타이는 불안과 분노로 인한 심병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사후[편집]

오고타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서방 원정은 취소되고, 규유크 외에 남아있던 몽골군은 퇴각하였다.

원사, 원조비사, 집사에 의하면 오고타이는 성격이 관대, 온화하면서도 지적인 인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을 좋아하여 젊어서부터 과음하였다 한다. 황후는 퇴레게네(1186년 ~ 1246년)이며 그의 사후 장남 귀위크1246년에 칸으로 선출될 때까지 섭정하였다. 1266년 10월 조카 쿠빌라이 칸이 추존한 묘호태종(太宗)이고 시호는 영문황제이다.

기년[편집]

오고타이 칸 원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10년
서력 1229년 1230년 1231년 1232년 1233년 1234년 1235년 1236년 1237년 1238년
육십간지
(六十干支)
기축
(己丑)
경인
(庚寅)
신묘
(辛卯)
임진
(壬辰)
계사
(癸巳)
갑오
(甲午)
을미
(乙未)
병신
(丙申)
정유
(丁酉)
무술
(戊戌)
오고타이 칸 11년 12년 13년
서력 1239년 1240년 1241년
육십간지
(六十干支)
기해
(己亥)
경자
(庚子)
신축
(辛丑)

가족 관계[편집]

오고타이는 황후, 황비들 외에도 60명의 첩이 더 있었다 한다.

  • 황후 : 패랄합진 대황후(孛剌合眞 大皇后)
  • 황후 : 앙회 2황후(昻恢 二皇后), 자녀가 없던 그는 툴루이의 아들 몽케를 양자로 입양시켰다.
  • 황후 : 홀첩니 3황후 걸리길사씨(忽帖尼 三皇后 乞里吉思氏)
    • 차남 : 활단 태자(闊端 太子)
  • 황후 : 미상(未詳)
  • 황후 : 미상(未詳)
  • 황비 : 토랍기나 비자(土拉起那 妃子)
  • 황후 : 소자황후 내마진씨(昭慈皇后 乃馬眞氏)
    • 장남 : 정종 귀유(定宗 貴由) : 몽골 제국의 3대 대칸
  • 황비 : 업리길납 비자(業里吉納 妃子)
    • 7남 : 멸리 대왕(滅里 大王)
  • 황비 : 미상(未詳)
    • 3남 : 활출 태자(闊出 太子) : 생모미상(生母未詳)
    • 4남 : 찹랄찰아 왕(哈剌察兒 王) : 생모미상(生母未詳)
    • 6남 : 합단 대왕(合丹 大王) : 생모미상(生母未詳)
    • 장녀 : 노국공주 사아합한(魯國公主 唆兒哈罕) : 생모미상(生母未詳), 납합(納合)에게 하가(下嫁)

족보[편집]

 
 
 
 
 
 
 
 
 
 
 
 
 
 
 
 
 
 
16. 보르지긴 카불
카불 칸
 
 
 
 
 
 
 
8. 보르지긴 바르탄
바가투르
 
 
 
 
 
 
 
 
 
 
 
4. 보르지긴 예수게이
바가투르
 
 
 
 
 
 
 
 
 
 
 
 
 
 
2. 보르지긴 테무친
칭기즈 카간
 
 
 
 
 
 
 
 
 
 
 
 
 
 
 
 
 
5. 올코노드 호엘룬
 
 
 
 
 
 
 
 
 
 
 
 
 
 
1. 보르지긴 우구데이 카간
 
 
 
 
 
 
 
 
 
 
 
 
 
 
 
 
 
 
 
 
6. 온기라트 데이세첸
 
 
 
 
 
 
 
 
 
 
 
 
 
 
3. 온기라트 보르테
우진 카툰
 
 
 
 
 
 
 
 
 
 
 
 
 
 
 
 
 
7. 초탄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관련 항목[편집]

전임
동생 툴루이 칸
(임시)
제2대 몽골 제국 대칸
1229년 9월 13일 ~ 1246년 8월 23일
후임
퇴레게네 카툰(섭정)
장남 구육 칸
전임
아버지 칭기스 칸
(사실상)
제1대 우구데이 울루스의 쿠베군
1225년 ~ 1241년
후임
장남 구육 칸

각주[편집]

  1. 呼格吉勒圖, 薩如拉 編著, 《八思巴字蒙古語文獻匯編》, pp. 51, 60, 80-81; 蔡美彪, 《元代白話碑集錄》, pp. 37, 40, 43
  2. Plano Carpini, The Story of the Mongols Whom We Call the Tartars, ed. E. Hildinger(Boston: Branden Publishing Company, 1996), pp. 64, 80, 85-86.
  3. Kempf, Béla (2010/11). “Ethnonyms and etymology: The case of Oyrat and beyond”. 《Ural-altaische Jahrbücher》 23: 198-99. 
  4. de Rachewiltz, Igor (2013).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Volume 3 (Supplement): A Mongolian Epic Chronicle of the Thirteenth Century》. BRILL. 1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