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전도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전도비에서 넘어옴)
서울 삼전도비
(서울 三田渡碑)
(Samjeondobi Monument, Seoul)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사적
2015년 이후 복원된 삼전도비의 모습
종목사적 제101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200m2
시대조선 인조 17년(1639)
관리송파구
위치
주소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
좌표북위 37° 30′ 37″ 동경 127° 6′ 6″ / 북위 37.51028° 동경 127.10167°  / 37.51028; 127.10167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서울 삼전도비(서울 三田渡碑, 영어: Samjeondobi Monument, Seoul)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청나라의 전승비이며 송덕비이다. 병자호란 때 승리한 숭덕제가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현지 안내문[편집]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1]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1]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1]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만주글자, 오른쪽에는 몽골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1]

2010년 3월에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위치하던 비석을 고증을 통해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1]

※(삼전도비 → 서울 삼전도비)으로 명칭변경 (2011.07.28 고시)

개요[편집]

치욕비(삼전도의 욕비(辱碑))라고도 불리며, 비문은 1637년 11월 25일(인조 15년) 이경석이 지었고[2], 글씨는 오준(吳竣)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3]

내용[편집]

  • 어리석은 조선 왕은, 위대한 청제국 황제에게 반항했다.
  • 청제국 황제는 어리석은 조선 왕을 타이르고, 자신의 대죄를 납득시켰다.
  • 양심에 눈을 뜬 조선 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맹성하고, 위대한 청국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을 맹세했다.
  • 우리조선은 이 청국 황제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또 청국에 반항한 어리석은 죄를 반성하기 위해서, 이 석비를 세우기로 한다.

역사[편집]

원래는 한강변 삼밭나루터의 항복을 했던 곳에 세워졌다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조공 관계가 단절되자 강물에 수장시켰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1913년일제가 다시 세워놓았고, 1945년 광복 직후에 주민들이 땅 속에 묻어버렸다. 1963년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났고,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1983년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옮겼다.[4] 이후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25일에 비석이 서 있던 원래 위치인 석촌호수 수중에서 30여m 떨어진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의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겼다.[5]

2007년 2월에는 30대 남성이 삼전도비에 붉은 페인트를 사용해 '철거 370'이라고 적어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정치인들이 나라를 잘못 이끌면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점을 경고하기 위해서" 삼전도비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또한 '370'은 인조 태종에게 무릎꿇은 지 370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6]

경위[편집]

조선14세기 말의 건국 이래, 명나라사대하던 책봉국으로 있었지만 17세기에 들어오면서 만주에서 여진족들이 건국한 후금이 부흥하고, 1627년에 조선을 침공(정묘호란)했지만 조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결국 청나라와 조선은 조공 관계를 맺고 화친했다.(정묘약조)

이후 삼전도비는 소중화사상을 가진 조선사대부들에게 치욕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설립 취지와 배경[편집]

기타[편집]

2007년 삼전도비 훼손 상태 (전면)
2007년 삼전도비 훼손 상태 (후면)
2007년 삼전도비 훼손 상태 사진 (왼쪽이 전면, 오른쪽이 후면.)

후에 송시열이경석이 삼전도비를 찬한 것을 문제삼아 그를 공격하기도 했다.

2007년 삼전도비 훼손 사건[편집]

2007년 2월 3일 오후 9시 40분경 백모(39)씨는 삼전도비 공원을 찾아 붉은색 스프레이로 비 몸체에 ‘철’ ‘거’ ‘병자’ ‘370’(370년전 굴욕이라는 의미) 등의 글자를 써 놓았다.[7] 7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 삼전도비 앞뒷면에 붉은 스프레이로 낙서가 돼 있는 것을 구청 공무원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8]

송파구청의 의뢰를 받아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370'이란 숫자가 인조청 태종에게 항복한 뒤 370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고 전국의 유사 사건을 검색한 끝에 두 사건에서 같은 차량이 사용된 사실을 확인, 추적 끝에 백씨를 검거했다.[9]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생활정보 사이트를 운영하던 백씨는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아 “치욕의 상징인 삼전도비를 철거하거나 위정자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청와대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7] 몇시간이 흐른 뒤에 주변 CCTV 확인 끝에 범인 백모씨를 검거하여 체포했다.

조사결과 생활정보 제공 사이트 운영자인 백씨는 지난 1월16일 경남 함양읍의 역사인물공원에서 역대 함양군수와 관찰사의 공덕비, 동학혁명 시기의 고부군수 조병갑의 선정비 등 비석 40여개를 망치 등으로 훼손한 것으로 드러났다.[9] 백씨는 "지난해 말 월간지에 동학혁명의 원인제공자인 조병갑의 공덕비가 세워졌다는 기사를 읽고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란 생각에 함양에서 공덕비를 훼손한 뒤 치욕스런 삼전도비도 훼손키로 마음먹고 범행했다"며 취지를 밝혔다.[9] 그는 또 "추가로 삼전도비에 '청와대로' 등을 표기하는 등의 재범을 계획했으나 수사가 시작된 것을 알고 포기했으며 경기도 파주의 인조 묘지 앞에 설립된 사당을 훼손할 계획도 있었다.[9]"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문화재청이 3개월간의 복구작업을 거친 끝에 7월 15일 삼전도비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7]

복구 과정[편집]

인조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을 선언하는 모습을 묘사한 부조 동판 (1983년 제작, 2010년 철거)

문화재연구소가 그 복구를 위해 고안한 방식은 '습포법'이었다.[9] 이에 의해 삼전도비는 '팩'까지 했다. 습포제(세피올라이트 점토)와 유기용제를 혼합한 페인트 제거용 팩을 바른 것이다.[9]

당초에는 레이저 제거법이나 페인트 제거법, 그리고 반도체 세정에 주로 사용하는 아이스블라스터를 이용하는 방법 등도 생각했으나 각기 단점이 발견돼 결국은 습포제와 유기용제를 혼합한 팩으로 페인트를 녹여 없애는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연구소에 의하면 페인트 제거용 팩에 포함된 유기용제는 페인트를 녹이는 작용을 한다. 나아가 습포제는 유기용제가 급속히 마르는 작용을 막고 유기용제에 녹아나온 페인트를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9]

습포제가 페인트를 흡수하면 얼굴에 팩을 바른 것처럼 하얗게 굳는다. 이를 저압스팀세척기를 이용해 세척하는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해 마침내 삼전도비에 본래 얼굴[9] 을 복원하였다.

복구가 끝난 후 삼전도비를 원래 위치로 옮기기로 결정해 2010년 위치를 이전하였다.[10] 또한 인조의 삼전도 항복 장면을 묘사한 동판은 1983년 제작되어 모습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고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철거 되었다.

사진[편집]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1. 현지 안내문 인용
  2. 조선왕조실록 (1637년 11월 25일). “장유 등에게 명하여 삼전도비의 글을 짓게 하고 이경석의 글을 택하다”. 《sillok.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2019년 4월 25일에 확인함.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 
  3. “서울 삼전도비”. 《www.heritage.go.kr》. 문화재청. 2019년 4월 25일에 확인함. 
  4. “삼전도비”. 송파구. 2014년 1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1월 18일에 확인함. 
  5. 김경욱 기자 (2010년 4월 22일). “삼전도비 ‘원위치’”. 한겨레신문. 
  6. 삼전도비 훼손 30대 검거 “정치인 잘못 경고하려”, 경향신문 2007-02-27
  7. 삼전도비 복원을 바라보며 Archived 2016년 3월 6일 - 웨이백 머신 동부뉴스 2007년 6월 20일자
  8. 삼전도비 훼손사건, 누가? 왜? 노컷뉴스 2007년 2월 8일자
  9. 사적 '삼전도비' 훼손범 영장[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동아일보 2007년 2월 27일자
  10. 수난의 '삼전도비' 원위치로 이전 <<아시아 경제>> 2010년 4월 23일.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서울 삼전도비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