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중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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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 배중손 사당의 배중손 동상이다.

배중손(裵仲孫, ?~1271년)은 고려의 무신이며 삼별초의 지도자였다.

생애[편집]

1270년 원종이 몽고와 화의를 하면서 삼별초는 원종의 명에 항명하던 임유무를 암살했다. 그러나 고려 황실이 몽골과 결탁한 데 대한 고려 백성들과 삼별초의 반감은 삼별초를 거병하게 했다.[1][2]

1270년(원종 11) 개경 환도가 단행된 후 조정에서 항몽 세력의 근거를 없애기 위해 삼별초를 폐지하고 그 병적(兵籍)을 압수하려고, 원종이 삼별초의 해산을 명하고 명단을 요구하였다. 이에 맞서 그해 음력 6월 초 배중손은 삼별초 지유(脂諭)로서 야별초(夜別抄) 지유 노영희(盧永禧) 등과 공모하여 몽골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1]

봉기한 삼별초는 배중손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왕족 승화후(昇化候)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했다.[1][2] 그러나 이탈자가 속출하여 경계가 어렵게 되자 1천여 함선을 징발하여, 고려 정부의 재화와 백성을 모두 싣고 강화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며 남행하여 진도에 이르렀다.

그곳에 근거지를 두고 용장사를 행궁으로 삼은 후 고려의 유일한 정통 정부임을 주장했으며[2] 일본과 외교도 펼쳤다. 또한 남해 연안과 각 도서·나주·전주에까지 출병하여 관군을 격파하고 위세를 떨쳤으며, 그해 음력 11월에 이르러 삼별초군은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다.[1]

이듬해인 1271년 음력 5월 상장군 김방경(金方慶)과 몽골의 흔도(炘都)가 거느린 여·몽 연합군이 결성되어 세 방향에서 진도를 향해 공격해 온다.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데 주력했지만, 삼별초가 중군을 방어하는 동안 좌군과 우군이 배후와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하였다.[1]

그러나 계속되는 고려군과 몽고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9개월 만에 진도는 함락당했고 혼란에 빠진 삼별초는 순식간에 무너졌으며 배중손은 남도석성에서 여·몽 연합군을 상대로 결사항전을 벌였으나 결국 전사하였다.

이후 삼별초 잔여군이 제주도(濟州道)에서 마지막 항쟁을 벌이다가 1273년 평정되었다.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박남일 자유기고가 (2008년 2월 13일). “문신정권에 맞서다 호국항쟁의 화신이 되다”. 조선일보. 2008년 12월 11일에 확인함. 
  2. 이철영 (2004년 9월 14일). “[이철영의 전라도 기행 33] 진도 삼별초 항쟁 - 진도에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HTML). 오마이뉴스. 2008년 12월 11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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