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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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몽골 전쟁
高丽油画.jpg
날짜 1231년 ~ 1273년
장소 한반도 전역
결과 고려의 항복
몽골 제국의 고려 속국화
교전국
고려 고려 몽골 제국
지휘관
고려 고려 고종
고려 최우
고려 최의
고려 최향
고려 김윤후
고려 박서
고려 왕온
고려 이용상
고려 임연
고려 홍복원
오고타이 칸
귀위크 칸
몽케 칸
쿠빌라이 칸
살리타
아모간
예케
자랄타이
김방경
홍다구
홍복원
흔도

배경[편집]

고려최씨의 무단정치(武斷政治) 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라는 사람이 나와 몽골족을 통일하고, 1206년(희종 2년)에는 칭기즈 칸이라 칭하고 강대한 제국(帝國)으로 군림하였다.[1]

그는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서양의 각국을 공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다음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니 금은 대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요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다시 몽골에 쫓기어 1216년(고종 4년)에는 마침내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1]

이에 몽골은 여진족의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거란족을 소탕하기 위하여 고려에 들어오자 고려도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무찔렀다(→강동성 전투). 몽골은 이를 계기로 고려에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고려와 협약을 맺고 해마다 과중한 세공을 요구하는 한편 몽골 사신은 고려에 들어와 오만한 행동을 자행하여, 고려는 차츰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1]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국경지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 하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지고 마침내는 국교단절에까지 이르러 몽골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1]

전쟁의 경과[편집]

초기[편집]

1231년 오고타이 칸은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 살해 사건에 대해 힐책하는 내용과 함께 고려에게 항복하라는 국서를 보낸다.[2] [3] 이로써 고려몽골 제국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고타이 칸몽골 제국 잘라이르부 출신의 장수 살리타로 하여금 고려를 정복하도록 하였다.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은 압록강을 넘어 고려의주를 함락시켰다. 몽골군은 이때 투항한 고려의 장수 홍복원과 그의 군사들과 함께 귀주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귀주성을 지키고 있던 고려의 장수 박서김경손, 그리고 그들 휘하에 고려군은 몽골군에 저항하였다.

살리타귀주성을 함락하기 위해 포차와 누차 등 무수한 대형 병기를 이용하는 등 맹공하였으나 귀주성이 함락되지 않자 포기하고 고려의 수도 개경에 진격하여 포위하였다. 고려 조정은 몽굴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별다른 대책이 없음을 알고 몽골 제국에게 강화를 요청, 몽골 사신들과 살리타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고려 조정이 강화를 맺자 귀주성박서도 항복하여 전투가 중단되었다. 이후 몽골군은 강화의 감시와 이후 고려에의 간섭을 위해 개경평안도 일대에 감독관인 다루가치를 72명 배치하고 철수하였다.

고려는 비록 몽골과 강화를 하였으나 이는 고려의 본의가 아니었고 또 앞으로 몽골의 태도 여하를 몰라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는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 천도를 결정하고, 1232년(고종 19년) 음력 6월에 수도를 강도(江都 :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의 각오를 굳게 다졌다. 이는 몽골에 대하여 적의를 보인 것이므로 살리타는 7개월 만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서경의 홍복원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하고 남경(南京 : 한양)을 공격한 다음 한강을 넘어 남쪽을 공략하였다.[1]

그러나 해전에 약한 몽골은 강화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다시 남하하여 처인성(處仁城 : 용인)을 공격하다가 살리타는 고려의 김윤후에게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대장을 잃은 몽골은 사기를 잃고 철수하였는데, 이때 부인사(符仁寺) 소장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불타 없어졌다. 한편 몽골의 철수에 기세를 올린 최우는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에게 가병(家兵) 3천을 주어 앞서 반역한 홍복원을 토벌하고, 가족을 사로잡고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1]

1235년(고종 22년) 몽골은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따로 당올태(唐兀台)에게 대군을 주어 다시 고려를 치게 하였다. 몽골은 개주(介州 : 개천)·온수(溫水 : 온양)·죽주(竹州 : 죽산)·대흥(大興 : 예산) 등지에서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를 휩쓸었다. 유명한 《황룡사 9층 목탑》도 이때에 파괴되었다.[1]

이같이 몽골은 육지에 화를 입혔으나 강화도만은 침공치 못하니 조정은 강화도에 웅거하여 방위에 힘쓰는 한편 부처의 힘을 빌려 난을 피하고자 《팔만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강화도에서는 백성에게 미치는 피해를 우려하여 1238년(고종 25년) 겨울 김보정(金寶鼎) 등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제의하였고, 몽골은 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봄에 철수를 시작하였다. 철수 후 고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다가 몽골의 독촉으로 입조의 불가능함을 말하고 왕족 신안공 전(新安公 佺)을 왕제(王弟 : 왕의 아우)라 칭하여 대신 몽골에 보내고 1241년(고종 28년)에는 신안공의 종형(從兄 : 사촌형) 영녕공 준(永寧公 綧)을 왕자로 가장시켜 몽골에 인질로 보냈다.[1]

중기[편집]

오고타이 칸(원 태종)의 대를 이어 귀위크 칸(한국 한자貴由 : 정종)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며 아모간(阿母侃)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몽골은 정종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한때 철군하였으나, 몽케 칸(헌종)이 즉위하게 되자 1251년(고종 38년) 예케(한국 한자也窟 또는 也古)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하였다.[1]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동주(東州 : 철원)·춘주(春州 : 춘천)·양근(楊根 : 양주)·양주(襄州 : 양양)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에 이르렀다. 이때 돌연 예케는 병을 이유로 귀국하였는데,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1]

그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종은 강화도에서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 한편 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부 지방에 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고 있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하였다.[1]

그러나 몽케 칸(원 헌종)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치 않고,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면서 1254년(고종 41년) 음력 7월 자랄타이(한국 한자車羅大 또는 札剋兒帶)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케 하였다.[1]

그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과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으로 군을 돌이켰는데, 이때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하여 《고려사》에는 포로가 20만 6천 8백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하였다.[4]

후기[편집]

이듬해 몽골의 몽케 칸(원 헌종)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하여 대군을 보내,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화도를 공격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마침 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몽골은 고려에서 철수하였다.[1]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대책에 불과하였으며, 더욱이 1257년(고종 44년)에는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다. 그간 정부는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서,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1]

몽골은 끈질기게 고려왕의 입조·출륙을 요구했다. 고려는 몽골의 철수를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등 교섭이 잘 진행되지 않다가, 1258년(고종 45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김준(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돌변하여 몽골에 대한 강화의 기운이 생기게 되었다.[1]

이리하여 1259년(고종 46년) 음력 3월 박희실(朴希實)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자랄타이와 회견,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倎) 등 40여 명을 몽골에 보내고 강화도의 성을 헐게 하여 고려의 강화 태도에 확증을 보이니 28년간의 싸움 끝에 드디어 고려는 조건부 항복하였다. 그해 음력 6월 고종이 죽고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는데, 그는 몽골에 태자를 다시 인질로 보내어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강화도에서 나오지는 않았다.[1]

그 후 강화도에서는 무신간의 알력이 생겨 한때 왕이 폐위되었으나 다시 복위하였고, 몽골의 초청을 받고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1270년(원종 11)에 귀국하여 개경에 환도하니 이로부터 고려는 몽골의 간섭하에 들어갔다. 이는 강화도로 천도한지 39년 만의 일이다.[1]

결과[편집]

몽골의 침입은 고려의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막대한 인명·재산·문화재의 피해를 입혔다.[1]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고려 왕실과 원나라"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 『元史』巻2・太宗本紀「(太宗三年秋八月)是月、以高麗殺使者、命撤禮塔率師討之、取四十餘城。」
  3. 『元史』巻208・高麗伝「(太祖十九年)十二月、又使焉、盜殺之于途、自是連七歳絶信使矣。 太宗三年八月、命撒禮塔征其國、國人洪福源迎降于軍、得福源所率編民千五百戸、旁近州郡亦有來師者。」
  4. 고려사 > 卷二十四 世家 卷第二十四 > 高宗 41年 >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