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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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곤 테무르 우카가투 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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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an Huizong.jpg
지위
대원제국 황제
몽골 제국카안
재위 1333년 7월 19일 ~ 1370년 5월 23일
대관식 지순(至順) 4년 6월 8일
(1333년 7월 19일)
전임 린친발 카안
엘테무르(섭정)
후임 아유르시리다르 빌릭투 카안
섭정 메르키트 바얀(1333 ~ 1340), 토구다(1340 ~ 1354), 아유르시리다르 빌릭투(1367 ~ 1370)
이름
토곤 테무르(몽골어: ᠲᠣᠭ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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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한자妥懽帖睦爾 타환첩목아)
연호 지순(至順) 1333년
원통(元統) 1333년 ~ 1335년
지원(至元) 1335년 ~ 1340년
지정(至正) 1341년 ~ 1370년
묘호 혜종(惠宗)
칸호 우카가투 카안(몽골어: ᠤᠬᠠᠭᠠᠲ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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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qaγatu Qa'an, 한국 한자烏哈噶圖 可汗 오합갈도 가한)
시호 선인보효황제(宣仁普孝皇帝)
신상정보
출생일 연우(延祐) 7년 4월 17일
(1320년 5월 25일)
출생지 차가타이 한국
사망일 지정(至正) 30년 4월 28일
(1370년 5월 23일)
사망지 북원 응창
왕조 대원
가문 보르지긴
부친 명종 쿠살라
모친 정유휘성황후 카를루크씨 말리아타리
배우자 다나슈리
바얀 쿠투
기 울제이 쿠투
무나시리
자녀 아유르시리다르
투구스 테무르
종교 티베트 불교

원 혜종(元惠宗, 연우(延祐) 7년 4월 17일(1320년 5월 25일 ~ 지정(至正) 30년 4월 28일(1370년 5월 23일)) 혹은 원 순제(元順帝)는 대원의 제12대 황제이자 몽골 제국 제16대 카안(재위: 1333년 ~ 1368년), 북원의 황제(재위:1368년 ~ 1370년)이다. 순제(順帝)는 명나라가 그를 호칭할때 사용하는 시호이고, 정식 묘호는 혜종(惠宗), 시호는 선인보효황제(宣仁普孝皇帝), 칸호는 우카가투 카안(몽골어: ᠤᠬᠠᠭᠠᠲ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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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qaγatu Qa'an), 우카간투 카안(몽골어: ᠤᠬᠠᠭᠠᠨ ᠲ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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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qaγan-tu Qa'an, Ухаант хаан)이다. 본명은 토곤 테무르(몽골어: ᠪᠲᠣᠭ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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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γon Temür, Тогоонтөмөр, 한국 한자妥懽帖睦爾)이다.

2000년대 이전 한국에서는 명나라식 시호로 순제로 표기되었다가 이후 혜종으로 표기된다. 명종의 아들로, 이복 동생 영종 사후, 권신 엘테무르의 방해로 즉위하지 못하다가 1333년 6월 즉위하였다. 그는 메르키트 바얀을 이용, 엘테무르 세력을 제거했다. 그러나 이후 메르키트 바얀, 토구다가 실권을 장악했고 1354년 친정하였다. 극단적인 몽골 지상주의자인 메르키트 바얀의 1334년 과거 제도 폐지에 중국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후 1351년 5월부터 발생, 전국으로 확산된 홍건적의 반란에 시달렸다. 1366년 홍건적의 잔당 주원장이 반란을 일으켜 대도를 탈출, 1368년 상도로 갔다가 그해 명나라군의 추격으로 상도를 떠나 몽골 고원 응창부로 피신,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이름 토곤 테무르는 중세 몽골어로 철 가마, 철 냄비를 뜻한다. 혜종이 대도를 잃은 것은 몽골사에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의 하나로 인정되며, 많은 몽골 연대기에는 토곤 테무르가 대도를 잃고 북쪽으로 후퇴한 것을 혜종 비가, 또는 토곤 테무르의 슬픔(Lament of Toγon temür)이라는 뜻으로 부른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생애 초기[편집]

토곤 테무르는 1320년 5월 25일 중앙아시아에 머물던 쿠살라(후일의 원 명종)와 투르크 카를룩[葛邏祿]족의 추장 테무스루의 딸 카를루크씨 말리아타리(邁來迪)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사연의에서는 그의 이복동생 이린친발은 적자라 하고, 토곤 테무르에 대해서는 적자라는 언급이 없었다. 그의 이름 토곤 테무르는 중세 몽골어로 철 가마, 철 냄비를 뜻한다. 타간테무르(托歎特穆爾), 수간테무르(妥歡帖木耳)로도 부른다.

1307년 혜종의 아버지 쿠살라의 삼촌 인종 아유르바르와다는 자신의 형이자 토곤 테무르의 조부 무종 카이산이 황태자직과 제위를 양보하는 대신, 인종 사후 형 무종 카이산의 아들을 차기 황제로 세운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뒤에 약속을 어기고, 윈난성으로 추방당했다. 삼촌인 인종에게서 암살 위협을 느낀 쿠살라는 윈난 성에 유배 도중 탈출, 중앙아시아차가타이 한국으로 도주, 망명했다. 쿠살라의 망명으로 원 인종은 자신의 아들 우투시부카몽골 고원으로 보내 쿠살라의 침입을 대비하였다.

어머니 카를루크씨 말리아타리는 군왕 아르슬란(阿兒厮蘭)의 후손으로 투르크계 민족 카를룩[葛邏祿]족의 추장 테무스루의 딸이다. 카를룩씨는 한때 원나라에 투항한 남송 공제의 첩이었으나, 공제 사후, 혹은 송 공제가 불교 승려가 된 후 어느 시점에 중앙아시아로 귀환하였다. 따라서 토곤 테무르가 명종 쿠살라의 아들이 아니고, 송 공제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시중에 유포되었다. 이에 일부 몽골인들은 영락제에 대해 주원장의 아들이 아니라 명나라가 북경을 함락시킨 뒤 몽골 황후 출신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라며 비슷한 이야기를 유포했다. 영락제가 몽골 황후의 아들이라는 설은 17세기의 몽골의 사서 알탄 톱치몽골 연대기에도 수록되었다.

토곤 테무르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은 상세히 전하지 않는다. 토곤 테무르는 티베트 불교의 신자였고, 카르마파 랑중 도르제 3세의 제자였으며 불교 탄트라를 수행하였다. 후일 그의 즉위식에 티베트 불교 카르마파 랑중 도르제 3세는 그의 즉위식에 참석하러 대도(현, 베이징시)를 방문하기도 했다. 카를룩족은 칭기즈 칸의 친인척도 아니었고, 몽골족이 아닌 투르크계 부족이었다. 토곤 테무르는 몽골 귀족들로부터 출신이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1329년 차가타이 한국에 망명 중이던 아버지 쿠살라원나라로 귀국할 때, 따라 귀국하였다.

유배 생활[편집]

1328년 원나라의 대도파 귀족들은 몽골고원파 진왕계열 황제에 반기를 들고, 그해 10월 16일 무종 카이산의 군인 측근들과 연락, 카이산의 아들 중 한 명을 황제로 세우기로 약속했다. 이들은 대도 근처에 있던 투그 테무르를 황제로 추대했지만, 곧 투그 테무르의 형이자 무종의 다른 아들 쿠살라가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대도로 왔다. 토곤 테무르의 삼촌 투그 테무르는 자신의 형이자 토곤테무르의 아버지 쿠살라에게 황제 자리를 양보하였다.

1329년 4월 아버지 명종 쿠살라가 황제가 되었지만 그해 8월 동생 투그 테무르를 만나러 가던 중 엘테무르에 의해 독살되었다. 문종 투그 테무르는 형 명종 쿠살라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형 명종 쿠살라의 아들 중 한명을 황태자로 삼으려 했다. 1329년 8월 킵차크 출신 권신 엘테무르는 토곤테무르가 원 명종 쿠살라의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추방하고, 3살의 어린 린친발을 황태자로 임명했다. 어린 황제가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 보고, 린친발을 선택하게 했다.

1329년 태자 패랄이 고려 대청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그해 3월 29일 원나라 황제에 의해 소환된 기사가 고려사에 전한다. 이 패랄 태자가 토곤테무르와 동일인인지 여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듬해인 1330년 4월 토곤 테무르는 같은 대청도로 유배되었다.

토곤 테무르는 일자왕, 2자왕의 작위도, 군왕의 작위도 받지 못했다. 1330년 4월 20일 엘 테무르는 명종의 정비 바부샤 카툰을 처형하고, 토곤테무르는 문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탄핵을 유도하여, 고려대청도로 유배보냈다. 엘테무르는 자신의 딸 다나슈리를 토곤테무르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엘테무르명종을 독살했고, 토곤테무르가 이를 추궁할까 의심하며 두려워했다. 고려에서는 그가 계모의 핍박을 받고 유배온 것으로 소문이 유포되었다.

즉위 직전[편집]

1329년 9월 2일 문종이 죽자, 이복 동생인 린친발 태자가 황제위를 계승하였다. 권신 엘 테무르는 토곤 테무르의 즉위를 반대하고, 문종 투그 테무르의 아들 엘 테구스를 새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투그 테무르의 황후 부다시리 카툰은 엘 테무르의 권세가 커지는 것과, 아들이 권력투쟁에 시달리는 것을 걱정해, 이를 거절하였다. 부다시리 카툰은 선황제 문종이 전전 황제 쿠살라의 아들을 후계자로 정하라는 유언을 근거로 엘테무르엘 테구스 추대를 계속 거절했다.

토곤테무르는 고려 양광도대청도 섬으로 보내졌다. 그는 도금한 불상 하나를 봉안하고 매일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한다. 토곤 테무르가 작은 불상을 봉안하고 기도했다는 곳에는 후일 사찰 신광사(神光寺)가 세워졌다. 옹진군 백령도의 전설과 한국 조선조의 사서 택리지에 의하면 토곤 테무르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나는 밤낮없이 이 곳에 서서 모진 비와 억센 바람에 견기디 힘들고 괴롭다. 네가 나를 위하여 집을 지어 준다면 너에게 황제위에 오르도록 해 줄 것이라고 현몽했으며, 토곤 테무르는 그 꿈을 꾸고 불상을 봉안했다 한다. 후일 그는 황해도 해주에도 특별히 목재를 보내 사찰을 지었다 한다.

그 해, 요양행성의 일부 관료들이 토곤 테무르를 황제로 추대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토곤테무르의 감시는 강화되어 사람을 못 만나게 하다가, 1331년 12월 이배되어 호광행성중서성정강부(静江府, 현, 광시 성 계림)으로 이배되었다가, 다시 광시성으로 추방되었다. 1330년 무렵 토곤 테무르는 고려인 공녀 출신 기씨를 첩으로 받아들였다. 기씨는 1320년 무렵 고려에서 조공으로 바쳐진 여성 중 1명이었다.

그러나 12월 14일 영종 린친발은 갑자기 죽었다. 엘테무르부다시리 카툰에게 엘 테구스를 칸으로 옹립하려 했응나, 이번에도 부다시리 카툰은 선황제의 뜻을 이유로 아들의 황제위 계승을 사양하였다. 당시 군권을 장악한 권신 엘 테무르는 토곤 테무르가 자신의 부황 쿠살라를 독살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다고 보아, 그의 즉위를 반대하였다. 1333년 2월 토곤 테무르는 린친발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대도로 올라오려 했으나 엘테무르가 말과 수레 이용을 금지하여, 그의 상경을 저지하였다.

원나라는 아유르바르와다가 죽은 뒤부터 1333년 토곤 테무르가 즉위할 때까지 13년간 7명의 황제가 차례로 교대하는 이상사태가 발생했다. 다수의 황족이 황위를 둘러싼 항쟁 끝에 쓰러진 뒤, 광서에서 추방생활을 보내던 토곤 테무르가 즉위함으로써 겨우 제위가 안정되었다.

재위 기간[편집]

즉위[편집]

원 혜종

토곤 테무르는 이 시기에 과거 킵차크 칸국의 친위대 사령관을 지냈었고, 원나라의 승상에 올라 권력을 장악한 태평왕(太平王) 엘 테무르에게 묶여 있어, 엘 테무르가 병사할 때까지 정식으로 즉위할 수 없었다. 1333년 5월 엘 테무르가 죽자, 대신들이 사람을 보내 상도로 올라와 그해 6월 8일 상도 대안각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엘 테무르의 사후에는 메르키트 바얀 세력과 엘 테무르의 아들 텡기스 세력이 조정의 권력을 놓고 서로 대립하였다. 1334년 당시 실권자의 한 사람인 메르키트 바얀과거 시험을 폐지하였다. 바얀은 몽골 지상주의자였다. 1335년 메르키트 바얀의 세력이 강해지자, 엘 테무르의 아들 중서성좌승상 텡기스와 타라카이 등은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1335년 6월 아스트 친위대 사령관인 메르키트 바얀을 중서성우승상에 임명, 곧 중서성좌승상 텡기스와 타라카이의 반란을 토벌하고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했다. 텡기스 일파의 반란을 진압한 뒤, 순제는 몽골 유목지상주의자인 메르키트 바얀의 요구대로 과거 제도를 폐지했다. 1335년 7월 순제는 바얀을 우승상에 임명했다. 바얀은 한림원을 폐쇄하고, 과거 제도를 폐지하는 한편, 몽골 지상주의 정책과 한인에 대한 억제 정책을 실시, 한족들이 이에 반발하였다.

즉위 직후 순제는 문종의 아들 엘 테구스를 황태자로 임명하고, 부다시리 카툰을 그 후견인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1340년 계비 기황후에게서 아들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가 태어났다.

1336년 순제는 바티칸로마 교황청을 서유럽 대표로 보고 사신을 보냈고, 사신은 1338년 5월 아비뇽에 도착했습니다. 순제의 사신은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두 통의 편지서신을 전달하고 귀국하였다. 1336년 여름 원나라 조정은 재정 위기에 직면했고, 순제는 세금 인상과 소금에 부과하는 세금 인상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다. 이는 중국 지역 한인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중화 지역의 기근, 가뭄, 홍수가 계속되었고, 세금인상과 소금세 인상에 대한 한인들의 반발은 점점 심해져갔다.

순제는 성인이 되면서 메르키트 바얀의 권력에 반발, 1340년 2월에 순제는 메르키트 바얀의 조카 토구다를 찾아 친정 의사를 내비쳤다. 토구다는 고민하다가 순제를 따르기로 하였다. 그는 곧 토구다를 이용, 그와 손잡고 메르키트 바얀을 쿠데타로 축출하고 광둥 성으로 유배를 보내 그 권력을 빼앗았다. 이후 원나라의 궁정은 거의 군벌의 내부항쟁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권신 바얀을 제거하면서 그해 6월 부다시리 카툰과 엘 테구스를 제거, 이들을 유배보냈다가 유배가던 도중 사사하였다. 일설에는 부다시리 카툰엘 테구스를 유배보낸 것은 메르키트 바얀의 뜻이라는 설도 있다.

순제는 메르키트 바얀의 권력을 빼앗았으나 바얀의 측근들은 토구다와 그의 아버지 마지야르타이의 편에 서게 되고, 토구다는 곧 조정의 권력으르 장악하다.

즉위 초반[편집]

바얀을 추방한 후 순제는 한인 문사들을 등용하고, 연호를 지정(至正)으로 고쳤다. 성인이 된 칸의 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더해져 1344년 6월 토구다를 일시적으로 해임시켰다. 그러나 토구다는 복귀했고, 순제는 구 태정제명종 쿠살라의 측근들을 이용 1347년 토크토아와 마지야르타이 부자를 영주(寧州)로 추방한다. 토구다가 추방당하고 1347년부터 1349년까지 중앙 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순제는 쿠살라 칸과 예순 테무르 칸 시절의 관료들의 도움을 받아 토구다를 최종 실각시켰다. 이 정치 혼란 속에서 어느덧 유럽에 유행하던 흑사병과 비슷한 것으로 보이던 전염병이 원나라에 유행하였고, 차례로 천재지변이 농촌을 황폐화했다.

순제는 몽골의 유력 부족 내에서 제2정비를 취하는 일반적인 관행에 어긋나, 고려인 기씨를 제2 정비로 승격시키려고 했다. 궁정에서 이러한 전대미문의 한국 여성의 승진에 대한 반발이 거세 순제는 일단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1340년 1월 23일 기씨가 아들 아유르시다르 빌레그트를 낳자, 아들을 낳은 것을 계기로 기씨를 제2황후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권력 다툼에 마음을 빼앗긴 권력자들은 이에 대한 유효한 대책을 충분히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내는 급속히 황폐화되고, 원나라의 차별정책 아래 놓였던 옛 남송인의 불만과 상업 중시의 원나라의 정책이 만들어낸 경제 착취에 괴로워하던 농민의 궁핍 등이 원인이 되어 지방에서는 급속히 불온한 움직임이 높아져만 갔다.

1338년부터 1349년 저명한 아랍의 여행자 이븐 바투타(Ibn Battuta)는 델리 술탄국의 사절 자격으로 원나라를 방문, 혜종을 알현하고 대도에 체류하며 원나라를 여행하였다.

재위 중반[편집]

1347년 순제는 토구다의 권력 확장을 두려워하여, 옛 원 무종의 지지자들과 예순테무르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토구다를 탄핵, 실각시켰다.

마침내 1348년, 현재의 신장 지역인 차가타이 칸국 동부 지역의 유력 가문인 도그라트(Duglaht) 부에서 투글루크 티무르(Tughlugh Timur)를 옹립하면서 차가타이 칸국은 동서로 분열되고 말았다. 동차가타이 칸국(모굴리스탄 칸국)의 첫 번째 칸이 된 투글루크 티무르가 잠시 분열된 차가타이 칸국을 통합하고, 여러 부족의 아미르들을 격파하기도 했지만, 이 일시적 통합은 그가 죽은 1363년에 붕괴되고 말았다.

즉위 초반부터 그는 각지에 운하 건설을 추진, 농민들을 데려다가 부역시켰고, 이는 반발을 불러왔다. 1348년 원나라 조정의 소금 독점에 불만을 품은 불법 소금 상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반란이 계속 발생하였다. 1348년 방국진(方国珍) 등의 해적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켜 절강성, 복건성을 점령하고, 원나라의 조세 수송선을 공격했다. 순제는 토벌군을 보냈으나, 토벌군은 참패하고 사령관이 포로가 되었다.

1348년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 5월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적한산동, 유복통의 주도로 봉기했다. 이들은 한산동송 휘종의 후손이라며 한산동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군사를 보내 진압했다. 그해 순제는 자이루(賈魯)를 공부상서로 등용했다. 이어 중서좌승상으로 승진시켰으나, 자이루는 2년만에 갑자기 돌연 병사하고 만다.

한편 고려기황후는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려 했고,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했다.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는 점점 조정 권력을 장악하려 시도한다.

정치 외면과 내부 혼란[편집]

토곤 테무르는 점차 정치에 관심을 잃어갔고, 정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중단했다. 그는 역학을 좋아했고, 사냥과 성행위 등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대도상도 황궁의 정원에는 기계 장치를 설치했다. 정치는 혜종의 측근인 관료들에 의해 주관되었다. 그는 12만 명의 장정을 황하로 보내 산둥 반도의 남쪽과 황해변까지 운하를 건설하였다.

1353년에 왕세자가 된 그의 아들 아유르시다르 빌리그투 칸은 권력을 장악하려 했고, 황제 대신 정무를 관장하던 순제의 측근들과 충돌했다. 이 기간 동안 기황후는 세력을 키워, 기황후의 권력이 점점 더 커졌다. 기황후는 자기 아들 아유르시리다르가 조정의 정권을 장악하기를 원했지만, 순제의 측근들은 이를 반대하여 조정에서는 갈등이 벌어졌다. 기황후와 그의 측근들은 아유르시다르 빌리그투를 설득하여 순제의 측근들을 타도하도록 ​​했다. 1353년 태자 아유시리다르기황후 등의 지원을 받아 정권 탈취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순제는 분쟁을 조절하지 못했고, 1355년 순제의 측근들은 기황후와 아유르시리다르의 음모로 반역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혜종은 합마가 아유르시리다르를 황제로 옹립하려 한다고 의심하였다. 1356년에는 합마가 아유르시리다르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했다가 사전에 발각, 정적들에 의해 목졸려 죽임당했다. 기황후 역시 자신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황제로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재상 틴카이에 의해 발각되었다. 1357년 틴카이는 의문의 독살로 죽었다. 혜종은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내부혼란과 홍건적의 난[편집]

1354년 토구다가 대규모 토벌군을 이끌고 홍건적 반군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순제는 토구다에 의지하면서도 토구다의 배신을 의심, 두려워했다.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구다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 의해 갑자기 경질되고 곧 살해당하자, 이것을 칸의 권력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중국 내부에서는 종말론적인 유언비어가 각처에서 확산되었다. 1355년 2월 유복통의 잔당이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황제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원나라의 군대는 홍건적과 백련교도를 막지 못했다.

티베트 불교를 신봉했던 혜종은 4대 카르마파 랑중 도르제 4세를 대도로 초빙, 1359년 4대 카르마파 랑중 도르제 4세는 원나라대도를 방문, 3년간 황제의 자문으로 있으면서 중국에 많은 티베트 불교 사원을 설립했다.

1360년 이후 황태자 아유시리다르는 정권을 탈취하려다가 실패했다. 순제는 아유시리다르를 죽이지 않았다. 1362년 황태자 아유시리다르는 재상 초젬과 함께 새로운 음모를 꾸몄으나 사전에 발각, 실패하고 대도에서 추방시켰다. 곧 초젬을 처형하자, 아유르시리다르는 중국 남부와 북부에서 홍건적의 난을 토벌하던 원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 아유르시리다르의 군대는 코케 테무르의 허난성 군대를 가까스로 이겼다. 1363년 아유르시리다르의 군대는 대도를 점령했고, 혜종은 차례로 지방에 지원을 요청, 다퉁에 있던 볼루드 테무르 군대가 대도로 왔다.

1364년 산시 성에 기반을 둔 군벌 볼라드 테무르(Bolad Temür)가 군사를 이끌고 대도를 점령 하고 황태자를 대도에서 추방했다. 태자는 허난에 기반을 둔 군벌 코케 테무르(Köke Temür)와 동맹, 1354년 볼라드 테무르를 몰아냈다. 볼루드 테무르는 부하의 배신으로 코케 테무르에게 사살되었다. 아유르시리다르의 계속된 정권 탈취 기도는, 홍건적의 진압을 어렵게 만들었다.

1366년 원나라 군대는 겨우 홍건적을 붕괴시켰다. 그러나 이때, 1360년 무렵부터 홍건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朱元璋)이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홍건적의 세력을 규합, 흡수하고 화남을 통일해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대도 탈출과 북천[편집]

1366년 9월 14일 주원장은 즉위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북벌을 개시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에 육박했다. 1368년 1월 23일주원장이 건국한 명나라에 의해 수도인 대도를 빼앗기고 몽골 고원에 있는 상도(上都)로 천도하였다. 혜종이 천도하는 사이 진남왕 토곤의 넷째 아들 테무르부카(帖木兒不花)가 임시 감국에 올라 중서우승상 배경동(拜慶童)과 함께 항전하였으나 패하고 전사하였다. 9월 10일 명나라 장군 서달 등이 대도를 다시 점령하였다. 학자에 따라서는 1366년 대도 점령을 원나라의 멸망 기점으로 보기도하고, 다른 학자들은 1368년 상도 점령을 원나라의 멸망 기점으로 보기도 한다.

1367년 아유르시리다르 황태자를 중서령과 겸 영추밀원사에 임명했다. 아유르시다르는 행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곧 혜종에게 태자에게 양위하라는 상소가 올라왔고, 그는 퇴위를 꺼리면서도 황태자를 사실상의 통치권자로 승인했다.

1368년 명나라군이 강남에서 올라왔고, 허난 성에 주둔 중이던 코케 테무르의 군대도 명나라의 서달 군대에 최종 격파되었다. 이 패배를 계기로 원나라의 전 군은 아유르시리다르가 실권을 잡게 되었고, 태자는 부황을 폐위시키지 않았다. 그는 명목상의 군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1369년 명나라상우춘(常遇春)에게 군사를 주어 상도를 공격, 1369년 9월 14일 상도도 명나라 상우춘 군에게 함락된다. 혜종과 구신들은 피신, 1369년 7월 14일 혜종은 상도의 북쪽에 있는 응창부(應昌府 현,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 자치구 츠펑 시 헤시구텐기),로 천도하였다. 일설에는 케룰렌강변까지 일시 피신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그의 영향력은 만리장성 이북에 한한 것이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370년에 혜종은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르에게 칸 지위를 물려주고 응창부에서 이질로 사망하였다.

명나라에게 쫓겨 수도를 북쪽에 있는 응창부로 천도하였지만, 북원은 여전히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1635년 후금에게 공격당해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사후[편집]

명나라에서는 순천응인(順天應人), 순순히 하늘의 뜻에 따라 물러났다며 순제라는 시호를 추서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연호를 따 지정제(至正帝)라 부르거나, 경신년에 대도를 버리고 떠난 것을 근거로 경신제, 경신군으로 부르기도 한다. 북원에서는 시호를 선인보효황제(宣仁普孝皇帝)라 하고 묘호를 혜종이라 하였다. 몽골식 존호는 우카칸투 카안(烏哈噶圖汗, 烏哈篤汗)으로, 명지(明智), 밝은 지혜를 의미한다.

그해 6월 10일 명나라 장군 이문충(李文忠)이 이끄는 부대가 다시 응창부를 장악, 아들 소종과 원나라 조정은 카라코룸으로 퇴각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도 윈난 성구이저우 일대에서는 양왕 바르살바르미 등 원나라의 왕족과 장군들이 계속 명나라에 저항했다. 이들의 저항은 1381년까지 계속되었다.

가족관계[편집]

조부모와 부모[편집]

  • 조부 : 제7대 카안 무종(武宗) 카이샨
  • 조모 : 추존황후 인헌장성황후(仁獻莊聖皇后) 이키레스씨
  • 아버지 : 제9대 황제 명종(明宗) 코실라
  • 어머니 : 추존황후 정유휘성황후(貞裕徽聖皇后) 한록로씨(罕祿魯氏)

황후[편집]

후궁[편집]

  • 숙비 용서교(淑妃 龍瑞嬌) - 궁중 7귀
  • 숙비 정일녕(淑妃 程一寧) - 궁중 7귀
  • 숙비 과소아(淑妃 戈小娥) - 궁중 7귀
  • 여빈 장아원(麗嬪 張阿元) - 궁중 7귀
  • 여빈 지기씨(麗嬪 支祁氏) - 궁중 7귀
  • 재인 응향아(才人 凝香兒) - 궁중 7귀
  • 재인 영영(才人 英英) - 궁중 7귀
  • 여빈 진씨(麗嬪 陳氏)

황자[편집]

  1.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르 - 대원 제17대 카안 소종(昭宗)
  2. 오왕(吳王)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
  3. 촉왕(蜀王) 도선첩목아(都先帖木兒)
  4. 익왕(益王) 투구스 테무르 - 대원 제18대 카안 천원제(天元帝)
  5. 제왕(齊王) 연태(燕台)
  6. 초왕(楚王) 화태랄(和台剌)
  7. 진금 황자(眞金 皇子) - 백안홀도황후 소생
  8. 설산 황자(雪山 皇子) - 백안홀도황후 소생
  9. 실독아 태자(失禿兒 太子)
  10. 만만 태자(巒巒 太子)

황녀[편집]

  1. 정국공주(鄭國公主) - 진동무성왕 박공목소특(鎭東武成王 博供穆素特)에게 하가(下嫁)
  2. 초국공주(楚國公主) - 요왕 홍길랄 색평지만사특(遼王 弘吉剌 色坪持滿思特)에게 하가(下嫁)
  3. 연국공주(燕國公主) - 정남충성왕 홍길랄 초삭극포태가파(征南忠成王 弘吉剌 礎朔克布台可巴)에게 하가(下嫁)
  4. 완국공주(宛國公主) - 평북무헌왕 홍길랄 시금(平北武獻王 弘吉剌 時金)에게 하가(下嫁)
  5. 촉국공주(蜀國公主) - 안평왕 파통격만(安平王 把通格滿)에게 하가(下嫁)

기년[편집]

기타[편집]

1348년 3월 그의 제3황후 기황후의 친정 일족들은 고려 개경(현, 개성시)에 개성경천사지십층석탑을 세웠다 한다.

드라마[편집]

전임
동생 린친발 카안
엘테무르(섭정)
제16대 몽골 제국 카안
1333년 7월 19일 - 1368년 1월 23일()
1368년 1월 23일 - 1370년 5월 23일(북원)
후임
아들 아유르시리다르 빌릭투 카안
전임
동생 린친발 카안
엘테무르(섭정)
중국 남부 지역의 황제
1333년 7월 19일 - 1368년 1월 23일
후임
명나라 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