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투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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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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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u.png
지위
청장 칸국
재위 1227년-1255년
전임 주치 칸
후임 사르타크 칸
이름
보르지긴 바투 (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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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한자孛兒只斤 拔都 패아지근 발도)
신상정보
출생일 1207년
사망일 1255년
왕조 금장칸국
가문 보르지긴
부친 보르지긴 주치
모친 온기라트 우크하

바투(1207년 ~ 1255년)는 몽골 제국 킵차크 칸국의 칸(재위:1242년~1255년)으로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주치 칸의 차남이다. 주치 칸의 아들들 중에 훌륭한 칸 이라는 별명의 그는 아버지 속령에 대한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생애[편집]

바투의 영토는 이르티쉬의 서쪽인 세미팔라틴스크,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또는 약튜빈스크, 우랄스크, 아다지, 호레즘 본토(히바)를 포함하였고, 또한 킵차크 인들의 땅부터 볼가 강 서쪽의 정복지인 제베수베에테이의 원정으로 얻은 땅을 포함하였다.

1227년 8월 18일 칭기스 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바투와 칭기스 칸의 다른 손자들 간의 알력다툼이 나타났다. 우구데이 칸은 주치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1237년 킵차크 칸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서서히 끊어갔다.

바투는 몽골 전승에는 '훌륭한 임금'이라 하나, 루스인들에게는 무자비한 정복자로 알려져 있다. 바투는 1237년루시의 도시 쿠르스크, 벨고로드, 랴잔 등을 포함한 12개의 도시를 단 5일만에 무너뜨렸고, 1238년에는 루스 노브고로드 주크레스테츠키 군을 침략했다. 1241년 4월 11일 셔요 강 인근에서 일어난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벨러 4세를 무찔렀다.

1236년 오고타이 칸의 명으로 서방 원정군을 편성, 그해 가을 원정군에 오고타이의 아들 귀유크, 툴루이가문의 몽케차가타이 가문의 부리 등과 함께 루시 원정에서 참전했다. 1237년 겨울에는 리아잔 공략전에 참여했고, 1239 년에는 귀위크는 몽케와 함께 알라니족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240년 겨울에는 키예프 공성전에도 참여했으며, 1241년 4월 11일 모히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 원정의 과정에서 귀위크와 바투의 사이가 벌어졌다. 귀위크는 바투 형제들의 실책을 보고 그들의 지휘 능력, 특히 바투의 역량을 불신했다.[1] 이를 알게 된 우구데이는 귀위크와 몽케에게 있던 우익군의 지위를 카단과 부첵에게 맡기고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바투는 이들을 위해 티사 강도나우 강 강변에서 이별연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귀위크는 전쟁에서의 바투의 소극적 태도를 비난했다.[2]

한번은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가 바투를 공격했고, 귀위크는 이를 관망했다. 한번은 술좌석에서 귀위크가 바투를 비웃다가 시비가 붙기 직전까지 갔다. 원조비사와 집사(集史)에 따르면, 원정 중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가 주치계열 왕자들과 말다툼을 벌인다. 이때 귀위크도 부리에 동조했다 한다. 원조비사에 의하면 전투 중의 상황을 보고받은 오고타이 칸은 분노했고, 귀위크를 해임, 본국에 소환을 명령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귀위크가 귀환하면서 몽케도 같이 몽골로 돌아갔다 한다.

그는 칭기즈 칸 가문의 장로로서 제국의 대칸을 둘러싼 권력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대칸 옹립자'도 알려져 있다. 1241년우구데이 칸이 죽자 대칸의 자리를 두고 우구데이의 아들인 귀위크와 바투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1246년, 귀위크는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칸 에 올랐다.

바투와 귀위크 사이의 갈등을 계기로, 소르칵타니 베키는 사람을 보내 바투와 교섭했고, 몽골 본국의 사정을 바투에게 전하였다.

귀위크의 즉위 이후 두 사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닫았지만 그 해에 귀위크가 사망하여 무산됐다. 1248년 봄 귀위크는 제2차 서방 원정대를 다시 편성하고, 바투 등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러나 바투는 응하지 않았고 귀위크는 직접 바투를 치러 군사를 이끌고 킵차크 한국으로 출발했다. 귀위크는 1248년 4월 루스 지역으로 가던 길에 사망했다. 그 이후 바투는 툴루이 의 왕비 소르칵타니 와 손 잡고 우구데이계 와의 분쟁이 다시 발생했다. 바투는 1251년에 쿠릴타이를 통하여 툴루이의 장남 몽케대칸에 오르도록 도왔다.

바투와 그의 장남 사르타크가 죽었을 때 바투의 형제 베르케(1207 이후 ~ 1266)가 킵차크 칸국을 계승하였다. 베르케는 몽골의 그의 사촌들과 통합하려하지 않았으며 훌라구 칸과는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베르케는 중국을 그의 이론적인 상부로 공공연히 인식하였다. 사실 베르케는 그때까지 독립적인 군주였다. 다행스럽게도 베르케는 유럽 공략에 관하여 바투와 이해를 공유하지 않았다.

바투는 적어도 4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토코 칸은 차남이다.

전임
주치
제1대 청장 칸국의 칸
1242년~1255년
후임
사르타크
  1. 김호동,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105쪽.
  2. 김호동,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1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