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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성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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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성
朴文成
고려의 서북면병마사
국왕 고려 고종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출생지 미상
사망일 미상
사망지 미상
성별 남성
본관 죽산
부모 부: 박인석
군사 경력
복무 고려군
주요 참전 고려-몽골 전쟁

박문성(朴文成, ?~?)은 고려의 무신이다. 본관은 죽산이며 개명하기 전의 이름은 박서(朴犀)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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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부상서(戶部尙書) 박인석(朴仁碩)의 7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1]

1231년(고려 고종 18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임명되었으며, 이 해 살리타(撒禮塔)가 거느린 몽골군이 철주(鐵州)를 거쳐 구주(龜州, 오늘날의 평북 구성시) 성을 공격하자, 김중온(金仲溫)·김경손(金慶孫)과 함께 누차(樓車)·대포차(大砲車)·운제(雲悌) 등으로 공격해 오는 몽골군과 한 달 동안이나 격전하여 마침내 물리쳤다.

이에 몽골군은 서경을 먼저 함락시키고, 고려와 강화를 맺으니, 조정에서도 몽골의 압력으로 귀주성의 장수들을 항복시킬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이듬해 조정의 설득이 계속되자 왕명을 어기기 어려워 몽골군에게 항복했다.

뒤에 몽골의 사신이 와서 박서를 죽이려고 했는데, 당시 무신 집권자 최우(崔瑀)가 박서에게 잘 처신하라고 충고했고, 박서는 고향으로 돌아갔다.[2]

이 무렵 박문성(朴文成)으로 개명했으며, 1234년(고종 21) 우산기상시(右散騎尙侍)에 임명되어 관직에 복귀했다.

1236년(고종 23)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승진했다가[3], 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병부사(判兵部事)에 이르렀다.[2]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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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조 - 박정유(朴挺蕤, 1089년 ~ 1145년)[4] :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전중감(殿中監)·빈객(賓客), 충질공(忠質公)
    • 조부 - 박육화(朴育和)[4] :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형부상서(刑部尙書)
      • 아버지 - 박인석(朴仁碩, 1144년 ~ 1212년)[4] : 호부상서(戶部尙書)
      • 어머니 - 추밀원사(樞密院使)·이부상서(吏部尙書)·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丞旨) 김천(金闡)의 딸[4]
        • 아들 - 박이온(朴李溫)[5][6]
        • 아들 - 박실(朴實)첨사공,문하시중(門下侍中)국무총리( 실(實)의 후손에서 고성박씨(固城朴氏)로 분적되었다가 1839년 고성박씨(固城朴氏)는 본관이 다시 죽산박씨(竹山朴氏)로 복관됨)
        • 손자 - 박자안(朴自安)복야공,좌복야,우복야,조선시대 좌의정 우의정, 부총리
        • 증손 - 박빈(朴彬)첨사공,문하시중(門下侍中)국무총리
        • 현손 - 박혁충(朴奕忠)이조전서(吏曹典書)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태자첨사(太子詹事)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배(配):여산송씨(礪山宋氏)
        • 5세손 박혁충(朴奕忠)의 아들 왜구를 격퇴한 박보로(朴寶老) 두산백과 자료
        • 족보자료 출처(죽산박씨 종친회)

관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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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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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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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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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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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버지 박인석의 묘지명에 따르면, 형들은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사실상 외아들이었다.
  2. 『고려사』 「박서전」
  3. 『고려사』 「고종세가」
  4. 『박인석 묘지명』
  5. 『김중구 묘지명』
  6. 『씨족원류』에 등장하는 박문성의 아들 참지정사(參知政事) 박홍(朴晎)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