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고려궁지

강화 고려궁지
(江華 高麗宮址)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사적
강화 고려궁지
종목사적 제133호
(1964년 6월 10일 지정)
면적7,534m2
시대고려 고려 시대
위치
강화도 고려궁지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강화도 고려궁지
강화도 고려궁지
강화도 고려궁지(대한민국)
주소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좌표북위 37° 45′ 4″ 동경 126° 29′ 5″ / 북위 37.75111° 동경 126.48472°  / 37.75111; 126.48472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강화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는 고려시대의 궁궐과 조선시대의 외규장각이 있었던 장소다. 위치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다. 1964년 6월 1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개요[편집]

고려 후기 고려 23대 고종 강화도에 건축된 궁궐터로 추정된다. 개경으로 환도한것은 고려 24대 원종 있을때 사실상 원나라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뒤 있던 궁성 다수가 철거됐고, 원 간섭기 고려가 있었으며 공민왕친원파를 숙청했다. 고려 멸망 후 조선 왕조에선 강화유수부 동헌 겸 유사시 강화행궁으로 사용했다. 현재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고 사적 제133호로 지정됐다. 꽤 경사가 가파른 곳에 위치해 있고 주변에는 상가와 주차장 매표소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고려 궁궐이 있었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이후 최우 장군이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1234년 이 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과 같게 하고, 뒷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칭했다. 이후 몽골에 항쟁하던 39년간 고려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270년 몽골군의 화친 후 고려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현재의 고려궁지 면적은 고려시대 궁궐의 영역 일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래는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행궁, 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1622년 (광해군 14년)에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봉선전'을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고, 1631년 (인조 9년)에는 행궁을 건립, 1638년 (인조 16년)에는 유수부 동헌을 개수, 1654년 (효종 5년)에는 유수부 이방청을 건립하였다. 1695년 (숙종 21년)에는 장녕전 건립, 1713년 (숙종 39년)에는 만녕전을 건립하여 조선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1782년 (정조6년)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 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건립하였으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 안에 보관중이던 서적을 약탈해가고 외규장각을 포함한 여러 건물이 방화로 인해 소실되었다.

1964년 고려 궁궐터는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복원 정비 된 이후 현재는 강화유수부 동헌, 강화유수부 이방청, 강화동종과 2003년 복원된 외규장각이 있다.

연혁[편집]

시설[편집]

강화유수부 동헌[편집]

강화유수부 이방청[편집]

외규장각[편집]

강화동종[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