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위크 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Picto infobox prétendant à un trône.png
귀위크 카안
ᠭᠦᠶᠦᠭ
ᠬᠠᠨ
Guyuk khan from Persian miniature.jpg
지위
몽골 카안
재위 1246년 8월 24일 ~ 1248년 4월 20일
대관식 1246년 8월 24일
전임 우구데이 카안
후임 뭉케 칸
이름
구육(몽골어: ᠭᠦᠶᠦᠭ)
묘호 정종(定宗)
시호 간평황제(簡平皇帝)
신상정보
출생일 1206년 음력 2월 9일(3월 19일)
사망일 1248년 음력 3월 25일(4월 20일)
사망지 쿰 셍기르
왕조 몽골 울루스
가문 보르지긴
부친 우구데이
모친 투레게네 카툰
배우자 오굴 카미시 카툰
종교 텡그리교

귀위크 칸(몽골어: ᠭᠦᠶᠦᠭ
ᠬᠠᠨ
Güyüg Qan, 1206년 음력 2월 9일(3월 19일) ~ 1248년 음력 3월 25일(4월 20일))은 몽골 제국의 3대 으로 1246년부터 1248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칭기스 칸의 손자이자 우구데이 카안의 장남이었다. 휘는 보르지긴 귀위크, 묘호정종(定宗)이다. 겁이 많고 힘이 약하였으나, 머리가 뛰어나게 좋아 정치면에서는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귀위크 칸은 카안이라고 칭해졌던 경우도 보인다. 예를 들어 회력 646년(1248년경) 그루지야 지방에서 다비드 5세가 주조한 은화(dirham)에 Gūyūg Qā’ān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보고된 바 있다. 또한 동시대의 라틴어 자료에서도 귀위크는 chaam이라고 표기되었는데, 이 역시 카안을 나타낸 것으로 추측된다.[1]

아버지 오고타이 카안은 생전에 카안이라 칭했지만, 그는 카안의 칭호가 아버지 오고타이만의 칭호라고 생각하여 카안이라 하지 않고 스스로 칸 칭호만을 자칭했다.

초기의 생애[편집]

귀위크는 외게데이 카안과 그의 6번째 부인[2] 퇴레게네 카툰의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나 메르키트 부의 오굴 카미시 카툰과 결혼했다. 우구데이는 대칸으로 즉위한 뒤에 자신의 영지인 중앙아시아 Emil-Qobuq 지역[3]을 귀위크에게 줬다.[4][5] 발하슈 호 근처의 에밀 코보쿠 지방 역시 그의 영지였다.

귀위크는 1233년에는 포선만노랴오둥 반도에 세운 대진국을 정복하는 일에 공을 세웠다.

외게데이는 1234년부터 시작된 몽골 제국의 루스 원정에 귀위크를 보냈다. 주치의 차남 바투는 주치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에서 차출된 좌익군의 지휘관이자 원정의 총사령관이었고, 귀위크는 외게데이 가문과 툴루이 가문에서 차출된 우익군의 지휘관이었다.

1235년 초봄, 외게데이 칸카라코람을 수도로 정하고, 아울러 쿠릴타이를 다시 소집, 이 때의 쿠릴타이에서 주치 가문의 장손 바투를 총사령관으로하는 유럽 원정군, 귀위크의 세 동생 쿠츄, 코단 등을 총사령관과 하는 남송 원정군을 편성했으며, 고려에도 정벌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귀위크 칸은 우구데이 가문을 대표해 바투의 서방 원정에 종군, 출정하였다.

귀위크는 1236년 가을 원정군에 합류하여 바투, 툴루이가문의 장남 몽케와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 등과 함께 루시 원정에서 활약했다. 1237년 겨울에는 리아잔 공략전에 참여했고, 1239 년에는 귀위크는 몽케와 함께 알라니족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239년 말/ 1240년 초에는 툴루이의 장남인 몽케 칸과 함께 아스인들의 거점인 메게스를 점령했다. 1240년 겨울에는 키예프 공성전에도 참여했으며, 1241년 4월 11일 모히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 원정의 과정에서 귀위크와 바투의 사이가 벌어졌다. 귀위크는 바투 형제들의 실책을 보고 그들의 지휘 능력, 특히 바투의 역량을 불신했다.[6] 이를 알게 된 우구데이는 귀위크와 몽케에게 우익군의 지위를 카단과 부첵에게 맡기고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바투는 이들을 위해 티사 강도나우 강 강변에서 이별연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귀위크는 전쟁에서의 바투의 소극적 태도를 비난했다.[7] 귀위크는 1241년 가을에 회군을 시작했다.

원조비사와 집사(集史)에 따르면, 원정 중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가 주치계열 왕자들과 말다툼을 벌인다. 이때 귀위크도 부리에 동조했다 한다. 원조비사에 의하면 전투 중의 상황을 보고받은 오고타이 칸은 분노했고, 귀위크를 해임, 본국에 소환을 명령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귀위크가 귀환하면서 몽케도 같이 몽골로 돌아갔다 한다.

칸위 계승[편집]

귀위크가 아직 회군 길이던 1241년 12월, 우구데이는 카라코룸에서 알콜중독으로 죽었으며 당시 몽골 제국의 칸들이 모두 부재 중이었는데, 이 틈에 우구데이의 친 숙부이자 칭기즈 칸의 동복 막내아우이며 73세 고령의 옷치킨 테무게[8]가 군사를 이끌고 우구데이의 오르두로 접근했다. 그의 목적은 선제의 유해와 그의 부인들을 방패삼아 정권을 잡자는 것이었다.[9] 그러나 마침 귀위크가 에밀[3]에 도착했다는 소식으로, 테무게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10]

우구데이의 오르두를 장악한 것은 퇴레게네였다. 그녀는 장남 귀위크를 남편 우구데이가 남긴 대칸 위로 세우고자 했으나, 동유럽 원정에서 서로 갈등했던 바투의 방해로 쿠릴타이 개최는 계속 미뤄졌다. 하지만 퇴레게네의 공작은 성공했으며 1244년 봄 달란다바스 에서 열린 쿠릴타이에 참석한 몽골의 칸 들은 귀위크의 즉위를 합의했다.[11] 사촌 바투는 귀위크와 퇴레게네를 싫어하여 쿠릴타이 소집 참여를 거부하고, 계속 가문의 장로인 바투가 불참한 채 후계자를 결정할수 없다며 쿠릴타이를 반대하는 몽골 부족장들의 항의도 계속되어, 당분간 쿠릴타이를 개최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퇴레게네에 의해 쿠릴타이의 개최는 강행되었다. 바투는 불가불 동의했으나 즉위식에는 병환을 핑계로 손위 형인 오르다를 비롯한 형제들을 대신 보냈다.

집사의 오고타이 칸기에 의하면 오고타이 칸은 생전 처음 황후 보라크친에게서 얻은 셋째 아들 쿠추를 후계자로 결정했다. 남송 원정에서 코단이 우익 세력으로 쓰촨성 의 청두 에 입성, 산시성 방면을 점령하고 중군을 이끄는 쿠추도 허난에서 호남 에 침공하여 조양(棗陽) 방면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쿠추는 1236년 11월에 호광 방면의 전선에 출정했다가 이듬해 2월 전사했했다. 오고타이 칸은 쿠추의 장남 시레문를 총애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궁중에서 양육했다. 그러나 오고타이 사후 섭정이 된 퇴레게네 카툰은 시레문 대신 귀위크를 추대하도록 여러 몽골 부족장들을 설득하였다.

귀위크는 1246년 8월 막북 코코 나우루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대칸으로 정해졌다. 1246년 8월 24일카라코룸 에서 대칸 으로 즉위했다. 경축 사절단으로 조지아 왕국의 왕위 계승자 다비드 나린과 다비드 라샤, 블라디미르의 대공 야로슬라브 2세,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 헤툼 1세와 그의 동생이자 원수(元帥)인 셈파드, 후일 룸 술탄국의 술탄이 된 킬리츠 아르슬란 4세, 케르만의 아타벡들의 사절, 바그다드 칼리프의 사절, 그리고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사절로 델 카르피네가 찾아왔다.[12]

재위 이후[편집]

즉위 직후 잠시 모후 퇴레게네가 섭정을 맡아보았다. 모후 퇴레게네는 귀위크가 즉위한지 몇 달 만인 1246년 10월에 사망했다.
퇴레게네 섭정을 맡고 있던 동안 발표된 칙령 야루리쿠를 폐지하고, 몽골계 제 왕족들의 권력 남용을 억제하였으며, 어머니의 총애를 받고 전권을 휘두르고 있던 중신 압둘 라흐만을 처형했. 대신 오고타이가 총애하던 마흐무드 아라와치와 친하이 등을 복직시켜 중용하였다. 또한 차가타이 울루스카라 훌레구를 폐하고, 그의 삼촌이자 차가타이의 다섯째 아들 예수 몽케로 임명하는 문제에도 관여했다.

제7차 십자군을 추진하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귀위크의 1246년 대칸 즉위식에 카라코룸 으로 프란치스코회수도사지오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를 보내 무슬림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고자 하였으나, 교황과 유럽이 모두 귀위크 칸에게 복종해야 동맹이 성립한다 라는 반응만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그를 정통군주로 보지 않았는데, 후대에 티무르도 그를 찬탈자라고 격하했다.

그는 칭기스 칸이 정한, 고문 금지를 깨고 반대파에게 고문을 가하였으며, 특히 어머니 퇴레게네 카툰의 측근이자 신뢰했던 무슬림 노예 출신 여성 파티마를 고문을 가하여 몽골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또한 그는 즉위 직후 세금을 올려 몽골계 제부족은 물론 정복지의 주민들에게도 반감을 샀다.

서부의 기독교도들과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인들은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몽골과 중대한 동맹을 맺기를 바랐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인들은 1247년 과 (대칸 귀위크의 사망 이후인) 1254년헤툼 1세가 몽골을 방문함으로써 종속의 예를 갖추었다.

귀위크 칸은 관절염에 시달리고 있었고, 알콜중독에 빠지게 되었다. 과도한 주색으로 만년에는 정무를 볼 수 없었으며, 측근인 친카이, 카다쿠 등이 정무를 주관하였다. 귀위크 칸의 개인 가정교사이기도 했던 카다쿠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이며, 그의 영향도있어 귀위크 칸의 통치 아래 몽골 제국에서 기독교는 어느정도 공인받았다.

카안인 귀위크는 차가타이의 제 5남인 예수 몽케로 하여금 차가타이 울루스을 다스리게 하였다.

사망 이후[편집]

귀위크의 칸 즉위 이후 바투와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지만 그 해 3월/4월에 귀위크가 사망[13] 하여 무산됐다. 그 이후 바투는 툴루이의 왕비 소르칵타니와 손 잡고 다시 외게데이계 와 분쟁했다. 바투는 1251년쿠릴타이를 통하여 툴루이의 장남 묑케카안에 오르도록 도왔다.

1248년 봄 귀위크는 서방 원정대를 다시 편성하고, 바투 등에게 지휘를 맡겼다. 귀위크는 1248년 4월 루스 지역 원정 도중에 자신의 몫으로 분배된 영지 비슈바리쿠 방면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몸이 병약했던 귀유크는 지나친 음주로 건강을 잃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서는 알콜중독이라는 설이 있고, 과로사라는 설이 있다. 일설에는 툴루이의 처 소르칵타니 베키 또는 바투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귀위크의 미망인 오굴 카이미쉬가 귀위크의 이복 아우 코추(闊出)의 장자이자 우구데이 칸이 후계자로 낙점해두었던 시레문(失烈門) 을 외게데이계 칸으로 옹립하려고 모의하다 발각됐다. 몽케 칸소르칵타니는 애초에는 관용적이었으나 툴루이계와 부하 일당의 주장으로, 결국 시레문 을 처형하고 오굴 카이미쉬를 나체 고문 끝에 펠트에 말아 강물에 던져 죽였다.

1266년 10월 쿠빌라이 칸에 의해 묘호는 정종, 시호는 간평황제로 추서되었다.

기타[편집]

그의 치세에 대해 청나라의 필원의 속자지통감, 위원의 원사신편에는 그의 치세에 가뭄이 심했고, 풀도 마르고, 말과 소가 죽고, 사람들도 죽고 황폐해졌다는 평가를 내렸다.

기년[편집]

귀위크 칸 원년 2년 3년
서력 1246년 1247년 1248년
육십간지
(六十干支)
병오(丙午) 정미(丁未) 무신(戊申)

가족 관계[편집]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와 중국계 사서 원사에는 그의 아들이 3명의 이름만이 전한다. 페르시아의 사서 집사에는 그의 세 아들 중 호자 오루구와 뇌홀은 오굴 카미시 카툰의 소생이라 한다.

  • 조부 : 태조 철목진(太祖 鐵木眞) : 몽골 제국의 초대 대칸
  • 조모 : 광헌익성황후 홍길랄씨(光獻翼聖皇后 弘吉剌氏)
    • 부황 : 태종 와활태(太宗 窩闊台) : 몽골 제국의 2대 대칸
    • 모후 : 소자황후 내마진씨(昭慈皇后 乃馬眞氏)
      • 황비 : 원비 멸아걸씨(元妃 蔑兒乞氏)
      • 황후 : 미상(未詳)
      • 황후 : 미상(未詳)
      • 황후 : 흠숙황후 알올립씨(欽淑皇后 斡兀立氏)
        • 장남 : 홀찰 태자(忽察 太子)
        • 차남 : 뇌홀 태자(腦忽 太子)
      • 황후 : 내만진 황후 내마진씨(乃蠻眞 皇后 乃馬眞氏)
        • 3남 : 남평왕 화홀(南平王 禾忽)
      • 황비 : 미상(未詳)
        • 장녀 : 고창공주 파파합이(高昌公主 巴巴哈爾) : 생모미상(生母未詳)
        • 부마 : 역도호화적합아적근(亦都護火赤哈兒的斤)
        • 차녀 : 조국대장공주 엽리미실(趙國大長公主 葉里迷失) : 생모미상(生母未詳)
        • 부마 : 조충양왕 군불화(趙忠襄王 君不花)

족보[편집]

 
 
 
 
 
 
 
 
 
 
 
 
 
 
 
 
 
 
16. 보르지긴 바르탄
바가투르
 
 
 
 
 
 
 
8. 보르지긴 예수게이
바가투르
 
 
 
 
 
 
 
 
 
 
 
4. 보르지긴 테무친
칭기즈 카간
 
 
 
 
 
 
 
 
 
 
 
 
 
 
9. 올코노드 호엘룬
 
 
 
 
 
 
 
 
 
 
 
2. 보르지긴 우구데이 카간
 
 
 
 
 
 
 
 
 
 
 
 
 
 
 
 
 
10. 온기라트 데이세첸
 
 
 
 
 
 
 
 
 
 
 
5. 온기라트 보르테
우진 카툰
 
 
 
 
 
 
 
 
 
 
 
 
 
 
11. 초탄
 
 
 
 
 
 
 
 
 
 
 
1. 보르지긴 귀위크 카간
 
 
 
 
 
 
 
 
 
 
 
 
 
 
 
 
 
 
 
 
3. 나이만 퇴레게네 카툰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참고 서적[편집]

  • ʿAlāʾ-al-Din ʿAṭā Malek Jovayni, tr. John A. Boyle, The History of the World-Conqueror, 2 vols., Manchester, 1958.
  • 『두산백과』의 항목들: 구유크 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포선만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르네 그루쎄 씀, 김호동·유원수·정재훈 옮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1998.
  • 스기야마 마사아키 지음, 임대희·김장구·양영우 옮김, 『몽골 세계제국』, 신서원, 1999.
  • 윤은숙, 『몽골제국의 만주 지배사』, 소나무, 2010.
  • 김호동,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근세 동아시아의 국가와 사회』,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편, 지식산업사, 87-132쪽.

각주[편집]

  1. Ibn-i Bībī, Al-Avāmir al-ʿalāʾīyah fī al-umūr al-ʿalāʾīyah. Tihrān: Pizhūhishgāh-i ʻ Ulūm-i Insānī va Muṭālaʻāt-i Farhangī, 2011, 275-76, 278쪽
  2. 스기야마 마사아키 지음, 임대희·김장구·양영우 옮김, 『몽골 세계제국』, 85쪽.
  3. Background of Ogedei Khan--> http://history.cultural-china.com/en/46H8037H12816.html Archived 2013년 6월 16일 - 웨이백 머신
  4. ʿAlāʾ-al-Din ʿAṭā Malek Jovayni, tr. John A. Boyle, The History of the World-Conqueror, vol.1, p.43.
  5. 우구데이는 1232년 툴루이가 죽자 툴루이의 아내 소르칵타니에게 귀위크와 결혼(근친결혼: 34세의 숙모와 26세의 조카)할 것을 명령했지만, 소르칵타니는 툴루이의 남은 아들들의 교육에 집중하겠다며 완강히 거절했다.
  6. 김호동,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105쪽.
  7. 김호동,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106쪽.
  8. Ochigin, ordu 등 Mongolian terminology --> http://randomeye713.deviantart.com/art/Mongolian-terminology-translated-347633238 Archived 2014년 12월 20일 - 웨이백 머신
  9. 스기야마 마사아키 지음, 임대희·김장구·양영우 옮김, 『몽골 세계제국』, 86쪽.
  10. 테무게는 5년 뒤, 귀위크가 대칸으로 즉위하는 해인 1246년에 처형됐다.
  11. 김호동,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108쪽.
  12. 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390쪽.
  13. 수도 카라코룸 의 서쪽으로 1 천 km 떨어진 Qum-Senggir (오늘 날 칭허 현 (아러타이 지구)에 속하는 곳)에서 독살 또는 과로사
전임
아버지 우구데이 카안
제3대 몽골 제국
1246년 ~ 1248년
후임
사촌동생 몽케 칸
전임
아버지 우구데이
제2대 우구데이 울루스의 쿠베군
1246년 ~ 1248년
후임
조카 카이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